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저희가 했던 야학은 공장 부근에 있던 교회에서 하던 것이었습니다. 야학이 있기 전에 아가페 선교회라고 노조 사람들이 조직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YH노동조합에 속한 분들 중 신앙심이 깊은 분들이 부근 교회를 찾아가서 선교회를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교회는 보수적인 교회였는데, 젊은 전도사 한 분이 꽤 진취적인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그 교회에 어렸을 때부터 다녔고, 가족도 모두 다니는 사람인지라 그 교회에서는 꽤 영향력이 있었나 봅니다. 그 분에게 누군가 교회에서 아가페 선교회원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했고, 그 분이 동의한 뒤 교회 당회를 설득해서 실현되었던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교회는 아마 그 야학의 학생들이 나중에 정국을 강타하는 신민당사 점거농성을 하는 노동조합의 열성조합원들이라는 생각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장소만 빌려주었지 내용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전도사란 분이 중간에서 개입하지 못하도록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 대학생이었으니까 야학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자세히 모릅니다. 야학을 만들고 교장이 된 선배 한 분이 기독청년협의회 활동을 하셨는데 산업선교회 활동을 하시는 분들과 친하고, YH노동조합 집행부와도 상당히 친했다고 들었습니다. 야학은 처음부터 당시 막 확산되기 시작하는 노동야학으로 시작했습니다. 노동야학은 한마디로 말해서 검정고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서 알아야 할 지식들을 공부한다는 것입니다. 노동야학을 하게 된 것은 저희 강학들도 그랬으면 하는 생각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보다 야학 학생인 노동자들의 요구가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야학 학생들은 56년생부터 60년대 초반생들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야학에서 중심 역할을 하던 분들이 대체로 57년, 58년생들이었는데 다른 야학에서 공부를 많이 해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김경숙 열사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이분들은 노조에서도 대의원 등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까짓 검정고시 공부하느니 우리에게 좀더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습할 과목들을 짰습니다. 우선 국어 공부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했고, 한자가 어려우니 한문 과목을 넣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 사회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해서 사회, 그래도 영어를 완전히 몰라서는 이 사회에서 원활히 살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해서 영어, 그 다음에 문화생활을 해보자고 음악. 이렇게 다섯 과목을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도중에 연극 공연을 두 번 했는데 그때는 제가 다니던 대학의 연극부에서 활동하는 분을 임시로 모셔 왔습니다. 그 사람이 연극 지도를 하고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라서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냥 연극하는 사람들 하는 것 생각하고 온 것이지요. 그런데 연극의 기초도 없는 분들이 너무 진지하게 활기차게 하는 걸 보고 자기도 생각을 바꿨다고 하면서 무척 좋아했습니다. 저는 거기서 한문을 맡아서 가르쳤습니다. 첫 시간에 가렴주구(苛斂誅求)를 가르쳤던 생각이 납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아무튼 노동야학이니까 이렇게 시작해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장희락이 1979년 초에 했던 야학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신돌석씨는 야학이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야학이라는 게 있다는 이야기는 노동운동하기 이전부터 들었고, 거기서 공부해서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 말고도 정규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공민학교, 산업체학교 등이 있었다. 하지만 노동운동을 하기 이전에는 노동야학이란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 나중에야 노동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한 곳이 노동야학이란 말을 들었다. 하지만 신돌석씨가 노동운동을 하기 시작한 1985년 이후에 야학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야학이 아니더라도 종교단체 등에서 실시하는 노동자 교육이 상당히 형성되어 있었고, 노동운동단체가 지역마다 조직되어서 노동자 교육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 말부터는 노동조합이 그러한 교육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전체적으로 학력이 향상되어서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배워야 할 야학 같은 경우는 존재 의미가 없어졌다. 물론 한글을 모른다거나 기초적인 상식, 산수 등을 모르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체로 나이 많은 분들이나 예외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었고, 젊은 노동자의 대다수는 그렇지 않은 시대로 접어 들어갔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연극 공연을 두 번 했는데 한 번은 3월 10일에 했습니다. 그때는 그날을 근로자의 날이라고 했지요. 한국노총의 전신인 대한노총의 창립기념일이라고 하더군요. 메이데이는 어디로 사라지고 이날은 노동자들이 반드시 노는 날이었습니다. 가내수공업 같은 곳이 아니면 모두 놀았지요. 이날 연극 공연을 했는데 우리끼리 한 것이었습니다. 지하에 있는 강당에서 야학을 했는데 거기서 그냥 공연을 한 것이지요. 연극 공연 끝나고 밤 늦게까지 함께 놀기도 했습니다. 연극은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여성 노동자가 과로 때문에 쓰러지는 내용이었는데요, 그때 김경숙 열사는 사장 역할을 했습니다. 쓰러지는 여성 노동자가 나이가 좀 어린 분이었는데, 얼굴도 창백하고 배역에 아주 어울렸습니다. 두 번째 공연은 부활절 예배와 함께 했습니다. 이번에는 신도들이 모두 모인 대예배당에서 했습니다. 내용은 지난 번처럼 시골에서 올라온 여성 노동자가 쓰러지는 것이었는데, 이때는 노조를 만들어서 사장과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행동이 뒤에 이어졌습니다. 보수적인 교회라서 아마 신도들은 문화적 충격을 받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연신 ‘아멘’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때도 쓰러지는 분이나 사장 역할을 앞에서 한 사람들이 그대로 했어요. 김경숙 열사가 두 번 다 사장 역할을 했다는 게 재밌는 기억입니다. 연극 공연이 끝나고 나서 제가 노조 대의원 하는 한 분에게 ‘오늘 은혜 많이 받았다’고 했더니 이분이 ‘아, 그런 게 은혜군요. 저는 은혜가 한 근에 얼마짜리인가 했어요’라고 하더군요. 저는 노조활동을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에 충실한 분들인 줄 알았는데 당시의 교회의 행태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었더라구요. 물론 신앙심은 다 깊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 분들이 함께 기도할 때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하는 것과 크게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뒤 저희 강학들은 학생운동을 해야 한다고 야학을 다른 학교 사람들에게 인계하고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만두던 날 비가 무척 내렸는데, 그날도 통금 시간이 다 될 때까지 함께 이별식을 했습니다. 그때 강학들과 학생들이 한 사람씩 짝을 지었습니다. 물론 우린 수가 적으니까 짝이 안 된 사람들은 학생들끼리 짝을 지었지요. 그때 김경숙 열사가 제 짝이었습니다. 그런 걸 파트너라고 하지요? 그래서 더욱 생각이 납니다. 김경숙 열사가 저에게, 학교 가서도 열심히 싸우고, 서로 연락하고 지내자고 했습니다. 저도 물론 그러겠다고 했지요. 마지막에 만난 것은 1차 폐업이 끝난 뒤 저희들 강학과 야학 학생들이 함께 행주산성에 놀러 갔을 때였습니다. 그때 제 기억으로는 경찰이 진입했다가 물러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그러더군요. 당시 담당 경찰서였던 태릉경찰서 형사들이 YH 쪽을 보고는 오줌도 안 누겠다고, 왜 그렇게 지독하냐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저희들은 대단한 투쟁을 하셨다고 말했는데, 다시 또 폐업이 이어지고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몰랐습니다.

야학을 하던 YH노동조합의 아가페 선교회 사람들과 함께 놀아보면 정말 잘 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기억나는 분이 ‘쎄무잠바’라는 것을 잘 부르던 분인데요, 팝송 ‘새드 무비’의 곡에 가사를 바꾸어서 부르는 것이었어요. ‘오오오 쎄무잠바 어느 년이 훔쳐갔나’라는 가사로 바꾸어서 춤을 추며 부를 때 다들 배꼽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흥이 우리 민중들의 전통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칫하면 저처럼 노동현실을 제대로 모르고 대학이나 다니던 사람은 이분들이 즐겁게만 사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야학 하면서 도중 도중에 대화를 나누었는데 어느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인천에서 일하다가 작업장 이전으로 서울로 왔는데 여기 노조가 있더라. 노조 있는 데서 일해 보니 생판 이리 좋을 수가 없더라. 다시 노조 없는 데로 가라고 하면 절대로 못 간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이런 말과 함께 옛날에는 밥도 멸치 국물에 멸치 대가리 몇 개 둥둥 떠 있고, 깍두기 한두 개로 먹으라고 했다고 하면서 쉬는 시간도 없고 잔업도 시키면 몸이 아파도 안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살았다는 것이지요. 저는 YH노동조합의 그 강력한 단결력, 투쟁력이 바로 노동조합의 일상활동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닐까 하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장희락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연극 공연을 하고 함께 놀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노동야학이란 것이 실감이 갔다. 3월 10일에 노동자들이 근로자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놀았다는 것은 신돌석씨도 기억이 났다. 신돌석씨가 중학교 때부터 공장에 다니던 형이 3월 10일이면 놀았다. 가방공장에 다녔을 때는 워낙 작은 영세가내공업이어서 그런지 안 놀았는데, 프레스를 하는 공장에 다닐 때는 공단 밖에 있는 작은 공장인데도 놀았다. 지금의 5월 1일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이름은 ‘근로자의 날’이라고 한다. 그래도 요즘 텔레비전 등에서 노동자라는 말을 쉽게 하는 것을 보면 세상은 바뀌기는 많이 바뀐 것 같다. 부활절 예배에서 신도들이 문화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란 말도 신돌석씨는 공감이 갔다. 신돌석씨는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생각, 정서 등에 대해서 잘 안다. 그들은 아마 노동자가 과로로 쓰러졌을 때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아멘’했을 것이다. 그런데 노조를 만들어서 싸울 때는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자본가인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서도 자본가는 소수인데, 교회는 끊임없이 자본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자본가 같은 생각을 하라고 강요하는 듯하였다. 잠시 숨을 멈추었던 장희락은 뭔가 격한 마음이 되는 것 같았다. 눈가가 조금 촉촉해진 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가 다시 말을 시작할 때는 약간 비장한 느낌도 들었다.

그 뒤로 김경숙 열사는 보지 못했습니다. 학교로 보낸 편지만 두 번 받았습니다. 폐업 투쟁을 했고, 또 다시 그런 일이 닥칠지도 모르는데 오히려 저에게 열심히 하라고 격력해 주었습니다. 여름 방학이 되었습니다. 그때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순서를 정해서 데모를 했고, 그러면 바로 감옥으로 가는 것이었지요. 1학기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데모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2학기에 해야 하는데 갈등이 생기더라구요. 솔직히 대학생들은 조금만 비겁하다는 소리 듣고 안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어렵게 대학을 다녔거든요. 융자받고 알바 하면서 다녔습니다. 당시에는 융자도 받기 어려워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대학 다니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데모를 하고 감옥에 간다는 생각을 하니 괴로워지더라구요. 부모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하는 생각도 나고, 내 인생이 어떻게 될까 걱정도 되구요. 그런 미래보다 당장 잡혀가서 맞을 생각을 하니 정말 겁이 났습니다. 김경숙 열사와 학교에 가서도 열심히 싸우자고 하던 말이 생각났지만, 또 한편에서 좌절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또한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8월 9일인가요.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 납니다만, YH노동조합이 신민당사에 가서 농성을 한다는 소식이 뉴스로 나왔습니다. 4월에 했던 폐업을 또다시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학을 했던 노동자들 생각이 났습니다. 한 분, 한 분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면서 어떻게 됐을까 걱정이 됐지요. 그리고 8월 11일 아침에 경찰이 진입해서 강제로 노동자들을 연행해 갔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명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이어졌습니다. 지금 기억은 희미합니다만 바로 그 사람이 김경숙 열사라는 뉴스가 나왔을 때 정말 무엇엔가 세차게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동명이인이겠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을 거란 생각도 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김경숙 열사가 투신했다는, 경찰의 주장을 그대로 보도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경숙 열사가 투신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루 이틀 멍하니 집에 있다가 학교로 나가봤습니다. 함께 강학을 했던 친구, 선후배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술도 참 많이 마셨습니다. 조금 감상적인 친구들은 술이 취하면 울기도 했습니다. 새 학기가 되면서 우리가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각오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데모를 준비했는데 여러 가지로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유인물을 새벽에 교내에 몰래 뿌리기로 했습니다. 유신헌법철폐, 긴급조치해제 등의 내용이 큰 타이들이었지만, YH노동조합 신민당사 점거농성을 잔인하게 진압한 만행에 대한 분노와 규탄을 담은 것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유인물에서 3일 뒤에 시위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때는 대학교 교정 내에 기관원이나 경찰들이 수도 없이 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정복을 입은 경찰은 없었습니다. 학생으로 위장도 하고, 타임지 판매하는 사람처럼 행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유인물에 시위하자고 한 날에는 교정 내에 경찰차까지 주차시키고, 전경들이 학교 내에 수백 명이 도열해 있었습니다. 별 수 없이 시위는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지나가는가 했는데, 그만 일주일 만에 발각이 되고 잡히고 말았습니다. 당시에는 유인물만 발견되어도 뿌린 사람을 잡으려고 별짓을 다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이라면 마구 잡아다가 물고문, 매타작 등을 하면서 추적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겁도 났지만 뭔가 김경숙 열사에게 떳떳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들어갔을 때는 얼마 안 있어서 10. 26이 나고 박정희가 죽는 바람에 오래 살지 않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80년에 복학된 뒤에 다시 수배되고, 구속되고, 징역 살고 나온 뒤에 노동운동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뒤돌아보면 별로 큰일도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김경숙 열사의 뜻과 어긋나지 않게 살아왔습니다. 저는 김경숙 열사에게 야학에서 한문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김경숙 열사는 제 제자라고 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나이가 같고 뜻을 같이했으니 동지이기도 합니다. 그것보다 더 제가 지금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제 인생의 큰 방향을 알려 주었고, 평생 그렇게 살도록 했으니, 김경숙 열사는 제 스승입니다. 앞으로는 제가 스승을 모시는 마음으로 빠짐없이 추도식에 참석하고, 김경숙 열사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제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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