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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째 마당, 진보하는 역사, 희망을 주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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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0.11.14  19: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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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앞에서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점점 더 많은 인간들이 정치적 자유를 얻어 가는 과정이었고, 경제적인 불평등이 점점 사라지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으며, 모든 민족이 외세에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살아가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진보하는 역사입니다.

역사는 진보하는 역사인데, 그것은 다시 말해서 진보해야만 할 역사라는 의미와도 통합니다. 왜냐하면 역사라는 것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 나가는 것이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의미로 `진보해야만 할 역사`라고 표현하지 않고,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의미로 `진보하는 역사`라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옳은 것을 이루고야 마는 인간의 진보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지요. 옛말에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이 저절로 올바른 길로 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의로운 것, 올바른 것을 이루고야 말고, 결국에는 의로운 사람, 올바른 사람의 편을 다수가 지지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역사를 진보하는 역사로 만들어 가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됩니다. 진보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진보를 위해 몸을 바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독립을 위해 싸워온 많은 선조들이 조국 독립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러한 힘이 어디에서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잠깐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창씨 개명이나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와의 타협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한 평생을 마감한 만해 한용운의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시를 살펴봅시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의 시에서 `임`이나 `당신`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만, 이 시에서 `당신`은 아무래도 `조국`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겠지요. 왜냐하면 `땅`이나 `민적`이라는 시어가 그것을 뒷받침해 줍니다. 여기에서 마지막 부분에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라고 하는 구절은 역사의 진보를 부정하려고 하는 생각을 말합니다. 만해 한용운과 같이 위대한 사상가이고 불굴의 저항 정신을 지닌 독립운동가도 이처럼 인간 역사가 진보하는 역사라는 것을 부정해 보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던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고 인간 역사의 진보를 믿고 싸워 나갔다는 데 한용운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겠지요.

만해 한용운과 같은 사람이 그럴 정도인데 범인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더욱이 우리 역사처럼 부정한 자들이 많은 이익을 누려온 경우에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냉소적인 역사관이 자리잡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에 민주화투쟁을 하는 아들, 딸들을 향해 부모님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네 말이 맞다. 하지만 그래봤자 너만 고생한다. 친일파라고 욕하지만 그 사람과 그 자손들이 잘 사는데 어쩔거냐.` 이런 생각을 잘 표현해 주는 말들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이라는 것들입니다.

이제 이런 역사와 결별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는 진보하는 역사라는 것을 믿고, 역사 속에서 후대에게 희망을 심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옳은 자가 승리하고, 그릇된 자가 단죄당하는 가운데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지난 11월 5일 문래동 공원에 있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흉상을 시민 단체 회원들이 모여서 철거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그 방식이 옳은지 그른지는 일단 논외로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방식이 옳은지 그른지는 일단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 같은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논의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방식 때문에 기본적인 관점의 문제가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흉상 철거가 있던 날 텔레비전에서는 박정희 정권 때 부총리를 했던 사람의 견해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흉상을 철거하는 식으로 행동해서는 되느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흉상 철거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내놓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의 이러한 말은 정말 웃기는 말입니다. 그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는 박정희를 존경하지 말아야 합니다. 존경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청산과 극복의 대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박정희는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흉상을 철거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고 고문하고 투옥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왜 청산과 극복의 대상일까요?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다음 두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 - 만주 신경군관학교 졸업식장에서 박정희 생도(일본명 : 오카모토 이노부)의 답사 -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 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 - 일본 육사 교장 나구모 쥬이치의 말 -


그가 말하는 `성전`은 누구를 상대로 싸우는 것입니까? 바로 만주 일대에 있던 우리 독립군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을 상대로 목숨을 바쳐 `성전`을 하겠다는 사람, 이런 사람이 청산과 극복의 대상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청산의 대상이겠습니까?

그런데 현재 우리의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고 하는 김대중 정부가 국민의 혈세 200억을 들여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지원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래가지고야 누가 역사 속에서 희망을 갖겠습니까? 우리가 박정희 기념관 건립이나 국고 지원을 반대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기념될 때 우리에게 희망은 사라진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의 기념관이 건립되고 국민의 혈세가 그의 기념관 건립을 위해 쓰일 때 우리에게 더 이상 진보도 희망도 없게 됩니다. 우리의 후손들은 말할 것입니다. 조국과 민족은 생각하지 말자.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자.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말자. 그리하면 승자가 되고, 역사는 기념해 줄 것이다. 실로 두렵고 두려운 역사가 우리 앞에 펼쳐 질 수도 있는 순간이 지금 우리 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 그것이 바로 진보하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희망을 주는 역사입니다. 진보하는 역사, 희망을 주는 역사를 열어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올바른 역사관을 세우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다섯째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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