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革命) 한 해가 지났는데...

 

가난한 농촌(農村)에 색(色)다른 「암」

창녀(婦女)들은 양식(糧食) 긁어 미장원(美粧院)으로

내버려 둔 애들은 굶고 나물 뜯어

 

탄광촌 거리마다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처럼 기울어진 몇 채의 낡아빠진 초가집과 이끼 돋은 움집들이 아직 마을의 산허리에 구멍(坑口)이 뚫리기 전의 그 고장 옛 모습을 전해준다. 그 이웃에는 하루 밤새 두드려 세운 판잣집과 「브로크」 건물들이 외모만은 초(超)「모던」의 울긋불긋한 「페인트」가 창녀(娼女)의 화장처럼 어쩐지 값싸고 조화(調和)의 미(美)를 잃었다.

탄광촌에 즐비한 모든 집들마다 가게 아닌 집이 거의 없다. 집집마다 음식점이 아니면 미장원 - 하다못해 선술집이나 구멍가게로 개방했다. 책방은 몇 군대 밖에 없고 조그만 도서관이라도 있는 곳은 한군데도 없으나, 「먹고 노는 자리」는 이처럼 풍성하다 사내들의 그와 같은 기질은 그들의 아내와 딸들에게도 물들었다.

시가지 도는 대기 속에 마저 거무튀튀한 탄즙(炭汁)이 밴 그 수많은 탄광촌의 한길에서는 발을 옮길 때마다 「검은 먼지」가 감겨 꼬리를 친다. 그런데도 그 거리를 걷는 여인들의 얼굴은 무대배우 못지않게 짙은 화장으로 조금도 어색해 하는 눈치가 없다. 

집을 나설 때 애써 다듬어낸 그 얼굴들도 한길을 반시간만 걷고 나면 절로 푸릇푸릇해진다. 「검은 공기」와 날아 뿌리는 탄가루의 습격을 받고 마는 것이다. 「먹고 보자」 「놀고 보자」의 기질이 지배하는 사나이들과 그의 아낙들에 의해 강원도 두멧골 수십 군데에 있는 탄광촌들의 경기는 어지간한 소도시(小都市)쯤 찜쩌 먹는다.

탄광촌 사람들의 이러한 생활풍조는 마치 전염병처럼 그 변두리에 있는 가난한 농촌 - 화전지대에 까지 번져갔다. 그러기에 조상대대 긴머리를 틀어 올려 곱다랗게 비녀를 쪽찌는 것으로 아름다움을 나타낼 줄밖에 모르던 농촌 부녀자들이 수십리, 수백리 밖의 이름난 미장원을 찾아 그들의 검은 머리를 짜르고 지져 볶는다. 기차와 자동차의 왕래도 없는 산골에서 오직 「파마」머리를 멋지게 하고 싶은 일념으로 며칠씩 길을 걷는 여인들 -

머리에는 「파마」비용으로 쓸 몇 말의 감자나 밀 옥수수 계란 등을 받쳐 인 부녀자들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 한국의 모양을 그대로 그려놓은 축소판(縮小版)같다면 나무랄 것인가! 검은 윤이 자르르 흐르는 머리를 노르스름하게 지지기 위해 무거운 줄도 잊고 머리에 받쳐 인 그 식량들은 그 고장 형편으로 한 달을 먹으려 덤빌 주식물들이다. 그러기에 한 여인의 「파마」에는 집안싸움과 매질 - 허리끈을 졸라매는 가족들 등 수없는 비극의 부산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처럼 허공에 들떠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어떤 광부의 아내와 딸 - 화전민들의 아내와 딸들은 도시의 어지간한 사내들이 엄두도 못 낼 중노동속에 파묻혀 있다. 남편을, 아들을, 아버지를 그 컴컴한 땅속 천「미터」의 굴속에 보낸 탄광촌 아낙네들의 가슴은 조그만 산울림 소리에도 와르르 무너진다. 집속에 앉았어도 눈길은 자꾸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어들어간 그 산마루와 산허리로 쏠린다.


「두더지」들 시꺼먼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도로 나올 때까지 탄광의 아낙네들은 몇 번이나 마음속에서 「남포」 불이 터진다. 참다못해 어떤 아낙네들은 광산의 선탄부(選炭夫)로 일자리를 얻는다. 이처럼 아내와 딸들이 발을 벗고 남편과 아버지를 돕는 사람들은 광산은 삶의 피난처가 아니라 재출발의 발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 부녀자들에게는 한 길의 미장원들도 눈에 비쳐들지 않는다. 그들의 어린 자녀들은 어른들이 광산으로 가고나면 들에 나물 캐러 나간다. 온 집안 식구가 모두 생활전사다. (계속)

김재형(金載亨) 기(記)

 

(사진 = 메마른 산에서 먹을 만한 풀을 찾아 헤매는 화전민촌(火田民村)의 어린이들)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숨결 ⑥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숨결 ⑥ [민족일보 이미지]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숨결 ⑥ [민족일보 이미지]

 

[민족일보] 1961년 4월 29일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