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철망 앞에 선 필자. [사진제공-류승완]
DMZ 철망 앞에 선 필자. [사진제공-류승완]

24일 파주 임진각에서는 한반도에 정전과 평화를 기원하는 ′경기여성 DMZ 평화걷기′ 행사가 열렸다. 2015년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세계여성의 날′에 세계 여성평화 운동가들이 북에서 남으로 비무장지대를 질러 걸었다. 이날 행사는 이를 이어가려는 뜻이 담겨 있다.
 
′군축′은 국제정치가 얽힌 큰 범주로 서민들과는 거리가 있지만 ′평화′는 나라 안에서, 일상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결이다. 크게 보면 아래로부터의 평화 물결이 군축을 이끌어내는 더 큰 힘이다. 

군비란 결국 전쟁 준비이고 무기 쌓아 놓고 훈련하는 것인데 이는 군사적 긴장을 빌미로 엄청난 돈을 낭비하는 경제의 바이러스다. 군사적 긴장을 평화로 바꾸는 일은 결국 군축의 전제조건이 된다. 일상의 평화를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만들어 군비축소에 이르기까지는 여러 길이 있다. 그중 하나가 분단으로 인한 학문·예술의 끊김을 넘어서는 일이다.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실내 문인들 전시물. [사진제공-류승완]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실내 문인들 전시물. [사진제공-류승완]

이날 걷기대회 행사장 옆에 있는 통일부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1층에는 ‘예술, 전쟁을 겪다’라는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DMZ의 평화·군축과 납북의 아픔이라는 주제가 같이 나오는 건 조금은 불협화음인 듯한 이중주였다. 납북 기획전시 어린이 체험활동 자료에 나오는 말은 인상 깊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우리 할아버지. 1950년 6·25전쟁으로 납북되신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요′

우리 세대도 학창시절 늘 북한 공산군에게 끌려간 사람들과 북한 공산군을 따라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다. ′납북과 월북′ 사이에는 큰 심연이 놓여 있었다. 

여기서 떠오르는 이미지 하나는 성북동 수연산방이라는 찻집이다. 이 집은 이름난 소설가 상허 이태준의 서재였다. 1980년대 말 월북문인 해금 전까지 쓸쓸해 보였던 이 집은 해금 뒤로 방송극 촬영 무대가 되는 등 명소가 됐다. 철원이 고향인 이태준은 납북과 월북 사이에서 평가가 엇갈리던 문인이었다.

천태산인 김태준이 위원장을 맡은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 이태준. 그는 북에서도 결국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고 어떤 형태로 숙청되었다. 그의 운명은 남과 북 사이에 놓인 양심적 지식인의 전형일 것이다. 남과 북 사이, 남북 안에서 평화체제의 주춧돌을 놓으려면 해방공간과 6·25 전쟁 앞뒤로 남북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해방공간에서 백가쟁명 백화제방으로 피어난 새나라 건설의 꿈과 설계도는 지금은 사라졌다. 그 대부분이 남에서 북으로 올라간 이른바 월북지식인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 들어 있었다. 문학을 비롯해 사회·경제·역사에서부터 과학기술과 예술계에 이르기까지 남한에서 진보적 인사들뿐만 아니라 평소 양식 있는 지식인들이 대거 북으로 가버렸다. 

사학자 정칠성의 일기나 김수영의 시뿐만 아니라 미당 서정주도 토로했던 사실이다. 80년대 초반 미당은 집으로 찾아온 동국대 제자들에게 ″진짜 시인들은 다 북으로 가버려서 내가 이런 대접을 받는다″고 말했다 한다. 이 학술·문화의 단절이 분단체제 영속화를 푸는 것, 나아가 평화체제를 만드는 일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해방공간의 서울은 그야말로 해방공간이었다. 학자들과 문화·예술인들은 민족전통을 복구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데 열정을 기울였다. ′민족문화건설론′으로 표현되는 이 시대 흐름은 조선공산당의 ′민족문화건설에 관한 테제′에 집약되어 있다. 이 테제 집필자는 김태준으로 추정된다. 나라에서 으뜸가는 국문학자이자 한학자이면서 경성꼼그룹 인민전선부장이었던 천태산인 김태준은 해방 직전 연안으로 탈출했다가 돌아와 경성대학 직선총장에 선출됐다. 

미군정은 이런 김태준이 총장인 경성대학을 용인할 수 없었고 국립서울대설립을 밀어 붙였다. 이 과정에서 경성대학 이공학부장 도상록은 횡령 누명을 쓰자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이 함흥인 그는 월북이 아니라 귀향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조선 제일의 이론물리학자인 그는 북에서 김일성대학 물리학과에 오래 재직하면서 북의 핵개발을 이끌었다. 

다음 문제는 ′민족문화건설에 관한 테제′를 이끌었던 남로당 지도급 인사들이 이른바 ′미제간첩′이라 하여 정치적으로 꺾인 사건이다. 그들과 함께 해방 전후 고투 끝에 이룬 여러 분야의 성과들도 대개 묻히고 말았다.
 

한반도 분단을 짐짓 모르는 척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 줄기. [사진제공-류승완]
한반도 분단을 짐짓 모르는 척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 줄기. [사진제공-류승완]

′납북·월북·귀향 그리고 미제간첩′ 
이 사이에는 분명히 정치뿐만 아니라 학술 안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크레바스가 있다. 그러면서도 정전 뒤로 지금껏 남북 양쪽 모두에서 이 문제를 덮어 왔다. 이 메울 수 없는 큰 단락은 분단체제 안에서 내면화·구조화해 있다.
 
남북관계에서 평화와 긴장은 국제정세에 따라 길항한다. 남과 북 사이 그리고 남한 안에서 사회문화 밑바닥에 있는 문제들을 직시하고 해결해 나갈 때 민족 동질성 회복이나 상생적 통일논의가 가능하다. 해방과 함께 격정적으로 터져 나왔던 새 나라 건설의 꿈은 해방공간에서 르네상스를 이루었으나 6·25전쟁에서 두 번 꺾이고 말았다. 첫째는 남한에서 ′빨갱이′라는 묻혀짐이요, 둘째는 북에서 ′미제간첩′이라는 묻혀짐이다.

두 분단 권력이 억지로 감겨온 한쪽 눈을 뜨고 보면 학문 권력으로 포장되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어온 남북의 관제 이데올로기가 드러난다. 이 말이 그저 단순한 양비론은 아니다. 설혹 70년 전의 누군가가 빨갱이고 미제간첩이었다 할지라도 현대사회에서 그 학문과 예술은 재평가하고 복권하여야 마땅하다. 하물며 남북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남한 사회 안에서의 갈등을 풀기 위해 더욱 선행하여야 할 과제다.
 
항일전쟁기와 해방공간에서 새 나라 건설을 꿈꾸었던 사람들. 비록 ′그들의 혁명과 정치′는 꺽였지만 그 학술과 문예는 되살려야 한다. 이는 일상의 평화운동을 평화체제구축과 군축의 큰 흐름으로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이다.

 

류승완 박사 약력과 저서

류승완 박사는?
성균관대학교 유학과(儒學科) 마침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중국철학 전공 석사 마침
입학 후 23년 만에 박사학위 받음
학위 취득 후 중국 철학사 강의
현재 동아시아 사회주의와 한중 근현대사상 교류 연구 중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및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강사 해직 후 연구와 복직 투쟁 병행 중
     
류승완 박사는 그 동안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며
1999년 북한 ′어린이 돕기′ 백두대간 종주 
2006년 전국 해안선 도보 일주
2008년 전국 강 따라 도보 순례
20210 일본 시고쿠(四国) 도보 순례 참여

저서 <이념형 사회주의> 2010년 문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
2017년 <사람의 문학> 추천으로 시인 등단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