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인노회 대표의 발언에 이어서 녹화선도공작군의문사대책위 소속이라고 하는 사람의 발언이 있었다. 그는 자신도 녹화공작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의문사를 당한 열사의 친구라고 소개했다. 그가 녹화공작을 당했던 과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이야기했다. 대학 2학년 때 가두시위에 나갔다가 연행되었는데,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는 그대로 형사들이 군부대로 데려가서 거기서 바로 신병이 되었다고 한다. 신돌석씨가 이전에 듣기는 한 이야기지만 들을 때마다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이다. 시위하다 잡혔다고 해서 집에도 못 가고 그대로 군대로 끌려갔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병역의무가 형벌제도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리고는 일병 때 퇴계로에 있는 진양분실에 끌려갔다. 보안사는 녹화사업을 위해 과천과 이곳에 분실을 운영했다고 한다. 거기서 태어날 때부터 그 순간까지의 일들을 쓰게 만들었다. 대충 쓰려고 하면 주먹질, 발길질, 몽둥이가 날아왔다. 잠도 안 재우고 다시 쓰고 다시 쓰게 했다.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서 벌거벗은 것처럼 전부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자대로 간 뒤에도 걸핏하면 불렀고, 생각과 이념을 바꾸겠다고 말도 안 되는 교육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했다. 그리고는 휴가 나가라고 하면서 학교 가서 운동권 친구, 선후배들을 만나고 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들에게서 정보를 얻어오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였다. 그는 잠시 숨을 멈춘 뒤 그렇게 녹화공작의 대상이 된 사람은 대부분 일정 정도의 협조를 안 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랬을 것이다. 신돌석씨도 군대를 갔다 와서 알지만 군대에서 어떻게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같은 사병인 고참의 지시도 어길 수 없는데, 하물며 살인적인 고문을 일삼고 없는 간첩도 조작해서 만들어내는 보안사 같은 곳에서 집중적으로 강요하면 도리가 없지 않을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충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는 자신도 학교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서 술을 마신 뒤 만난 사람들을 이미 감옥에 간 사람, 군대에 간 사람, 운동 그만둔 사람들로 말하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물론 어느 정도는 고통을 당했지만 그러고 나면 그들도 더 이상 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김순호는 달랐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김순호의 보안사 관련 행적을 다루는 존안자료라는 것을 보면 적극적인 협조를 했다는 것이 드러난다고 한다. 그것은 김순호의 학교 후배들의 증언에서도 밝혀졌다. 자기가 속한 써클의 회원을 신입생까지 전부 밝히고, 그들이 무슨 책을 읽었는지까지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후배들이 구속되어서 조사를 받을 때 김순호에 대해서는 묻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미 김순호는 밀정의 길에 들어섰다고 보아야 한다.

발언자는 그것보다도 동료를 지키기 위해, 강압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김순호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여덟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끝까지 협조하지 않다가 고문 끝에 숨졌거나 아니면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이다. 고문 끝에 숨진 사람도 자살로 처리된다. 고문을 통한 프락치 활동 강요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은 군대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죽은 것으로 만들어진다. 발언자는 이런 사람들도 있었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해서 동료를 팔아먹고 그것도 모자라서 노동운동을 하면서 그 짓을 하고는 출세까지 한 인간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냐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녹화선도사업으로 군의문사를 당한 여덟 명의 열사를 차례차례 부르면서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따라서 부르라고 요청하였다. 이진래 열사, 정성희 열사, 이윤성 열사, 김두황 열사, 한영현 열사, 한희철 열사, 김용권 열사, 최우혁 열사 등 여덟 명이었다.

신돌석씨와 비슷한 시기에 군대에 있던 사람들인데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당시에는 까맣게 몰랐다. 자살은 종종 있었다. 소문으로는 고참들한테 맞다가 죽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이웃 중대에 데모하다가 온 대학생이 있는데 보안사가 심심하면 찾아오고 부르고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것도 남의 이야기로만 알았다. 데모는 무엇 때문에 하느냐고 생각했다. 그러다 녹화공작이란 걸 알게 된 것이 노동운동을 하게 되고, 1985년 말에 그 지역에서 의문사한 열사의 추모제에 참가하면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3주기밖에 안 됐을 때이니 의문사한 지 정말 얼마 안 된 시기의 일이었다. 그때는 의문사한 사람이 여섯 명이라고 했었다. 신돌석씨는 열사도 누군지 모르고, 자초지종도 몰랐지만, 한번 시위를 하다 구류를 살고 난 뒤, 뭐 싸울 일이 없나 하고 찾아나설 때였다. 마침 지역에서 군의문사 당한 열사에 대한 추모제를 한다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내용도 자세히 모르면서 참여했다. 열사가 다녔다는 성당에 오래 다니던 노동운동가에게서 짤막하게 들은 내용이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신돌석씨는 정말 황당한 일을 전두환이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추모제가 성당에서 있었는데 거기서 나오면서 경찰과 충돌해서 연행되어 가는 과정에 무수히 맞았기 때문에 더욱 그날 일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때 다른 사업장의 해고자였던 지금의 아내와 함께 유치장 생활을 하기도 했고, 그 안에서 단식투쟁도 했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가 녹화공작에 대해 또 듣게 된 것은 엉뚱하게도 중학교 동창 최준용한테서였다. 이 친구는 부동산 중개업을 했는데, 일찍부터 시작해서 돈을 좀 벌었다. 신돌석씨 또래들이 대체로 그렇듯 이 친구 역시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그런데 신돌석씨와는 희한한 악연으로 엮인 적이 있다. 이 친구가 군대 제대하고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던 때였다. 1986년쯤이었던 것 같다. 학생 출신 노동자들 때문에 홍역을 치른 공안당국과 기업들은 위장취업에 대한 조사를 삼엄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신분을 세탁해서 공장에 들어가겠다는 학생 출신들은 끝없이 생기던 때였다. 조직 차원에서 신분증을 구해야 할 판이었다. 노동자 출신인 신돌석씨가 그런 임무를 맡았다. 대학 출신들은 주위에 친구나 친척도 대부분 대학을 나왔다. 그럴 때 신돌석씨가 생각해 낸 친구가 최준용이었다. 말을 하고 빌릴까 하다가 아무래도 거절할 것 같아서 술을 잔뜩 먹이고 취했을 때 그의 지갑에서 몰래 빼내서 조직에 가지고 갔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공장에 들어간 친구가 얼마 안 돼서 당시 악법인 제3자개입금지로 구속되었다. 이 친구가 구속되면서도 최준용 행세를 했고, 동시에 최준용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당연히 문제가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준용 집에서 우유대리점을 경영했는데 직원으로 등록시켜 놓았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탈세 혐의까지 받게 되었다. 최준용은 합격이 취소되었을 뿐 아니라 경찰서 대공과에 가서 취조까지 받게 되었다. 물론 분실한 것이라고 끝까지 우겨서 금방 나오기는 하였다. 그리고 사실 최준용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는 상태였다.

최준용이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신돌석씨는 최준용을 찾아가서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욕이라도 들을 각오로 갔는데 희한하게도 ‘임마 그러면 그런다고 말을 해야지’라는 한마디만 하고는 딴소리만 했다. 오히려 불안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술이 많이 올랐을 때 마무리한다는 말이 이랬다.

나 데모한다는 놈들 진짜 싫어한다. 팔자 좋으니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대 가서 고참이 됐을 때 강제로 끌려온 놈을 만났다. 글쎄 이 친구가 몸무게가 48킬로였다. 왜 군대에 왔는지를 모르겠다. 나중에 조금 불기는 했지만, 그 몸으로 아등바등했다. 처음에는 좀 괴롭혔다. 얼차려도 많이 시켰고, 조금 때리기도 했다. 그런데 몸은 비실비실해도 애가 진국이더라. 게다가 내가 괴롭힐 틈도 없이 보안사 놈들이 데리고 가고, 갔다 오면 초죽음이 되어서 왔다. 그래서 내가 감싸주고 다른 놈들이 괴롭히지 못하게 했는데, 그것 때문에 보안사 놈들한테 경고를 받았다. 진짜 웃기는 새끼들 아니냐? 이건 뭐 국방의 의무를 가지고 사람을 괴롭히는 일에 쓰다니. 듣기로는 얘들 휴가 보내서 간첩짓 시켰다고 하더라. 이전에 하던 친구들 만나서 정보 가지고 오라는 거지. 그런 짓은 적어도 군대에서는 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 이번에도 보니까 진짜 황당하다. 내가 피해잔데 나더러 준 것 아니냐고 다그치는 거다. 정말 어이가 없다. 그래서 생각을 다시 해봤다. 데모하는 놈들도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하고 말이다.

결국 최준용은 공무원 시험에서는 불합격 처리되었고, 공무원에서 부동산중개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때는 젊은 사람이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 때였다. 그는 일찍 그 직업을 택해서 돈을 꽤 벌었다.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이후에도 가끔 보았는데 원래 보수적인데다가 돈까지 벌어서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진보적인 것을 무턱대고 싫어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고, 신돌석씨 만나면 활동비로 쓰라고 돈까지 쥐어 줄 정도가 되었다.

다음으로 최동 열사의 동생이 김순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는 시간이 있었다. 최동 열사라고 하면 신돌석씨도 귀동냥식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김순호의 1년 선배로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최동 열사의 집이 대학로 부근이었는데, 학교와 가까운 곳이라서 그런지 친구나 선후배들이 자주 놀러와서 자고 가곤 했다고 한다. 장사하러 새벽에 나가시던 어머니는 아침밥은 먹고 다녀야 한다면서 그 사람들 아침밥을 다 준비해 놓고 나가시곤 했다. 그때마다 김순호는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오빠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여러 번 봤는데 김순호는 최동 열사에게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곤 했다. 그러다가 최동 열사는 시위를 주도하여 감옥에 가고, 김순호는 군대에 끌려갔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학생 때 그랬듯이 함께 활동을 하였다. 선배인 최동 열사를 따라 김순호가 인노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얼마 안 되어서 인노회 사건이 터지고, 최동 열사가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되었다. 최동 열사는 인노회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인노회에서 공식적인 직책을 맡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때 그는 주로 노동현장에 취업해 있었다. 그런 그가 연행이 되었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김순호만이 알 수 있을 거라고 열사의 동생은 말했다. 연행되어서도 열사는 동지들에게 시간을 벌게 하기 위해 취조실 욕조에 머리를 부딪히는 자해를 하였다. 연행된 뒤 6일 만에 면회를 할 수 있었는데 머리 정수리 부근에 붕대를 붙이고 있었고, 피가 엉겨붙어 있었다고 한다. 옆에 있던 경찰관이 말하기를 자해를 해서 일곱 바늘 꿰맸다고 했단다. 그런 저항은 구치소로 옮겨서도 계속되었다. 칫솔로 목을 찔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공안경찰로부터 조직을 보호하려고 애쓰던 최동 열사를 좌절감에 빠지게 만든 것은 그들이 너무나도 소상히 자신들의 행적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열사의 동생은 말했다. 오빠가 연행될 때 당신은 왜 연행되지 않고, 어디에 가 있었는가? 오빠가 대공분실에서 고문에 시달릴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오빠가 구치소에 있을 때 당신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을 찾아갔다. 그때 오빠는 실어증에 걸리는 등 몹시 괴로워했는데 오히려 당신은 그런 오빠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빠를 그렇게 만든 자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만난 사람이 홍승상. 그는 오빠를 감찰하던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대공분실에서 만났을 때 정말 경악하셨다. 그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때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을 만들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그는 인노회 사건을 담당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찾아가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가? 게다가 아무나 그렇게 찾아가면 만나주는 곳이 아닌데 어떻게 만났을까? 결국 그를 인생의 스승이라고 칭하는 걸 보고 정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오빠가 고문후유증에 못 이겨서 분신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때 당신은 그 소식을 알았을 것이다. 오빠는 더 이상 싸울 힘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겠다는 심정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오빠가 원래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안다. 얼마나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갔던 사람인가? 그런데 그런 오빠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공안경찰이었고, 오빠가 가장 아꼈던 후배 중 하나였던 당신은 오빠를 그렇게 만든 그들을 찾아갔고,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았다. 당신은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추도식에도 30년이 넘도록 한번도 오지 않았다. 이제라도 오빠의 무덤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당시의 진실을 오빠에게, 또 당신 때문에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당신이 정말 인간이라면,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동생은 바람 부는 계절 가을이 되면 10월의 마지막 밤이 나오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는 오빠가 더욱 그리워진다는 말로 편지 낭독을 마쳤다.

김순호는 경찰에 특채된 뒤 고속승진을 하였고, 표창도 여러 번 받았다. 그가 했던 일은 얼마 전에 자신이 했던 일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잡아서 감옥에 넣는 일이었다. 국회에 출석해서 자기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대해 조금도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인노회는 이적단체였다고 말한다. 대법원이 재심에서 최근에 이적단체가 아니라고 해도 그는 자신의 생각만이 중요하다. 신돌석씨는 문득 묻고 싶었다. 그렇다면 김순호는 최동 열사가 이적행위를 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그렇게 배신을 했는가? 도대체 그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사람을 그렇게 망가뜨리고 배신하게 하고 밀정 노릇을 하게 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인가?

동생의 편지 낭독이 끝난 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어서 노래패 꽃다지가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김지하 시에 곡을 붙인 ‘새’라는 시였다. ‘저 청한 하늘 저 흰구름 왜 나를 울리나’로 시작하는 노래다. 김지하 시인이 감옥에서 지었다고 한다. 징역 경험이 있는 학생 출신들이 자주 불렀는데, 노래가 너무 처량해서 신돌석씨와 같이 일하는 노동자들은 한때 부르지 말자고 했었다. 그런데 왠지 이 집회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듯하였다. 감옥에 갇혔던 최동 열사가 불렀음직하다. 첫 번째 시위 주동으로 구속되었을 때와는 달리 두 번째 인노회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는 정말 눈물이 났을 것 같다. 가장 아끼는 후배의 배신으로 그 모든 것이 날아간다고 생각했을 때 실어증에 걸렸을 것도 같다. 가을밤은 깊어만 가고 집회는 생각보다 상당히 긴 시간 계속됐지만 자리를 뜨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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