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측의 장관급회담 제의 이후 펼쳐진 `신6·15국면`과 하반기에 예고되는 대격변

이 기고는 한국민권연구소 발간 정세동향(2002년 16호/8월16일)에 실린 글을 다소 손질한 것입니다.


김서원(한국민권연구소 상임연구위원)


남북관계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특히 이번 8·15를 앞뒤로 남북 당국자간 대화뿐만 아니라 역사상 처음으로 8·15민족공동행사를 남북이 함께 서울에서 치르게 되었다. 게다가 다가올 가을에는 남북대화와 교류일정이 꽉 들어차 버렸다.

올 들어 위태롭고 냉랭하기만 했던 남북관계를 포함한 한반도 정세가 지난 6월 말 서해교전사건으로 인해 격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수구냉전세력들은 아예 이 기회에 북을 군사적으로 응징하자고 외쳤으며, 미국 역시 어렵사리 결정했던 대북 특사파견을 재빨리 철회해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좋지 않았던 조짐과 흐름이 6월 29일 사건이 벌어진지 한 달이 안된 7월 25일 북측의 전격적인 유감표명과 장관급회담 재개 제안으로 급반전된 것이다. 이 급반전은 어떤 힘으로 추동되었으며, 앞으로 한반도 정세에서 어떤 대격변을 예고하는가?


1. 2000년 6·15국면과 2002년 신6·15국면
(1)

2000년에는 남북 정상에 의해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선언이 채택되었다. 그 후 남북관계는 급진전하여, 2000년 가을에만 해도 네 차례에 걸쳐 남북장관급회담이 이루어졌으며, 3차례의 군사실무회담, 그리고 경제협력추진위원회가 열렸다.

그리하여 반세기 끊어져있던 경의선 잇기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남북 이산가족이 대규모 상봉을 하게 되었다. 남과 북 해외의 온 겨레는 분단 50여 년의 역사상 처음으로 남과 북의 합의가 곧 바로 실천되는 새로운 역사를 목격하였으며, 조만간 이루어질 통일의 환희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2002년 가을, 예정된 남북관계 일정을 살펴보면 2000년 가을을 방불케 하는 남북대화와 교류일정들이 잡혀있다.(2) 또한 민간교류 역시 장관급회담에서 논의된 민간교류 일정이외에도 다음달에는 남북청년학생통일대회 및 남북여성통일대회 등이 예정되어 있다.

이러한 남북교류의 일정만을 두고 보더라도 이번 장관급회담과 8·15민족통일대회는 6·15남북공동선언을 이행하는 새로운 국면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2000년 하반기를 "6·15국면"이라고 부른다면 2002년 하반기는 "신 6·15국면"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렇다면 "6·15국면"과 "신6·15국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이며, "신 6·15국면"은 어떤 힘으로 열리게 되었는가? 2000년 6·15국면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북한의 승리로 귀결된 북-미 대결의 결과물이 6·15남북공동선언이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바대로 6·15남북공동선언은 98년 광명성1호의 발사와 99년 페리보고서로 표현되는 미국의 대북 정책을 평화공존정책으로 전환을 강요하면서 남북관계의 급진전을 용인할 수밖에 없이 만들면서 탄생하게 된다.

둘째, 북-미관계에 일방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었던 남북관계가 한반도 정세에서 서서히 중심축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근거 중 하나가 2000년 10월 북-미 공동코뮤니케이다. 북-미 공동코뮤니케는 크게 보면 90년대 북-미 대결의 결과물이지만, 소시기적으로 보자면 6·15남북공동선언과 거침없는 공동선언의 이행이 한반도에 평화무드를 조성했고, 미국 역시 이 흐름에 떠밀릴 수밖에 없었던 결과물이기도 하다. 6·15공동선언과 븍-미 정전체제는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정세의 중심축이 북-미관계에서 남북관계로 서서히 옮겨간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중 첫 번째가 한미관계에 일정한 균열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90년대 말과 2000년 미국이 남북관계의 진척을 허용하긴 했지만 미국이 허용했던 당국간의 대화의 최고수준을 "정상회담"이 아닌 "장관급회담"정도였다. 이는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정상회담"이 필요했던 남측 정부당국과 분단관리는 용인하지만, 통일까지는 용인하지 않으려는 미국의 입장과의 마찰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정상회담 직후 미국은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정상회담의 막후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당시 박지원 청와대비서실장은 미국의 압력으로 퇴임해야만 했다.

앞으로 남측 정부당국이 통일을 지향하면 할수록 외세공조보다는 민족공조 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럴수록 한미당국간의 균열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6·15남북공동선언은 그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6·15공동선언으로 남과 북은 조국통일의 전환적 국면을 열었다는 점이다.

6·15남북공동선언 이행 차원에서 진행되는 민족 내적 교류 협력은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 조국통일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내는 역할을 했다. 2000년 하반기처럼만 2001년에도 공동선언의 이행이 지속되었다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에 유리한 정황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한 조건에서 열리는 2차 정상회담에서는 당연히 공동선언 1항에 기초하여 2항을 더욱 구체화하는 합의들이 이루어졌을 것이며 그것은 바로 다름아닌 통일방안의 확정 내지는 통일방안을 합의 확정하기 위한 "민족통일기구"의 형성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2001년 등장한 부시 행정부는 남북공동선언의 이행을 가로막았고, 나아가 대북 강경자세를 나타냄으로써 또다시 한반도 정세는 격화될 조짐이 보였다. 하지만, 2001년에는 5, 6, 7, 8월로 이어지는 민간급 교류(3)가 남북관계 개선의 기관차 역할을 하여, 2001년 9월 6차 장관급회담 재개를 추동하였다.

그렇다면 2002년 신6·15국면은 어떤 특징을 갖는가? 2000년 6·15국면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자.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은, 신6·15국면이 통일에 성큼 더 다가선 국면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첫째, 2000년 하반기에는 각종 합의들이 이루어졌던 시기라면 이제는 그것이 실천단계에 들어선 국면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당국자간 대화와 민간교류가 동시에 진행되는 새로운 높은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2000년 하반기 남북관계가 주로 당국간 대화가 중심이었다면, 2001년에는 민간교류를 중심으로 남북관계가 진척되었는데 2002년 하반기의 남북관계는 당국간 대화와 민간교류라는 양 바퀴가 동시에 남북관계를 추동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과 6·15이행 방해를 뚫어내고 펼쳐낸 국면이라는 점이다.

6·15국면은 90년대 북-미 대결사를 총결하면서 펼쳐졌었다.  신6·15국면 역시 이와 비슷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2002년 들어 높아져가던 대북 강경정책이 급기야 대북 전쟁계획과 이른바 "북한붕괴 시나리오"로 이어지더니, 결국 서해교전이 터져 버렸다. 사실 서해교전의 파장은 예상외로 크지 않았지만 남북관계의 꼬임을 바라는 국내 반통일 세력에게는 "전쟁을 불사하더라도 응징해야한다"고 할 정도로 호재를 주었고, 미국 내부 강경파 역시 대북 특사파견(4) 철회라는 성과를 얻었다.

이러한 때에 북한은 전격적으로 서해교전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으며 7차장관급회담을 서울에서 열자고 제안하였다. 서해교전으로 꼬였던 한반도 정세를 일거에 풀어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6·15국면은 남북관계의 급진전이 어떻게 북-미관계를 추동할 것인지를 보여줄 것이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이 북미대결의 결과물로 나왔지만 그 자체가 다시 북-미 공동코뮤니케 탄생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듯이 신6·15국면에서의 남북관계 개선은  대미 압박과 북-미 관계개선 및 북-일 관계개선을 밀고나가는 힘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북에서 전격적으로 장관급회담을 제안한 이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북의 백남순 외상과 미국의 국무장관 파월이 회동하여 대북 특사 파견을 확인하였으며, 북-일 국교정상화 회담을 재개하기로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2002년 "신6·15국면"은 2000년 10월의 북-미 공동코뮤니케에 버금가는 북-미관계의 전환을 가지고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2000년의 6·15국면에서는 당시 클린턴 행정부의 공격적인 대북 정책을 완전히 꺾어버린 조건이었기 때문에 2000년 10월의 북미 공동코뮤니케가 가능했던 반면 현재 부시 행정부는 여전히 대북 적대시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다르긴 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2000년만큼 호락호락 대타협의 길로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보다 구체적으로 북-미관계를 중심으로 하반기 정세를 전망해보자.


2. 하반기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신6·15국면"은 하반기 북미관계 개선을 어떻게 추동할 것인가?

하반기 북미관계의 전환적 국면은 미국의 대북 특사파견으로부터 시작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실 대북 적대정책과 전쟁계획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서 특사파견은 파격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다. 특사파견을 두고 미국이 이른바 "대북 포용정책"으로 돌아서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5)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미국 내부의 강경파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것이 대북 특사파견 문제였다.

북에 특사가 파견될 경우 핵문제, 미사일 문제, 재래식 무기 문제 등의 의제를 들고 갈 것인데, 북에서는 해당 문제에 대한 보상으로 북-미 평화체제 수립을 핵심으로 하는 북미관계의 정상화를 요구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특히 재래식 무기 문제의 경우 주한미군 감축 내지는 재배치와 결부시키려는 것에 북의 의도가 있다. 실제로 예정대로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제임스 켈리가 대북 특사로 파견되었을 경우 주한미군감축 내지는 재배치가 논의될 뻔했었다.(6)

그런데 서해교전을 빌미로 재빨리 특사파견을 철회했던 미국이 다시금 북한의 백남순 외무상과의 회동에서 특사파견 문제를 논의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상반기 내내 유지되던 미국의 대북 강경기조와 구체화되어 오던 전쟁계획은 "신6·15국면"을 맞아 급진전하는 남북관계로 그 명분을 급격히 상실해가고 있다. 게다가 6·15남북공동선언을 전후하여 펼쳐지기 시작했던 북한의 전방위 외교는 2002년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특히 백남순 외무상은 7월 31일 브루나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 타이, 오스트레일리아, 유럽연합, 브루나이 등의 외무장관과 회담했으며 중국 외무장관과도 회담을 열었다.

이러한 북한의 전방위 외교와 남북관계의 급진전은, 날이 갈수록 패권적 대외정책으로 비난받으며 국제적 권위가 실추되고 있는 미국의 이미지와 반대로 북한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높여주고 있으며, 나아가 6·15남북공동선언과 한반도 통일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확산시키고 있다. 최근 들어 러시아와 중국이 나서서 2차 정상회담을 주선하겠다고 하는 것 역시 모두 이러한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대북 특사파견 철회 상태를 계속 고집한다면 한반도에서 자신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근 파월 장관이 회담에서 북한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없다`고 언급했고 미 국방장관 럼즈펠드가 미국이 이라크와는 달리 북한에 대해서는  `정권 교체`를 시도하지 않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7)

북-미관계의 핵심 현안 중 하나 : 핵사찰

지난 8월7일 경수로 콘크리트 타설식에 참석한 미국의 잭 프리처드 대사는 북한에 대해 핵사찰을 즉각 받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13일 외무성대변인 담화를 통해 "미국은 조기핵사찰을 떠들기 전에 전력손실을 보상해야하며,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철회해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또한 제네바 핵합의 파기를 경고하고 있다. 이 문제를 군사적 타격의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문제는 결국 미국의 대북 특사 파견 결정 여부, 파견된 특사의 북한과 협상 여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국내외적으로 불리한 조건 속에서, 한반도에서 남북관계의 급진전이 마련된 평화무드 속에서 특사를 파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에 대해 아무런 "보상"없이 "군사적 협박"을 병행하며 핵사찰 압력을 가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과거 90년대 북미대결 및 협상과정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북한은 미국의 군사적 협박에 결사항전의 자세로 맞서며 결국 미국을 협상자리로 불러내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유리한 방향으로 미국과의 합의를 끌어내고야 말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군사적 협박마저도 제대로 작동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는 것이 미국의 처지라는 것이다.

미국은 군사적 협박 대신 북한에 대해 "보상"을 약속하며 핵사찰 수용요구를 해야하는데 그 "보상"에는 전력손실에 대한 "경제적 보상"에서부터 94년에 만들어진 조-미 제네바 기본 합의문에 명시되어 있듯이 양국간의 관계를 대사급의 외교관계로 발전시키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

결국 미국의 대북 특사가 파견되어 논의할 의제인 핵·미사일·대량살상무기 문제 중 미사일 문제는 북에 대해 경제적 보상을 하는 방향으로, 핵문제는 북-미관계를 정상화하는 방향으로 마지막으로 대량살상무기 문제는 주한미군을 감축하는 방향으로 밖에 해결책은 없으며, 현재까지는 그러한 방향으로 귀결될 전망이 유력하다.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 미국 국무장관 파월이 먼저 백남순 외상과의 만남을 제안했던 점과 그 만남에서 "성과있는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풀어나가자. 관대하게 친구로서 취급해달라"고 말하면서 재래식 무기 협상과 관련해서도 "미국과 마주앉아 토론할 것"이라는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 낙관적 전망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까지 "`불량국가`와의 대량살상무기 문제에 대해 협상할 수 없다" 혹은 "대화는 하되 협상은 없다"는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이 전면적으로 철회된 징후는 없다. 하지만 현재의 국면에서 특사 방북의 성사 자체가 `대타협`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선 미국 자신이 "대화를 위한 대화"는 할 필요 없다고 주장해왔고, 이북 역시 "대조선 적대시정책의 철회 없는 대화"는 거부해왔기 때문이다.

미국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미국 내부의 강경파들은 특사파견이 가져올 파장에 대해 우려하면서 특사파견자체를 지연시킬 궁리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8월 15일 열린 국무부 정례 브리핑에서 국무부 부대변인 리커는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생산적 진전이 있었다"고 평가하면서도 대북 특사파견에 대한 질문에서는 "현재로서 밝힐만한 내용이 아무 것도 없다"며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남북장관급 회담, 북-미관계 전반, 북-일 대화 재개 등 상황을 총체적으로 종합해 부시 대통령, 국가안보회의 당국자들과 협의를 거쳐 후속  조치를  결정하게 된다"고 답변하였는데, 국무부와 국가안보회의 일부 강경파들이 특사파견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지연 입김을 불어넣을 여지가 많다.

강경파들은 특사파견 지연과 함께 국면 반전을 기도할 가능성도 있다. 남북관계가 급진전할수록 그 실현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지만, 군사적 긴장의 고조 내지는 선제공격 역시 미국의 최후의 선택으로 남아있다. 최후의 발악으로 9·11과 같은 대형 사건을 조작함으로써 날이 갈수록 와해되고 있는 "대테러 연합전선"의 재구축을 포함하여 대북 강경정책의 명분을 찾으려고 할 수도 있다.

한편 남북관계가 급진전할수록 자신의 협상카드와 한반도에서의 입지가 줄어들 판에 놓여있는 미국이 음으로 양으로 남북관계의 진척 자체를 가로막고자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정부당국을 압박하여 예정되어 있는 남북대화와 교류협력 일정을 축소시키거나 혹은 한국의 수구반통일세력과의 각종 공식 비공식 선을 통해 10월까지 다양한 민·관 대화와 교류를 축소시키거나 반북대결을 부추길 가능성 역시 적지 않다는 말이다. 

이번 8·15민족통일대회가 민간행사임에도 불구하고 남측 참관단 규모를 대폭 줄일 것을 종용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결정은 아무래도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을 개연성이 높은데 이것이 그 한 예이다. 또한 9월초로 예정되어 있는 남북청년학생통일대회의 경우는 더더욱 필사적으로 축소 또는 무산되는 방향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남과 북의 대응은?

예상되는 미국의 방해를 극복하고 하반기 남북관계가 정해진 일정대로만 간다면 올해를 조국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여는 해로 만들 수 있다. 새로운 차원에서 무르익어가는 교류·협력과 화해와 단합의 분위기는 더 높은 급의 북측 인사 방문에 훌륭한 조건을 마련해줄 것이며 통일을 위한 전환적인 합의가 도출될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당국은 "민족공조"로 급선회하여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을 결정적으로 철회시킬 비책을 마련중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미국 대통령 부시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남북평화선언"이 하나의 예이다. 남측 정부가 지난 해 첫 국가안정보장회의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 때 남북간의 항구적 평화 확립을 위한 일종의 "평화선언"을 구상했었는데 이것이 실현만 되었어도 미국의 한반도 문제에 주도적 위상을 흔들고 개입여지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그리하여 남북 당국은 여전히 평화선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남측 당국이 얼마나 확고하게 민족공조로 돌아서는가, 북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주적론"과 같은 것을 폐기하는가와 함께 "이적단체"로 낙인찍혀 있는 범민련, 한총련 등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갖는가 하는 것이 그 전제로 되기 때문에 매우 힘겨운 과정이 될 것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3. 7차 장관급회담과 8·15민족통일대회, 대격변의 신호탄

이번 7차 장관급회담의 경우 지난 장관급회담에 견주어보았을 때 특별히 새로운 합의가 도출된 것이 있다기보다는 미이행 합의사안에 대해 실천을 다짐한 회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또한 8·15민족통일대회 역시 북측 손님들을 대규모로 성대히 환영하지 못한 채 제한된 좁은 장소에서 정보기관의 밀착된 감시 속에서 진행되었던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하지만, 장관급회담과 8·15민족통일대회는 하반기 한반도 정세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소중한 출발점으로서 이러저러한 우여곡절과 난관이 있었지만 무사히 성사시켰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아직 남아 있는 우리 민족과 미국의 대격돌을 돌파해나가는 길에서 주도권을 쥐게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원래 엄청난 위력의 태풍도 작은 돌풍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던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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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

(1) "신6·15국면"이란 말은 "6·15남북공동선언 이행의 새로운 국면" 혹은 "6·15의 새로운 국면"의 줄임말이다. 이런 말을 새로 만들어 낸 것은, 2000년 하반기와 2002년 하반기를 빗대면서 올 하반기 급진전할 남북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2) 8월17일~    부산아시안게임(AG) 조직위원회와 조선올림픽위원회간 협의[금강산]
               북측의 부산AG 참가와 백두산 성화운반 등 제반실무적 문제 논의 예정
8월 26일~29일  제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개최[서울]
9월 4일~6일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제4차 남북적십자회담[금강산]
9월6일~8일     남북 축구 경기[서울]
9월 10일~12일  금강산관광 활성화를 위한 제2차 남북당국회담[금강산]
9월 중순       안변청년발전소 임남댐(이른바 금강산댐) 공동조사를 위한 관계 실무자 접촉[금강산]
               남측 태권도 시범단 북측 방문
9월 추석       제5차 이산가족 상봉[금강산]
10월 하순      북측 경제 시찰단 남측 방문
               북측 태권도 시범단 남측 방문
10월 19일~22일 제8차 장관급회담[평양]

(3) 5월 1일 금강산에서 열린 노동자 통일대회, 6·15 1주년 기념토론회, 7월 남북농민대회, 8월 2001민족통일대축전 등 매달 민간교류행사가 열렸다. 2000년에는 주로 당국간 대화가 이루어졌던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4) 대북 특사파견이 가져올 파장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5) 이 방송은 미국이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한 바 있으나 이번 외무장관 회담을 통해 미국이 북한에 대해 신중한 접근 자세를 보인 것은 이들 3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차별적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방송은 북한과 미국은 근 2년만에 최고위급 회담을 가졌으나 이같은 회담이 미국과 이라크간에 벌어질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등은 북한에 대해 포용정책을 펼지, 혹은 대결적인 태도를 가질지 지속적인 논의를 해왔다고 이 방송은 밝히고 부시 행정부는 이제 북한에 대해 신중한 포용정책으로 복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BBC방송 인터넷 판 7월 31일, 연합뉴스 8월 1일자에서 재인용)


(6) 북한이 미국의 까다로운 요구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서해교전을 일으켰다는 주장에는 또 다른 맹점이 숨어 있다. 북·미 관계는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는 만큼 북한에도 무엇을 주지 않으면 안되는 상호주의적 관계였기 때문이다. 지난 6월3일자 <워싱턴 포스트> 기사(`What to say to North Korea?`)에 그 내막이 잘 드러나 있다. 북한이 4월27일 미국측에 특사를 받아들이겠다고 통고한 이래 미국 행정부는 강온 양파로 나뉘어 그야말로 혈전을 벌였다. 당시 중요한 논점 중 하나가 북에 무엇을 요구하는 대가로 미국이 북에 줄 선물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바로 그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이미 내려진 결정 중에는 북한이 무기 판매를 중단했을 때 어떤 보상을 할 것인가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식량 지원과 에너지 보증이 그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남한에 주둔 중인 주한미군 3만7천명을 감축할 것인지 재배치할 것인지 하는 문제도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수 있다.’
<중간 생략>
이와 관련해 뉴욕의 한반도 전문가는 제임스 켈리 특사의 호주머니에 바로 이 제안이 들어 있었다고 확인했다. 북·미간 협상 내막에 정통한 이 소식통은,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들어 줄 경우 미국은 대북 지원(경협 포함) 및 경수로 지원 선물과 함께 주한미군 전력 감축 문제를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 공식 제안하려 했다고 한다. 그는 특사 방문이 실현되었다면 북·미 관계가 크게 변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미군 감축도 협상 대상이였다", 남문희 기자, 시사저널 7월 25일자)

(7) 조선신보 8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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