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이전 글은 제29회 연재에서 다루었어야 하는 부분이다. 당시에 구한말의 교과서까지 쓰면 글이 너무 길어지고, 일부 자료는 서재에서 제대로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민족혼1’전을 준비하면서 확인하고 찾아냈기에 이번에는 구한말의 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역사관의 발아와 흐름을 다루려고 한다.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앞의 연재에서도 몇 차례 언급하였지만, 대한제국의 유서(類書, 百科事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는 1903년에 증수를 결정한 후, 1906년(광무10년) 3월5일 증수할 자료의 수집이 완료되어 찬집(纂輯)에 들어갔으며, 12월에 초고가 완성되어 교정 작업을 진행하였다. 최종 완성은 1907년 2월 11일이다. 교정 총재(校正總裁) 박제순(朴齊純)은 홍문관에 모여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오자가 없도록 대조, 교정한 다음 완성 원고본 250권 95책을 고종에게 올렸다. 이후 이 책은 1908년에 관판으로 발행한다.

『증보문헌비고』 편찬에 당대의 석학들이 참여, 1906년 직전까지 문헌상 보이는 상위고(象緯考) 여지고(輿地考) 제계고(帝系考) 예고(禮考) 악고(樂考) 병고(兵考) 형고(刑考) 전부고(田賦考) 재용고(財用考) 호구고(戶口考) 시적고(市糴考) 교빙고(交聘考) 선거고(選擧考) 학교고(學校考) 직관고(職官考) 예문고(藝文考) 등 16고로 분류 편찬한다.

이 책은 영조(英祖)대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의 기록을 참조하여 개화기 이후의 상황을 중점적으로 보충하였으므로, 개항조약문, 서기연호 사용, 전보, 전화, 철도, 8도에서 13도로의 개혁, 각종 신식학교의 소개, 육군법률의 소개, 신군제의 수록, 군악대, 관리의 봉급표, 중앙은행 조례 등 당대(當代)의 기록도 들어가 있다. 즉 『증보문헌비고』는 갑오개혁 이후의 자료들을 보완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분류한 책이다.

물론 이 책 『증보문헌비고』는 사대주의적 관점이 일부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연구에 참조할 사항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계몽주의자들과 민족사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더군다나 이 책의 편찬에 참여한 김교헌은 나철이 중광한 대종교의 제2대 대종사가 된다.

(31) 개화기와 대한제국의 역사 교과서들

가. 학부에서 역사 교과서를 편찬하기까지

『신정심상소학』, 1896년, 학부 편집국 편찬, 정리자본. 띄어쓰기대신 방점을 찍었다. 권2의 끝부분에 학부 편집국에서 개간한 도서 목록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신정심상소학』, 1896년, 학부 편집국 편찬, 정리자본. 띄어쓰기대신 방점을 찍었다. 권2의 끝부분에 학부 편집국에서 개간한 도서 목록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신정심상소학』, 1896년, 학부 편집국 편찬, 정리자본. 띄어쓰기대신 방점을 찍었다. 권2의 끝부분에 학부 편집국에서 개간한 도서 목록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신정심상소학』, 1896년, 학부 편집국 편찬, 정리자본. 띄어쓰기대신 방점을 찍었다. 권2의 끝부분에 학부 편집국에서 개간한 도서 목록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1908년 『증보문헌비고』가 간행되기 이전의 개화기에, 1894년(갑오년) 봄에 민중들 사이에서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그해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조선왕조에서는 갑오경장(甲午更張)을 추진한다. 갑오경장 당시 1895년 음력 4월 1일에 학무행정(學務行政)을 관장하던 중앙관청 학부(學部)가 설치되고, 학부 편집국장(學部編輯局長)에 3품 이경직(李庚稙)을 임명한다(『고종실록』 고종 32년4월1일조). 그런데 이경직은 이듬해(1896년) 음력 5월 5일자로 학부 편집국장과 성균관장직에서 동시에 물러난다(依願免本官, 『고종실록』 고종33년5월5일조).

그런데 이경직이 학부 편집국장에 있던 1895년 음력 7월에 『국민소학독본(國民小學讀本)』을 간행하는데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官撰) 교과서이다. 이 책의 제1과 「대조선국」에서 제41과 「성길사한2」에 이르기까지 모두 41과로 편성되어, 우리의 역사와 인물, 근대 생활과 지식, 서양 도시와 역사와 위인 등을 다루고 있다. 서양 문명의 수용과 침략적인 외세의 진출로 인해 복잡한 양상을 띠었던 당대 현실을 타개하려는 민족적 의지와 자주독립, 주권 수호의 시대적 사명감 등이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세종대왕」 기사에서는 세종대왕의 업적이 상세하게 나열하며, 「을지문덕」에서는 을지문덕의 뛰어난 지혜와 용맹으로 중국의 백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즉 이는 민족주의적 자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중국 중심의 모화역사관이 부정되고 점차 조선은 자주독립국가라는 의식이 분명해진 것이다.

또한 한자 전용을 피하고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함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했고 그것을 통하여 국민을 계몽하고자 하였다. 『국민소학독본』이 보여주는 이러한 계몽기의 민족 주체성은 『조선역사(朝鮮歷史)』와 『조선역대사략(朝鮮歷代史略)』으로 이어진다.

나. 학부가 편찬한 역사 교과서 『조선역대사략』 등 2종

『조선역대사략』, 1895년 맹동(孟冬, 음력10월), 3책. 학부 편집국 편찬, 운각인서체철활자본.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선역대사략』, 1895년 맹동(孟冬, 음력10월), 3책. 학부 편집국 편찬, 운각인서체철활자본.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국민소학독본』의 이러한 민족 주체성은 학부 편집국에서 같은 해(1895년) 음력 8월에 편찬‧발행한 초등교육용 『조선역사(朝鮮歷史)』 3권3책과 음력10월에 편찬‧발행한 고등교육용 『조선역대사략(朝鮮歷代史略)』 3권3책으로 이어진다. 이 두 책의 서술체재는 편년체 서술이지만, 『조선역사』는 국‧한문혼용체이고, 『조선역대사략』은 순한문체이다.

그런데 두 책의 내용 구성은 권1은 단군기(檀君紀) 기자기(箕子紀) 삼한(三韓: 마한·진한·변한) 위만조선(衛滿朝鮮) 4군(郡)2부(府) 삼국기(三國紀: 신라 고구려 백제), 권2는 고려기(高麗紀), 권3은 본조기(本朝紀: 즉 朝鮮紀)로 기본적으로는 동일하다.

전체의 내용은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에서 발췌하였고 단군-기자-삼한(마한)으로 체계화한 실학자의 사관이라 할 수 있는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을 계승하고 있다. 연대 표시는 조선왕조의 개국을 기원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조선역사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학부 편집국에서는 역사서술의 일반적 원칙을 제시하고 자료에 대한 비판적이며 고증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바, 이것은 이후에 간행된 국사교과서의 모범이 된다.

연대표시는 간지로 되어 있으나, 상단 여백에 조선의 개국을 기원으로 하는 연대를 함께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는 종래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조선왕조를 중심으로 한 한국사의 주체성을 말하여주고 있다. 그리고 해당 국왕의 역년(曆年)을 간지와 함께 표시하였다. 3권의 본조기는 502년 계사(癸巳) 30년, 즉 고종 30년(1893)까지로 끝맺고 있다. 이 책은 근대교육이 전개되는 시점에서 우리 역사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교과서일 뿐 아니라, 이 시기 최초의 한국사 통사(通史)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조선역대사략』 3권3책은 『조선역사』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학부에서 편찬했으면서도 내용을 보면 이 책은 『조선역사』의 증보판과도 같다. 우선 개항 이후의 역사는 『조선역사』와 같은 내용을 전재하고 있는 데에서 두 책은 연관성을 보이지만, 『조선역대사략』은 고대사 분야를 크게 늘렸다. 지면에서 전체적으로 각 시대가 다소 증면되어 있지만, 특히 삼국시대는 25장에서 41장으로 많이 늘어나 있다. 그것은 삼국을 신라정통설(新羅正統說)에서 벗어나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대폭 늘려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역사』에서는 범례가 없는데 『조선역대사략』에서는 「총목범례(總目法例)」를 두고 있다. 이 「범례」를 보면 단군을 정사로 보고, 역시 삼한정통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실세를 의식한 탓인지는 몰라도 명분상의 정통설은 「법례』에서 분명히 밝히면서도, 목차의 구성은 위만(衛滿)이나 사군이부(四郡二府)까지 모두 배열하였다.

서술의 내용에서도 『조선역사』는 단순한 인사 관계가 많았던 것과 달리, 『조선역대사략』은 단군‧기자의 정사(政事), 삼국관계와 후삼국관계, 정묘호란 등 역사사건이나 관계를 규명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그것은 「법례」에서 국가에 관계되는 것 외에는 싣지 않았다고 전제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회사나 문화사적 접근을 서술하지 않고, 또 정치사에서도 왕실 중심의 서술을 크게 탈피하지 못하였다. 병인양요를 역시 영국과의 관제로, 강화도조약을 구호(舊好)를 다시 강화했다고 하는 등 개항과 그 전후의 역사를 보는 시각이 『조선역사』와 같다. 이것은 대청 독립을 강조하기 위하여 고종을 대군주 폐하로 나타내면서도 구미(歐美)나 일본에 대하여는 자주성을 보이지 못하고 있던 갑오경장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국략사』, 학부 편집국 편찬, 1896년4월 학부편집국장 이경직의 발문이 실려 있다. 2책, 정리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만국략사』, 학부 편집국 편찬, 1896년4월 학부편집국장 이경직의 발문이 실려 있다. 2책, 정리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한편 이경직은 학부 편집국장에서 물러나기 직전인 1986년4월8일자로 학부 편집국에서 발행한 『만국략사』에 발문을 쓴다.

다. 학부에서 발행한 『동사집략』 등

『동사집략(東史輯略)』은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 『증보문헌비고』의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기 직전에 단군조선에서 고려말까지의 사실(史實)을 편년체로 엮어 편찬하여 1902년 학부에서 발행한 역사 교과서이다. 한지 양장본으로는 3책으로, 양지 양장본으로는 2책으로 제본하였다.

이 책은 교과서라고 해도 전문서의 수준과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이 나오기 이전의 우리나라 역사 교재로는, 앞서 언급한 학부 발행의 『조선역사(朝鮮歷史)』와 『조선역대사략(朝鮮歷代史略)』, 『조선약사(朝鮮略史)』 등이 있고, 역시 학부에서 1899년에 발행한 『동국역대사략(東國歷代史略)』과 역시 김택영이 편찬한 『대한역대사략(大韓歷代史略)』, 현채가 편찬한 『동국역사(東國歷史)』를 간행한 바 있다. 그러나 내용이 부실하고 틀린 곳도 여러 곳 있어 새로운 편찬이 요구되어 1902년에 『동사집략(東史輯略)』을 편찬하였다.

『동사집략』은 편년체로 고려시대까지의 통사를 한문으로 저술하였다. 상권은 신기선(申箕善)과 김가진(金嘉鎭)의 서문이 있고, 삼국시대까지 233면에 걸쳐 다루고 있다. 하권은 고려시대의 서술로서 301면인데 별도로 이재곤(李載崐) 이중하(李重夏) 김교헌(金敎獻)의 발문이 있다.

종전에 관찬한 교과서는 실학 사서의 내용을 전재 초록한 것이어서 독창적인 서술이 적었으나, 『동사집략』은 많은 사서를 재검하면서 독창적으로 역사서술을 본격화하고 있다. 종전에 학부에서 발행한 역사 교과서에는 저자를 밝히지 않았는데 이 책부터는 저자를 밝혀 사찬 사서의 길을 열었다. 이후 1905년부터는 사찬 사서가 대량으로 출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동사집략』은 내용 면에서 종전에 없던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단군조선에 대해서 황원(荒遠)하다는 것이다. 단군기사가 『삼국유사』에는 등재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소개되지 않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군을 부정한 하야시(林泰輔)의 『조선사 朝鮮史』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또 하나 고대사에서 『일본서기(日本書紀)』와 하야시의 『조선사』에서 주장하고 있는 임나 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그대로 서술하는 등, 일본 정한론파 학자들의 침탈사학을 수용하고 있다. 김택영은 그것을 과학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분석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책에는 없는 내용을 일본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고 수용한 것이다.

김택영은 당시 학부에서 현채(玄采)와 함께 역사 편찬을 책임지고 있었으므로 당대 역사학자로 제일의 인물로 손꼽히고 있었지만, 아직 일제의 침탈사학 즉 식민사학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일제의 식민사학이 국내에서 번지는데 결과적으로는 협력한 것이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정국사교과서가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김택영은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지자 일제를 피하여 일찌감치 중국으로 망명한다.

라. 대한국민교육회의 『대동역사략』

『대동역사략』, 1906년 6월, 대한국민교육회 발행. 유성준(兪星濬)의 저술이다. 위만과 한사군을 상고사 체계에서 제외시켰고, 개화기교과서의 삼한정통론를 따르면서 기자-마한, 마한-신라계승을 한층 강조하였다. 특히 임나일본부설을 취하지 않았던 것이 특징적이다. 이에 따라 국민교육회 편찬으로 나온 『대동역사략』 7권1책은 민족사관이 형성되는 시발점이라 할 수 있으나, 기자(箕子)를 극복하지는 못한 것이 아쉽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대동역사략』, 1906년 6월, 대한국민교육회 발행. 유성준(兪星濬)의 저술이다. 위만과 한사군을 상고사 체계에서 제외시켰고, 개화기교과서의 삼한정통론를 따르면서 기자-마한, 마한-신라계승을 한층 강조하였다. 특히 임나일본부설을 취하지 않았던 것이 특징적이다. 이에 따라 국민교육회 편찬으로 나온 『대동역사략』 7권1책은 민족사관이 형성되는 시발점이라 할 수 있으나, 기자(箕子)를 극복하지는 못한 것이 아쉽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대동역사략(大東歷史略)』 7권1책은 1906년 대한국민교육회에서 초등학교의 역사 교육을 위하여 편찬한 교과서이다. 편년체 저술로 국한문을 혼용하고 있다. 정식 서명은 ‘보통교과 대동역사략’이며, 단군조선에서 고려 말까지 국왕 중심의 사실을 간단하게 기록한 통사이다. 최경환(崔景煥)의 『대동역사(大東歷史, 1905) 2책와 정교(鄭喬)의 『대동역사(大東歷史, 1905)』 4책를 소학교 교재로 번역하여 재편집한 것이며, 고려사의 부분은 김택영의 『동국역대사략』(1899)과 『동사집략(東史輯略)』(1902)을 간추린 것으로 판단된다.

이 책의 초판본에는 저작자가 밝혀져 있지 않으나 1908년 4월에 발행된 박학서관 재판본은 유성준(兪星濬) 편술로 발행되었다. 유성준은 유길준의 동생으로 일본의 경응의숙(慶應義塾)에서 유학한 후 1904년 학부 학무국장과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국민교육회의 창립회원으로 교과서 편찬에 관여하였다.

1904년에 이준(李儁) 열사가 설립한 계몽운동단체인 대한국민교육회(大韓國民敎育會)는 국민사범학교와 몇 곳에 소학교도 설립해서 운영하였는데, 학교 교육에 필요한 국사 교재가 시급하였으므로 기존 교과서를 활용해 편집했다. 자서와 목차는 없으며, 표지에 이어 역대왕도(王都)표, 역대일람이 기록되어 있고, 이어서 본문으로 이루어진다.

본문은 1. 단군조선기, 2. 기자조선기, 3. 마한기, 4. 신라기 부 고구려 백제, 5. 신라기(문무왕~경순왕), 6. 고려기(태조~충열왕), 7. 고려기(충선왕~공양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무신집권기와 몽골침입기의 분량이 대체로 많다. 내용상으로는 위만과 한사군을 상고사 체계에서 제외시켰고, 개화기교과서의 삼한정통론를 따르면서 기자-마한, 마한-신라계승을 한층 강조하였다. 특히 임나일본부설을 취하지 않았던 것이 특징적이다. 이에 따라 국민교육회 편찬으로 나온 『대동역사략』 7권1책은 민족사관이 형성되는 시발점이라 할 수 있으나, 다만 기자(箕子)를 극복하지는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러나 『대동역사략』은 고대사 서술에서 민족 주체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그 의의가 크다. 즉 위만조선을 중심으로 삼한의 역사를 서술한 학부 발행의 교과서들과는 인식을 크게 달리한다. 바로 이러한 민족 주체성에 의하여 1910년 11월 일제의 민족의식말살정책에 따라 일제하 금서(禁書)로 포함된다.

마. 현채 사찬의 『동국사략』

『동국사략』, 현채(玄采, 1886~1925) 사찬(私撰), 1906년 초판본, 보성관 발행. 현채 역술의 『동국사략』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역사개설서’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동국사략』, 현채(玄采, 1886~1925) 사찬(私撰), 1906년 초판본, 보성관 발행. 현채 역술의 『동국사략』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역사개설서’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동국사략』 판권면, 현채(玄采) 사찬(私撰), 1907년 재판본, 현채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동국사략』 판권면, 현채(玄采) 사찬(私撰), 1907년 재판본, 현채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동국사략』, 현채(玄采) 사찬(私撰), 1908년 삼판본, 현채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동국사략』, 현채(玄采) 사찬(私撰), 1908년 삼판본, 현채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현채(玄采, 1886~1925) 사찬(私撰)의 『동국사략(東國史略)』 4권은 1906년6월에 초판(4권4책)이 발행되었고, 1907년10월에는 재판본(4권2책)을 1908년7월에는 3판본(4권2책)이 간행되었으나, 1909년5월5일자로 발매가 금지되었다. 초판본의 서명은 『동국사략』이고, 재판본은 『중등교과 동국사략』인 점으로 미루어 보면, 초판본을 낸 이후에 중등학교의 교과서로서 개제(改題)하였다. 금서로 지정된 이후 증보해 현채 원저(原著)로 1924년에 『동국제강(東國提綱)』이라는 제목으로 발간하였고, 현채 사후인 1928년에는 『반만년 조선역사』로 제목을 바꾸어 발간하였다.

현채 역술의 『동국사략』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역사개설서’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제29회 연재에서 「단군과 단군조선을 언급한 고서 및 고문헌」을 다루며 소개한 바 있으니, 앞서 쓴 글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바. 맺음말

학부에서 편찬 간행한 최초의 우리 역사교과서는 1895년에 간행된 『조선역사』이다. 같은 해 『조선역대사략』과 『조선약사』 등이 뒤를 이어 간행되었다. 『조선역사』가 간행한 이래로 1905년까지 출간된 역사 교과서는 국사 9종, 외국사 7종이다. 1895년 간행된 3종 교과서 외에 1899년에 『동국역대사략』, 『대한역대사략』, 『보통교과 동국사략』이 간행되어 있으며, 1902년 『동사집략』(김택영), 1905년 『대동역사』(최경환), 『대동역사략』(정교) 등을 학부에서 편찬 간행한다.

1895년에 발간된 국사 교과서는 각종 학교령의 공포에 따라 급박하게 편찬되어 내용이 소략하지만, 1899년에 간행된 교과서는 내용이 이전보다 상세하다. 특히 1905년에 발간된 교과서는 발해와 가야의 역사를 비교적 자세히 서술하고 사회사와 생활사 내지 문예사까지 접근하고 있다.

이들 교과서는 학교에서만 사용된 것은 아니고, 관보를 통해 일반 국민에게 광고해 널리 읽도록 했다. 역사 교과서는 국민의 애국심을 키우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중요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역사 교과서는 대부분 조선초기의 『동국통감』이나 조선후기의 『동사강목』 등 기존의 통사류를 요약 정리하거나 실학자들의 저서들을 그 저본으로 하여 편술하고 있다. 그 체재는 전통적인 편년체로 정리하였다. 이 시기 편찬된 모든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에 관한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고 다루고 있으며, 특히 단군이 우리의 시조임을 강조하고 있다. 고대사 인식은 단군―기자―마한으로 이어지는 삼한 정통론을 채택하고 있으나, 단군―기자―위만으로 체계화한 것도 있다. 단군의 건국을 강조한 것은 개화기와 구한말의 계몽주의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1905년을 전후해서는 학부에서는 역사 교과서를 편찬하지 않았으며, 개인이나 학회, 또는 애국 단체에서 다수의 역사 교과서를 편찬 및 간행한다. 이 시기에 간행된 많은 교과용 도서들은 일반인들의 교양 도서로도 널리 읽혔고, 1909년 이후 시행된 교과서 검정제도에 의해 통감부에 압수되거나 금서로 묶인다.

1905년 을사늑약에 따라 1906년 초에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된다. 통감부의 교육 정책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추구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억압하기 위해 민족사학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한편 교과서 검정제도를 실시하여 교육 내용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강화하였다. 즉 1908년 통감부는 ‘교과용 도서 검정 규정’을 발표해 학부에서 편찬한 것을 허용하고, 학부 편찬 교과서가 없을 경우에는 학부대신의 검정을 받은 교과용 도서나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은 교과용 도서를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학교령을 개정한 이후에는 교과용 도서에 대해 더욱 세밀한 사항까지 규정하여 통제하였다. 교과서를 포함한 모든 도서는 출간되기 전에 내부대신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고, 교과용 도서는 다시 학부의 검정과 인정 절차를 받아야 했다.

1906년부터 1910년 사이에 간행된 역사 교과서는 1906년 『동국사략』(현채), 『보통교과 대동역사략』(국민교육회), 『신정(新訂) 동국역사』(원영의․유근), 『중등교과 동국사략』이 있으며, 1908년 『대한력 상』(헐버트, 오성근), 『초등본국역사』(유근), 『대동역사략』(유성준), 『초등대한역사』(정인호), 『초등대한력사』(조종만), 1909년 『초등대동역사』(박정동), 『초등본국약사』(흥사단), 『초등본국역사』(안종화), 1910년 『신찬초등역사』(유근), 『국조사(國朝史)』(원영의) 등이 있다. 대체적으로 이 시기의 역사 교과서들에는 사료를 시대순으로 나열하는 편년체가 지양되고 분야별로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거나 인과관계를 적시하는 새로운 근대적 역사서술 체제가 등장하였다.

특히 현채의 『동국사략』은 왕조 중심의 시대구분을 배제하고 태고사, 상고사, 중고사, 근대사, 근세사 등의 근대적인 시대구분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단군-기자-마한-신라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채택하여 민족의 독립과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역사서술 방식에서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외침에 저항한 명장이나 역사상 위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술하여 민족의 독립심을 고취하는 등 민족의식은 투철하였지만,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을 내세우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 구한말의 역사책에 흐르는 주체적 변화의 움직임과 그 이후에 등장하는 대종교와 민족사학자들의 분투는, 변환하는 역사학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사. 군말

1906년(광무10년) 3월5일 『증보문헌비고』를 증수할 자료 수집을 완료하고 12월에 초고가 완성되어 교정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1895년 학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들도 당연하게도 이 자료 수집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규원서화』 『단기고사』 등등은 그 시기에 아직 출현지지 않았으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저술되지 않았으므로 포함될 수 없었다. 즉 제1기 민족사학자들은 위서라든가 전거가 불분명한 문헌에 기대지 않았다.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볼 때 여러 부분에서 극복하여야 할 점이 있지만, 그런대로 『증보문헌비고』에서 집대성한 우리나라 자료를 우선으로 하고, 또한 중국의 정사(正史)와 고문헌을 참고하며 연구하였다. 자신의 의도에 맞게 황당한 문헌을 만들어 자신의 주의 주장에 근거로 억지를 부리는 정신적 병폐는 역사와 문헌 및 사실을 왜곡하는 심각한 망동이다.

조선이 마지막 시기인 1895년부터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1910년 사이에 편찬된 역사교과서를 보면 민족사관의 출현을 이해하게 되며, 우리 민족사학의 발전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일개인이 만들어 낸 어느 날 ‘갑툭튀’한 황당한 문건으로 간고(艱苦)한 시절에 민족사관의 탄생과 발전을 폄훼하고 짓밟는 행위는, 마치 해방후에도 계속 득세한 친일파 후손들이 ‘김구’같은 독립운동가는 건국공로자가 아니라고 모략해대는 행위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진정한 역사광복이란 황당사관의 있지도 않은 유령을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민족사관의 본연한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 민세 안재홍, 산운 장도빈, 애류 권덕규 등등이 주창한 역사적 관점을 공통으로 하는 길로 나가야 한다. 황당사관은 절대로 민족사관도 민족사관의 아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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