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좌우연합의 붕괴와 조만식의 퇴장

1945년 11월 23일 발생한 신의주 사건은 소련군과 공산당에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신의주 사건은 소련군의 북한 점령이래 최초의 조직적인 대규모 반소반공 학생시위였던 것입니다.

신의주 사건은 처음 공산당이 학교 건물을 접수해 공공기관으로 사용하는 데 대해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평안북도 본부와 보안서 등 공산당과 관계있는 곳을 점거하려 한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사건이 일어나자 보안대와 소련군은 즉각 진압에 나서 사건은 곧바로 진압됐으나 그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해 문제가 커졌습니다. 시위가 확산되면서 검거선풍이 몰아쳤고 1천여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체포됐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석방됐으나 그 가운데 주동자 7명은 계속 조사를 받았습니다. 후에 월남하게 되는 함석헌도 이 사건의 주모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건이 터지자 소련군은 김일성을 급파해 수습에 나섰습니다. 김일성은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책임자 처벌을 약속하는 등 유화책을 내놓았고, 사태는 일단 마무리됐습니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익 민족주의 세력과 기독교 세력의 반소반공 입장이 확고해지고, 이에 따라 공산당과 민주당의 협조관계에도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신의주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는 소련군의 횡포와 그에 야합한 공산당의 책임이 컸습니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주민약탈 사건이 적지 않게 일어났습니다. 이들의 행패에 조만식 등 민족진영의 정치지도자들이 강력히 항의하자 소련군의 만행은 현저히 줄어듭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소련군은 수풍댐을 비롯해 발전기계들을 마음대로 뜯어가는 등 해방군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약탈 행위를 계속함으로써 대중들의 반소 감정은 더욱 누적되었습니다. 때문에 소련군의 행패를 눈감아주는 공산당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학교까지 공공기관으로 내놓으라고 하자 학생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지요.

신의주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 공산당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원수도 겨우 4천여명 수준으로 그 세력도 아직은 미약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당이 이른바 전위조직으로서의 당내 규율이나 조직체계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당원들의 훈련과 교육 프로그램조차도 갖지 못했을 정도로 정비가 안돼 있었다는 것입니다.
후에 김일성은 "그대로 두었다가는 죽도 밥도 안될 상황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지만 바로 그런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이 당을 틀어쥐어야 한다는 의견이 항일빨치산 세력을 중심으로 강력히 대두하게 되고, 이런 여론을 바탕으로 1945년 12월 18일 제3차 북조선분국 제3차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선출돼 당을 장악하게 됩니다.

공산당이 이렇게 신의주 사건의 여파를 수습하고 대중과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한반도 전체를 뒤흔드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모스크바 3상회담이 그것입니다. 모스크바에 모인 미·영·소 3개국 외상은 한반도의 장래와 관련해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모스크바 회의에서 결정한 핵심 내용은 "1)한국(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한국(조선)민주정부를 수립한다 2)한국(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개최한다 3)미·영·소·중의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4)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미·소 양군 사령관을 대표로 회의를 소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알려지자 남한에서는 즉각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납니다. 남한에서 반탁운동이 어떻게 진행됐으며, 그것이 한반도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신탁통치 문제가 북한에서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북한에서 최대 관심사는 조선민주당의 입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남쪽에서 우익 민족주의 세력들이 모스크바 협정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의 우익 민족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조선민주당이 매우 중요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소련군은 조만식을 만나 조선민주당이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12월 30일 치스차코프 대장이 조만식을 만났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한국에 대한 5개년간의 신탁통치안이 한국을 독립국가로 만드는 데서 가장 적합한 국제적 지도노선이오. 따라서 당신이 영도하는 조선민주당도 북조선공산당·독립동맹·북조선여성동맹·북조선직업동맹 등 다른 정당·사회단체와 함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해 주시오."
이에 대해 조만식은 "신탁통치 문제는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중대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개인적으로 가부를 결정할 성질의 것이 아니오. 당헌에 따라 총의를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주시오"라고 말해 1차적으로 소련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 뒤 김일성도 만나고 로마넨코도 만나고 최용건도 만났습니다. 특히 최용건은 `열아홉 차례나 만나서` 간곡히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조만식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소련군은 조만식이 모스크바 회담 지지에 응한다면 향후 건설될 독립국가의 수반으로 조만식을 밀어줄 수도 있다는 제의까지 하지만 조만식의 고집을 꺾지는 못합니다.
당시 소련 군정의 주요 인물이었던 레베데프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고당에게 후원제(소련인들은 신탁통치를 후원제 또는 후견제라 했다)를 설득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요. 그가 이 문제만 찬성하면 북한의 상징적인 인물로 추대할 계획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후원제를 찬성하지 않아 우리와 결별이 불가피했지요."

1946년 1월 5일 소련군정의 주도 아래 평남 인민위원회 긴급회의가 소집돼 모스크바 협정 지지 결의안을 통과시키려 했으나 조만식은 "나는 조선민주당 소속이기 때문에 신탁을 반대하며 이 문제를 경솔히 다루기에는 나의 민족적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면서 반대합니다. 이렇게 되자 소련군은 조만식을 위원장에서 사임시키고 고려호텔에 연금시킵니다. 이로써 조만식은 정치무대에서 퇴장하고, 김일성과 조만식으로 대표되는 좌우연합도 사실상 무너집니다.

공산당으로서도 조선민주당에 대한 정책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조선민주당을 새롭게 개편해 최용건이 위원장으로 취임하고, 조선민주당을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후 공산당은 독립동맹 세력이 조직한 신민당과 합동해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을 결성함으로써 좌익연합전선을 강화하고 조선민주당의 세력 기반을 잠식함으로써 사실상 좌우연합은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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