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일하다 다쳐 본 사람은 안다. 기계에 팔다리가 손가락 발가락이 잘리고도 욕을 먹어 본 사람들은 안다. 일하다 떨어져 본 사람은 안다. 떨어져 허리가 부러지고 어깨가 바스라져도 모든 것이 자기 책임으로 돌아온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안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자기 자식 스포츠카 사주는 데는 펑펑 쓰다가도 안전장치 위해 푼돈이라도 들이는 것에 얼마나 인색한지를 안다. 그들의 개가 되어 짖는 관리자들도 마치 자기 돈이라도 나가는 것처럼 다친 사람에게 성질을 부린다는 것도 안다. 이 모든 것을 일하다 다쳐본 사람은 안다.

  신돌석씨는 군대 가기 전에 건축 공사장에서 추락한 적이 있었다. 다리가 부러지고 어깨 허리가 다쳐서 병원에 누워 있는데 그 공사장을 소개해 준 사람이 찾아왔다. 과일 바구니를 들고 병문안이라도 온 것처럼 했지만 대뜸 하는 첫말이 술 좀 그만 마시라는 거였다. 마치 신돌석씨가 술을 많이 마셔서 사고라도 난 것처럼 말했다. 과일 바구니를 확 집어 던지고 싶은 걸 참았다. 물론 신돌석씨는 술을 좋아하고 많이 마셨다. 하지만 그 전날에는 전혀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에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셨다. 일하다 새참이나 점심을 먹을 때도 막걸리 한두 병이나 소주 한 병은 기본이었다. 일하면서 술 마시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겠지만 술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지금처럼 안전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못했지만 그래도 안됐다든가 많이 아프지는 않냐라는 말 정도는 하고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자본가나 관리자들은 사고가 나면 무조건 노동자의 부주의 때문이라고 규정했다. 자신들의 책임을 면피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신돌석씨의 경험으로 볼 때 그들의 생각이 그러했다.

  군수품 부품을 생산해서 납품하던 프레스 공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안전장치가 거의 없었다. 부품을 프레스가 내려오는 위치에 손으로 갖다 놓고 발로 페달을 밟아서 작업을 하였다. 손을 늦게 빼거나 페달을 조금이라도 빨리 밟으면 여지없이 손가락이 날아가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어찌 절단 사고가 안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사고가 나자 반장 직장 공장장이 달려왔고 공장장이 대뜸 욕부터 해댔다. 야 이 개새끼야 정신을 어따 두고 일하는 거야? 다친 사람은 피나는 손가락을 붙잡고 고통에 괴로워하는데 이들은 피해자를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 공장의 반장, 직장, 공장장 모두 손가락이 잘려나간 사람이었다. 구박받은 며느리가 크면 못된 시어미가 된다고 하던가? 그때까지 산재사고라고는 거의 구경하지 못할 가방공장에만 다녔었던 신돌석씨는 이 일로 정말 충격을 받았다.

  SPL  산재사망사고의 이후 처리 과정을 보면 회사측이 이 사건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 수 있다. 사고가 일어나고 119에 신고하는 데 10분 이상이 지체되었단다. 그 이유는 동료 직원들이 핸폰을 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핸폰이 없는 이유는 회사에서 작업장에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핸폰이 없으니 유선전화로 관리자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그런데 번호를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핸폰을 못 가지고 있게 하는 것은 작업에 지장이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한번은 쓰러진 사람이 있었다. 핸폰을 관리자 몰래 가지고 들어온 사람이 119에 연락을 했다. 이 노동자는 나중에 관리자들한테 엄청나게 까여야만 했다.

사고가 나자 시신을 옮기는 데 바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을 시켰다. 그리고 다음 날에도 고인이 일하던 기계에만 흰 천을 덮고 같은 공간에 있던 사람들을 일을 시켰다. 관리자들이 개별적으로 연락을 해서 일을 하라고 했다고 한다. 누군가 노조 지회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회사가 하라고 하니 안할 수 없지 않냐고 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 분노하는 사람들의 비난이 잇따르자 그때서야 일을 중단시켰다. 이들은 노동자들을 감정도 없는 기계로 생각한 것이다. 동료가 죽든 말든 돈만 주면 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산재사망사고로 축이 날지도 모를 이윤을 확실하게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사고의 원인은 좀더 많은 것이 밝혀져야 하지만 현재까지만으로 보아도 99,99% 회사의 책임이다. 먼저 위험한 기계가 밀폐된 공간에서 작동하는데 혼자서 일하게 방치했다. 2인 1조로 작업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회사는 두 사람이 일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기계가 있는 공간 외부에서 일했다. 이건 2인 1조가 아니다. 2인 1조가 되려면 기계가 작동될 때 두 사람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위급한 상황이 닥칠 때 서로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혼합기에 재료를 붓기 위해 뚜껑을 열 때 센서가 반응해 혼합기 가동이 중단되어야 하는데 사고가 난 기계에는 센서가 없었다. 작업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센서를 아예 부착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떼어 놓았다 다시 부착하는 식으로 한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는 의혹이 일고 있다.

사고 이전에도 회사의 문제는 많았다. 안전교육을 하지도 않고는 받았다고 서명을 하도록 강요했다. 평소에도 앞치마가 끼이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개선 조치를 하지 않았다. 사고가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도 손가락 끼임 사고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안전불감증의 회사이다 보니 사망사고 일주일 뒤에 또 손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렇게 사고 이전에도 사고 당시에도 그리고 사후에도 회사는 안전에 대해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결국 이건 노동자를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기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그들의 사고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고가 일어나던 날 고인은 남자친구와 문자를 교환했다고 한다. 일이 많아서 너무 힘들다는 말을 했다. 배합하는 일은 따로 수당을 받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시키는 것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도 회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시켰다. 12시간 맞교대이었다. 쉬는 시간도 15분밖에 주지 않았다. 그 중 절반 정도는 청소 등을 해야 했다. 힘에 벅찬 일, 장시간 집중해야 하는 일 등에서 사고가 나기 마련이다. 회사나 관리자들은 그런 것을 무릅쓰고 집중을 해서 사고를 내지 말라고 요구하는데 그거야말로 노동자가 기계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기계도 과부하가 걸리면 고장이 나기 마련이다. 하물며 사람이 힘에 부친 일을 지나치게 긴 시간 하면서 어찌 사고가 나지 않겠는가?

고인은 남자친구와 그날 일이 끝난 뒤 놀러가기로 했다고 한다. 남자친구도 같은 공장에 근무하면서 비슷한 일을 했던 모양이다. 그 날 교대 시간이 앞서서 먼저 퇴근했는데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절절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고가 난 시간 이후 톡에 답장이 없자 왜 그러냐면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라디오에서 들으면서 신돌석씨는 처음 노조를 만들 때 함께 일했던 원형민이란 사람이 떠올랐다. 신돌석씨보다 세 살쯤 아래였는데 그때 아마 스물 네 살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그때 이미 동거를 하고 있었다. 손가락 두 개가 잘려 나갔다. 그 사람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회사에서 물량이 급하다고 철야를 시켰다. 야간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저녁을 먹으러 회사 부근에 있던 집에 갔다. 같이 살던 여자친구는 핑계를 대고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장의 요구를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철야수당이라도 받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여자친구에게 선물이라도 사주고 싶었다. 까짓것 하루만 고생하고 내일 함께 맛있는 것 사먹고 쇼핑도 하자고 여자친구를 달랬다. 예쁜 옷을 사주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철야가 끝나고 좀더 연장을 하라고 해서 그냥 가겠다고 했더니 반장이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그만두려면 가라고 하더란다. 할 수 없이 다시 기계를 켰는데 자꾸 여자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핸폰도 없어서 연락도 할 수 없고, 오전까지 하면 가겠지 하고는 일을 하다가 그만 순간적으로 꾸벅 졸면서 손을 기계에 넣어 버렸다. 너무 놀라서 손을 뺐을 때 이미 손가락 두 개가 저만치 떨어져서 팔딱거리고 있더란다. 병원으로 갔고 여자친구가 왔는데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단다. 너 옷 사주어야 하는데, 옷 사주러 가야 하는데. 그러면서 통곡을 하고, 여자친구도 훌쩍이기만 하더란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아내가 성옥, 정희와 하던 소모임은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아내도 신돌석씨에게 신중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던 바이라서 셋이서 떡볶이 사먹고, 수다 떨면서 모임을 이끌어 갔다. 그런데 성옥이 일하는 라인의 옆 라인에서 작은 분규가 있었다. 분규라고 말할 것까지도 없지만, 갑질을 해대는 관리자에게 반원들이 대거리를 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관리자가 그 중 제일 앞에 나서는 사람에게 폭행을 가했고, 이 사람이 경찰에 신고를 하였다. 작업장에 경찰이 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관리자는 전직 조치되고 그를 고소한 노동자는 권고사직되었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현장이 뒤숭숭해졌다.

성옥은 이런 기회에 소모임을 확대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피력했다. 정희는 아직은 섣부른 것 같다고 하였다. 아내는 두 사람의 의견을 경청했지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신돌석씨에게 자문을 구했다. 신돌석씨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조철구를 만나서 의견을 물었다. 조철구는 확대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말했다. 당시는 1987년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공단 부근에서 일어났다. 해고자들도 이런저런 양식으로 투쟁을 시작했다. 당장 투쟁에 나서지는 못하더라도 현장이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확대하더라도 반드시 점으로 이어지게 하라고 하였다. 신돌석씨나 아내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몰랐다.

점으로 이어지게 하라는 조철구의 당부는 지켜지지 않았다. 성옥과 정희의 자취방은 그 공장 노동자들이 모여서 회사와 관리자와 어용노조를 성토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은밀하게 움직이던 다른 소모임들도 교류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이들은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지역내 가톨릭 공간인 ‘함께 하는 집’ 등에 나가는 노동자와 함께 거기 가서 교육도 받았다. 마침내 공장 내에서 이 모임이 꽤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아내가 다른 노동자들과 마주치는 일들이 생겼다. 이럴 때 재빨리 사태를 파악하는 것은 경찰도 아니고, 노동부도 아니고, 회사 노무팀도 아니었다. 바로 현장에 끈이 있는 어용노조였다. 주로 남자 기사로 구성된 노조 집행부와 대의원들이 개별적으로 노동자들을 협박하고 회유해서 이것저것 알아냈다. 그 과정에서 성추행까지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결국 이들은 모두 회사 노무팀에 불려갔고, 성옥과 정희를 비롯해서 몇 명은 집에 연락이 되어서 강제로 회사를 그만두고 집으로 끌려내려 갔다.

신돌석씨는 이 소모임을 생각만 하면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노동자대투쟁이 있을 때 공단 전체가 술렁였다. 그 공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용노조 집행부가 교체되었다. 그러나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준비된 세력이 없었다. 당시에 여성 중심 사업장에서 어용노조는 대개 남자들이 했다. 여기도 그랬다. 남자에서 또 다른 남자로 바뀌었다. 만약 당시 모임이 착실히 준비되었으면 투쟁이 고조되는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이것도 역사일 텐데,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아쉬운 마음이 없을 수가 없었다. 정희는 그 뒤 소식을 전혀 모르고, 성옥은 다시 돌아와서 지역내 공장에 다니다가 지금은 협동조합에서 일하고 있다. 신돌석씨는 본 지 오래 되었지만, 아내는 적어도 1년에 한 번 이상은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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