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기간에 접어들면서 아이들은 부쩍 힘들어한다. 지각하는 아이들도 늘어나고 학교에 와서도 멍하니 앉아 있거나, 심지어 혈기왕성한(아직 체력적으로 튼튼해야 할) 중학생이 책상에 엎드려 조는 모습을 심심찮게 본다.

아이들과 함께 쓰는 모둠 일기에서도 현실에 대한 짜증은 그대로 묻어 난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공부를 많이 못했다. 수행평가도 못 봤다. 미치겠다. 이번 시험은 정말 망할 것 같다."

 "오늘은 학원에서 시험 준비를 하는 날이다. 오늘부터 시험 끝날 때까지 1시간 30분 빨리가고 1시간 30분 늦게 끝난다. 그런데, 수업을 다하고 맨 마지막 수업이 암기과목인데 선생님께서 가정 1쪽을 다 외워야 보내준다고 하였다. 그런데, 못 외워서 다 외울 때까지 남아야 했다. 나는 안 외울려고 했는데, 할 수 없이 외웠다. 다음부터 빨리 외워서 집에 빨리 가야겠다."

 "학교 가기 싫다. 오늘은 하는 일이 다 엉망이다. 잠 한번 실컷 자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우리 아이들은 시험이 시작되기 3, 4주전부터 학원에서 시험대비 작전(?)에 돌입한다. 기본이 밤 11시! 매일 학교 끝나고 학원에서 일제히 수업 및 자율학습을 하고 학원 선생님이 내준 과제(주로 암기하기)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남아서 보충학습을 해야 한다. 공부하기는 싫어도 남는 게 싫어서 어쩔 수 없이 외운다고 푸념한다.

물론 이들에게 주말은 없다. 토요일 종례시간, 솔직히 담임으로서 "얘들아, 주말 잘 보내거라." 환하게 웃으며 한마디 해보지만 공허한 메아리가 될 때가 많다.

학교를 둘러싼 수많은 학원들은 최근 2, 3년 간 출제되었던 문제들로 엮은 두꺼운 문제집을 과목별로 한 권씩 제작해서 아이들에게 나눠준다. 겪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중학교에서 중간고사 시험 범위가 대충 어느 정도 되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그 시험범위에 문제집이 한권이다! 과목별로!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을 끝없이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있는 입시위주의 교육문화는 여지없이 중학교, 초등학교로 전파되어 우리의 아이들은 세상 돌아가는 것 볼 시간도, 마음껏 뛰어 놀 시간도 없다. 이들이 익혀야 할 다양한 가치들은 점점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물론, 이들에게 통일은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아니, 골치 아픈 시험 범위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에서 남북이 함께 참여한 아시안 게임 이야기나 신의주에서 뭔가 요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 미국이 어떤 이유에서 이라크를 공격하려 하고 있다는 이야기, 북한과 일본간에 정상회담 이야기는 아이들의 마음을 끌기에는 역부족인 듯 싶다.

그렇다면, 시험 준비에 고통받는 아이들과 허리 잘린 이 나라의 현실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우리 아이들이 왜 그렇게 시험 공부에 목을 메는 걸까? 어른들이 공부를 잘 하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주입시켜 왔기 때문이다.
왜 공부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가? 공부를 잘해서 일류 대학을 가야만 인생이 성공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왜 일류 대학을 가야 하는가? 일류 대학을 가야 일류 직장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좋은 직장은 좋은 대학을 나와야만 얻을 수 있는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학력 지상주의 때문이다. 능력이 아닌 학력이, 개인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학력지상주의를 신봉하게 되었나? 우리나라가 2002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로 여러 가지를 들지만, 단연 돋보이는 것은 히딩크의 `능력위주의 선수 선발`이었다. 이는 반대로 얘기해서 그동안의 우리나라 축구계에도 은연중에 `학력주의 풍토`가 팽배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 이런 현상이 해방 이후 5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왔을까?

여러 측면에서 원인을 찾아 볼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 사회에 넓게 퍼져 있는 민주적이지 못한 삶의 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회가 민주화되지 못하고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의 비민주성의 원인은 짧은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직접적인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이에 더해 우리의 현대사를 돌이켜 봄으로써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35년 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과 행동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음해해야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기도 했고, 서로를 알게 모르게 감시하며 살아야 했다. 자기 기만의 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오랜 고통과 갈등 끝에 맞이한 해방 공간에서는 일제 청산의 부재와 이념 갈등의 회오리 속에서 우왕좌왕 해야 했으며, 다시 한번 정치적 격동기를 겪었다.

3년이라는 기간 동안 벌어진 동족 상잔의 비극은 남과 북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아픔과 적대감, 불신을 남겨 주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이어진 현대사의 아픔을 일일이 나열할 필요 없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는 그에 못지않는 뼈아픈 대가를 치러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당하고 서로에 대한 불신의 싹을 키워 왔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불신의 벽은 공공기관을 방문해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뭔 놈의 서류가 그리도 많은지.... 뭐 하나 처리하려고 하면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서류 작성해서 제출하기 바쁘다. 그리고 때론 신원조회라는 인간자격검사도 해야 하는 것이다.

불안함이 일상생활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잘 믿지 못한다. 35년간의 식민지배와 50여년간 지속된 분단, 그리고 분단을 악용하여 진행된 민주주의의 역행! 이러한 현실은 우리를 끊임없이 자기검열 과정에 놓이게 만들었고, 상대방을 불신하게 만들었다. 말보다는 서류를 더 믿는 사회가 되었다.

학력주의 또한 이러한 현실에서 불안함을 떨쳐 버리는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아닐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그리고 불안정한 사회에서 기득권을 차지했던 이들은 자신의 자리를 쉽게 내주려 하지 않았다. 그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처럼 학력이라는 지상최대의 목표를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수십 년 동안 평화로운 체제 하에서 안정된 삶을 살아왔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사람들은 자기의 권리를 정당하게 주장할 줄 알고, 또 상대방은 그러한 주장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았을까? 그 어떤 기준 보다도 학력이 아닌 더 다양한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 우리에게 위협이 될 만한 내 외부의 갈등은 단연 분단으로 빚어지는 갈등이라 할 수 있다. 식민지 통치로 인한 청산되지 못한 여러 역사적 과오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 또한 이 분단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분단을 넘어 평화를 되찾고, 사회가 안정되고 민주화되는 가운데 아마도 우리의 아이들도 순수한 웃음을 되찾고 즐거운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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