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시절에 수도를 계룡산 근방으로 옮길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공개적으로 거론되지도 못한 채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도 수도 이전 검토가 몇 차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마찬가지로 거론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수도를 이전한다는 것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소유한 독재자라 할지라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세력들도 도읍 이전을 검토하면서 처음에 계룡산 부근으로 옮기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수도가 남쪽으로 치우쳐 있어서는 곤란하다는 점과 계룡산은 풍수지리설에 따를 때 문제가 있다는 점들이 거론되면서 백지화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도읍지로 떠오른 곳이 바로 지금의 서울인 한양이었습니다.
 
남산 타워에 올라가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 보면 서울은 정말 천혜의 지형을 갖춘 도시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인왕산과 북악산 같은 야트막한 산이 시가지를 감싸고 있고, 그 뒤로는 북한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정경은 가히 일품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시가지의 남쪽으로 남산이 있고, 그 뒤로 관악산이 있으며, 금상첨화로 한강이 가로지르고 있으니,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큼 천연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이런 천혜의 수도를 찾으려고 무학대사가 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지금의 왕십리쯤에서 신선을 만나 거기에서 십리를 가면 왕도로 적합한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한양을 수도로 삼게 되었다는 야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양은 무학대사가 발이 부르트게 돌아다니다가 어느날 갑자기 발견한 곳은 아닙니다. 백제 초기의 수도였던 한양은 일찍부터 술사들에 의해 명당 자리로 일컬어져 왔던 곳입니다.
 
한양은 고려 문종 21년(1067년)부터 본격적으로 행정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한양은 서경(평양). 동경(경주)에 이어 세번째로 소경으로 승격하여 남경이라 하였고, 주변 고을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한편 궁궐. 정자 등을 짓기도 하였습니다. 그 뒤로도 한양으로 수도를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서경이 묘청의 난 때문에 인기가 떨어지고, 경주에서도 무신정권 기간 동안에 신라 부흥을 표방하는 반란이 일어나 그 지위가 격하되는 것과는 달리, 한양은 고려 시대에 인기가 올라갔습니다.
 
지금의 서울인 한양은 수도로서 매우 훌륭한 입지 조건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개성인 개경이 수도로서 적합하지 못해서 조선 왕조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개성도 한양 못지 않은 입지 조건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도시의 천연 조건이 어떠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이유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조선 왕조가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긴 목적은 크게 보아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고려의 건국 때 그랬듯이 이번에는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피폐해진 민심을 부추겨서 새 왕조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고려 왕족에 대한 국민들의 동정과 기대를 뿌리뽑으려는 것이었고, 마지막으로는 고려 왕조 하에서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개경 사람들 특히 개경 귀족들과 상인들의 저항 의지를 잘라 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든지 정부가 있는 수도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지방 사람들보다 많은 혜택을 누리고 살게 마련입니다. 교통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온 나라에 흉년이 들어도 수도에 쌀이 떨어지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정작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굶어 죽어도 수도의 거지나 도둑은 굶어 죽지 않는 것이 봉건 체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도와 지방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므로 수도의 귀족이나 상인들은 당연히 옛 왕조에서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새로운 왕조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나아가 이들은 새로운 왕조에 저항하기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조선 왕조는 이들의 저항을 뿌리째 잘라버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조선 왕조는 수도 이전을 강행하는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조선 왕조에 참여한 관료들조차 거세게 반대했습니다. 수도 이전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왕실과 몇몇 관료들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수도 이전은 조선 왕조의 운명과도 직결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수도 이전을 강행하다가 실패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조선 왕조가 침몰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조선 왕실은 수도 이전을 강행했습니다.

태조 3년인 1394년 12월부터 다음해 9월에 걸쳐 몇 만 명을 동원한 경복궁 건설 공사로 수도 이전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경복궁 건설 공사가 끝난 이듬해인 1396년 1월부터 도시 건설 공사가 있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십이만 명을 강제로 끌어낸 것이었습니다. 실록에 이렇게 기록된 것을 보면 실제 숫자는 훨씬 더 될 것입니다.
 
조선 왕조의 무리한 수도 이전은 좋은 입지 조건을 가진 한양을 수도로 가지게 되었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무리한 추진 탓에 폐해도 많이 낳았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폐해가 무리한 토목 공사 때문에 농민들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공사에 동원되는 것은 국가를 위한 부역이었습니다. 농민들은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한 채 강제로 끌려나가 일했으므로 생계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겨울철에 강행된 공사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습니다.

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더라도 성문 밖 세 곳에서 수륙재를 베풀어 그 동안 공사장에서 죽은 자의 혼령을 위로하도록 했으며, 또 죽은 사람의 집도 3년 동안 부역을 면제해 주도록 했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을 했을 리가 없지요. 오늘날처럼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도 겨울철 대규모 공사는 많은 희생자를 낳는데 하물며 그 옛날에 어떠했을지는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경복궁을 비롯한 고궁을 둘러볼 때 조상의 빛난 얼 어쩌고 저쩌고 하기에 앞서 6백년 전에 농사 짓다 끌려 와서 죽거나 부상당한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역사를 움직이는 진정한 힘은 바로 이름 없는 이러한 사람들의 피와 땀이었습니다.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들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힘은 바로 이름없는 농민들의 희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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