다음으로 우리는 한글 창제의 취지를 애민 사상의 구현에서 찾습니다. 어지에서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어여삐(가엾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백성의 불편함 때문에 한글을 만들었다고만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뿐 아니라,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것입니다.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를 결심한 시기는 조선 왕조가 하루가 다르게 번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이 닦아 놓은 기반 위에서 순탄하게 통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정적도 없었고,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갈등도 아버지의 도움으로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세종에게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왕권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는 아버지 세대에 거의 정리되었지만 민중과의 관계는 그에게 새로이 주어진 과제였습니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호패법이나 5가작통법을 시행하면서 민중에 대한 통제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틀일 뿐이었고, 내용을 채워야 할 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의 민중들은 고려 시대의 민중들과는 많은 면에서 달랐습니다. 고려 중기 뒤로 숱한 농민, 천민 봉기와 봉건 귀족의 부패와 동요를 겪었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저항 의식이 꽤나 높았습니다. 또한 조선 왕조 자신도 무력을 빌려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민중을 구태의연한 강압으로만 통치하다가는 또 다른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의식, 정치의식이 성장한 민중들은 고려 시대 이후 소멸한 향찰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향찰은 한문 자체와는 아무 관계없이 국어의 형태 요소뿐 아니라 의미 요소에 이르기까지 한자의 음과 훈을 차용하는 전면적인 표기 체계로서, 삼국시대 이래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문자였습니다.

그런데 향찰이 고려 시대에 문벌 귀족들에게 배척 당하다가 사라지고 말면서 민중들은 문자 생활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무신 정변 이후 귀족 사회가 붕괴하면서 사회의식. 정치의식이 성장한 민중들이 문자 생활을 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갈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한글은 이러한 민중의 요구와 세종의 필요가 맞물리면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느 사학자는 한글을 `민중의 전리품`이라고까지 표현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정확하게 간파한 세종의 통찰력이 뛰어난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따라 창제된 한글은 민중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나 지배층에 포섭하기 위한 교화 수단으로 쓰였습니다. 원래 통치하는 세력은 통치 받는 사람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모두 쓰는 법입니다. 한글은 이 양 측면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앞에서 본 `한글 고비`에서 한글로 쓰인 부분은 한글이 백성들에게 지배층의 경고를 알리는 수단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말하자면 한글이 채찍으로 쓰인 것이지요. 반면에 통치 세력이 쓰는 당근은 얼마큼 경제적 이익을 던져 주거나 지배 세력의 사상으로 포섭하는 방식입니다.

조선 왕조는 과전법과 양인 신분 찾아주기 따위로 민중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얼마간 당근으로서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상으로 포섭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고려 시대까지 지배 세력의 사상은 불교라는 종교였습니다. 그러므로 민중을 지배 세력의 사상으로 포섭하는 것은 문자 없이도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왕조는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지배 세력의 사상으로 삼았습니다. 성리학은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양식만으로 사상을 전파할 수 없었습니다. 성리학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민중이 문자를 배워 성리학의 가르침을 이해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대의 민중들은 대부분 문맹이었습니다.

민중들에게 새삼스럽게 한자를 가르쳐서 성리학을 배우게 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한글은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필요에도 부응하기 위해 새로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말하자면 민중의 교화 수단으로 쓰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한글은 만들 때부터 그 목적대로 주로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는 선전물이라고 할 수 있는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들을 출판하고 성리학 교재를 번역하는 데 쓰였습니다. 그밖에도 농업서적이나 기술서적을 번역, 출판하는 일에도 쓰였지만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한글은 본래부터 양반과 민중 모두가 쓰는 전국민의 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민과 천민들의 글이었고, 상민과 천민들을 지배 세력이 사상적으로 가르치고 길들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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