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환(통일뉴스 편집국장)


정차(停車)는 주차(駐車)와 다르다. 잠시 멈춘 차는 곧 움직여야 한다. 주차장에 들어간 차는 언제까지고 쉴 수 있으나 정류장에 선 차는 곧 떠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정전(停戰)과 종전(終戰)은 다르다. 달라도 천양지차(天壤之差)다. 끝장난 전쟁이 아닌 이상 잠시 멈춘 전쟁은 언제고 발발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한반도가 그렇다. 지금, 아니 아직 한반도는 정전상태이다. 정전상태란 전쟁이 멈춰있다는데 방점이 있는 게 아니라 언제고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데 방점이 있다. 1953년 7월, 3년간의 전쟁을 잠시 멈췄던 한반도가 21세기에 들어온 지금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이 기이한 현상은 정전협정 체결 및 준수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유엔군 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하기(下記)의 서명자들은...`으로 시작하는 정전협정은 `법적 당사자와 체결 당사자, 준수 당사자가 서로 다른 `이상한` 협정이다.` 즉 법적 당사자는 북한, 중국과 미국이고 체결 당사자는 북한과 미국인데, 유독 남한만이 권리는 없고 의무만 지는 준수 당사자에 속하는 것이다.

이처럼 당사자 문제가 이상하고 또 복잡하기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에서 당사자 문제는 늘 골치덩어리였다. 게다가 정전협정에서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차지하던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시위원회`의 활동도 사실상 무력화, 중지되어 있다. 한마디로 정전협정이 파탄 지경에 와 있다. 따라서 정전협정은 새로운 협정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협정문이라는 종이장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정전협정으로는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조절,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반도에는 분단을 해소하여 통일을 이루는 문제 못지 않게 전쟁을 종식시켜 평화상태로 가는 문제도 중요하다. 통일문제와 평화문제는 한반도문제 해결에 있어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특히 평화문제 해결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1950년 한국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전쟁의 종식이란 곧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평화보장체계로의 대체를 뜻한다.

돌이켜 보면 지난 2000년도만큼 우리 민족에게 한반도문제 해결의 호기(好機)인 적도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해 한반도에는 주목할만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남북간의 6.15 공동선언 합의이고, 다른 하나는 북미간의 10.12 공동코뮈니케 합의이다.

2000년 6월 평양회담후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은 귀환보고 제 일성(一聲)에서 `이제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10월 북한과 미국은 공동코뮈니케에서 `쌍방은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꾸어 조선전쟁을 공식 종식`시킨다고 밝혔다.

불과 2년전의 일이지만 한반도문제 특히 평화문제가, 해결되기 직전인 정상의 8부 능선까지 와 있었다. 어느 산이나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험난한 법이다. 특히 8부 능선에서는 숨넘어가는 `깔딱 고개`를 늘 만나기 마련이다. 지금 `평화`라는 이름의 자동차가 그 `깔딱 고개`에서 잠시 멈춰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한반도에는 여전히 기이한 정전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전쟁이 재발되지 않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도 그 불안정한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아닐 수 없다. 49년 동안 전쟁이 재발되지 않은 것은 차라리 천우신조다. 하지만 남북간 또는 북미간에는 크고 작은 갈등과 분쟁이 있어 왔다. 이 크고 작은 분쟁이 언제 국지전으로, 그리고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비화할지 모른다.

최근 서해교전 사태도 예외일 수 없다. 시간이 좀 지나고 감정들이 누그러지면서 6.29 서해사태의 근본원인으로 북방한계선(NLL)을 드는데 일치하고 있다. 특히 북측은 `북방한계선이라는 것은 정전협정에도 없는 것으로서 미국이 협정체결 이후 우리와의 그 어떤 합의도 없이 우리 수역에 제멋대로 그어놓은 비법적인 유령선`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남측은 `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남북 쌍방이 지켜온 실질적 해상경계선`으로 보고 있다.

분명한 건 정전협정 63개항 중에 해상의 `북방한계선`과 관련된 사항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1953년 정전협정 당사자인 `미군과 조선인민군`이 6.25전쟁 종결 과정에서 채 처리하지 못한 해상분계선 문제를 해결해 평화를 정착시켜야 할 책무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북한과 미국은 좁게는 이번 서해교전 사태와 관련해서, 넓게는 한반도의 평화보장체계와 관련해서 만날 필요가 있다.

이 달 27일은 휴전협정의 날이다. 말이 좋아 휴전협정이지 정확하게는 정전협정의 날이다. 이렇게 중요한 날임에도 최근 달력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다. 달력에는 사라졌지만 27일 정전협정의 날을 기억하자. 전쟁의 공포를 되새기자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춘 전쟁상태`라는 이름의 `정전상태`에 놓여 있는 불안정한 한반도의 현실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평화의 귀중함을 알 수 있고 또 지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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