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광심 지사 망명지는 통화현

오광심 지사. [사진 출처 - 국가보훈처]
오광심 지사. [사진 출처 - 국가보훈처]

평북 선천 출신 광복군 오광심(1910~1976) 지사 관련 글을 보면 지사가 흥경현 화흥중학을 다녔기 때문에 추정해서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흥경현’으로 이주했다”고 기술한다. 그런데 「오광심 자필 약력」에는 화흥학교 이전에 “통화 김두하(금두하 또는 금두화락-필자 주) 숭신학교 졸업”이라고 적혀 있다.

1919년 평북 철산 출신 장관선 목사(1866~1938)가 통화현 금두하에 망명해 학교와 교회를 세웠는데 학교명은 알려진 바 없으나 같은 ‘숭신학교’였을 가능성이 높다. 장관선의 아들 장호강(1916~2009)은 1944년 5월 중국 푸양에서 오광심을 만나 통화현 망명 시기 선친과의 일화를 직접 들었다.

“오광심씨가 우리 아버님이 있던 그 부근에 있었대요. 자기도 교인이라 그러고. 그러면서 쭉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까 우리 아버님의 신세를 많이 졌어요. 그러면서 아주 반갑다고 하고, 악수를 하자고 그래서 악수를 하고.”

장호강 지사. [사진 출처 - 국가보훈처]
장호강 지사. [사진 출처 - 국가보훈처]

1920년 경신참변 때 장관선 가족이 희생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장호강의 증언에 담겨 있다.

“다행히 우리 부락은 일본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전부 산으로 올라가 숨었습니다. 그런데 왜군들이 지나가다가 동네에 불을 질러요, 동네에. 그래, 산 위에서 우리 어머님과 저희들이 내려다보면서 교회가 불타는 걸 보고, 우리 교회가 불타는 걸 학교와 교회, 교회와 학교가 같이 있었으니까 그때는 타는 걸 보고 동동 발을 굴리던 그때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겁니다.”

일본군은 11월 2일 통화현 반납배에 난입했고, 11월 4일 금두하에 진군했기 때문에 하루 피신할 시간이 있었다. 다만 미처 피하지 못한 교민 7명이 체포돼 희생되었고 그중 4명이 같은 선천 사람이었다.

이듬해인 1921년 8월 흥경현 미국 선교사 쿡(Welling T. Cook)의 자택에 장관선 등이 모여 학교와 병원 시설 복구에 관해 밀의했다. 이후 장관선 일가는 랴오닝성 하이청으로 떠났으나, 지사는 1927년 흥경현에 가서 정의부 계열 화흥중학 사범과에 진학했다.

2. 오광심 지사 초임지는 통화 보성학교

오광심 지사의 공적에는 틀린 이력이 1줄 보인다.

오광심 주요 공적: “1930년, 남만주 한족회에서 설립한 배달학교에서 민족교육 교사로 활동”

배달학교는 1920년 11월 경신참변 때 교장과 교감, 교사가 참살되었고 방화로 건물이 전소되면서 끝내 폐교되었다. 참변 이후 배달학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지사가 잘못 썼던 것일까? 아니다! 지사는 자필 약력에 “1929년 통화 반립보(반납배-필자 주) 보성학교 교원”이라고 경력을 분명히 적었다. 즉 배달학교가 아니라 ‘보성학교(普成學校)’ 교사였다.

「오광심 자필 약력」(입력본 발췌). [사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오광심 자필 약력」(입력본 발췌). [사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지사가 50세에 남긴 자필 약력서는 애국지사 김승학 선생 유품 속에 있다가 『희산 김승학 독립운동사 자료 정리』(2018)를 통해 처음 공개되었다. 원소장자 (사)희산김승학선생기념사업회 김병기 이사와 통화해 원본은 모 기념관에 기증되었고 자료 보존 처리 중인 사실도 확인했다.

1923년 통화현에는 의성학교, 통북소학교, 광동학교가 다시 세워졌다. 서간도 한인 학교 부활은 쿡 목사에 이어 동명학교 교장 한경희 목사의 헌신적 노력에 힘입었다. 1929년에 이르러 반납배에 현지 교포들이 보성학교를 세우자 그해 7월에 전 배달학교 교사이자 광한단 단장이었던 이시열(후의 운허스님)이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때 오광심이 교사로서 같이 교육 활동을 했던 것이다.

1929년 9월 조선혁명당이 창당되자 이시열은 12월에 가입해 1930년 12월 흥경현 한흥학교 교사를 거쳐 1931년 봄부터 조선혁명당 교육부 책임을 맡았고, 오광심은 1931년 유하현 동명여학교 교사를 지낸 뒤 1932년에 가입해 조선혁명군 사령부 군수처에서 활약했다.

3. 오광심 지사 초기 이력의 오류 원인

오광심 지사의 망명 초기 이력에 오류가 생긴 시점은 2010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면서다.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에서 보성학교를 ‘배달학교’로 틀리게 기재한 채 보도자료를 배포한 데서 비롯된다. 당시 잘못된 설명은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 그대로 남아 있다.

“선생은 1930년 통화현 반납배에 있는 초등학교인 배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이 학교는 남만주의 한인 자치단체이자 독립운동기관이었던 한족회에서 설립한 민족주의 학교였다. 선생은 배달학교 교사 시절인 1930년부터 조선혁명당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오광심과 남편 김학규 지사 관련 저술, 논문, 칼럼에서 전문가조차도 예외 없이 과거 오류를 그대로 답습해 기고하고, 다시 언론을 통해 유관 기관과 인터넷 상에 오류가 퍼지고 말았다.

비록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이제부터라도 지사의 잘못된 이력이 바로 잡혀 바르게 선양되기를 바란다. “한국 여군의 효시”, “여성 광복군의 맏언니”로 칭송하기에 앞서 기초부터 공고히 하자.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