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식(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1. 최근 북한의 변화

요사이 북한의 변화를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없을 정도이다.
지난 7월1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관리 개선조치`가 북한 지도부의 `계획개선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시장지향적` 결과를 내포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6.29 서해교전이 초래한 남북관계 냉각국면이 북한의 신속한 유감표명과 이후 7차 장관급회담 개최로 오히려 이후 남북관계 진전에 속도를 더하게 된 것도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다. 8월부터 지속되고 있는 남북한간 다양한 교류협력 사업들 역시 지난 해 지지부진하던 남북관계에 비추어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민족화해의 역사적 상징성을 갖고 있는 경의선·동해선 철도 도로 연결 기공식이 거행되었고 8.15 민족통일대회와 2002 남북통일 축구경기가 개최되었으며 부산 아시안게임에 북측 선수단과 응원단이 대거 참가해서 통일의 열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음도 분명 예삿일은 아니다.

북한이 주도하고 있는 한반도 정세의 변화도 최근에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전격적인 북일 정상회담 성사로 동북아 평화의 오랜 장애물이었던 북일관계 정상화가 이제 가시권 안에 들어왔고 여기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밝힌 일본인 납치에 대한 시인과 사과의사 표명은 예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북측의 파격적 조치로 간주되었다. 추석 연휴기간에 터져 나온 신의주 특구 조치 역시 북한의 대외개방 의지를 국제사회에 입증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되었다. 특구 기본법이 홍콩식의 일국양제를 연상할 정도로 특구에 전면적 자율성을 보장하고 있고 아울러 네덜란드 국적의 중국계 부호 양빈을 특구 초대장관에 서둘러 임명한 조치 또한 북한이 외자유치와 대외개방에 지독히도 신경 쓰고 있음을 역으로 짐작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내세워 북한을 방문케 했다. 최근의 이같은 사태는 과거와 질적으로 다른 동북아 정세가 새롭게 판을 짜고 있음을 예상케 하고도 남는다.

2. 북한변화가 성에 차지 않는 사람들

최근 북한의 변화와 한반도 정세의 급변이 결국은 남북관계 진전과 민족화해 증대에 기여하는 방향인 탓에 우리는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우리는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기도 한데 그것은 바로 오랫동안 북한의 변화를 주장하고 요구했던 사람들이 정작 북한이 변화의 몸짓을 보이자 이를 애써 평가절하거나 무시하고 심지어는 트집을 잡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북한의 시장경제적 변화와 전면적인 개방개혁을 요구했고 이것이 전제되어야만 진정으로 남북관계가 진전될 수 있다고 목소리 높였던 사람들은 최근 북한의 변화를 반신반의하면서 비아냥과 냉소주의로 일관하고 있다. 7.1 경제개혁조치에 대해 이들은 북한의 시장지향적 변화가능성을 제대로 평가하기보다 제대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을 주로 제기했고 북일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북일관계 정상화가 갖는 한반도 평화의 상징성은 정확히 평가하지 않은 채 일본인 납치만을 전면 부각시켜 느닷없이 납북자 문제를 이슈화시키는가 하면 신의주 특구조치 역시 북한의 절박한 대외개방 의지를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수적 문제였던 양빈 장관의 자질논란을 대서특필하면서 그 성과를 깎아내리는 데 급급했다.

자신들이 그토록 요구했던 변화의 방향으로 북한이 가고 있는데도 이들 냉전적 대결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은 현실의 객관적 평가보다 자신의 주관적 편견에 사로잡혀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기실 이들에게는 요즘의 북한변화쯤은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냉전대결주의의 입장에서는 체제붕괴와 정권교체를 전제로 한 급작스런 북한변화만이 진정한 변화로 간주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이 하나 변하면 또 다시 다른 변화를 요구하는 얄궂은 사태진전을 가져올 것이다. 광주리에 떡을 이고 가는 `아줌마`에게 고개를 넘을 때마다 떡 하나 줄 것을 요구하며 애간장을 태우게 하더니 결국은 줄 떡이 없게 되자 그 아줌마 마저 잡아먹고 마는 마음씨 고약한 `호랑이`의 심보인 것이다.

3. 북한의 일방적인 떡만을 요구하는 `호랑이` 미국

이같은 염치없는 호랑이 심보는 미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부시 행정부 등장 이후 일관되게(?) 대북 강경노선을 고집하면서 북한에게 줄 것은 하나도 없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했던 미국 역시 최근의 북한 변화를 보는 시각은 차갑고 냉랭하기만 하다. 북한체제의 변화를 강조하며 시장경제적 원리를 수용하고 전면적 대외개방과 함께 국제사회에 편입할 것을 요구했던 미국이었지만 막상 북한이 그같은 조짐을 보이자 이에 대한 평가는 싸늘하기만 한 것이었다.

미국을 제쳐놓고 북한과 일본이 전격적인 정상회담 합의에 이르자 미국으로서는 자신의 대북 강경노선이 손상받을까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악의 축 국가로 명시했던 북한인 지라 이라크 공격에 이어 북한까지도 군사적 압박을 할 생각이었을 터인데 아시아 최대 맹방인 일본이 딴 생각을 하고 있으니 미국으로서는 그야말로 한방을 맞은 셈이었다. 더욱이 러시아 및 중국과의 실용적인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북한이 신의주 특구를 전격개방하면서 외국인 장관까지 임명하고 외자유치와 경제개방의 의지를 과시하자 이 역시 미국에게는 달갑지 않은 사태였을 것이다.  

급박한 상황전개에 밀려 10월 3일 미국도 대북 특사파견을 실행에 옮겼지만 그것은 예상했던 대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여전히 미국은 지난 해 6월 북한에 제기했던 대화의제 즉 조기 핵사찰 문제,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검증가능한 규제, 재래식 전력의 감축 문제와 여기에 더하여 인권상황까지를 거론하면서 북한의 의사를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들 의제에 대한 북한의 태도변화가 있기 전에는 미국이 북미관계 진전을 위한 화해제스쳐를 취할 수 없음도 분명히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번 제임스 켈리의 방북이 부시 행정부 이후 처음 가졌던 북미간 공식 대화였고 일단은 상호 진지한 의견교환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화를 통해 문제해결을 하기로 합의한 것은 진전이라 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한국 입국 후 켈리 차관보가 밝혔듯이 미국은 향후 북한과의 후속대화 일정마저도 합의하지 못한 채 빈 보따리를 가지고 돌아갔다. 여기서 우리는 더 화끈하게 양보하지 않은 북한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만큼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북한에게 떡 하나 줄 것을 요구하는 미국식 호랑이 심보가 더 고약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최근 일련의 북한이 취한 의미 있는 변화 모습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함께 북미간 대화를 진전시킬 수 있는 모멘텀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으로서는 북한이 자신들의 요구에 대해 진지한 협상의사와 태도변화를 보이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요즘의 북한변화는 그 자체로 북한이 미국에게 보내는 협상의지의 표현이다. 특히 고이즈미와의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우회적으로 미국에게 표명한 몇 가지 방침들은 분명 미국의 관심사에 대한 호의적 입장변화로 평가될 만한 것이었다. 즉 2003년까지로 되어 있는 미사일 발사유예 시한을 그 이후로도 연장하고 아울러 핵과 미사일 문제에 관한 국제적 합의를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밝힌 대목은 분명 북한이 미국에게 전달하고자 한 적지 않은 양보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특사 방북을 통해 북한의 일방적인 양보만을 기대했다면 이는 분명 많지 않은 떡을 가진 북한에게 끝없이 떡을 요구하는 고약한 호랑이 심보에 다름 아니다. 줄 떡이 제한되어 있는 북한에게 아예 떡이 바닥날 때까지 양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분명 불공정한 협상게임이며 이는 아예 처음부터 떡에는 관심 없고 결국 북한이라는 아줌마를 해치겠다는 의사를 가진 것으로 읽혀질 수밖에 없다.    

4. 미국도 북에게 `떡`을 줘야
 
최근 북한의 변화와 한반도 정세 급변의 마지막 단계는 북미관계의 정상화일 것이다.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도 그리고 한반도의 화해와 통일의 진전을 위해서도 북미관계의 개선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2000년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북미관계 진전의 기회를 `시간 보내기`로 놓쳐버린 북한은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김대중 정부 임기 전에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시화하고 이를 토대로 북일관계 정상화와 대외개방 의지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2003년 남한 정치환경의 변화와 한반도 안보위기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북한으로서는 오히려 미국보다 더 절박한 심정으로 최근의 변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으로서도 호랑이에게 줄 떡이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고개를 넘을 때마다 떡을 줘야 하는 북한의 입장에서 호랑이에게 한꺼번에 떡을 다 줄 리는 만무하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의 최대관문인 북미관계 진전을 위해 이제는 강자의 입장에 있는 미국`호랑이`가 한번쯤은 북한`아줌마`에게 떡을 주어야 한다. 어릴 적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양국간 협상인 지라 그래야만 진정한 대화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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