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달 굶으며 가마니 덮고 흉한 안두희를 이렇게 잡았다.

 

김용희(金龍熙) <전 광복군 제3지대 간부(前光復軍 第三支隊 幹部)>

 

<안(安)의 동서는>

「맞아 죽자」고 제의(提議)

수없는 정보(情報)와 조사(調査)에도 거듭 실패(失敗)

 

발견(發見)·추격(追擊)·체포(逮捕)

이는 정녕 꿈이 아니었다

수없는 정보와 조사에 실패하다 다시 정보를 얻은 건 칠(七)월 어느 날이다.

안(安) 처제의 식모를 통해 얻은 정보는 안(安)의 처제가 미도파 백화점에서 아동복 장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안(安)의 저서 「시역의 고민(弑逆의 苦憫)」을 통해 처제 이름이 박옥주(朴玉珠)임을 알고 샅샅이 미도파 백화점을 조사했으나 허탕치고 말았다. 다음날은 미우만 백화점으로 방향을 돌렸다. 명단이고 무엇이고 닥치는 대로 조사했다. 문제의 박(朴)은 분명 미우만 백화점 이(二)층에 있었다. 그날 밤부터 물샐틈없이 박(朴)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후암동 남산 밑에 있는 처제의 집은 곧 알 수 있었다.

동지들은 한 달 동안 처제의 집 마루 밑에서 교대로 철야했다. 동네 사람들의 말은 오(五)일 전에 안(安)은 처제의 집에서 나갔다는 것이다. 한 달이 지난 어떤 날 밤 「내일 아버지 만난다」고 가족들에게 박(처제)이 하는 말을 마루 밑에서 들었다. 처제의 집에는 안(安)의 딸 미라(美羅)가 같이 살고 있었다.

처제의 집에는 개가 있었다. 처음엔 개를 죽여 버릴까 했으나,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먹을 것을 사가지고 개를 남산으로 유인하기에 무척 애를 먹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우리 동지들은 세 갈래로 나누어 뒤를 따랐다. 가족들은 「륙색」을 메고 창경원으로 행했다. 그대로 소풍행각이다. 창경원에서 잠시 배회하던 가족들은 장소를 원숭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얼마 후 박(朴)이 있는 옆으로 제삼(三)의 사나이가 나타나서 쪽지를 전했다. 처재 박(朴)은 쪽지를 받고는 곧 가족들과 창경원을 나왔다. 제삼(三)의 사나이는 쏜살같이 창경원 앞에 있는 어떤 다방으로 달려가서 쪽지를 전했다고 전화로 누구에게 보고했다.

창경원을 나온 가족들은 차를 타고 후암동 쪽으로 달렸으나 처제 박(朴)만은 다른 차를 타고 자유신문사 앞까지 와서 내렸다. 박(朴)은 자유신문사 이(二)층으로 올라가더니 금세 내려와서 다른 차를 집어탔다. 동대문을 빠져 숭인동 버스주차장 앞에서 내린 박(朴)은 앞뒤를 흘겨보며 길 건너편 「사이다」공장 골목길로 해서 꺾어 돌았다. 백주의 미행은 삼(三)면으로 포위했다. 박(朴)이 들어간 집은 전부터 안(安)과 가까웠던 사람의 집이었다.

우리들은 러닝셔츠로 변장하고 장기판을 얻어다 문제의 집 대문 옆에서 장기전술을 썼다. 처제 박(朴)이 그 집에서 나온 건 몇 시간 뒤였다. 

처제를 보내는 안(安)은 「썬글라스」에 러닝셔츠 바람으로 다시 만날 장소와 시간을 연락 할 테니 조심하라고 전했다. 밥이 깊어지자 안(安)은 그 집을 나와 다시 안암교 근처로 옮겨갔다. 안(安)은 안암교 근방 어떤 집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안암교의 집은 담이 높아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안(安)을 독안의 쥐로 만들고 말았다. 우리는 그를 보호해준 셈이다. 

동지들은 안(安)을 보고도 잡지 않는 것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그냥 쳐 죽이자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나는 동지들의 불평을 막기에 갖은 애를 다 먹었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다. 안(安)의 동서 김경신(金敬信)이란 사람이 최후의 협상을 청해왔다. 그는 신학교 출신이었다.
보복을 그만두고 백범정신으로 안(安)에게 다시 태양을 보게 해달라는 요청에 대해 우리는 민족정기를 위해 자진해서 나타날 것을 말했다. 「지난번 추도식 때도 효창공원에 가서 맞아죽자」고 안(安)에게 제의한 것도 동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산 정리 및 유서까지 써놓은 안(安)이었으나 다음날 아침에는 마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 후 검찰에서 안(安)을 수배했을 때도 검찰에 자수하자고 동서가 말했으나, 다음날 아침에는 삶의 애착이 생겼던지 번의했다는 것이다. 동서는 화가 치밀어 올라 안(安)에게 「너는 사람이 아니다」고 뱉듯이 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곡절을 거쳐 온 최후의 협상 결론은 이러했다. 오(五)일후 동서 김경신(金敬信)이 안(安)을 직접 만나게 하되 안(安)은 친필로 자백서와 배후관계를 써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최후의 협상은 술을 마셔가며 열 시간이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보냈다. 그러나 최후 협상의 공약이 허탕이 된지도 오랬다.

4.19(四⋅一九) 한 돌이 이틀 전인 지난 십칠(七)일이다. 하오 두(二)시경 종로이(二)가 <영보>빌딩 앞에서 나는 안(安)을 발견했다. 꿈이 아니었다. 「썬글라스」에 「레잉코트」를 입은 신사 안(安)은 빌딩 음달에서 꽃을 사가지고 얼굴을 돌리는 순간 나와 부딪혔다. 당황한 안(安)은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며 질주하는 차를 멈춰 집어탔다. 위기일발의 순간이다. 나도 지체 없이 두 팔을 벌리고 차를 불렀다. 차는 많은데 빈차가 없었다. 요행 차를 집어탔을 때는 안(安)의 차와는 이(二)백미터 거리였다. 운전수에 안(安)의 차를 추격하라고 고함쳤다. 차장을 통해 안(安)의 뒷등이 보이고 흘끔 뒤로 바라보는 옆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단성사」 앞을 건너려는데 교통차단 신호가 보인다. 차단이고 무엇이고 막 돌진하자 교통순경이 호각을 요란하게 분다. 더 속력을 놓았다.

종로오(五)가를 돌파할 무렵 안(安)은 다시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안(安)은 분명히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안(安)과는 중국서부터 아는 사이었다. 차는 청량리 쪽으로 달린다. 우리 차는 「크라숀」을 비상 사이렌처럼 울리며 잡도한 거리를 뚫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숭인동 파출소 앞을 지날 때는 간격 오(五)미터... 나는 차창으로 목과 손을 내밀고 「앞 차를 잡으라」고 소리쳤다. 교통순경의 호각소리가 요란하다.

파출소에서 삼(三)십미터도 못가 우리 차는 앞질러 가로막고야 말았다. 세 시간 차내에서 격론이 벌어진 후 안(安)은 고분고분 내 안내로 검찰청까지 갔다.

(백범 김구선생 살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제공 白凡金九先生殺害眞想糾明鬪爭委員會 提供)

 

(사진-백범 김구 선생(白凡金九先生)을 살해(殺害)한 안두희(安斗熙)가 김용희씨(金龍熙氏)에 발견(發見)되어 경찰(警察)에 끌려왔을 때의 모습이다. △표가 민족(民族)의 거성(巨星) 백범 선생(白凡 先生)을 살해(殺害)한 안(安)이다. 좌(左)는 김용희씨(金龍熙氏))

석달 굶으며 가마니 덮고 흉한 안두희를 이렇게 잡았다.

석달 굶으며 가마니 덮고 흉한 안두희를 이렇게 잡았다. [민족일보 이미지]
석달 굶으며 가마니 덮고 흉한 안두희를 이렇게 잡았다. [민족일보 이미지]

[민족일보] 1961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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