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층


 
「암살자」 배출의 소지

<불체포⋅불처벌의 특혜>

 

4282년 6월 26일 ?시3) 34분-돌연 경교장에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 민족의 거성, 민족의 영웅 백범선생은 그 흉탄에 쓰러졌다. 총을 쏜 젊은 포병 소위 안두희는 현장에서 붙잡혔다.

이 비보를 들은 온 겨레의 가슴은 분노로 가득 찼고 삼천리 방방곡곡은 슬픔으로 뒤덮였다. 암살범 안두희는 당국에 의하여 어느 틈엔가 한독당의 비밀당원으로 급조되었다. 

「배후를 밝히라」는 겨레의 노호는 충천했건만 이승만의 충견들은 적반하장으로 무고한 김학규(한독당 간부)씨 등 수명을 암살공모자로 날조해 내어 「김구씨의 반민족적 노선에 격분한 당원들의 의거」라고 뻔뻔스럽게 발표했다. 안두희는 군법회의서 종신징역을 받고 복역했다.

그러나 6⋅25사변이 터진 얼마 후 어느 사이엔지 안두희는 육군대령까지 승진하여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게 되었다.

더욱이 후안무치하게도 안두희는 「시역자의 수기」4) 라는 책까지 내어 어디까지나 「국가에 반역한 김구」씨를 살해했다고 자기 행위를 스스로 영웅화하였다.

또다시 겨레의 분통은 터졌다.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느냐, 이승만의 명령으로 형의 집행정지를 받고 석방되어 재복무의 문이 열려 파격적 승진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처 날뛰는 독재자의 횡포는 막을 길이 없었고 또다시 겨레는 가슴속에서 끓어 넘치는 분노를 달래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독재의 성은 무너지고 민권과 민주주의의 새날은 밝았다. 

4⋅19직후, 젊은 정치인 고정훈씨의 <법살>과 더불어 김구씨를 살해한 장본인으로서 이승만, 신성모 등을 고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 닷새후에 단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못하고 온 장안이 잠든 첫 새벽에 비행기를 타고 영영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신성모도 수일후 까닭모를 급사를 하였다. 

다시금 김구선생암살사건진상규명위는 하수인 안두희 일당을 고발했다. 사직당국도 정신을 차렸는지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여 안두희의 체포령을 내렸으나 재빨리 안은 어디론지 종적을 감추었다. 경찰은 이렇다 할 활동도 보이지 않은 채 이미 안은 일본 등지로 도망갔으리라는 단정을 내렸다. 일년 가까운 세월은 흘렀다.

그 안두희가 십일 전 백서의 서울 한복판에서 김구 선생의 옛 부하에게 붙잡혔다. 분명히 경찰이 못 잡은 것이 아니라 안 잡으려 했다는 엄연한 사실은 드러났다. 이번에야 말로 민족과 역사의 이름으로 안두희 일당과 그 배후관계자들이 처단되지 않고서는 배겨내지 못하리라고 많은 사람들은 믿었었다. 

그러나 또다시 이 겨레는 권력자의 우롱을 받아야만 했다. 정부는 안을 호화로운 「호텔」에 열흘간이나 잘 모셔두었다가 이제 와서는 「일사부재리원칙」이니 다른 혐의가 없느니 하는 구실로 석방을 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일을 돌아보고 오늘을 바라보니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너무도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다.

요모조모로 국민을 괴롭히지 말라고 설정된 「일사부재리원칙」을 그래 민족의 지도자를 무참하게 학살한 암살범과 그 배후도당들을 구출키 위해 써먹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왜 <장부통령저격사건>은 4⋅19이후 일사부재리원칙을 어겨 전면적인 재조사, 재처벌을 감행했단 말인가. 

법은 만민 앞에 평등한 것이거늘 어떤 사람들은 아무 죄도 없이 단지 옳은 일과 옳은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데모」에 참가했다는 것만으로 보름씩이나, 한 달씩이나 구속했다가 석방하기도 하고 기소도 하면서도, 이 천인공노할 민족과 역사의 반역자들은 구속은커녕 끝끝내 허울 좋은 법의 방패로 감싸주어야만 하는가. 제2공화국의 「법의 단층」은 이다지도 다기다양한 것인가.

위정자에게 물어보자. 그래 종신징역수를 정당한 이유없이 형의 집행정지를 하고 불법으로 군무에 복역케 한 죄- 무고한 한독당원들을 공범자로 몰았던 그 독재의 주구들이 저지른 무고의 죄- 지난날 이승만의 품안에 숨어 단죄를 모면한 배후조종자들의 살인교준의 죄- 이것을 밝혀내는 것이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난단 말인가? 

일사부재리란 어떤 정당한 처리를 전제로 하는 것이어늘 언제 어느 때 그 「처리」가 있었단 말인가?

바야흐로 겨레의 함성은 드높아가고 있다. 언제고 반드시 밝혀질 죄악을 뒤덮어 씻어 뭉개려는 무리들은, 그들 역시 새로운 공범자의 낙인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똑똑히 안다.

안두희가 버젓이 서울거리를 활보하다가 민간인의 손에 잡혀 사직에 인도되었다는 사실은 당국이 그를 잡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세력층에 의하여 그의 신변이 충분한 보장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또한 그를 석방하고 배후관계수사를 하지 않으려는 이면에는 그 모든 음모사실이 백일하에 폭로됨으로써 많은 부류의 <권력의 독종>들이 발본색원이 될 것을 저어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을-

더 나아가 이런 <암살자>들을 잡지 않고 처벌하지 않으려는 것은, 또 어느 때든지 필요에 따라 새로운 암살자를 배출시킬 소지를 마련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어렵다.

더욱 놀랍고 서글픈 사실은 이렇듯 무서운 반민족적, 반민주적 처사가 실현되려는 마당에 정치인들은 너무도 무관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아! 언제나 이 땅에도 「정」과 「의」가 제자리에 서게 되고 참된 민주주의의 태양은 비칠 것인가?

(백설령)

 


1)  기사의 해당 글자가 확인이 안 되지만, 암살 시간은 12시 36분으로 알려져 있다.(백범기념사업회)  

2)  안두희 수기 「弑逆의 苦憫」, 학예사, 1955.

3)  기사의 해당 글자가 확인이 안 되지만, 암살 시간은 12시 36분으로 알려져 있다.(백범기념사업회)  

4)  안두희 수기 「시역의 고민」, 학예사, 1955.

 

단층

단층 [민족일보 이미지]
단층 [민족일보 이미지]

單層

 

「暗殺者」 輩出의 素地

<不逮捕⋅不處罰의 特惠>

 

四二八二年 六月 二十六日 ?時1) 三十四分-突然 京橋莊에 세발의 銃聲이 울렸다. 民族의 巨星, 民族의 英雄 白凡先生은 그 兇彈에 쓰러졌다. 총을 쏜 젊은 砲兵 少尉 安斗熙는 現場에서 붙잡혔다.

이 悲報를 들은 온겨레의 가슴은 憤怒로 가득 찼고 三千里 坊坊曲曲은 슬픔으로 뒤덮였다. 暗殺犯 安斗熙는 當局에 依하여 어느 틈엔가 韓獨黨의 秘密黨員으로 急造되었다. 

「背後를 밝히라」는 겨레의 怒號는 沖天했건만 李承晩의 忠犬들은 賊反荷杖으로 무고한 金學圭(韓獨黨 幹部)씨 등 數名을 暗殺共謀者로 捏造해 내어 「金九씨의 反民族的 路線에 激憤한 黨員들의 義擧」라고 뻔뻔스럽게 발표했다. 安斗熙는 軍法會議서 終身懲役을 받고 服役했다.

그러나 六⋅二五事變이 터진 얼마 후 어느 사이엔지 安斗熙는 陸軍大領까지 昇進하여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게 되었다.

더욱이 厚顔無恥하게도 安斗熙는 「弑逆者의 手記」2) 라는 冊까지 내어 어디까지나 「國家에 반역한 金九」씨를 살해했다고 자기 행위를 스스로 英雄化하였다.

또다시 겨레의 분통은 터졌다. 國會에서도 問題가 되었느냐 李承晩의 命令으로 形의 執行停止를 받고 釋放되어 再服務의 門이 열려 破格的 昇進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처 날뛰는 獨裁者의 橫暴는 막을 길이 없었고 또다시 겨레는 가슴속에서 끓어 넘치는 憤怒를 달래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獨裁의 城은 무너지고 民權과 民主主義의 새날은 밝았다. 

四⋅一九직후, 젊은 政治人 高貞勳氏의 <法殺>과 더불어 金九씨를 殺害한 張本人으로서 李承晩, 申性模 등을 告發했다. 그러나 李承晩은 그 닷새후에 단 한마디의 辨明도 하지 못하고 온 長安이 잠든 첫 새벽에 飛行機를 타고 영영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申性模도 數日後 까닭모를 急死를 하였다. 

다시금 金九先生暗殺事件眞相糾明委는 下手人 安斗熙 一黨을 告發했다. 司直當局도 정신을 차렸는지 本格的인 수사에 착수하여 安斗熙의 逮捕令을 내렸으나 재빨리 安은 어디론지 종적을 감추었다. 경찰은 이렇다 할 활동도 보이지 않은 채 이미 安은 日本 等地로 도망갔으리라는 斷定을 내렸다. 一年 가까운 歲月은 흘렀다.

그 安斗熙가 十日 前 白書의 서울 한복판에서 金九先生의 옛 部下에게 붙잡혔다. 분명히 경찰이 못 잡은 것이 아니라 안 잡으려했다는 엄연한 사실은 드러났다. 이번에야 말로 民族과 歷史의 이름으로 安斗熙 一黨과 그 背後관계자들이 처단되지 않고서는 배겨내지 못하리라고 많은 사람들은 믿었었다. 

그러나 또다시 이 겨레는 權力者의 愚弄를 받아야만 했다. 政府는 安을 豪華로운 「호텔」에 열흘간이나 잘 모셔두었다가 이제 와서는 「一事不再理原則」이니 다른 혐의가 없느니 하는 구실로 釋放을 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일을 돌아보고 오늘을 바라보니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너무도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다.

요모조모로 國民을 괴롭히지 말라고 設定된 「一事不再理原則」을 그래 民族의 指導者를 무참하게 학살한 暗殺犯과 그 背後徒黨들을 救出키 위해 써먹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왜 <張副統領狙擊事件>은 四⋅一九이후 一事不再理原則을 어겨 전면적인 再調査, 再處罰을 敢行했단 말인가. 法은 萬民앞에 平等한 것이거늘 어떤 사람들은 아무 罪도 없이 단지 옳은 일과 옳은 主張을 내세우기 위해 「데모」에 참가했다는 것만으로 보름씩이나, 한 달씩이나 拘束했다가 석방하기도 하고 起訴도 하면서도 이 天人共怒할 民族과 歷史의 반역자들은 拘束은커녕 끝끝내 허울 좋은 法의 방패로 감싸주어야만 하는가. 

第二共和國의 「法의 斷層」은 이다지도 多岐多樣한 것인가.

爲政者에게 물어보자. 그래 終身懲役囚를 正當한 이유없이 刑의 執行停止를 하고 不法으로 軍務에 服役케한 罪- 無故한 韓獨黨員들을 共犯者로 몰았던 그 獨裁의 走狗들이 저지른 誣告의 罪- 지난날 李承晩의 품안에 숨어 斷罪를 모면한 背後操縱者들의 殺人敎晙의 罪- 이것을 밝혀내는 것이 一事不再理의 原則에 어긋난단 말인가? 一事不再理란 어떤 正當한 處理를 前提로 하는 것이어늘 언제 어느 때 그 「處理」가 있었단 말인가?

바야흐로 겨레의 喊聲은 드높아가고 있다. 언제고 반드시 밝혀질 罪惡을 뒤덮어 씻어 뭉개려는 무리들은, 그들 역시 새로운 共犯者의 烙印을 免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똑똑히 안다.

安斗熙가 버젓이 서울거리를 활보하다가 民間人의 손에 잡혀 司直에 引導되었다는 사실은 當局이 그를 잡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勢力層에 依하여 그의 身邊이 충분한 보장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또한 그를 釋放하고 背後關係수사를 하지 않으려는 理面에는 그 모든 陰謀事實이 白日下에 폭로됨으로써 많은 部類의 <權力의 毒種>들이 拔本塞源이 될 것을 저어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을.

더 나아가 이런 <暗殺者>들을 잡지 않고 處罰하지 않으려는 것은, 또 어느 때든지 필요에 따라 새로운 暗殺者를 輩出시킬 素地를 마련하려는 底意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看過하기 어렵다.

더욱 놀랍고 서글픈 사실은 이렇듯 무서운 反民族的, 反民主的 處事가 實現되려는 마당에 政治人들은 너무도 無關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아! 언제나 이 땅에도 「正」과 「義」가 제자리에 서게 되고 참된 民主主義의 太陽은 비칠것인가?

(白雪嶺)

[민족일보] 1961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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