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한 것은 대외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도 한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움켜 쥔 사대부 정권은 명나라에 친선 정책을 펴왔습니다. 이러한 대외 정책은 조선 왕조를 세운 뒤에도 한동안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동 공격 뒤로 잠잠하던 명나라가 조선 건국 뒤부터 다시 압력을 넣어오기 시작하면서 조선 정부 안에서는 명나라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논쟁이 붙었습니다.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 일부는 명나라에 대해 강경책을 쓸 것을 주장했습니다.

위화도 회군을 적극 옹호했던 이들이 명나라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대외 관계를 바라보는 이들의 태도가 고정 불변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강경책을 주장하는 근거는, 새로운 왕조의 기틀도 잡혔으므로 명나라와 힘으로 맞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맞서 이방원은 왕권이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명나라를 자극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정도전이 내부 문제에서나 대외 문제에서나 모두 다분히 이상주의적 노선을 가졌다면 이방원은 현실주의적인 노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두 사람의 이해 관계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도전은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개국공신들이 힘을 잡았으므로 왕조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이 격화하자 이방원은 그렇지 않아도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정도전을 제거하기로 결심을 굳혔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할 때 이방원의 공로가 다른 왕자들보다 뛰어났다며 특별히 대대로 전해온 동북면 가별치 5백여 호(戶)를 내려 준 적이 있었습니다. 가별치는 일종의 사병(私兵)입니다. 이방원은 자신의 사병들을 꾸준히 키웠습니다. 왕자들의 사병들을 해산시킬 때도 이방원은 형식적으로만 해산시킬 뿐이었습니다. 그의 권력 의지는 강경 개혁파 사대부들 내부의 권력 투쟁이 불가피함을 일찍부터 예감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1398년에 사병들을 동원하고 자신을 추종하는 군부의 일부 세력을 동원해 정도전을 비롯한 왕권을 제약하려는 개국공신들을 제거하여 도평의사사를 무력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세자 방석과 그 형인 방번을 죽임으로써 실권을 완전히 손에 넣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정변은 개국공신에 대한 공격임과 동시에 왕권의 강화를 위해 개국공신들과 싸우지 않고 이를 꺼리며 주저하던 아버지 태조 이성계에 대한 압력이기도 했습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을 숙청하고 실권을 장악하자 이성계는 왕위를 아들인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낙향했습니다. 정도전 일파에 대한 숙청은 이성계까지 물러나게 만드는 결과를 빚었습니다.

이성계에게는 이방원의 정변으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린 자신이 왕위에 계속 눌러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던 것입니다. 이성계가 낙향한 뒤 2년이 지난 1400년 이방원은 형 정종을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왕위에 앉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방원은 조선 왕조 3대 임금인 태종이 되었습니다.

요컨대 정도전과 이방원의 투쟁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1차 왕자의 난은, 이상주의적 노선을 걷는 개국공신들과 현실주의적 노선을 가진 이방원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방원이 가진 현실주의적인 노선은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명나라에 대한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노선은 태종 뒤로 거의 100년 동안 조선 왕조에서 계속 지켜졌습니다. 조선의 외교 정책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대 교린은 이와 같은 권력 투쟁을 거치면서 확립된 것이었습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하는 과정을 볼 때, 이방원은 권력을 위해 같이 고생한 동지도 가차없이 처단하는 것은 말할 나위 없고, 아버지와 형제들까지 희생양으로 삼는 냉혹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냉혹함은 조선 왕조를 튼튼한 정권으로 뿌리내리게 하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고, 그러한 점에서 역사 발전에 이바지한 측면도 있습니다.

또한 이방원이 냉혹하다고 하여 그에게 패한 정도전이 인간적이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는 둘 사이의 차이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싸움의 기본 성격이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노선 사이의 싸움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봉건통치배의 추악한 권력 투쟁이라는 측면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갖가지 추악한 짓을 일삼은 것과 자신의 정치 노선을 위해 싸운 것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권력이란 것은 원래 그렇게 추악한 것이고, 언제나 그 추악함은 계속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것은 그러한 추악함이 사라져 간다는 것도 포함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러한 추악함은 점점 더 민중 앞에 폭로되어 가면서 그 정도나 범위가 축소되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권력은 으레 추악한 싸움이고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권력허무주의에 빠져서도 안 될 것이며, 이들 봉건통치배들의 추악한 권력욕을 잊어버린 채 마치 이들이 권력욕과는 무관하게 자기 이상만을 위해 싸운 자들로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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