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공산당과 조선민주당의 제휴

통일전선 문제와 관련해 소련과 김일성은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합니다. 물론 이것은 김일성이 소련의 노선을 거부할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동안의 활동과정에서 일치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많이 갖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이 내세운 민족통일전선의 핵심적 내용은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 국가 건설에는 일부 친일세력을 제외한 모든 세력을 포섭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소련의 입장도 같았습니다. 스탈린이 해방 초기 소련군에 보낸 비밀 훈령에서 절대로 공산당을 전면에 내세우지 말 것을 지시하고, 수차에 걸쳐 소련군의 목표는 북조선에서 소비에트 체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 이를 말해 줍니다. 물론 스탈린의 말을 액면 그대로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소련의 입장이 민족주의자와의 연합이었던 것은 인민위원회에 대한 정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소련과 김일성이 통일전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세력은 누구였을까요?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조만식으로 대표되는 일제 시대 비타협적 입장을 견지했던 민족주의자들입니다.
조만식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일제 시대 주로 개량주의 운동에 참여했지만 끝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신간회에도 관계했고, 물산장려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 `조선의 간디`로 불리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평양을 무대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북 지방에서는 대중적 신망이 매우 높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소련과 김일성은 조만식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김일성은 입북 후 9월 30일 조만식과 첫 대면을 하게 됩니다. 그후에도 김일성은 수차례나 조만식을 찾아가 대선배에 대한 깍듯한 예의를 갖추면서 건국문제 등에 대해 상의하게 됩니다. 그런 덕분으로 초기 이들의 관계는 좋았습니다.

김일성과 조만식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데는 양쪽 집안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점도 적지 않게 작용했습니다. 조만식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숭실학교 5년 선배로서 약간의 면식이 있었고, 김일성의 외가는 조만식과 같은 기독교 장로교 계통으로서 일제시대부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김일성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딸 이름을 `반석`이라고 지을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김일성의 외삼촌 강보석은 조만식과 같은 교회 교인이면서 조만식 보다 몇 년 선배라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젊은 빨치산 대장 김일성과 민족주의 세력의 거두 조만식 사이에는 이런 개인적인 인연도 있고 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공산당과 민족주의 계열의 협력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두 사람의 협조관계가 절정에 이른 것은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을 결성할 때였습니다.
조만식을 당수로 하는 조선민주당이 결성된 것은 1945년 11월 3일이었습니다. 조선민주당을 결성하게 된 것은 조만식 등 우익민족주의 세력이 힘을 모으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정당을 결성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소련군정의 허락을 얻어 창당을 준비하였고, 김일성에게도 입당을 권유했습니다.
김일성의 입장에서도 조선민주당의 창당은 환영할 일이었습니다. 아직 공산당의 세력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대중을 조직 결집하기 위해서는 조만식과 같이 대중적 영향력이 큰 인물이 나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당시 좌우연합 노선을 취하고 있던 소련과 김일성으로서는 조선민주당의 창당은 공산당과 협력할 우당을 얻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민주당에 김일성은 참가하지 못합니다. 김일성이 조선민주당에지 못한 것은 당시 내부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노정하고 있던 공산당(북조선분국)을 장악해야 한다는 내부방침 때문이었습니다. 대신 조만식의 오산학교 제자인 최용건이 가담해 부당수가 됩니다. 김책도 서기장 겸 편집부장으로 선출됩니다.

조선민주당의 노선은 조만식이 내세운 민족의 독립, 남북의 통일, 민주주의의 확립 등 3원칙에 근거하여 결정됐고, 정강 정책은 소련군정이 약속한 대로 소자산계급성 민주주의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내세웠습니다. 이것은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정강 정책을 제정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이 공산당과 격론을 벌이면서 지켜온 입장을 그대로 밝힌 것이었습니다.

조선민주당은 창당한 지 1개월이 채 안된 12월 1일 현재 당원수가 5,406명이나 돼 공산당원 4천여명을 능가하게 됩니다. 이것은 일제 때부터 계속돼온 반공교육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북한 지역에서 민족주의와 기독교 세력의 영향력이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공산당과 소련군은 해방후 북한 지역에서 민족통일전선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우익민족주의세력을 대표하는 조만식과의 제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의 결성도 도와주었습니다. 따라서 공산당의 지도자 김일성과 민주당의 지도자 조만식의 관계가 원만했던 것처럼 좌우간의 협조체제도 표면적으로는 잘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면 아래서는 좌우 세력 사이에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었고, 동시에 소련군과 공산당에 대한 우익의 불만도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신의주 사건과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집니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과 민족주의세력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좌우연합도 사실상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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