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이번 제27회 연재는 가야국(伽倻國)에 대한 글이다. 오래전부터 가야국의 실체에 대하여 생각해 왔지만, 나는 이제서야 가야국에 대한 나의 관점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번 연재의 앞머리에서, 가야국은 기존에 남아있는 『가락국기(駕洛國記)』를 넘어서서 보아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우선 나는 가야국은 고조선의 무사(武士) 세력이 남하하여 세운 국가로 본다. 한반도 최남단의 국가인 가야국의 유물에서 보이는 갑주(甲冑)라든가 무구(武具) 및 마구(馬具)가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모습과 같다는 것은 가야국이 대륙의 세력 고구려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대륙과 한반도 북부의 고구려는 지금의 발해만 및 서해와 동해에서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였다고 본다. 고구려의 해상활동이 가야국과도 연관된다고 보는 것이다.

철기시대의 북방기마민족세력의 일부가 남하한 후에 여섯 가야의 지역을 정벌하여 자리를 잡았고, 그 시기는 신라의 건국보다도 다소 앞선 시기였다고 본다. 그러한 여섯 집단의 세력이 여섯 가야 지역을 정벌하여 건국하는 과정을 신화의 형태로 ‘스토리텔링(storytelling)’한 것이 『가락국기』의 수로왕 신화로 본다. 그 증거가 북방기마민족 고구려 추모의 난생 신화와 가야 수로왕의 난생 신화가 기본 구상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가야국(伽倻國)은 한반도 남쪽에 있었던 변한의 12개 작은 나라들을 통합해 세운 왕국이다. 김해의 금관가야(金官伽倻), 고령의 대가야(大伽倻), 함안의 아라가야(阿羅伽倻), 고성의 소가야(小伽倻), 성주의 성산가야(星山伽倻), 상주의 고령가야(古寧伽倻) 등 여섯 나라가 있었다.

이 가운데 김해의 금관가야는 가야사(伽倻史) 초반의 맹주였고, 고령의 대가야는 가야사 후반의 맹주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가야가 562년 9월에 신라의 공격을 받아 마지막으로 멸망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가야국은 완전히 소멸한다.

(30) 가야국의 『가락국기』

가야국에도 신화가 있다. 신화란 고대인의 ‘스토리텔링'이다. 말 그대로 가야국의 신화는 고대 가야국의 지배자(왕)들이 백성과 이웃 나라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이야기이다. 고대 가야국 초기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그 시절의 신화를 포함한 모든 역사 사실은 ‘구전(口傳 : storytelling)'의 형식으로 전승되었다. 그래서 신화가 중요하며, 고대 신화에는 역사적 사실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전해진 신화 가운데서 무엇이 역사적 사실이며 무엇이 가공된 이야기인가를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가. 『가락국기』란?

국보 『삼국유사』 「가락국기」 부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국보 『삼국유사』 「가락국기」 부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가락국기(駕洛國記)』는 가야국의 역사를 기록한 고문헌이다.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 간략하게 들어 있는 「가락국기」는 11C에 지어진 원(原) 『가락국기』를 초록(抄錄)한 것이다. 일연이 초록한 이 「가락국기」는 원 『가락국기』에서 수로왕에 대한 설화를 중심으로 원용(源用)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의 주(註)에는 정확한 저자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으나, 고려의 ‘금관주지사(金官州知事) 문인(文人)’이 편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김해김씨 일각에서는 이 ‘금관주지사 문인’이 11C의 문신 김양감(金良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금관주지사 문인’의 원 『가락국기』가 11C에 편찬되었다고 해도, 민족주의적 사관의 측면에서 보면 11C에 편찬된 원 『가락국기』의 원형(原形)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 원형의 상당 부분은 가야국 시절 후반에 쓰이기 시작하였을 것이고, 그 원형의 『가락국기』가 후기 신라로 들어오면서 완성되었고, 다시 그 원형이 전승되면서 11C에 이르러 ‘금관주지사 문인’에 의하여 재편되었는데, 이를 일연이 다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로 변형(變形)하였다고 본다.

만약 『가락국기』가 11C에 처음 지어진 것이라면, 여기에 나오는 ‘구지가(龜旨歌)’가 갖는 우리 문학사상(文學史上) 최고(A.D.42년)의 노래라는 의의(意義)는 퇴색한다.

보물 『삼국유사』 「가락국기」 부분, 성암 조병순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보물 『삼국유사』 「가락국기」 부분, 성암 조병순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김해김씨족보』의 「가락국기」, 영조39(1763년)년 판, 사진Ⓒ2021 이양재.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청구기호 : 古2518-10-1069. [사진 제공 - 이양재]『삼국유사』의 「가락국기」와 대비(對比) 연구가 필요하다.
『김해김씨족보』의 「가락국기」, 영조39(1763년)년 판, 사진Ⓒ2021 이양재.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청구기호 : 古2518-10-1069. [사진 제공 - 이양재]『삼국유사』의 「가락국기」와 대비(對比) 연구가 필요하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내용에는 수로왕의 탄생과 여섯 가야의 건국, 수도와 궁실 건립, 수로왕과 신라 탈해왕(脫解尼師今)의 다툼, 허황후(許皇后)와의 혼인, 관제 정비, 수로왕릉과 사당(祠堂)에 얽힌 설화, 신라에 합병된 이후부터 고려시대까지 김해지방의 연혁, 수로왕묘(廟)에 할당된 토지 결수, 왕후사(王后寺) 창건, 2대 거등왕(居登王)부터 마지막 구형왕(仇衡王)까지의 왕력(王歷), 신라에 투항한 연대에 대한 고증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가야 관계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삼국유사』 「가락국기」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특히 수로왕과 관련된 설화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신라와의 관계 등을 파악하는 데 많은 의미를 제공해 준다.

나.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내용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에 보이는 가야국 신화와 역사의 내용은 대체로 아래와 같다. 그 번역문을 전재한다. (출처 : 한국사데이타베이스)

(1). 『삼국유사』 권제1. 기이(紀異) 제1.

1. 5가야(五伽耶)

5가야 『가락기찬(駕洛記贊)』에 의하면 “한 가닥 자줏빛 노끈이 드리워 여섯 개 둥근 알을 내리니 다섯 개는 여러 고을(各邑)로 돌아가고 한 개가 이 성안에 남았다.”라고 하였다. 즉 한 개는 수로왕(首露王)이 되고 남은 다섯 개는 각각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는 것이니, 금관(金官)국을 다섯 숫자에 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본조(本朝)의 『사략(史略)』에서는 금관국도 함께 꼽아 창녕(昌寧)이라고 함부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2). 『삼국유사』 권제2. 기이(紀異) 제2. 「가락국기」

1. 수로왕(首露王)

가락국기(駕洛國記) 문종대(文宗代)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金官) 지주사(知州事)의 문인(文人)이 지은 것으로 이제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개벽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에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추장(酋長)으로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은 산과 들에 스스로 모여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 3월 계욕일(稧浴日)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龜旨)(이것은 산봉우리를 일컫는 것으로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또 말하였다. “황천(皇天)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았다. 그 줄이 내려온 곳을 따라가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金合)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번 절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서 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고 그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무리가 다시 서로 모여서 그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하였다. 이에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하였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 10여 일이 지나자 신장(身長)은 아홉 자나 되었으니 은(殷)의 천을(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처럼 생겼으니 한(漢)의 고조(高祖)와 같고, 눈썹에는 팔채(八彩)가 있으니 당(唐)의 요(堯)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있으니 우(虞)의 순(舜)과 같았다.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하였다. 혹은 수릉(首陵, 수릉은 죽은 후의 시호이다)이라고도 한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한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3척이었다.

즉위 2년 계묘 정월(43년)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라고 하고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畓坪, 이는 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畓字는 俗字이다.)에 나가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고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 잎과 같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니 7성(聖)이 살 곳은 여기가 가장 적합하다.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곳에 1,500보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우(殿宇)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의 터를 만들어 두었다. 일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 두루 나라 안의 장정, 인부,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때를 기다려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 2월(44년)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2. 수로왕과 탈해

이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임신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고, 그 알이 화하여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였다. 이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고 머리 둘레가 1척이었다.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왔다”라고 하니 왕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한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러면 술법(術法)으로 겨루어 보겠는가”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사이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었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이때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탈해가 이에 엎드려 항복하고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겨루는 곳에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하였는데, 이는 대개 성인(聖人)이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져서 그러한 것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곧 왕에게 절을 하고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와서 정박하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마음속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난을 꾀할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국경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3. 허황옥

“건무(建武) 24년 무신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청컨대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항려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니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일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라고 하고,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경주(輕舟)를 이끌고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고 승점은 연하(輦下)의 국(國)이다.)으로 가게 하였다.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매달고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은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그것을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찾아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이에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과 본래 모르는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서로 따라가겠는가”라고 하였다.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그렇다고 여겨 유사(有司)를 이끌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의 산 주변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대고 땅으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고 있는 비단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山神靈)에게 바쳤다. 그 밖에 시종한 잉신(媵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 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 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된 장신구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니 왕은 나아가 그를 맞아서 함께 유궁(帷宮)으로 들어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섬돌 아래에 나아가 뵙고 곧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인도하게 하고 말하였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 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옷과 비단과 보화도 주었고, 군인들을 많이 모아서 그들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황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皇天)을 뵈었는데, 황천은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 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것이 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왔으니 이 사람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니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재갈을 나란히 수레를 함께 탔으며, 중국의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되려 하였다. 왕후는 이에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어가게 하였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지급하는 것은 풍부하게 하고,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고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4. 관제(官制)를 정비

“어느 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구간(九干)들은 모두 여러 관리의 으뜸인데, 그 직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 농부들의 칭호이고 고관 직위의 칭호가 아니다. 만약 외국에 전해진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마침내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고쳐서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방(五方)을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했고, 신귀(神鬼)의 음(音)은 바꾸지 않고 그 훈(訓)을 고쳐 신귀(臣貴)라고 하였다.

계림(鷄林)의 직제(職制)를 취해서 각간(角干)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의 차례를 두고, 그 아래의 관료는 주(周)나라 법과 한(漢)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것은 이른바 옛것을 고쳐서 새것을 취하여 관직(官職)을 나누어 설치한 방법이었다.

이에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敎化)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욱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양(陽)에게 음(陰)이 있는 것과 같았고 그 공은 도산(塗山)이 하(夏)를 돕고, 당원(唐媛)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의 몽조(夢兆)를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5. 수로왕과 허황옥의 붕어(崩御)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고 구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였다. 드디어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 처음 와서 닻줄을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하였다.

잉신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 등은 나라에 온 지 30년 후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부부는 1, 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 8년 사이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고향을 생각하다가 모두 죽어서 거처하던 빈관(賓館)은 텅 비고 아무도 없게 되었다.

왕은 이에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내고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 3월 23일(199년)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는 것이 왕후가 죽은 날보다 더하였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가 1장이고 둘레가 300보였고, 거기에 장사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 구충왕(仇衝王)까지 이 묘(廟)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을 기다려 풍성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6. 신라 법민왕의 제사

“신라 제30대 왕 법민왕(法敏)은 용삭(龍朔) 원년 신유 3월에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伽耶國) 시조(始祖)의 9대손 구충왕(仇衝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이끌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庶云) 잡간(匝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가 나를 낳았다. 따라서 시조 수로왕은 나에게 곧 15대 시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멸망당했으나 그를 장사지낸 묘(廟)는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宗廟)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겠다.” 인하여 그 옛 궁터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묘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頃) 공영(供營)의 비용으로 하여 왕위전(王位田)이라 부르고 본토(本土)에 소속시켰다. 수로왕의 17대손 갱세(賡世) 급간(級干)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매해 때마다 술과 단술을 빚고 떡 밥 차 과실 등 여러 맛있는 음식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어 해마다 끊이지 않게 하였다. 그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年中) 5일을 바꾸지 않았다. 이에 비로소 그 향기로운 효사(孝祀)가 우리에게 맡겨졌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에 편방(便房)을 설치한 뒤로부터 구충왕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에 묘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으나 그 구충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용삭(龍朔) 원년 신유(661년)에 이르는 60년 사이에 이 묘에 지내는 제사지내는 예를 가끔 빠뜨리기도 하였다.

아름답도다, 문무왕(文武王, 法敏王의 시호이다)은 먼저 조상을 받드니 효성스럽고 또 효성스럽다.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향하였다.”

7. 제사와 관련한 기이한 여러 사건

“신라 말년에 충지(忠至) 잡간(匝干)이란 자가 있었는데 금관(金官) 고성(高城)을 쳐서 빼앗고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이에 영규(英規) 아간(阿干)이 장군의 위엄을 빌어 묘향(廟享)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냈는데, 단오(端午)를 맞아 사당에 제사를 지내다가 사당의 대들보가 이유 없이 부러져 떨어져서 인하여 깔려 죽었다. 이에 장군(將軍)이 스스로 말하기를 “다행히 전세(前世)의 인연으로 해서 외람되이 성왕(聖王)이 계시던 국성(國城)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는 그 진영(眞影)을 그리고 향(香)과 등(燈)을 바쳐 그윽한 은혜를 갚아야겠다”라고 하고, 교견(鮫絹) 3척을 가지고 진영을 그려 벽 위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공손히 받들었다. 겨우 3일 만에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서 땅 위에 고였는데 거의 한 말 정도가 되었다. 장군은 매우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받들어 가지고 사당을 나가서 불태우고 곧 수로왕의 친자손 규림(圭林)을 불러서 말하였다. “어제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들이 거듭 생기는 것인가. 이는 필경 사당의 위령(威靈)이 내가 진영을 그려서 모시는 것을 불손(不遜)하게 여겨 진노한 것이다. 영규(英規)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몹시 괴이하고 두렵게 여겨 진영도 이미 태워 버렸으니 반드시 신(神)의 주살을 받을 것이다. 경은 왕의 진손(眞孫)이니 전에 하던 대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겠다.”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다가 나이 88세에 이르러 죽었고,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이어서 제사를 지내는데 단오날 알묘제(謁廟祭) 때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발광(發狂)하여, 사당으로 와서 간원(間元)이 차려 놓은 제물을 치우고서 자기가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냈는데 삼헌(三獻)이 끝나지 못해서 갑자기 병이 생겨서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그런데 옛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음사(淫祀)는 복(福)이 없고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 앞서 영규가 있고 뒤에는 준필이 있으니 이들 부자(父子)를 두고 한 말인가.

또 도적의 무리들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이 있다고 해서 와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려고 하였다. 처음에 오자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에 살을 당긴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오더니 사면을 향해서 비오듯 화살을 쏘아서 7, 8명을 맞혀 죽이니, 나머지 도둑의 무리들은 달아났다. 며칠 후에 다시 오자 큰 구렁이가 있었는데 길이가 30여 척이나 되고 눈빛은 번개와 같았다. 사당 옆에서 나와 8, 9명을 물어 죽이니 겨우 살아남은 자들도 모두 넘어지면서 달아났다. 그리하여 능원(陵園) 안팎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보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안(建安) 4년 기묘에 처음 만든 때부터 지금 임금께서 즉위한지 31년인 대강(大康) 2년 병진(1076)까지 도합 878년인데 제단을 쌓아 올린 아름다운 흙이 이지러지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심어 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마르거나 썩지 않았으며, 하물며 거기에 벌여 놓은 수많은 옥조각들도 부서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본다면 신체부(辛替否)가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괴되지 않은 무덤이 있겠느냐”라고 말했지만, 오직 가락국이 옛날에 일찍이 망한 것은 곧 체부의 말이 맞지만 수로왕(首露王)의 사당이 허물어지지 않은 것은 곧 체부의 말을 믿을 수 없다.”

8. 수로왕을 기리는 놀이

“이 중에 또 놀이를 하여 수로왕을 사모하는 일이 있다. 매년 7월 29일에 백성 서리(胥吏) 군졸(軍卒)들이 승점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떠들며 동서쪽으로 서로 눈짓을 보내고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서 망산도에서 말발굽을 급히 육지를 향해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古浦)를 향해서 다투어 달린다. 대개 이것은 옛날에 유천간과 신귀간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에게 아뢰던 옛 자취이다.”

9. 지명(地名) 변천(變遷)

“가락국이 망한 뒤로는 대대로 그 칭호가 한결같지 않았다. 신라 제31대 정명왕(政明王)이 즉위한 개요(開耀) 원년 신사에는 금관경(金官京)이라 이름하고 태수(太守)를 두었다. 그로부터 259년 후에 우리 태조(太祖)가 통합한 뒤로는 대대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고 배안사(排岸使)를 둔 것이 48년이었으며, 다음에는 임해군(臨海郡) 혹은 김해부(金海府)라고 하고 도호부(都護府)를 둔 것이 27년이었으며, 또 방어사(防禦使)를 둔 것이 64년이었다.”

10. 수로왕 능묘 소속 전답과 관련한 일화(0991년 (음))

“순화(淳化) 2년에 김해부(金海府)의 양전사(量田使)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은 조사해서 보고하였다. “수로왕의 능묘(陵廟)에 소속된 밭의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15결을 가지고 전대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부(府)의 역정(役丁)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을 맡은 관청에서 그 장계(狀啓)를 전하여 보고하자, 그때 조정에서는 명을 내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화해서 성군(聖君)이 되었고 이내 왕위(王位)에 올라 오래 살았으니 곧 나이 158세가 되었다. 저 삼황(三皇) 이후로 이에 견줄 만한 이가 드물다. 붕어한 뒤에 선대(先代)부터 능묘(陵廟)에 소속된 전답을 지금에 와서 줄인다는 것은 진실로 의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고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量田使)가 또 거듭 아뢰자 조정에서도 이를 그렇다고 여겨 반은 능묘에서 옮기지 않고, 반은 그곳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절사(節使) 양전사의 별칭이다는 조정의 명을 받아 이에 그 반은 능원(陵園)에 소속시키고 반은 부(府)의 부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주었다.

거의 일이 끝날 때에 양전사(量田使)가 몹시 피곤해 하더니 어느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7, 8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을 가지고 칼을 쥐고 와서 말하였다. “너에게 큰 죄가 있어 베어 죽여야겠다.” 양전사는 형(刑)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놀라서 깨었다. 이내 병이 들었는데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가다가 그 병이 낫지 않아서 관문(關門)을 지나 죽었다. 이 때문에 양전도장(量田都帳)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그 뒤에 사신이 와서 그 밭을 검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이고 부족한 것은 3결 87부 1속이었다. 이에 모자라는 밭을 어찌했는가를 조사해서 내외궁(內外宮)에 보고하고, 칙명으로 그 부족한 것을 채워 주게 했는데 또한 고금(古今)에 탄식하는 자가 있었다.”

11. 왕후사의 창건과 폐지(0452년 (음)

“수로왕(首露王)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것을 매우 숭상하였는데 시조모(始祖母) 허황후(許皇后)를 위해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하였다. 원가(元嘉) 29년 임진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한 곳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 하였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처의 평전(平田) 10결을 헤아려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하게 하였다.

이 절이 생긴 지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밭이 도합 300결(結)이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은 왕후사(王后寺)가 장유사의 밭 동남쪽 표(標) 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폐해서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12. 가락국의 사적

“시조 이하 9대손의 역수(曆數)는 아래에 자세히 기록하니 그 명(銘)은 이러하다.

처음에 천지가 열리니, 이안(利眼)이 비로소 밝았다. 인륜(人倫)은 비록 생겼지만,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지 않았다. 중국은 여러 대를 지냈지만, 동국(東國)은 서울을 나누어 계림(鷄林)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駕洛國)이 뒤에 경영(經營)되었다.

스스로 맡아 다스릴 사람 없으면, 누가 백성을 보살피겠는가. 드디어 상제(上帝)께서, 저 창생(蒼生)을 돌보았다. 여기 부명(符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精靈)을 보냈다. 산 속에 알이 내려오니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안은 오히려 아득하고, 밖도 또한 캄캄하였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듯하나 들으니 여기 소리가 있었다.

무리들은 노래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쳤다. 7일이 지난 후에, 한때 안정되었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이 맑게 개었다. 여섯 개 둥근 알이 내려오니, 한가닥 자색 줄에 드리웠다. 낯선 땅에, 집과 집이 연이었다. 구경하는 사람은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 우글거렸다.

다섯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남아 있었다. 같은 때 같은 자취는, 아우와 같고 형과 같았다. 진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서,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다. 왕위에 처음 오르니 온 세상은 곧 맑아지려 하였다. 궁전은 옛 법을 따랐고, 흙계단은 오히려 평평하였다. 만기(萬機)를 비로소 힘쓰고, 모든 정치를 베풀었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하나이고 오직 정밀하였다. 길 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는 밭을 양보하였다. 사방은 모두 안정되고, 모든 백성은 태평을 맞이하였다. 갑자기 풀잎의 이슬처럼, 대춘(大椿)의 나이를 보전하지 못하였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모두 슬퍼하였다. 금과 같은 그의 발자취요, 옥과 같이 떨친 그 이름이었다.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영묘(靈廟)의 제사가 오직 향기로웠다. 세월을 비록 흘러갔지만, 규범(規範)은 기울어지지 않았다.”

13. (금관) 가야국의 역대왕

(①수로왕, 재위 42년~199년)

②거등왕(재위 199년~253년)

“아버지는 수로왕(首露王), 어머니는 허황후(許皇后)이다. 건안(建安) 4년 기묘 3월 13일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9년으로 가평(嘉平) 5년 계유 9월 17일(253년)에 죽었다. 왕비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으로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에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시조(始祖)가 금란(金卵)에서 난 까닭에 김을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③마품왕(재위 253년~291년)

“마품(馬品)이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가평(嘉平) 5년 계유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9년으로, 영평(永平) 원년 신해 1월 29일(291년)에 죽었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로 태자(太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④거질미왕(재위 291년~346년)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영평(永平) 원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56년으로 영화(永和) 2년 병오 7월 8일(346년)에 죽었다. 왕비는 아궁(阿躬) 아간(阿干)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王子) 이시품(伊尸品)을 낳았다.”

⑤이시품왕(재위 346년~407)

“김씨이고 영화(永和) 2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62년으로 의희(義熙) 3년 정미 4월 10일(407년)에 죽었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았다.

⑥좌지왕(재위 407년~421년)

”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義熙) 3년에 즉위하였다. 용녀(傭女)에게 장가를 들어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삼으니 나라 안이 소란스러웠다. 계림국(鷄林國)이 꾀를 써서 치려하니, 박원도(朴元道)라는 신하가 간하여 말하기를 “유초(遺草)를 보고 또 보아도 역시 털이 나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늘이 망하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에서 보전하겠습니까? 또 점쟁이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점괘의 말에 ‘소인(小人)을 없애면 군자(君子)가 와서 도울 것이다’라고 했으니 왕께선 역(易)의 괘를 살피시옵소서”라고 하니 왕은 사과하여 “옳다.”고 하고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에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치세는 15년으로 영초(永初) 2년 신유 5월 12일(421년)에 죽었다. 왕비는 도령(道寧) 대아간(大阿干)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⑦취희왕(재위 421년~451년)

“질가(叱嘉)라고도 한다. 김씨로 영초(永初) 2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1년으로 원가(元嘉) 28년 신묘 2월 3일(451년)에 죽었다. 왕비는 진사(進思) 각간의 딸 인덕(仁德)으로 왕자(王子) 질지(銍知)를 낳았다.”

⑧질지왕(재위 451년~491년)

“금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元嘉) 28년에 즉위하였고 이듬해에 시조와 허황옥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혼인한 곳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치세는 42년으로 영명(永明) 10년 임신 10월 4일(492년)에 죽었다. 왕비는 김상(金相) 사간(沙干)의 딸 방원(邦媛)으로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

⑨겸지왕(재위 492년~521년)

“금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永明) 10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30년으로, 정광(正光) 2년 신축 4월 7일(521년)에 죽었다. 왕비는 출충(出忠) 각간(角干)의 딸 숙(淑)으로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⑩구형왕(재위 521년~532년)

”김씨(金氏)이다. 정광(正光) 2년에 즉위하였다. 치세는 42년으로 보정(保定) 2년 임오 9월(562년)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對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보면,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14. 일연의 논평(論評)

“논평하여 말한다. 삼국사(三國史)를 살펴보면, 구형왕(仇衡王)은 양(梁)의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에 땅을 바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의 건무(建武) 18년 임인(42년)으로부터 구형왕 말년 임자(532년)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만약 이 기록으로 상고한다면 땅을 바친 것은 원위(元魏) 보정(保定) 2년 임오(562년)이다. 그러면 30년을 더하여 도합 520년이다. 지금 두 가지 설(說)을 모두 기록해 둔다.”

(3) 『삼국유사』 권제3. 제4 탑상(塔像第四)

1.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금관(金官)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 읍이 금관국이었을 때 세조(시조의 의미) 수로왕(首露王)의 비인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 하였는데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니 곧 쉽게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다. 붉은 돛, 붉은 깃발, 주옥(珠玉) 등 아름다운 것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주포(主浦)라고 부른다. 처음 언덕 위에서 비단 바지를 풀은 곳은 능현(綾峴)이라고 하며, 붉은 깃발이 처음 들어온 해안은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한다.

수로왕이 그를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이때에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못하여 토착인들이 신복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452년)에 이르러서야 그 땅에 절을 세웠다. 또 왕후사(王后寺) 아도(阿道) 눌지왕(訥祇王)의 시대로 법흥왕대의 전이다.를 창건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겸하여 남쪽의 왜를 진압하고 있는데 가락국 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고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본초(本草)』에서 말하는 닭벼슬의 피를 찍어 검사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 하는데 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일연의 찬)

“찬하여 말한다.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서 험한 물결 헤쳐왔다.
어찌 다만 황옥(黃玉)을 도와 건넜을 뿐이겠는가
천년 동안 남쪽 왜의 침략을 막았다.”

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평가

(1) 「가락국기」의 역사성

『수로왕릉』, Ⓒ2021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수로왕릉에는 석물을 세웠다. 석물의 형식이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다. 수로왕릉은 임진왜란시에 도굴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수로왕릉』, Ⓒ2021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수로왕릉에는 석물을 세웠다. 석물의 형식이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다. 수로왕릉은 임진왜란시에 도굴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락국기」 문헌은 아래와 같이 역사성이 간략히 정리된다. ①여섯 금란(金卵)이 천강(天降)한 난생신화는 북방민족의 천손사상을 의미한다. ②여섯 금란에서 나온 사람은 여섯 가야국의 왕이 되므로 가야의 연합국체가 입증된다. ③수로왕(首露王, 재위 A.D. 42~199)은 가락국(특히 금관가야)의 시조이다. ④수로왕의 왕후 허황옥(許黃玉)은 아유타국의 공주로 배를 타고 왔다. 그 증거는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이다. 이는 가야국이 활발한 해상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허황후릉』, Ⓒ2021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수로왕비 허황옥릉에는 석물이 없다. 허황옥릉도 임진왜란시에 도굴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허황후릉』, Ⓒ2021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수로왕비 허황옥릉에는 석물이 없다. 허황옥릉도 임진왜란시에 도굴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파사석탑』, Ⓒ2021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허황후가 남천축국에서 배에 싣고 온 것으로 전하는 석탑이라고 한다.
『파사석탑』, Ⓒ2021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허황후가 남천축국에서 배에 싣고 온 것으로 전하는 석탑이라고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역사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신화로 윤색(潤色)한 것이 수로왕의 신화이다. 그 윤색된 부분을 사실로 판단하고, 허황옥에 대한 각종 판단이 난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2) 구지가

구지가(龜旨歌)는 가야국의 고대 가요이다. 영신군가(迎神君歌) 구하가(龜何歌) 또는 구지봉영신가(龜旨峰迎神歌)라고도 부른다. 원래의 완전한 가사는 전하지 않으나, 관련 설화와 4구체의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 『삼국유사』권2 「가락국기」에 실려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A.D.42년 3월 계욕(禊浴)의 날에 북쪽 구지에서 수상한 소리로 부른 것이 있었다. 무리 200∼300명이 거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형상은 나타나지 않고 소리만 내어, “여기에 누가 있느냐?”라고 묻더라는 것이다. 구간(九干) 등이 “우리가 있소.”라고 대답하자,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하고 재차 물어오자, 구간이 다시 “구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다시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세워 임금이 되라 하였기에 여기에 내려왔다. 그러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를 파서 흙을 모으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놓아라. 만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고 노래하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이에 너희들은 매우 기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간들이 그 말과 같이 행하고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그러자 얼마 후 자주색 끈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았다. 그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합자(金合子)가 싸여 있었다. 열어보니 그 속에는 해와 같이 둥근 황금빛 알 여섯이 있어 이를 본 모든 사람이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수없이 절을 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서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평상(榻) 위에 두고는 무리가 모두 흩어졌다가,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모여 금합자를 열어보니, 알 여섯개가 모두 동자로 변했는데, 용모가 매우 준수하였다고 한다.

「구지가」와 그 신화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신화를 영신제의(迎神祭儀)로 보고 신탁의식(神託儀式) 희생의식 영신의식의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고 논의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등극제의로 보고 신탁의식 귀복의식(龜卜儀式) 등극의식의 세 단계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등극의식은 다시 하강-격리-재수용-등극의 과정으로 이루어져있다.

「구지가」는 이 세 단계 가운데 제2 단계에서 신탁에 의해 불린 주가(呪歌)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 가요의 성격을 밝히는 데는 가창 뒤의 결과나 가사 자체의 분석도 중요하지만 산문 전승 중에 들어 있는 ‘굴봉정촬토(掘峰頂撮土)’라는 행위전승의 풀이도 중요하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견해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구지가」의 가사 가운데 연구대상이 되어온 어사(語辭)는 ‘거북(龜)’과 ‘머리(首)’와 ‘구워먹겠다(燔灼而喫也)’ 등이다. 이들 어사를 은유 내지 상징적인 것으로 보고, ‘거북’을 ‘검(神)’ 또는 토템으로서의 거북으로 풀이하거나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수신의 사자인 제의적 상관물로 풀이하기도 한다.

『구지봉 선돌』, Ⓒ2021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우리나라에서 선돌은 고인돌에 비해서는 그 전하는 수량이 매우 적다. 그러나 그 분포 범위는 한반도 전역이다. 이렇듯 넓은 분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단순한 구조로 단독으로 세워져 있다. 특히 구지봉에 세워져 있는 선돌의 기능은 구지봉에 얽혀져 있는 신앙 및 신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지봉 선돌은 흡사 남성의 성기와 외형이 비슷하며, 그 아래 알돌까지 있어 성기 숭배같은 원시 신앙과 결부하여 볼 수도 있다. 알돌이 하나 없어지기는 했다. 이러한 선돌로 인하여 나는 구지봉에서 불리워졌던 「구지가」는 성숭배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구지봉에도 고인돌이 있는데, 고인돌과 선돌은 대체적으로 같은 지역에서 발견되는 공존 관계에 있어, 이들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진 유적으로 보인다.
『구지봉 선돌』, Ⓒ2021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우리나라에서 선돌은 고인돌에 비해서는 그 전하는 수량이 매우 적다. 그러나 그 분포 범위는 한반도 전역이다. 이렇듯 넓은 분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단순한 구조로 단독으로 세워져 있다. 특히 구지봉에 세워져 있는 선돌의 기능은 구지봉에 얽혀져 있는 신앙 및 신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지봉 선돌은 흡사 남성의 성기와 외형이 비슷하며, 그 아래 알돌까지 있어 성기 숭배같은 원시 신앙과 결부하여 볼 수도 있다. 알돌이 하나 없어지기는 했다. 이러한 선돌로 인하여 나는 구지봉에서 불리워졌던 「구지가」는 성숭배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구지봉에도 고인돌이 있는데, 고인돌과 선돌은 대체적으로 같은 지역에서 발견되는 공존 관계에 있어, 이들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진 유적으로 보인다.
『구지봉의 파노라마 사진』, Ⓒ 2021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구지봉 정상부는 수백명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사진은 선돌이 중간부에 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구지봉의 파노라마 사진』, Ⓒ 2021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구지봉 정상부는 수백명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사진은 선돌이 중간부에 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머리’는 수로(首露)·우두머리, 남근(男根), 구지봉(龜旨峰)으로 해석된 바도 있다. 그런데 ‘구워먹겠다’라는 ‘번작(燔灼)’이 나타내는 이미지는 원시인들의 격렬한 욕정이 반영되어 여성성기를 은유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이 가요의 뜻과 표현형식이 비슷한 것에 신라 성덕왕 때 해룡에게 끌려간 수로부인(水路夫人)을 구출하기 위해 부른 「해가」라는 노래가 전하고 있다.

구지가가 『삼국유사』 권2 「가락국기」에 실려있는 대로 A.D.42년 3월 계욕(禊浴)의 날에 불린 것이 확실하다면, 이 노래 가사는 우리 민족의 현존하는 최고의 노래가 된다. 구지가에 대한 기존의 이론은 상당히 다양하나 여기에서는 그것을 논하지 않겠다.

나는 구지가를 성적(性的)인 고대인의 노래로 본다. 김해의 구지봉 정상에 올라보면 그곳에는 고인돌도 1기가 있고 남성 성기를 닮은 선돌도 1기가 서 있다. 그 사진을 여기에 첨부한다.

(3) 아유타국은 어디인가?

아유타국을 ‘남천축국’이라하고 있다. 즉 아유타국을 인도로 보아온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학계에서 이러한 견해는 대체적으로 부정되고 있으며, 아유타국의 실체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다.

『가락국탐사』, 이종기, 1977년, 일지사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아동문학가 이종기는 이 책의 pp.99~100에서 “아요디아 왕가는 서기 20년 경에 크샨의 군대에 의해 王都를 잃고 어디론가 떠났으며, 허황후가 5월에 배로 출발해서 7월에 도착하였는데 아요디아가 있는 갠지스강 상류까지는 배가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므로, 왕녀의 사실상의 출발지는 오늘날의 타이국의 메남 강가에 있는 옛 도시 아유티야로 추정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아요디아 왕국이 1세기 전에 건설한 식민국”라고 하였다. 1977년 이 책은 가야사에 큰 관심을 갖도록 자극을 주었으나, 후일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가락국탐사』, 이종기, 1977년, 일지사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아동문학가 이종기는 이 책의 pp.99~100에서 “아요디아 왕가는 서기 20년 경에 크샨의 군대에 의해 王都를 잃고 어디론가 떠났으며, 허황후가 5월에 배로 출발해서 7월에 도착하였는데 아요디아가 있는 갠지스강 상류까지는 배가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므로, 왕녀의 사실상의 출발지는 오늘날의 타이국의 메남 강가에 있는 옛 도시 아유티야로 추정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아요디아 왕국이 1세기 전에 건설한 식민국”라고 하였다. 1977년 이 책은 가야사에 큰 관심을 갖도록 자극을 주었으나, 후일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북의 김석형은 『초기조일관계연구』(1966년, 사회과학원출판사)에서 아유타국을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분국(分國)으로 보았다. 반면에 아동문학가 이종기는 『가락국탐사』(1977년, 일지사. pp.99~100)에서 “아요디아 왕가는 서기 20년쯤에 크샨의 군대에 의해 왕도(王都)를 잃고 어디론가 떠났으며, 허황후가 5월에 배로 출발해서 7월에 도착하였는데 아요디아가 있는 갠지스강 상류까지는 배가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므로, 왕녀의 사실상의 출발지는 오늘날의 타이국의 메남강 강가에 있는 옛 도시 아유티야로 추정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아요디아 왕국이 1세기 전에 건설한 식민국”이라고 하였다. 이후 김병모는 「가락국 허황옥의 출자-아유타국고」라는 논문(1987년)에서 타이 메남강 강가에 건설한 식민국 아유티야는 부정하고 아요디아를 근원지로 보았다. 나는 여기에서 아유타국이 어디인가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겠다. 아유타국이 어디이든 「가락국기」의 윤색된 부분으로 성급히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라. 가야의 여섯 연맹체

가야국의 여섯 연맹체는 김해의 금관가야(金官伽倻), 고령의 대가야(大伽倻), 함안의 아라가야(阿羅伽倻), 고성의 소가야(小伽倻), 성주의 성산가야(星山伽倻), 상주의 고령가야(古寧伽倻) 등 여섯 나라이다. 이 가운데 김해의 금관가야는 가야사(伽倻史) 전반(前半)의 맹주였고, 고령의 대가야는 가야사 후반(後半)의 맹주였다.

(1) 김해의 금관가야

금관가야(金官伽倻) 는 본가야(本伽倻)라고도 한다. 원래 9촌(村)의 장(長)이 있어서 각 촌을 다스리다가, 수로왕이 나와서 9촌을 통일하였다고 한다. 학계 일각에서는 수로왕은 그때의 군장(君長)이 아니라, 후대로 내려와 본가야 중심의 여섯 가야의 연맹체를 결성할 때의 가야의 중흥조(中興祖)라는 주장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가락국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록이 금관가야의 기록이다.

금관가야는 수로왕 이래 491년간 계속되다가, 532년(법흥왕 19) 신라에게 멸망하였는데, 그 위치가 낙동강 하류의 해안지대이므로 수로왕 신화의 허황옥(許黃玉)에서 보듯 김해 지역은 최소한 1세기경부터는 왜인(倭人)이나 한인(漢人) 등등 무역선의 왕래가 있었으며, 따라서 경제 및 문화적으로 상당히 발달했던 나라로 판단된다. 이러한 금관가야에 대해서는 위에서 인용한 「가락국기」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2) 고령의 대가야

대가야(大伽倻)는 경북 고령 지역에 있던 가야국의 하나이다. 562년 멸망하였는데,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했다.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대가야로 언급한 기록도 있으나 이는 기록 착오(錯誤)이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가야연맹은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침입으로 큰 타격을 입고 세력이 약화하면서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5세기 이후에 대가야는 고령 합천 등 경상도 내륙 산간지방의 농업에 유리한 입지 조건과 제철(製鐵)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 중심지로 떠올랐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룬 반파국(伴跛國 : 고령지역에 있던 소국)은 5세기 후반에 새로이 시조 설화를 만들며 대가야를 표방하였다.

대가야는 합천 거창 함양 산청 아영 하동 사천 등지를 포괄하는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서 국제사회에도 등장한다. 479년에 가야왕(加羅王) 하지(荷知)의 이름으로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내 작호를 받았고, 481년에는 백제·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진행된 급속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활동의 폭이 매우 제한되었다. 554년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오히려 562년 신라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대가야는 정치적으로 삼국 보다 발전하지 못했지만, 문화적으로는 가야금을 제작하고 음악을 정리하는 등 높은 문화 수준을 보유하였다. 또한 지산동 고분을 비롯하여 본관동 중화동 양전동 종암동 쾌빈동 등 고령지역에 분포한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많은 유물은 가야연맹의 맹주인 대가야의 발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3) 함안의 아라가야

『삼국유사』 「기이」 '5가야조'에는 아야가야(阿耶伽耶), 『삼국사기』 「지리」 '함안군조'에는 아시량국(阿尸良國) 혹은 아나가야(阿那加耶), 『광개토왕릉비』와 『일본서기』에는 안라(安羅) 등 다양한 이칭으로 전한다. 음운(音韻)이 모두 비슷하다.

원래 변한 12국의 하나인 안야국(安邪國)으로 현재의 경남 함안군에 추정된다. 함안군 가야읍 사내리(沙內里) 널 무덤군[土壙墓群]은 아라가야 초기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아라가야는 4세기 말경까지 구야국(狗邪國 : 金官加耶)과 함께 전기 가야연맹의 양대 세력을 이루었다.

전기 가야연맹은 4세기 말 5세기 초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공격으로 해체되고 후기 가야연맹이 고령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5세기 후반에 형성되었다. 이 때 아라가야는 후기의 가야 연맹체 남서부 지역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522년 대가야가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고 신라에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고, 신라는 529년 탁기탄(啄己呑 : 경남 밀양)을 멸망시키자 가야 남부지역의 여러 세력은 대가야를 불신하고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자구책을 도모하게 된다. 이때 아라가야는 백제·신라·왜(倭)의 사신을 초빙하여 국제회의를 여는 등 세력을 과시하였으나 통합은 실패했다.

이후 가야의 남부 국가들은 신라와 백제의 영향권에 각각 편입되어 분열되어 갔는데, 남동부지역의 국가들이 신라에 병합되지만 아라가야를 비롯한 남서부지역의 국가들은 자립성을 보유한 채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아라가야는 540년대에 가야 남서부지역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여 외교적으로 신라·백제와 접촉하면서 독립과 안전보장을 추구하였으나 백제의 간섭 때문에 실패한다. 이에 아라가야는 고구려와 밀통하여 548년경 고구려·백제 간의 독산성(獨山城 : 충남 예산) 전투를 유발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패함으로써 아라가야를 비롯한 가야연맹은 다시 백제의 영향력 아래 지배를 받는 부용국(附庸國) 형태로 전락한다.

그 뒤 신라가 550년대 전반 한강유역 쟁투에서 백제를 물리치고 그 여세를 몰아 가야지역에 대한 병합에 착수하자, 아라가야는 559년경 신라에 투항하여 신라의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이 된다.

현재 함안 일대에는 말산리(末山里) 대형고분군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고분군이 있는데 이는 후기 가야연맹 시기 아라가야의 유적이다.

(4). 고성의 소가야

소가야(小伽倻)는 지금의 경남 고성에 있었던 것으로 가야 소국이다. 『삼국유사』 5가야조에 “소가야는 지금(고려 초)의 고성(固城)”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에는 “고성군은 본래 고자군(古自郡)”이라고 되어 있으며,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한조에는 변한 12국 중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이 있는데, 이 두 사서에서 ‘고자’는 동음이자(同音異字) 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자’의 ‘자’는 성(城)을 뜻하는 우리 말의 고어이다. 그러므로 신라 경덕왕 때 ‘고자’를 고성이라고 고친 것이다. ‘고자가야’를 ‘소가야’라고 부른 것은 ‘대가야’에 대응(對應)한 말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고성군의 영현(領縣)이 셋인데, 그 중에는 지금의 사천시 사천면을 포함하고 있는 사물현(史勿縣)과 지금 진주의 동쪽까지 포함하고 있는 일선현(一善縣)이 있다. 그러므로 소가야는 지금의 고성군을 중심으로 해 인접 지역까지 포함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4년(209) 조에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가라를 침략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물계자(勿稽子) 열전’에 따르면 포상팔국에는 골포(骨浦 : 지금의 경남 昌原) 칠포(漆浦 : 지금의 경남 漆原) 고사포(古史浦 : 지금의 경남 固城) 등이 포함되어 있고, 가라는 아라가야(阿羅加耶)로 되어 있다. ‘내해이사금’조의 기사는 3세기 초의 일로, 남해안의 여러 작은 나라들이 통합을 위한 정복 전쟁을 벌였던 사실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소가야는 늦어도 대가야가 신라에 평정된 6세기 중엽 이전에 신라에 합병된 것으로 판단된다.

(5) 성주의 성산가야

성산가야(星山伽倻)는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 성산(星山)이라는 지명은 원래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757년(경덕왕 16)에 일리군(一利郡 : 고령군 성산면)을 개칭함으로써 생긴 것이다. 따라서 성산가야라는 명칭은 적어도 경덕왕 대 이후의 신라 하대에 쓰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에 근거하여 성산가야라는 국명(國名)은 성산군이라는 관념이 경산(京山 : 성주군 성주읍) 및 벽진(碧珍 : 성주군 벽진면) 일대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던 신라 말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도 있다. 즉 이 지역의 지방호족이었던 이총언(李悤言, 858~938) 세력이 “신라 말에 반(反) 신라적인 명분의 하나로서 성산가야라는 국명을 조작해 냈다”라는 주장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본래 이 지역에는 벽진국(碧珍國)이라는 독립 소국이 있었다가 4세기 말 이후 신라 영향권에 편입되었고, 결국 6세기 초반 무렵에 완전히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한다. 성주지역이 낙동강 서안지역이었으면서도 그 유물의 특징이 이웃한 고령(高靈)과는 달리 신라의 출토품과 거의 유사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라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기존에 성산가야는 금관가야가 중심이 된 전기 가야 연맹체의 하나였다가 후에 신라의 영향권에 편입된 나라라고 이해한다.

(6) 상주의 고령가야

고령가야(古寧伽倻)는 가야 연맹체를 구성하는 여섯 가야 가운데 하나이다. 낙동강 상류지역인 지금의 경북 상주, 문경에 위치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육가야(六伽倻)의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뚜렷한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으며, 자세한 기록도 전해지지 않아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신라에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기이편(奇異篇)의 ‘오가야(五伽耶)’ 조에 따르면, “하늘에서 여섯 개의 알이 내려와 그 가운데 하나에서 수로왕(首露王)이 태어나 가락국(駕洛國)의 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개의 알은 각 읍(邑)으로 가서 다섯 가야의 주인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수로왕의 금관가야(金官伽耶)를 다섯 가야에 포함한 『본조사략(本朝史略)』의 내용을 비판하며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등 다섯 가야의 명칭과 위치를 전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령가야는 고려시대에 함녕(咸寧)으로 불렸던 오늘날의 경북 상주와 문경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도 “함녕군(咸寧郡)의 옛 지명인 고령군(古寧郡)이 본래 고령가야였으나 신라가 이를 빼앗아 고동람군(古冬攬郡) 또는 고릉현(古陵縣)으로 부르다가 경덕왕(景德王) 때에 고령군으로 명칭을 바꾸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령군은 고려시대에는 함녕군(咸寧郡)으로 불리다가 고려 현종 때에 함창군(咸昌郡)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1906년 월경지 정리로 일부 지역이 문경으로 통합되었으며, 나머지 지역도 일제시대인 1914년에 상주군(尙州郡)으로 행정구역이 통합되었다.

마 가야국의 신라 흡수

이렇듯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三國)과 함께 한반도에 사국(四國)의 일원이었다. 실제로 한반도에서의 삼국시대는 대가야가 멸망한 562년부터 백제가 무너진 600년까지 불과 98년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여섯 가야의 연맹체가 존속한 기간동안 한때 가야 연맹체는 신라는 물론 백제보다 더 광활한 영토를 거느린 나라였다.

또한 가야는 바다 건너 일본의 동쪽 해안의 소국(小國)들과 교류를 한 해양문화권의 나라로서 철기가 발달한 국가였다.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가야의 여섯 연맹체가 멸망한 후에 대다수의 가야 세력은 일본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는데, 이주하지 않고 남은 세력은 신라 귀족사회에 흡수된다. 신라사회에 흡수된 대표적 가계가 김유신(金庾信, 595~673)의 가계로 보는데,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은 만노군(지금의 진천군)의 태수였다.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은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왕의 10대 손이자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다.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조희승, 1990년. 평양 사회과학원 출판사. [사진 제공 - 이양재]북한의 역사학자 조희승의 이 논문은 고대 일본에 옛 조선의 이주민들이 상당수 밀려 갔으며, 그들이 소국을 형성하였다는 관점에서 연구된 이론서이다. 그는 일본에서 출토되는 역사적 유물과 한반도의 역사적 유물을 비교 고증하고 있다.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조희승, 1990년. 평양 사회과학원 출판사. [사진 제공 - 이양재]북한의 역사학자 조희승의 이 논문은 고대 일본에 옛 조선의 이주민들이 상당수 밀려 갔으며, 그들이 소국을 형성하였다는 관점에서 연구된 이론서이다. 그는 일본에서 출토되는 역사적 유물과 한반도의 역사적 유물을 비교 고증하고 있다.

북한의 역사학자 조희승은 자신의 저서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1990년)에서 당시 일본에 있던 여러 가야계 소국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조희승의 이 논문은 고대 일본에 옛 조선의 이주민들이 상당수 밀려 갔으며, 그들이 소국을 형성하였다는 관점에서 연구된 이론서이다. 그는 일본에서 출토되는 역사적 유물과 한반도의 역사적 유물을 비교 고증하고 있다. 물론 조희승의 연구에서는 가야국 소국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신라 계통의 소국도 다루고 있다.

일본의 정한론파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일본의 임나(任那)가 한반도에 존재하였던 것이 아니라, 가야의 소국들이 일본으로 진출하여 있었던 것이다. 『광개토태왕릉비』에 보이는 임나는 금관가야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으며, 『광개토태왕릉비』가 광개토태왕의 훈적비로서 그 주인공이 광개토태왕임을 미루어 볼 때 신묘년(391년)에 고구려 수군(水軍)이 신라와 백제를 피하여 해로(海路)로 김해지역의 금관가야를 정벌(征伐)한 것을 말하는 것 일수도 있다.

바. 맺음말

이 글의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가야국은 고조선의 무사세략이 남하하여 세운 국가로 본다. 한반도 최남단의 국가인 가야국의 유물에서 보이는 갑주(甲冑)라든가 무구(武具) 및 마구(馬具)가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모습과 같다는 것은 가야국이 대륙의 세력 고구려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대륙과 한반도 북부의 고구려는 지금의 발해만 및 서해와 동해에서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였다고 본다. 고구려의 해상활동이 가야국과도 연관된다고 보는 것이다.

철기시대의 북방기마민족세력의 일부가 남하한 후에 여섯 가야의 지역을 정벌하여 자리를 잡았고, 그 시기는 신라의 건국보다도 다소 앞선 시기였다고 본다. 그러한 여섯 집단의 세력이 여섯 가야 지역을 정벌하여 건국한 과정을 신화의 형태로 ‘스토리텔링(storytelling)’한 것이 「가락국기」의 수로왕 신화로 본다. 그 증거가 북방기마민족 고구려 추모의 난생 신화와 가야 수로왕의 난생 신화가 기본 구상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정한론파 역사학자들은 임나를 가야와 접목시켜 일본의 한반도 경영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구이다. 오히려 북한의 역사학자 조희승이 입증하였듯이 고대 일본에는 조선계의 소국이 여러곳 있었고, 가야국이나 고구려 신라 백제도 일본으로 진출하였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서있는 동북아 최대의 『광개토태왕릉비』는 훈적비인 바, 신묘년 기사는 고구려의 남진 정벌 기사이지, 일본측을 주인공으로 언급한 것이 될 수는 없다.

가야의 여섯 나라는 실존했던 연합체 국가이다. 나는 그 연합체 여섯 국가에서 고조선이 망한 이후에 난립했다는 72개 소국의 한 모습을 유추해 본다. 각기의 세력 크기와 경제 및 문화 수준도 달랐을 것이다. 여섯 가야를 뭉뚱그려서 하나의 가야사로 기념관을 운영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여섯 가야국의 특성을 살린 각각의 가야사 기념관을 세워서 각각의 그 실체를 구명하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야국을 특정하고 그 역사와 유적 및 유물을 지키는 일은 일본의 식민사관에 대항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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