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있는 노조법 개정 농성 천막에 도착한 것은 오전 8시50분쯤이었다. 정문 앞에는 ‘국회는 응답하라’ ‘특수고용노동자 노동자성 인정하라’ ‘진짜 사장교섭법 제정하라’ ‘손배폭탄금지법 제정하라’ 등의 팻말을 들고, 1인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여러 명 서 있었다. 아침 선전전을 하러 농성천막에서 나온 듯하였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천막으로 다가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길 건너편 국회 담벼락과 나란히 농성천막들이 죽 늘어섰다. 재미있는 것은 ‘간호법 제정하라’와 ‘간호법 반대’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 외 석탄금지법 제정, 낙태금지법 등을 주장하는 현수막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국회 앞에만 와 보면 바야흐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물결이 넘쳐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점심때쯤에는 이외에도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든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그 중 제대로 요구가 관철되었다는 것은 보기 드물다. 

  노조법 2, 3조 개정투쟁이 시작된 이후 신돌석씨 지역에서도 투쟁에 참여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논의를 하였다. 장기간 농성을 하고 끝내 병원으로 실려 간 사람들이 있었다. 지역에서는 거기에 함께 할 사람은 없었다. 릴레이 1인 단식을 하였다. 연초에 신돌석씨도 하루 와서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결의를 다진다는 것 이외에 커다란 의미를 갖기는 힘들었다. 농성장 집단 방문과 선전전 참여 등이 있었다. 신돌석씨 지역 노동자들도 함께 했다. 

  지역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일로는 한끼 단식을 하고, 그 비용을 후원금으로 개정운동본부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증샷을 찍어서 많은 노동자와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리고, 아직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동참을 권하는 일이었다. 그밖에 농성장 앞에서 저녁 시간에 문화제를 하면 시간이 가능한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지역에서 문화제를 독자적으로 해보자고 제안이 와서 논의를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작년 연말에는 오체투지를 하기도 하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국회를 포위하는 차량 시위도 하였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치열하게 투쟁을 하는 가운데 농성장을 지키던 사람들이 국회 안으로 들어가서 본청 앞에서 기습 농성을 하였다. 작년 연말에 있었던 일이다. 국회 경위들이나 경찰이 달려와서 강제로 끌어내려 하였다. 다행히 정의당 국회의원들의 중재로 하루만 했고, 의원들이 이어서 농성을 했다.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고 있지만 왠지 일반인들의 관심은 많지 않다. 사실 일반인이란 말이 우습기는 하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특수인인가? 우리나라 국민의 70%가 노동자, 혹은 노동자의 가족이라고 한다. 특히 지금 개정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 중 제일 앞자리에 있는,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인데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주요 언론이라고 하는 데서 다루지 않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특수고용노동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1990년대부터 신돌석씨는 학습지 방문교사와 이른바 야쿠르트 아줌마라는 분들이 노동자냐 아니냐로 다툼이 벌어졌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런 다툼이 있는 사람들이 21세기 들어서면서 엄청나게 늘어났다. 보험모집인, 골프장 캐디, 레미콘 차량 운전사, 방송 구성작가, 퀵서비스 배달원, 학습지 방문교사, 학원 강사 등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이거나 우리 자신이 바로 그렇다. 

  사람들은 보통 하나의 사장 아래 시급 또는 월급으로 임금을 받고 일해야 노동자인 것으로 안다. 그렇기 때문에 일한 만큼 받는 직종 등은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라고 분류를 하고, 당사자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엄청난 기만이다.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도 그들을 고용하는 사용자가 엄연히 존재한다. 임금을 어떤 방식으로 받는지는 노동자성 인정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왜 굳이 노동자라고 인정을 받으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본인들도 노동자라는 소리 듣기 싫어하는데 그냥 놔두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어떤 면에서는 사실에 부합하는 이야기다. 노동자라고 불리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건 너무나 오랜 차별 속에서 굳어지 고정관념이다. 그러면 본인들이 노동자라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노동자라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노동자라고 인정해 달라는데도 그러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그건 사실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아직도 우리 정부와 관료들, 자본가들은 노동3권이 이윤 창출에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노동자라고 인정하는 순간 노동3권, 즉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사간의 계약 관계를 그야말로 창의적으로 만들어서 엄연한 노동자를 개인사업자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작년에 있었던 화물연대 파업에서 이 문제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화물차주이기도 한 기사들은 스스로 노동자로 인식한다. 그래서 노조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정부나 화주측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파업을 해도 굳이 집단업무거부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면서도 파업을 중지시키려고 업무개시명령을 한다. 개인사업자에게 정부가 업무를 하라 말라 명령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물음에 대해 정부는 ‘그건 난 모르겠고’ 식이다.

  오늘 신돌석씨가 노동법개정 농성천막을 찾은 것은 농성장지킴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노조법 개정투쟁이 장기화되면서 개정운동본부도 어려움이 있는 듯하였다. 그런데 입법을 할 수 있는 국회는 환경노동위조차 열리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도 첩첩산중이다. 일단 환노위가 열릴 때까지는 농성천막을 유지하자는 것이 본부의 결정사항이었다. 본부에서 집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각자의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본부는 1월 9일 이후로는 각 단체가 돌아가면서 농성천막 지킴이를 해줄 것을 요청하고 신청을 받았다. 신돌석씨 지역에서도 논의 끝에 하루를 잡았다. 그 날짜도 잡기 쉽지가 않아서 결국 어느 단체가 오전에만 할 수 있다고 하는 날에 오전, 오후 모두 하겠다고 하고 오늘 오게 된 것이었다. 농성천막에 도착해 보니 지난번에 하루 동조단식을 했던 곳은 비어 있었다. 왼쪽에 좀 들어가 있는 곳에 있는 천막에 가니 거기 미리 사람들이 와 있었다.

  지역에서 최미숙과 김민호가 와 있었다. 둘 다 투쟁현장이라면 달려가는 사람들이었다. 또 한 가지는 하루를 비울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최미숙은 전자공장 노동자 출신인데 지금은 청소노동자를 하면서 진보정당운동, 시민운동 등을 하였고, 김민호는 영세한 쇠공장에 다니는데 사장이나 공장장하고 이야기가 잘 되는지 일이 있을 때마다 하루를 비우곤 했다. 하긴 연차 내겠다고 하는데 막았다가는 시끄러우니 그냥 그러라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두 사람 말로 남녀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신돌석씨들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여자는 30대 후반, 남자는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 정도였다. 노동보건 관련 단체라고 하였다. 2시까지만 지킴이를 하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다섯이서 지킴이를 시작하였다. 원래 단체들이 지킴이를 해도 개정운동본부나 민주노총에서 당직자가 있었는데 최근 상황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다고 양해를 부탁하는 문자를 받은 상태였다.

  신돌석씨를 제외한 네 사람은 문화제 등에는 와 봤어도 농성장에 온 것은 처음인 듯하였다. 신돌석씨가 이전에 하루동조단식을 한 경험 때문에 그 천막에서 해야 한다고 그리로 옮기자고 해서 갔는데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난번에 큰비가 내렸을 때 제대로 수선을 못해서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김민호가 잘 아는 개정운동본부 실무자한테 전화를 해보니 당장 어떻게 하기 어려우니 옆 천막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일단 옆 천막으로 옮긴 뒤 다섯이서 사진을 찍기로 했다. 소속 단체끼리 셋, 둘이 찍고, 다섯이 한꺼번에 찍었다. 그리고 천막에 가니 꽤 추웠다. 전기장판을 꽂았는데 한참이 돼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난로도 제대로 켜지지를 않았다. 김민호가 다시 전화를 해서 알아 보니 발전기를 돌려야 전기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로 켜는 방법을 들었다. 이렇게 해서 농성천막을 따뜻하게 해놓고 지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한 시간쯤 무료하게 앉아 있었다. 노동보건단체에서 왔다는 두 사람은 역시 젊은 사람답게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김민호와 최미숙은 핸폰으로 검색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신돌석씨는 핸폰을 보다가 말다가 하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섰다. 여기서 갈 수 있는 화장실은 전철역 아니면 길 건너편에 있는 빌딩이다. 지난 번 하루동조단식할 때 가본 경험으로는 건너편 빌딩으로 가는 것이 빠르고 편했다.

  빌딩에서 화장실을 왜 개방하나 의아하다는 생각을 그때 했었다. 이유가 있었다. 건물 1층에 식당들이 있었다. 단식을 할 때 식당들이 있는 곳을 지나 화장실을 들어가서 참 난감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농성천막에서 나와서 국회 정문과 횡으로 일단 길을 건너고, 다시 길을 건너야 한다. 파란 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편에 낯익은 사람들이 있었다. 월남참전군인들의 전투보상금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보훈개혁연대 어르신들이었다.

  길을 건너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이 분들이 일주일에 2-3일씩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성남에서 함께 살았던 경수형이 여기서 1인시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사실 경수형이라고 하지만 이제 70이 훨씬 넘어서 80이 다 되어 가는 분이어서 신돌석씨한테 아저씨뻘인데 친하게 지내다 보니 형이 되었다. 경수형 통해서 회장, 부회장 등을 알게 되었고, 오늘 두 분과 적극적인 회원 한 분이 나와 있었다.

  월남참전군인들은 대부분 무조건 수구세력을 지지하고, 수구정권의 돌격대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월남참전 공법단체들의 부정비리가 알려지면서 형사처벌 되기도 하고, 너무나 분명한 전투지원금을 못 받게 되자 수구정권을 지지해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월남참전개혁연대라는 것이 탄생하고, 이후 활동 속에서 보훈 문제 전반을 개혁하자는 의미로 보훈개혁연대가 되었다.

  현재 진행 상황이 어떠냐고 하니 몇 차례 논의가 될 듯 말 듯 하면서도 아직 국방위 안건으로 못 올라갔다고 한다. 회장은 80이 넘은 분인데 벌써 5년 이상 정열적으로 이 일을 추진하지만 이제는 좀 지쳤다고 한다. 이분들이 들고 있는 팻말에도 월남에 파병한 미국, 호주, 태국, 뉴질랜드 모두 파병 군인들에게 월 200만 원 정도의 참전명예수당을 지급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런 것은 둘째치고 전투수당까지 지급을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점들을 볼 때마다 신돌석씨는 우리나라의 보수세력은 진짜 보수가 아니라 수구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국가의 명령으로 해외에 파병된 사람들이 어떻게 국내 전투가 아니라고 전투수당을 지급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리고 미국에서 받았다고 하는 돈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이런 돈들이 이리저리 흘러서 지금 수구세력들의 비자금으로 쓰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경수형이 안 보여서 소식을 물으니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요양원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제 자신들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데 이 일이 어떻게 풀릴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지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한을 안고 살아간다. 이제 그 한을 집회나 시위 등으로 외칠 수 있는 시절은 되었다. 하지만 그게 더 화를 돋구는지도 모른다. 될 듯 될 듯하면서도 되는 게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함께 사진을 찍고 인사를 하고 길을 건너 화장실로 갔다. 1인시위는 원래 떨어져서 해야 하지만 다들 붙어서 한다. 떨어지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규정이 없다고 한다. 소리를 내거나 하면 안 되는데 국회 정문 앞 사거리에는 확성기를 들고 자기가 빼앗긴 아파트를 내놓으라고 몇 시간 동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할머니가 있다. 길 건너편에는 낙태 때문에 나라가 망할 거라는 할아버지가 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니 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한을 담은 팻말을 들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국회의원은 이곳으로 잘 지나다니지 않는다. 의원회관이 바로 앞에 있지만 이런 모습들을 보는 것이 불편해서 다른 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국민들의 한이 직접 전달되고 그것의 해결을 위해 움직이는 선량들의 모습이 확인돼야 하는데 여전히 국회 문턱은 높고 국민들은 저마다 대답 없는 물음만 외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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