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용산역 광장에 도착했을 때 집회는 이미 시작되었다. 10분 정도 지난 시각이었다. 오늘 집회는 ‘김순호 파면, 녹화공작 진상규명 국민행동’이 주최하는 집회이고, 집회 제목도 연대조직의 명칭과 같이 ‘밀정 의혹 김순호 파면, 녹화공작 진상규명 범국민대회’였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서 여러 가지 정책이 오락가락하였지만, 일관되게 추진하는 것이 있다면 권력기관에 대한 장악 시도이었고,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공격이었다. 사람들은 이 정부가 그것만큼 민생이나 외교 문제에 일관성을 보인다면 대단히 훌륭한 성과를 낼 것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권력기관 장악 중 대표적인 것이 경찰 장악이었다. 경찰은 6월항쟁 이후 1991년부터 독립외청인 경찰청을 두어 경찰위원회의 감독을 받게 하고, 2021년부터는 시도지방경찰을 분리하여 경찰위원회를 국가경찰위원회로 하는 대신 지방경찰청은 지방자치단체 소속의 시도자치경찰위원회의 감독을 받게 함으로써, 그 이전에 치안본부가 내무부의 직접 통제하에 있던 것과는 달리 형식적으로는 정권의 뜻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용산 참사, 쌍용자동차노조파업에 대한 폭력적 진압, 백남기 농민 물대포 직사 등에서 보듯 언제 경찰이 정권에 독립적인 적이 있었냐는 비판적 시각도 없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이 점차적으로 경찰을 순치시켜 왔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정권이 폭력적 진압의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때에 경찰은 과거 같이 날뛰지는 않았다. 문재인 정부하에서 그것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는데, 다만 사드 배치 반대 투쟁이 벌어지는 성주 소성리만은 이런 점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마저 없이 경찰이 정권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다면 그 결과가 어떨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행정안전부 내에 경찰국이라는 조직을 신설해서 경찰을 직접적인 통제하에 두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이는 성고문, 물고문, 전기고문 등으로 상징되던 과거 경찰에 대한 반성으로 취한 최소한의 조치를 다시 되돌리려는 반역사적, 반민주적 퇴행인 것이다.

그 과정 또한 반헌법적이고, 탈법적이었다. 정부조직의 신설은 법률의 제정, 개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므로 입법부의 권한이다. 그런데 입법부와는 한마디 논의도 없이 시행령으로 정부조직을 신설하였다. 그래서 삼권분립을 무시하는 반헌법적인 폭거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경찰국 신설은 당사자인 경찰들에게도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사상 처음으로 일선 경찰서장들이 회의를 열어 경찰청 신설에 대한 반대 의견을 모았다. 이에 대해 행정안정부 장관은 ‘하나회의 12. 12쿠데타’라는 등 격렬한 용어를 써가며 비판했다. 사실 지금 행정안전부 장관이 된 사람이 12. 12를 쿠데타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좀 의아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12. 12가 국민들에게 보편적으로 쿠데타로 인식되는 것은 이제 확실해진 모양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경찰서장 회의를 주도한 총경 한 사람을 직위해제하는 대응을 보였다. 일선 경찰들도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이어서 개최를 예고했던 경감·경위급 현장팀장회의를 14만 전체 경찰회의로 확대할 것이라고 예고를 하면서 새 정부와 경찰의 대립이 일촉즉발이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전체 경찰회의를 주최하겠다는 측이 회의를 취소하면서 일단 경찰국 신설에 대한 경찰 내부 반발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사실 처음부터 경찰이 정권을 상대로 대립각을 세우기는 힘든 일이었다. 경찰의 투쟁을 적극 지지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실망감을 나타냈고, 경찰이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냉소적인 시각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신설되는 경찰국의 초대 국장에 밀정 의혹을 받고 있는 김순호가 임명됨으로써 경찰국 신설을 둘러싼 갈등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그가 1980년대 초부터 전두환 정권이 자행한 이른바 ‘녹화공작’을 받을 때에 이미 밀정이 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지금까지 과거사위원회 차원에서만 다루어지던 ‘녹화선도공작’이란 것이 본격적으로 이슈로 떠오르게 되었다. 경찰국 신설을 추진할 때부터 많은 인권단체, 민주화운동관련단체 들이 기자회견도 하고, 집회도 하면서 항의를 하였다. 그러다가 문제의 초점이 신임 경찰국장의 밀정 의혹과 녹화공작진상규명으로 옮겨지면서 기자회견과 집회 등이 잇따르고, 드디어 ‘김순호 파면, 녹화공작 진상규명 국민행동’이라고 하는 긴 이름을 가진 연대조직이 만들어졌다. 이 조직은 순식간에 227개 단체가 참여하였고, 이후에도 계속 참여단체 늘어났다. 사실 신돌석씨는 경찰국 신설을 표방할 때부터 그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돌석씨 주위의 사람들은 대의에는 공감하면서도 선뜻 나서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문제가 밀정의혹과 녹화공작으로 옮아가자 신돌석씨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싸워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늘 집회는 그래서 참가하게 된 것이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가 집회 장소에 도착했을 때 어느 인권변호사가 발언을 하고 있었다. 경찰국 신설이나 검찰 수사권 확대를 시행령에 의해 실시하는 것의 위헌적 성격에 대해 이야기한 뒤, 김순호가 경찰에 특채된 이후에도 절차상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경찰에 신규 채용될 때 경장까지는 누구나 중앙경찰학교에서 6개월 동안 신임의무교육을 받게 되어 있는데 그는 그것마저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통상 승진하는 데 걸린 시간을 훨씬 앞당겨서 초고속으로 승진하더니 드디어 치안감이 되고, 초대 경찰국장까지 된 것이다. 변호사는 이른바 녹화선도사업의 위헌성과 탈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아무런 법률적 근거도 없이 인신을 구속하고, 프락치 활동을 강요했다는 것은 공소시효가 다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규명되어야 할 문제임을 강조하였다.

변호사에 이어서 인천부천노동자회(인노회)의 대표였던 사람이 나와서 발언을 하였다. 신돌석씨가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학생 출신 노동자로서 긴급조치 때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뒤 일찍부터 노동현장에 들어가서 활동하였다. 신돌석씨와 같은 공장에서 만나서 노동운동을 알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는 조철구와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라서 신돌석씨도 만나본 적이 여러 번 있었고,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운협)가 만들어졌을 때는 잠시지만 함께 일을 한 적도 있었다. 노동현장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학생출신이라는 티가 별로 나지 않는 사람이었고, 운동이론에도 상당히 깊이가 있다고 느껴졌다. 그런 그가 인노회 사건으로 구속되고 나온 이후에는 활동의 영역이 상당히 축소되었다. 안 드러나는 곳에서 어떻게 했는지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드러나는 데에서는 그렇게 보였다. 얼마 전 기자회견장에서 만났을 때 끝난 뒤 점심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이 사건이 자신들에게는 엄청난 굴레가 되었다고 말하였다. 도대체 왜 자신들이 그렇게 일찍, 그렇게 완전히 털려야 했는지, 과연 이런 상태에서 활동을 지속해도 좋을지 모르겠다는 무력감이 사건 이후에 계속 들었다고 하였다.

인노회는 김순호가 군대를 제대한 뒤 노동운동을 한다고 들어갔고, 결국 그의 밀고로 와해되었다고 의심이 되는 조직이다. 인노회 대표는 김순호의 경찰 특채와 승진의 절차도 문제이지만 사실 그가 어떻게 해서 경찰이 되었는지도 의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1989년 이른바 인노회 사건 때 돌연 사라졌다. 몇 달 동안 조직원들이 그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조직원들이 하나 둘 검거되기 시작하고, 특히 그가 책임자였던 부천지구에서 조직이 완전히 드러났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경찰에 특채되었다. 그것을 통해 볼 때 그가 과연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서 들어왔는지도 확인이 필요한 점이라고 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인노회가 주사파라서 탈퇴했다고 말했는데, 인노회는 재심을 통해 이적단체가 아니라는 판결을 받았고, 당시에도 대표인 자신이 2년 형을 받을 정도인 대중조직인데 무슨 주사파 조직이냐고 반문하였다. 사실 이념 때문에 전향을 했다는 자들은 많다. 자기가 활동하던 조직이 지닌 이념에 회의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 자체는 그의 자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재정권의 품에 안겨서 동료들을 밀고한다는 것은 용서가 될 수 없는 일이다. 김순호가 조직의 이념에 회의가 들었다면 다른 이념이 있는 활동을 찾거나, 아니면 활동을 중지하고, 평범하게 살면 되는 일이다. 조직의 이념에 회의가 들어서 조직을 수사하는 공안경찰을 찾아갔다는 것을 어찌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동료들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신돌석씨는 인노회를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때를 전후해서 많은 노동운동조직들이 검거가 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인노회는 당시에 PMO라는 조직노선이 나오면서 그에 걸맞은 노동자대중조직으로 결성된 것으로 알고 있다. 1980년대 초에 있었던 전국민주노동자연맹과 같은 비밀조직과 달리 반공개활동을 하던 조직은 1985년에 서울노동운동연합이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그때 인천에서도 비슷한 조직이 생겨서 신돌석씨와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은 그 조직들을 서인노라고 불렀다. 이때 나온 조직노선이 MPO였다. 대중정치조직이라고 하였다. 이 조직노선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사실 신돌석씨는 자세한 내막을 잘 모른다. 신돌석씨 지역에서도 해고자들 중심으로 생존권확보투쟁위원회(생투위)라는 것을 만들었고, 안산, 수원 등에서도 유사한 조직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대부분 이 조직들은 공안기관의 탄압으로 와해되거나 활동 중지상태에 들어갔다. 아니면 다른 조직으로 전환되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6월항쟁을 전후해서 노동운동단체 또는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수도권에서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가장 활발한 조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들과는 노선을 달리하면서 대중조직의 측면이 좀더 강조된 조직노선이 아마도 PMO였던 것 같다. PMO는 정치적 대중조직이란 말의 약자이다. 그리하여 비슷한 시기인 1988년 경에 인천, 부천, 안양, 안산 등지에서 이러한 조직들이 여럿 생겨났다. 그런데 그 중 가장 먼저 인노회가 탄압을 받았다. 1989년 2월에 갑자기 조직원들 여럿이 검거되었다가 영장이 기각되어서 풀려난 일이 있었다. 이후 4월부터 검거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는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다. 신돌석씨 기억으로 당시 노태우 정권의 노동운동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은 대체로 1989년부터 시작되었다. 1988년에 있었던 올림픽 때문에 탄압을 다소 무디게 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 해는 전해의 6월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대대적인 탄압은 어려웠다. 그러나 다음 해로 넘어가면서 어느 정도 탄압의 전열을 정비한 노태우 정권은 군사독재의 연장이라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노동운동, 학생운동을 좌경세력으로 지칭하고 색출하겠다는 등의 용어를 써가면서 탄압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검찰총장으로 탄압을 진두지휘한 자가 바로 김기춘이다. 그들의 탄압은 1990년 10월의 이른바 ‘범죄와의 전쟁’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폭압 속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신돌석씨가 속해 있던 조직도 이때 침탈을 받았다. 그런데 인노회는 이러한 대대적 탄압이 있기 훨씬 전부터 당했다. 당시의 다른 노동운동조직들과는 달리 일찍 침탈을 받은 것이다. 당사자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들이 정치적 대중조직이라고 하지만, 그 ‘정치적’이라는 것이 전두환 노태우 구속을 요구하는 투쟁 등이었고, 노동운동탄압 규탄 같은 것이었다. 그 외는 생존권투쟁 지원활동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신돌석씨가 함께 활동해 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안다. 신돌석씨 지역에서도 당시 노동자투쟁연합(투련)을 결성해서 노동자들이 정치투쟁에 나서게 하는 활동을 하였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생존권투쟁지원활동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들이 한 지역을 대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보다는 노동운동단체협의회(노운협)를 꾸려서 공동으로 대응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노동운동은 지역의 노조협의회 혹은 노조연합이 한 축을 이루고, 노동운동단체들의 연대체인 노운협이 한 축을 이루었다. 노조연대조직은 전노협으로 모였고, 단체연대조직은 전노운협으로 모였다. 당시에는 노조와 단체가 노동운동의 두 축을 이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구분은 웃기는 것이었다. 노동조합법에서 노동조합은 ‘단체’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도 노동조합이 아닌 ‘단체’라는 것이 노동운동의 한 축을 이룬다는 것은, 그만큼 노동조합 결성이나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인노회도 이런 점에서 일종의 노동운동단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중조직을 표방하고, 공개활동을 주로 하는 인노회가 누구보다 먼저 침탈을 당한 것은, 그만큼 공안경찰이 이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탄압을 하기 전부터 인노회를 집중적으로 치게 되었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그것은 내부에 공안경찰과 내통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그 사람이 김순호일 거라고 당사자들은 그때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다.

인노회는 부평, 주안, 부천의 세 지구로 나누어 활동을 하였고, 각 지역에 여러 분회가 있었다고 한다. 부천의 지구 책임자가 김순호였다. 그런데 당시에 부천에서 분회 책임자였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치안본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을 때 그들이 부천지구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더라는 것이다. 대중조직이고 공개적인 활동을 위주로 하지만 공안경찰의 침탈이 언제라도 있는, 군사독재가 연장되던 시기였으므로, 조직 내부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최대한 서로 모르게 했던 것이 당시 노동운동조직의 관행이었고, 인노회도 그랬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때 같이 조사를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다른 지구 사람들이라서 부천지구에 대해 소상히 알 수가 없고, 분회장인 자신도 모르는 것을 상세히 안다면 이것은 김순호가 알린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구책임자인 김순호는 연행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수사과정에서 김순호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도 않았다. 김순호가 지구책임자로 있던 부천의 한 분회를 맡았다는 사람이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오자마자 김순호를 만나서 자초지종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김순호의 누나 집에 찾아가서 만났는데 그는 왜 여기 왔냐는 식으로 대했다고 한다. 그 뒤로는 그를 만나지 않았는데 그가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경찰에 특채되었고, 그것도 자신들을 조사하던 치안본부 대공3과에서 공안업무를 하는 경찰이 되었다는 사실에 정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신돌석씨는 이런 이야기는 정말 일제강점기나 해방정국에서나 있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친일잔재가 청산이 안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것까지 그대로 물려받아서 지난 70년 이상을 계속되어 왔다는 것이, 그것도 신돌석씨와 같은 세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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