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고교를 졸업한 뒤에 몇 달 동안은 종종 만나서 놀았다. 그런데 그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오주석은 갑자기 해병대를 지원해서 갔다. 그리고는 한참 못 봤다. 대개 중고등학교 친구들은 군대에 간 뒤에는 연락이 끊기고 못 보게 되곤 하였다. 직업이 같거나 비슷해서 모일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아니면 누군가 나서서 엮지 않으면 영 못 만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졸업 후 20년 정도 지나서 동창회를 하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얼굴을 보게 되곤 했는데 그나마도 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오주석도 그렇게 잊히는 친구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신돌석씨가 군대 가기 직전에 작은 공장에 다닐 때였다. 저녁을 먹고 야간작업하기 전에 공장 담벼락에 붙어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누가 ‘돌석아’ 하고 부르면서 다가왔다. 오주석이었다. 부근 슈퍼에 음료수를 배달하러 왔다고 하였다. 제대한 뒤 곧바로 음료수 회사에 들어가서 배달하는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신돌석씨는 그날 야간작업을 해야 했고, 오주석도 근무 중이라서 간단하게 연락처 교환하는 정도로 끝냈다. 그리고 황창석까지 불러서 셋이서 만났다. 황창석은 그때 군대 말년이었는데 마침 말년 휴가를 나와 있었다. 오주석과 황창석은 서로 연락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이날이 특별히 기억되는 것은 술집에서 망신스러운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술집에서 젓가락을 두들기면서 노래 부르는 일이 남아 있었지만, 정부가 술집에서 노래하는 것을 단속하던 때였다. 하지만 아무리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이라도 사람들이 오랫동안 해오던 관습을 하루아침에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이때쯤에는 아파트 등의 주택가가 많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도심도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어 가면서 사람들이 술집에서 노래 부르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남이 부르는 것은 싫어하면서도 자기들은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경찰들도 단속한다고 하지만 상당히 귀찮게 여겼다. 이럴 때 곤란해진 것은 술집 주인들이었다. 정부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 말리기는 해야겠고, 또 싫어하는 손님들도 있으니 하지 못하게는 해야겠는데, 딱히 못하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날 셋이서 간 술집은 시내 한복판인 무교동에 있는 술집이었다. 조그마한 방들이 있어서 방바닥에 양반다리 하고 앉아서 먹는 곳이었다. 몇 차례 술잔이 돌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 뒤 버릇대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주인 여자가 세 사람에게 노래 부르지 말라고 몇 차례 당부를 했다. 그것은 간곡한 당부였다. 그래도 그치지 않자 차츰 짜증섞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해병대를 제대한 지 얼마 안 되는 오주석과 군대 말년인 황창석이 그런 것에 아랑곳할리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해병대를 제대한 오주석이 해병대들이 잘 부른다는 노래를 불렀는데 거기서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그 노래의 시작은 다 떨어진 작업복 어쩌구 하는데 정확히 생각이 안 난다. 이어지는 부분은 이랬다. ‘죽자니 청춘이요, 살자니 고생이라. 명예로운 개병대에 입대를 했네.’ 그리고는 여자 있는 집에 갔는데 그 여자가 ‘들어오세요. 앉으세요. 옷을 벗으세요.’라고 한다는 가사로 이어진다. 그걸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신나게 부르는데 마침 술집 주인이 방으로 들어오고 있는 찰나였다. 이 여자가 그 가사를 듣고는 대노한 것이었다. 뭐가 어째? 옷을 벗으라고? 이러면서 길길이 뛰더니 여기는 그런 데 아니니 당장 나가라고 하였다. 황창석이 여자를 밀쳐서 방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분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조금 있다 누가 문을 벌컥 여는데 거구의 사나이가 나타났다. 빨리 술값 계산하고 가시라고 처음에는 점잖게 말했다. 이쪽의 대꾸가 거칠어지니 방으로 들어섰다. 황창석이 일어나서 주먹을 휘둘렀으나 그한테 붙잡혔다. 그가 방 밖으로 황창석을 밀어던졌다. 워낙 힘이 좋은 거구인데다 황창석은 술까지 취했으니 상대가 안 되었다. 황창석이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 오주석이 술병을 들고 일어나서 치려고 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구의 사나이는 신돌석씨를 한번 흘낏 보더니 나가서 두 사람을 한 팔씩 잡아서 문밖으로 또 한 번 던져버렸다. 그는 노련한 기도답게 두 사람을 전혀 치지 않았다. 불과 몇 분 뒤 경찰이 왔다. 셋은 꼼짝없이 파출소로 연행되어 갔다. 소리소리 지르며 끌려가던 오주석과 황창석도 술기운이 좀 가라앉자 창피한지 조용해졌다. 신돌석씨도 창피해서 그냥 고분고분히 대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파출소 순경이 두 사람은 본서로 넘겨야 하지만 특별히 그때 손님으로 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께서 자기도 해병대 출신인데 고생한 사람이니 봐주라고 했다고 하였단다. 그래서 훈방하니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란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그렇게 힘이 센 것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더욱이 그때는 박정희가 죽은 뒤였다. 아마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직전이라 여전히 힘을 행세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사람들이 원래 지역에서는 유지로 행세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세 사람으로서는 평생 잊기 힘든 쪽팔리는 기억이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그때 셋이 만난 뒤 신돌석씨는 바로 군대에 갔다. 그리고는 한참을 더 못 만났다. 그런데 세 사람은 인연이 있는지 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황창석이 신돌석씨가 다니는 공장의 옆에 있는 공장에 영업사원으로 왔다가 신돌석씨를 만난 것이었다. 요즘은 핸폰도 있고, SNS도 있어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을 정도로 서로 연락이 되는데 당시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집 전화나 직장 전화 등을 통해서 연락을 하고, 찾아가거나 해야 되기 때문에 연락이 끊기는 경우가 많았다. 황창석은 재주가 좋은지 영업사원이 되어서 차를 몰고 다녔다. 공단 길을 걸어서 퇴근하던 신돌석씨를 누가 차에서 불러 가보니 황창석이었다. 이렇게 만나서 셋이 또 가끔이지만 연락을 주고 받고 만나게 되었다. 이때 오주석은 화물운수회사에 입사해서 일하고 있었다. 지방을 뛰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잘 안 났고, 신돌석씨도 직장에 얽매어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자연히 그래도 시간이 나고 기동성이 있는 황창석이 연락을 해서 만나곤 하였다. 그런데 이때쯤에는 신돌석씨가 노동조합을 만드는 데 함께 하고, 해고당하고, 복직투쟁을 하는 등 노동운동을 하기 시작하던 때라서 자연히 이들과는 잘 안 만나게 되었다. 더욱이 두 사람은 술만 마시면 여자 있는 술집에 가자고 해서 신돌석씨는 이들과 만나는 것이 꺼려졌다. 세상에 여자 좋아하지 않는 남자가 있을까마는, 신돌석씨는 매춘이나 성추행 등에 대해서는 자랄 때부터 상당한 거부감이 있었다. 집안 분위기부터가 그랬다. 신돌석씨의 아버지는 술에 안 취해 있을 때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술꾼이었지만, 매춘을 한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자식들한테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신돌석씨가 자란 망태산 동네에서는 이런 문제를 두고 싸움이 벌어지는 일이 아주 흔했다. 그런데도 신돌석씨 아버지는 전혀 그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와 같은 이야기를 농담으로라도 꺼내지 않았다. 망태산에 같이 살던 어느 친구의 아버지는 입만 열면 음담패설이었다. 한번은 그 아버지를 찾으러 친구가 대로변에 있는 술집에 내려가서 신돌석씨가 함께 따라간 적이 있었다. 자그마한 술집인데 젊다고는 할 수 없지만 늙지도 않은 여자가 주모와 함께 있으면서 손님 상대를 하는 집이었다. 술집에 들어서는 친구와 신돌석씨를 보고 그 아버지가 자리에 앉히고는 먹을 것을 시켜준 뒤 옆에 앉은 여자를 가리키며 친구에게 인사를 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씀이 작은엄마라고 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표정이었다. 신돌석씨는 그냥 어리둥절한 상태로 있었고, 친구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너무 많이 봐와서 그런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여자 역시 웃기만 하다가 친구를 보고는 예쁘게 생겼네 라는 말만 했다. 아버지는 그 비슷한 언행도 한 적이 없어서 신돌석씨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그냥 있었는데, 그때의 인상만은 머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 친구가 이후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그때 받은 충격에 대한 해석이 되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연애도 많이 하고 결혼 뒤 바람도 많이 피우더니 50 넘어서는 혼자 살고 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50대까지 여전히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여자들과 어울리며 산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그런 걸 멀리하라는 교육을 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냥 삶 자체를 보고 배운 것 같았다. 그 점에서는 형도 마찬가지였다. 또 하나 신돌석씨가 어린 시절 다니던 교회가 준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교회는 이성 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결벽증이 있는 곳이었다. 이성간의 접촉은 물론 교제도 극도로 막으려고 했다. 신돌석씨가 잘 따르던 젊은 전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남녀 학생이 함께 놀면 안 된다는 말을 종종 하면서 혹시라도 그런 낌새라도 보이면 개입해서 뭐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교회에 다니던 여고생과 사귀더니 함께 미국으로 가서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을 때 좀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환경보다는 노동운동을 한 뒤 형성된 의식이 그런 태도를 지니게 하는 데 더 큰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신돌석씨는 스스로 하였다.

신돌석씨가 해고된 뒤에는 바쁘기도 하였지만 연락하기가 어려워서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신돌석씨가 조직 사건으로 수배당한 뒤에 그들을 찾았다. 연락이 쉽게 되는 황창석을 통해서 오주석을 만났다. 오주석이 모는 트럭을 함께 타고 다니기도 하고, 물건을 싣는 뒤칸에서 잔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때만 해도 오주석은 일이 힘들고 수입이 적어서 불만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노동조합활동을 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졸치고는 수입이 괜찮은 직업이었고, 이전 음료수 배달보다는 훨씬 낫다고 하였다. 회사에 노조는 있었지만 완전히 어용이었다. 그러니 조합활동에 대해서도 별로 긍정적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신돌석씨가 노동운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이전 회사도 그렇고 지금 회사도 그렇고 뭔가 짖어야 해준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기가 그럴 생각은 없다고 하였다. 황창석은 좀 달랐다. 워낙 자유분방한 친구라서 남의 일에 왈가왈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신돌석씨에게 뭐하러 그리 어렵게 사냐는 말을 할 때가 있었다. 그는 영업사원을 하다가 해외 관련 일도 하기 시작하더니 무역중개상을 하는 사무실을 차렸다. 그는 중국이나 베트남과 외교 관계를 맺기 전에도 다녀오곤 하였다. 돈도 꽤 번 듯하였다. 신돌석씨는 그가 고졸인 줄 알았는데 군대를 갔다 온 다음에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을 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가수가 되려고 노력을 했던 것 같았다. 그는 당시에는 아주 드문 명동에 있는 생맥주집에서 주말마다 하는 노래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유명한 DJ가 그의 노래 실력을 극찬하였다. 그래서 모두들 그가 곧 가수가 되는 걸로 알았다. 하지만 그것도 밀어주는 사람이 있거나 돈이 있어야 하더라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돈도 벌고, 해외물도 먹어서 그런지 그의 눈으로 보기에 신돌석씨의 삶은 정말 이해하기 곤란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다투거나 멀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황창석은 남의 삶에 간섭하기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신돌석씨 역시 그가 극우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의 삶을 존중해주자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그렇게 가끔씩 만나다가 신돌석씨가 구속되었다 나오고 지역을 옮겨서 새로운 직장을 다니기 시작한 뒤 얼마 후에 셋이서 다시 만나는 일이 있었다. 이번에는 오주석이 두 사람을 불렀다. 그때 만난 곳이 오늘 만난 영등포의 횟집이었다. 오주석은 그날 신돌석씨보다 황창석에게 용건이 있었다. 구석에 있는 방에 들어가서 한참 동안 술 마시며 딴 이야기만 하던 오주석이 황창석에게 부탁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가 회사를 그만두고 사장이 되려고 한단다. 신돌석씨와 황창석 둘 다 축하한다고 했다. 신돌석씨는 그냥 축하하는 마음이 드는 정도였지만, 황창석은 정말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것 같았다. 덤프트럭을 사서 직접 운송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당시에도 억에 가까운 돈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돈을 회사에서 대출 알선을 해주겠다고 했단다. 문제는 보증 설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창석에게 부탁한다고 하였다. 아마도 단 둘이 있을 때 말하기 거북해서 신돌석씨를 함께 부른 모양이었다. 사실 신돌석씨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사정으로는 보증을 설 만한 자격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황창석은 달랐다. 집도 있었고, 수입도 괜찮았다. 어느 정도 수입이 들어오는 사업체도 작은 규모지만 운영하고 있었다. 황창석이 흔쾌하게 서주겠다고 했다. 오주석이 고맙다고 했고, 셋이 술잔을 부딪혔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황창석이 석연치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보증이 부담스러워서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황창석이 오주석에게 네가 먼저 한다고 생각한 것이냐, 아니면 회사에서 하라고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오주석이 그게 뭐 중요하냐고 하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야, 임마 그거 회사가 지입제 하겠다는 것 아니야? 니들에게 차 사게 해서 지입제로 바꾸겠다는 것 아니냐고?”

신돌석씨는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지입제라는 게 있다는 건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제조업에만 다녀본 그로서는 구체적인 실감이 오지 않았다.

“우석아, 내가 보증은 선다. 하지만 잘 생각해라. 지입제 하면 겉으로 남고 속으로 밑져. 내가 알기에도 운임료의 3-40% 이상이 회사로 들어가는 거다. 그거 오래된 고질병이야. 화물운송만 그런 게 아니지. 관광버스도 그러잖아. 시외버스 등은 다 정리된 것 같던데. 아 나쁜 새끼들 그렇게 해서 근로자들 피 빨아먹겠다고 하네.”

신돌석씨는 황창석의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을 순진하게만 살다가는 자본가들의 먹잇감밖에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두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어떡하냐? 회사를 온통 지입제로 바꾸겠다는 거야. 이미 지입제로 들어와 있는 고참들도 있어. 그리고 그 사람들 수입이 봉급 받을 때보다 낫지도 않아. 고생은 훨씬 더 하고 신경은 더 많이 쓰는데도 말야. 헌데 이번에는 심상치 않아. 싫으면 그만두어야 해. 기왕 이렇게 된 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좀더 뛰어서 돈 모아 보자는 거지. 애 엄마하고도 밤새우며 이야기해 봤어. 그 길밖에 없는 것 같애.”

오주석의 말에 황창석도 신돌석씨도 할 말이 없었다. 세 사람은 그 뒤 술만 마셨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마셔댔다. 여자 있는 술집을 가자고 황창석이 처음으로 말하지 않은 날이었다. 술집에서 나오면서 대로변으로 나설 때 황창석이 큰소리로 한마디 했다.

“야 씨팔. 정말 좆 겉은 세상이다. 나도 사업하는 놈이지만 돈 있는 놈들 정말 나쁜 놈들이다. 벼룩이 간을 꺼내 먹는다더니, 거지 똥구멍에 낀 콩나물 빼먹을 놈들 아니냐. 야, 돌석이. 이런 건 뭐 노동운동에서 어떻게 못 하냐? 만약 그런 거 하면 내가 후원금 왕창 낼게. 주석아, 내 친구야. 니가 왜 이리 힘들게 살아야 하냐?”

그런 말을 하던 끝에 황창석이 감정이 북받치는지 울기 시작했다. 오히려 오주석은 침통한 표정은 지었지만 그냥 묵묵히 걷기만 했다. 아마 그때 이후 황창석이 오주석에게 함께 사업하자는 제안을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주석은 응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친구를 잃는 길이라고 했다. 자기 문제는 자기가 풀어나간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이 몇 년 뒤 노동조합활동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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