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연재 제23회에서는 『산경표』와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다루었다.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발상지라고 하는 백두산(白頭山) 자료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백두산은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한민족(韓民族)의 발상지로, 또 개국(開國)의 터전으로 숭배했던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이며, ‘백두대간’은 백두산의 영기(靈氣)가 한반도에 흐른다는 관념을 표현한 산줄기의 호칭이다.

(24) 백두산 문헌 여러 종

근대 이후의 우리 민족은 백두산 문학사나 예술사를 정립할 수 있는 만큼의 문헌과 예술품을 남겼다. 그런데 백두산을 주제로 한 1910년도 이전의 고문헌과 이후의 근대 문헌은 그 수량이 매우 적다. 다만 1945년 이후에 창작된 시나 소설 등의 현대 문학작품과 근‧현대 미술품이나 악곡(樂曲) 등등은 상당수 있다. 이 글에서는 주로 1910년도 이전의 고문헌과 1945년 이전의 근대 문헌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 고려‧조선의 백두산 고전 문학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영토였던 시기는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시기였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 우리 민족은 한때 백두산을 잃어버렸다. 백두산이 다시 우리 민족의 영역에 들어온 시기는 조선시대이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백두산 문학은 시기적으로는 1910년 이전의 고려 및 조선시대의 것과 그 이후의 근대의 것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백두산 문학에 관한 연구서는 아직은 나온 바 없는 것 같다.

1) 려말선초 백두산 문학의 발아

문화사나 문학사에서는 『성경』을 종교문학 작품으로도 정의할 수도 있다. 인간이 글이나 말로 표현한 것(Storytelling)은 결국은 문학이다. 따라서 『삼국유사』도 역사문학작품으로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백두산 문학의 시작은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첫머리에 나오는 「고조선(古朝鮮)」조. 즉 단군신화(檀君神話)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민족이 생각해 온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의 이야기를 글이나 말로 표현한 것이 단군신화이니,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 옛 선조들의 백두산 문학이다.

단군신화 이후의 고려시대 백두산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송동북면한만호득월자(送東北面韓萬戶得月字)’라는 한시(漢詩)가 있다. 이후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는 세종 때 육진(六鎭)을 개척하여 백두산 호랑이(大虎)라고 불렸던 김종서(金宗瑞, 1382~1453)가 지은 시조 “장백산(長白山)에 기(旗)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싯겨 / 서근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히냐. / 어떠타 능연각상(凌練閣上)에 뉘 얼굴을 그릴고.”가 있다. 또한 남이(南怡, 1441~1468)의 시조 “장검을 빼어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 대명천지에 성진(腥塵)이 잠겼에라. / 언제나 남북풍진(南北風塵)을 헤쳐볼가 하노라.”라는 무인의 기개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백두산을 직접 오르고 시나 기행문을 남긴 분들은 현재 밝혀진 바로는 박종, 서명응, 홍양호, 신광하 등 네 분 정도에 불과하고, 이 네 분이 남긴 백두산 기행문이 당대에 알려진 분은 서명응과 홍양호 두 분뿐이다. 어떻든 이 네 분의 시와 기행문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 백두산 문학사의 초기는 매우 삭막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백두산 문학의 정수는 조선 후기에 나오는 이분들의 얼마 안 되는 시와 기행문이며, 백두산 고문헌의 핵심은 백두산의 인문지리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를 세분하지 않고 기록을 남긴 연대순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2) 홍세태의 「백두산기」

『유하집(柳下集)』 권9에 수록된 홍세태(洪世泰)의 「백두산기(白頭山記)」. 1731년에 운각인서체자로 인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홍세태가 직접 백두산을 둘러보고 지은 기행문이 아니라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당시 역관으로 수행하였던 김경문(金慶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1712년 이후 홍세태가 사망한 1725년 사이에 적은 것.
『유하집(柳下集)』 권9에 수록된 홍세태(洪世泰)의 「백두산기(白頭山記)」. 1731년에 운각인서체자로 인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홍세태가 직접 백두산을 둘러보고 지은 기행문이 아니라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당시 역관으로 수행하였던 김경문(金慶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1712년 이후 홍세태가 사망한 1725년 사이에 적은 것.

홍세태(洪世泰, 1653~1725)의 「백두산기(白頭山記)」는 『유하집(柳下集)』 권9에 수록되어 있다. 1712년(숙종 38)에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우고 청나라와의 국경선을 확정을 짓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이 글을 지은 홍세태는 중인 출신이었다. 글재주가 뛰어나고 특히 시로 이름이 나서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등 사대부들과 교유하였으며 임준원(林俊元)‧최승태(崔承太) 등 중인들과 시회(詩會)를 함께 하였다. 1675년(숙종 1)에 잡과인 역과(譯科)에 응시‚ 한학관(漢學官)으로 뽑혀 이문학관(吏文學官)이 되었으며 통신사 윤지완(尹趾完)을 따라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문장의 재능을 인정받아 제술관에 특히 많이 임명되었다. 사망한 후에 사위와 문인들에 의해 『유하집(柳下集)』이 간행되었다.

「백두산기(白頭山記)」의 편찬 연대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1712년 이후 홍세태가 사망한 1725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홍세태가 직접 백두산을 둘러보고 지은 기행문이 아니라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당시 역관으로 수행하였던 김경문(金慶門)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백두산정계비」의 설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史料)이다. 홍세태의 『유하집』은 1731년에 운각인서체자로 인출되었으므로, 그의 「백두산기」는 일찍이 널리 알려졌다.

3) 이중환의 『팔역지』

『팔역지(八域志)』, 이중환 후발문본(1751년), 필사본, 1책.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10행28자, 무계(無界), 책 크기 : 15×22cm.이 책의 표지에 적힌 『팔역지(八域志)』라 적혀있고, 책의 앞에는 정언유(鄭彦儒)가 계유년(1753년)에 지은 「팔역가거처서(八域可居處序)」가 있다.
『팔역지(八域志)』, 이중환 후발문본(1751년), 필사본, 1책.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10행28자, 무계(無界), 책 크기 : 15×22cm.이 책의 표지에 적힌 『팔역지(八域志)』라 적혀있고, 책의 앞에는 정언유(鄭彦儒)가 계유년(1753년)에 지은 「팔역가거처서(八域可居處序)」가 있다.
『택리지』 함경도 부분, 지도 삽입본, 필사본,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1책, 11행24자, 사주쌍변유계(四周雙邊有界), 책 크기 : 17.6×28.3cm.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팔도여지총도」와 조선 팔도(八道)의 각 지도를 싣고 있다는 점이다.
『택리지』 함경도 부분, 지도 삽입본, 필사본,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1책, 11행24자, 사주쌍변유계(四周雙邊有界), 책 크기 : 17.6×28.3cm.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팔도여지총도」와 조선 팔도(八道)의 각 지도를 싣고 있다는 점이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는 지리학이나 역사지리학에서 아주 중요한 지리서이다. 제23회 연재에서는 지나가며 언급하였다. 『택리지』는 실학자 이중환이 평안도와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의 현지답사를 토대로 1751년에 편찬한 지리서이다. 1912년 6월 15일 조선광문회에서 민제호(閔濟鎬) 소장본(所藏本)에 의거하여 근대식 연활자판으로 발행하기 이전에는 필사본으로 전해졌다.

『택리지』라는 명칭 이외에도 『팔역지(八域誌)』 『팔역가거지(八域可居地)』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 『형가승람(形家勝覽)』 『팔도비밀지지(八道秘密地誌)』 『복거설(卜居說)』 등 여러 이름의 필사본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나는 20대부터 『택리지』에 관심이 많았기에 지금까지 다섯 종의 택리지를 소장하고 있다. 한 종은 「복거(卜居)」만을 쓰고 있어 별 의미가 없으므로, 다섯 종 가운데 주목할만한 것은 아래의 네 종이다.

① 『팔역지(八域志)』, 이중환 후발문본, 필사본, 1책, 10행 28자, 무계(無界), 책 크기 : 15×22cm. 책 끝에 수록된 ‘후발(後跋)’ 마지막에 ‘백양초하상완(白羊初夏上浣) 청화산인서(靑華山人書)’라고 밝히고 있어, 이중환이 신미년(1751년)에 후발을 지었음을 의미한다. 통상적으로 후발은 탈고하면서 짓는다. 그런데 이 책의 앞에는 정언유(鄭彦儒)가 계유년(1753년)에 지은 「팔역가거처서(八域可居處序)」가 있다. 이를 보면 『택리지』의 원서명(原書名)이 이 책의 표지에 적힌 『팔역지(八域志)』나, 『팔역가거처(八域可居處)』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② 『택리지』, 지도 삽입본, 필사본, 1책, 11행 24자, 사주쌍변유계(四周雙邊有界), 책 크기 : 17.6×28.3cm. 이 책은 2권1책 식으로 『택리지』를 상편과 하편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팔도여지총도」와 조선 팔도(八道)의 각 지도를 싣고 있다는 점이다. 책의 수미(首尾)가 한 장 정도씩 낙장 되었고, 좀이 먹은 상태로 수리가 필요하다.

『복거설(卜居說)』, 계유(1753년)모춘 정언유(鄭彦儒) 서문본, 필사본,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1책, 12행26자, 무계(無界), 책크기 : 23.6×36.5cm. 이 책은 조선광문회본의 저본(底本)으로 보인다. 표지에는 『복거설(卜居說)』로 적혀있다.
『복거설(卜居說)』, 계유(1753년)모춘 정언유(鄭彦儒) 서문본, 필사본,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1책, 12행26자, 무계(無界), 책크기 : 23.6×36.5cm. 이 책은 조선광문회본의 저본(底本)으로 보인다. 표지에는 『복거설(卜居說)』로 적혀있다.

③ 『복거설(卜居說)』, 계유(1753년) 모춘 정언유(鄭彦儒) 서문본, 필사본, 1책, 12행 26자, 무계(無界), 책크기 : 23.6×36.5cm. 이 책은 조선광문회본의 저본(底本)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서지학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표지에는 『복거설(卜居說)』로 적고 있다.

④ 『택리지』, 조선광문회본, 근대식 연활자본, 1책, 17행 35자, 사주쌍변무계(四周雙邊無界), 책 크기 : 15.3×22cm. 1912년 6월 15일 조선광문회에서 민제호(閔濟鎬) 소장본(所藏本)에 의거하여 근대식 연활자판으로 발행한 사실상의 초판본이다.

『택리지』의 내용은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총론(八道總論)」 「복거총론」(卜居總論) 「총론(總論)」 등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사민총론」은 국가를 구성하는 백성들의 역할과 살 만한 곳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고, 「팔도총론」은 우리나라의 산세와 위치, 8도의 위치와 역사적 배경, 도별 자연환경·인물·풍속 등을 파악해 종합적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복거총론」에는 당시 조선사회의 취락과 거주지의 이상적인 조건 등을 조목별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은 조선중기와 후기의 모화사대주의(慕華事大主義) 관점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 책은 18세기 중엽 조선의 국토와 사회를 거시적이고 종합적으로 조망하여 당시 사회를 파악하는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4) 박종의 「백두산유록」

박종(朴琮)의 「백두산유록(白頭山遊錄)」은 『당주집(鐺洲集)』 권14에 실려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18세기 이전에 백두산을 등반한 기행문은 아직 확인된 바 없다. 그런데 이 「백두산유록」에 의하면, 홍계희(洪啓禧, 1703~1771)가 이미 1742년에 어명을 받들어 갑산‧무산으로 들어오면서 백두산을 편람 한 기록이 있다고 하였고, 또한 박종에 앞서 2년 전인 1762년에 조영순(趙榮順, 1725~1775)이 백두산을 등정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의 여행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선후기인 1764년(영조 40)에 함경북도의 실학파 선비인 박종(朴琮)이 직접 백두산을 탐승하여 순 한문 기행으로 남긴 이 「백두산유록(白頭山遊錄)」은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백두산 기행문이다. 이에 나는 260여 년 전 시골 선비 박종에게 현대의 애서운동가로서 경건하게 경의를 표한다.

박종의 시문집 『당주집』은 21권 7책으로, 1931년에 6대손 박치룡(朴致龍)에 의하여 근대식 연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즉 박종의 「백두산유록」은 그 내용이 사실적으로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어, 200여 년 전의 백두산의 실황을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지만, 20세기에 들어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아쉬운 점이 있다.

1764년 5월 14일 박종은 신상권(申尙權)과 함께 산천도(山川圖) 한 장과 책 몇 권 만을 가지고. 경성군(鏡城郡)에 있던 자기 집을 떠나, 부령(富寧)‧무산(茂山)‧임강대(臨江臺)‧풍파(豐坡)‧천평(天坪)‧천동(泉洞)을 거쳐 23일에 최고봉에 오른 뒤 하산하여 6월 2일에 집에 돌아왔다. 비록 말을 이용하였으나, 18일 동안 왕복 1,322리를 다녀서 백두산을 탐승하였으니,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백두산유록」의 형식은 노정(路程)‧일시(日時)의 차례로 썼다. 백두산 주변의 여러 읍과 고적‧풍토를 견문으로 낱낱이 적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만강 변 무산읍의 산보(山堡)인 번호노토부락고지(潘胡老土部落古地)와 갑령(甲嶺)과 소백산, 풍파(豐坡)에서의 등에(말‧쇠피를 빨아먹는 벌레)의 극성, 장백산(長白山)과 천평(天坪)의 광활함, 그 서쪽의 백두산, 백두산 서남의 보타산(寶陀山)‧대홍단수(大紅丹水)‧소대류동(小大柳洞)‧삼태봉(三台峯, 일명 豆乙粥)‧귀롱소(鬼隴所)와 삼지(三池), 천수동(泉水洞)과 포석(泡石, 또는 東石)‧오라총관(烏喇總管)‧목극등(穆克登)의 분계비(分界碑), 천지의 장관과 크고 작은 돌 봉우리 100여 개, 흑룡강 원두(原頭), 천지 북쪽의 후죽봉(帿竹峯), 녹운동령(綠雲東嶺)에 올라 바라본 백두산, 그 아래의 천평, 천평 끝의 남증(南甑)‧녹운, 그 아래의 소홍단(小紅丹)과 토문강(土門江), 주민이 사창(社倉)을 설치하고 사는 오암(烏巖)과 노평(蘆坪), 소대로평(小大蘆坪)과 정평(正坪), 압록강 서쪽의 후주(厚州)와 폐사군(廢四郡)‧강계(江界)를 답사하고 온촌(溫村) 종숙댁(從叔宅)에서 자고 돌아오기까지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백두산유록」에서 특기할 것은 군사지리적‧경제지리학적인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북으로 풍파에서 폐사군까지 1,000여 리의 땅은 공연히 폐기되어서 배는 찼는데 등이 비어 있는 것과 같다. 만일 호적(胡賊)이 백산(白山)에서 등 부분의 허점을 노려 함경북도의 단천‧길주‧경성‧부령 사이에서 갈라져 나온다면 연해(沿海) 여러 읍은 삼분오열되어 맥락이 불통하고 남북의 원수(元帥)가 비록 손자‧오자의 병법이 있다 할지라도 속수무책일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남단과 북쪽 여러 보성(堡城)의 토졸(土卒)을 내지에 모으고, 북도 유민(流民)을 장파(長坡)와 정평 사이에 이입시켜 수년 내에 토지를 개척한다. 백성을 풍부하게 한 다음에 장파‧오암 두 곳에 읍을 설치한다. 그러면 북으로 무산을 관할하고 서쪽으로 갑산을 통할하여 서쪽 여러 보성을 내지에 있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서토(西土)의 유민을 후주와 폐사군에 이입시켜 읍을 만들고 관(官)을 설치하면 오랑캐의 도적질을 막게 될 것이요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는 그의 실학자로서의 견해를 보여 준다고 하겠다.

「백두산유록」은 백두산의 풍토‧기후‧이수(里數)와 방위 등을 자상하게 노정 순서에 따라 일기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백두산 주변 여러 읍의 1,000여 리에 걸친 버려진 땅에 대한 척토광민(拓土廣民)을 위한 이상과 포부, 군사상 방수지책(防守之策), 토지에 대한 감식안 등에서 그의 국토애‧자연애가 역력히 엿보이고 있다.

5) 서명응의 「유백두산기」

영조 때의 문신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의 『보만재집(保晩齋集)』 속에도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가 있다. 「유백두산기」는 1766(영조 42년) 서명응이 조엄(趙曮, 1719~1777) 등과 함께 백두산에 오른 후 돌아와 쓴 백두산 유람기(遊覽記)이다.

서명응은 1754(영조 30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제학,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다. 그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홍문관록의 선출을 주관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사양하다 갑산부(甲山府)로 유배 가게 되었고, 조엄 또한 부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아니하여 삼수부(三水府)로 유배 가게 되었다. 이들 두 사람은 유배길에 서로 만나 백두산 근처에 유배된 것을 계기로 백두산에 오를 것을 합의하고 갑산 부사 민원(閔源), 삼수 부사 조한기(趙漢紀) 등과 함께 왕복 8일에 걸쳐 백두산에 올랐다.

이들 일행은 갑산부에서 출발하여 운총진, 심포(深浦), 임어수(林魚水), 연지봉 아래로 하여 백두산 정상까지 올랐고, 천수, 자포, 운총으로 되돌아왔다. 이들은 백두산의 절경에 흠뻑 취하여 산에 올랐지만, 한편으로 국방 문제 즉 백두산 일대 지역의 보(堡), 진(縝) 영(營)을 둘러싼 방어망 구축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였다. 더욱이 운총에서는 지형과 제시를 살피고 위도를 측정하기 위해 ‘상한의(象限儀)’라는 부채꼴 모양의 천체 고도 측정기를 만들어 수시로 이용하였다. 이러한 위도의 측정은 후일 「대동여지도」 같은 정확한 지도를 만드는 데 기본 자료로 활용된다.

이들은 이른바 ‘분수령’에 이르러 백두산정계비를 보고 경계가 잘못되었음을 밝히고, “분개강과 합류해 두만강으로 들어가고, 두만강은 다시 백두산 동쪽으로 넘쳐흐르니, 그 근원을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인데도 7백리 땅을 하루아침에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잃었다”라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아울러 그때 우리 측 대표였으나 그 현장에 참여하지 않았던 접반사 박권(朴權, 1658~1715)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李善溥, 1646~1721)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백두산정계비 건립 이후 현장을 직접 답사한 고위 관료의 시각이라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이들은 백두산 열두 봉우리의 이름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처음으로 그 이름들을 지어 주었다. 서명응과 조엄은 하산 길에 유배에서 풀렸다는 공문을 받았다. 이들은 “죄를 입은 것이 백두산을 유람시키고자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표현할 만큼, 유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이용하였다. 이들이 해당 고을의 수령과 함께 많은 노복들을 대동하고 백두산을 유람한 사실은 당시 유배 문화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유백두산기」는 백두산의 풍경을 읊은 유람기로써 뿐만 아니라,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6) 홍양호의 「백두산고」

1778년경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홍양호(洪良浩, 1724~1802) 편저 『북새기략(北塞記略)』의 「백두산고」는 함경도 지방의 풍토기로서 홍양호의 문집인 『이계집 외집(耳溪集 外集)』 권12에 실려 있다. 「백두산고」는 백두산에 관한 당대의 지리 정보를 종합한 문헌으로, 백두산의 역사, 지형, 산맥, 계곡, 생태 등의 정보와 백두산에서 발원한 강에 대한 정보를 서술하였다. 또한 이를 집약 구현한 지도인 「백두산도(白頭山圖)」를 수록하고 있다. 이 지도는 가장 오래된 백두산 지도이다.

「백두산고」는 백두산의 지리 정보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수록된 정보들은 조선 영역에 대한 것과 청나라 영역에 대한 것으로 크게 나뉘는데, 청나라 영역에 대한 것은 다시 조선에서 생성 전승된 정보와 『성경통지』, 『대청일통지』 등 청나라 지리서에서 파악한 정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처럼 지리 정보의 출처가 상이함으로 인하여 서로 다른 내용과 성격의 정보가 함께 수록되어 있기도 한데, 이 점에 유의하여 「백두산고」를 독해할 필요가 있다.

『북새기략(北塞記略)』의 「백두산고」는 조선 후기의 백두산 인식과 북방 영토 인식, 역사 인식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매우 가치가 높다.

7) 신광하의 『북록』

『북록(北錄)』 원본. 신광하(申光河)의 1783년 백두산 기행 시문집.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북록(北錄)』은 백두산 문학의 정수(精髓)라 할 만하다. 이 『북록』의 끝에, 1788년(戊申) 원월(元月) 하한(下澣)에 양천(陽川) 허만(許晩) 성보(成甫)가 자필로 쓴 「제진택자백두유록후(題震澤子白頭遊錄後)」가 4면에 걸쳐 있다.
『북록(北錄)』 원본. 신광하(申光河)의 1783년 백두산 기행 시문집.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북록(北錄)』은 백두산 문학의 정수(精髓)라 할 만하다. 이 『북록』의 끝에, 1788년(戊申) 원월(元月) 하한(下澣)에 양천(陽川) 허만(許晩) 성보(成甫)가 자필로 쓴 「제진택자백두유록후(題震澤子白頭遊錄後)」가 4면에 걸쳐 있다.
『북록(北錄)』 원본. 신광하(申光河)의 1783년 백두산 기행 시문집.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북록(北錄)』은 백두산 문학의 정수(精髓)라 할 만하다. 이 『북록』의 끝에, 1788년(戊申) 원월(元月) 하한(下澣)에 양천(陽川) 허만(許晩) 성보(成甫)가 자필로 쓴 「제진택자백두유록후(題震澤子白頭遊錄後)」가 4면에 걸쳐 있다.
『북록(北錄)』 원본. 신광하(申光河)의 1783년 백두산 기행 시문집.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북록(北錄)』은 백두산 문학의 정수(精髓)라 할 만하다. 이 『북록』의 끝에, 1788년(戊申) 원월(元月) 하한(下澣)에 양천(陽川) 허만(許晩) 성보(成甫)가 자필로 쓴 「제진택자백두유록후(題震澤子白頭遊錄後)」가 4면에 걸쳐 있다.

진택(震澤) 신광하(申光河, 1729~1796)가 1783년에 백두산을 기행한 기록 『북록(北錄)』은 백두산 문학의 정수(精髓)라 할 만하다. 1985년에 『숭문연방집(崇文聯芳集)』에 수록한 『진택선생문집(震澤先生文集)』을 만들면서 『북록』의 한시(漢詩)만을 재편(再編)하여 권지6에 「백두록(白頭錄)」이란 제호(題號)로 수록하고 있다.

신광하는 1751년(영조 27)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로 전국을 유람한다. 1778년 금강산을 구경하고, 1783년 백두산에 올라서 대각산(大角山)에서 산제(山祭)를 지내고, 추풍등대각(秋風登大角)에 낙일견중원(落日見中原)의 시구를 남겼다. 『북록』은 당시 백두산 기행문 및 시문(詩文)을 정서(淨書)한 원본이다.

산광하의 『북록』은 『진택선생문집(震澤先生文集)』 권지6 「백두록(白頭錄)」에 수록되지 않은 기행문 성격의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 제문(祭文)인 「제백두산산신문(祭白頭山山神文)」, 「상번암서(上樊巖書)」 등등의 문(文)도 싣고 있고, 한시의 수록 순서도 「백두록」과는 다른 초고의 온건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북록』은 백두산 문학의 정수라 할 만하다”라고 평가된다.

진택은 『북록』을 쓴 이후 1786년에 조경묘참봉(肇慶廟參奉)에 제수되고, 그 뒤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형조좌랑인제현감(麟蹄縣監)‧우승지‧공조참의를 거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시문(詩文)을 좋아하여 평생 삼천리강산을 유람하며 지은 시를 『남유록(南遊錄)』 『사군록(四郡錄)』 『동유록(東遊錄)』 『북유록(北遊錄)』 『백두록(白頭錄)』 『풍악록(楓岳錄)』 『서유록(西遊錄)』 등으로 묶어서 2,000여 수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신광하는 목만중(睦萬中)‧이헌경(李獻慶)‧정범조(丁範祖) 등과 함께 당대의 사문장(四文章)으로 꼽혔지만, 신광하의 저서 『진택선생문집(震澤先生文集)』은 필사본으로 집안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다가 사후 190여 년 만인 1985년 9월에 이르러서야 신광수와 신광연, 신광하, 부용당(芙蓉堂) 신씨 등 4남매의 합동 문집인 『숭문연방집(崇文聯芳集)』에 포함되어 세상에 나왔다. 즉 신광하 문학세계의 전모(全貌)는 아쉽게도 너무 늦게 1985년에 와서야 학계에 알려진 것이다.

그러니 그의 「백두록」이나 『북록』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신광하의 저서 『진택선생문집』이 이렇게나마 전승되어 널리 알려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8) 홍의영의 『북관기사』

『북관기사(北關紀事)』는 홍의영(洪儀泳, 1750∼1815)이 북평사(北評事)로 함경도 일대를 돌아본 뒤 그 지방의 연혁과 정황 및 자신의 개혁안을 엮어 임금에게 바친 책이다. 편찬의 시기와 경위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말미에 홍문관부수찬인 홍의영이 찬진(撰進)했다는 기록만 있다.

다만 이 책의 본문에는 “작년에 감사 이만수(李晩秀, 1752~1820)와 함께 무산과 육진(六鎭)의 환폐(還弊)를 논하고 이혁(釐革)하려고 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만수는 1806년(순조 6) 6월에 함경감사에 임명된 바 있다. 또한 『일성록(日省錄)』 1808년 8월의 기록에, 순조가 서영보(徐榮輔) 심상규(沈象奎)와 『만기요람(萬機要覽)』의 편찬을 논의하는 중에 이 책 『북관기사』를 전평사(前評事) 홍의영이 저술한 것이라 하면서 참고하도록 내려준 사실이 있다. 이것으로 보면 이 책의 저술 연대는 1807년 또는 1808년의 상반기로 고정(考定) 할 수 있다.

이 책은 기록이 많지 않은 함경도 지역의 자료로, 이 책에는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 문제가 곳곳에 언급되고 있다. 즉 백두산정계비는 1712년(肅宗 38)에 청의 오나총관 목극등(穆克登)과 접반사(接伴使)로 판서 박권(朴權)이 함께 조사하여 정계비를 세운 것으로 당시 박권이 잘못하여 강을 쫓아 비를 세웠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이 책은 「백두산정계비」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필사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9) 김노규의 『대한북여요선』

대한북여요선(大韓北輿要選), 1903년 김노규(金魯奎) 편찬.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1904년, 전사자본(全史字本). 2권1책. 10행22자, 사주단변(四周單邊), 계선(界線), 반곽(半郭) 23.3×15.2cm, 상하향백어미(上下向白魚尾).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와 한‧청 국경, 간도(間島)의 영유권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한북여요선(大韓北輿要選), 1903년 김노규(金魯奎) 편찬.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1904년, 전사자본(全史字本). 2권1책. 10행22자, 사주단변(四周單邊), 계선(界線), 반곽(半郭) 23.3×15.2cm, 상하향백어미(上下向白魚尾).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와 한‧청 국경, 간도(間島)의 영유권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한북여요선(大韓北輿要選)은 1903년에 김노규(金魯奎)가 백두산정계비와 한·청 국경, 간도(間島)의 영유권 문제에 관하여 편찬하여 1904년에 전사자(全史字)로 출간한 2권 1책 본이다. 표제는 ‘大韓北輿要選(대한북여요선)’이고, 사주단변(四周單邊)에 반곽(半郭) 23.3×15.2cm, 계선(界線)이 있으며, 10행 22자에 상하향백어미(上下向白魚尾)이다.

편찬 당시 백두산정계비 문제가 대두되고 양국 관리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에서 경원(慶源)의 처사(處士) 김노규는 국경 문제에 주목하여, 고금의 여러 문헌에서 자료를 모으고 자기의 의견도 첨가하여 경계시찰위원(境界視察委員)의 참고 자료가 되도록 하였다. 전임 의정부내부대신 이건하(李乾夏)가 1903년에 쓴 서문과, 농상공부대신 김가진(金嘉鎭), 유완무(柳完茂), 오재영이 1904년에 쓴 서문이 권두에 있다.

본문의 내용은 상편에는 백두고적고(白頭古蹟攷)ㆍ백두구강고(白頭舊疆攷)ㆍ백두도본고(白頭圖本攷)ㆍ백두비기고(白頭碑記攷)가 있는데, 저자는 상권에서 간도의 영유권 문제가 백두산의 문제와 관련이 있음을 인식하고, 백두산과 정계비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검토해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므로 백두산이 우리 영토였음을 주장했다.

하편에는 탐계공문고(探界公文攷)‧감계공문고(勘界公文攷)‧찰계공문고(察界公文攷)‧사계공문고(査界公文攷)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는 하편에서는 1881년(고종18년) 청나라와의 분쟁과 간도 및 두만강 연변의 한인들 반응을 탐계공문고에, 1883년(고종20년) 안변부사 이중하를 감계사로 삼아 조사했던 일들을 감계공문고에, 1897, 1898년 함북관찰사가 정계비처와 국경 지대를 조사했던 내용 등을 찰계공문고와 사계공문고에 정리하였다. 당시 간도에는 2만 7,400호에 약 10만 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책 끝에는 북간도 조약위원이었던 이병순(李秉純)이 1903년에 쓴 발문이 있다.

하권에서는 안설(按說)을 붙여 자신의 의견을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 이 책은 간도의 영유권 문제와 조선 후기 국경 분쟁의 내용을 살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한말 격동기의 한국인의 간도에 대한 역사 인식의 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때 신흥무관학교의 교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나. 근대의 백두산 문학

근대 시기의 백두산 문학의 정수는 1927년에 한성도서에서 간행한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의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와 1931년에 조선중앙일보에서 간행한 민세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의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가 있다. 두 저자가 모두 백두산을 직접 등반하면서, 백두산의 실경을 매우 소상하게 적었을 뿐만 아니라, 백두산에 얽힌 전설과 역사적인 사실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여 민족정기를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외에도 일제 강점기의 백두산에 대한 특이한 기행문으로는 조선중앙일보 기자였던 이관구(李寬求, 1898~1991)가 비행기로 관찰한 백두산의 비경을 「백두산탐험비행기(白頭山探險飛行記)」로 남겼다.

1)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 최남선(崔南善), 1책, 1927년 7월 15일 한성도서주식회사.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 최남선(崔南善), 1책, 1927년 7월 15일 한성도서주식회사.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백두산에 대한 근대의 기행문학으로서는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의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가 처음이 될 것이다. 기행문의 날짜 표시로 볼 때 1926년 7월 26일부터 하산일 인 8월 4일까지의 백두산 등반 기행을 기록하였는데, [동아일보]에는 1926년 7월 28일부터 연재되었다. 1927년 7월 15일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1책으로 간행하였다.

육당 최남선은 1919년 3,1독립선언에 참여한 33인 가운데 1인이었고, 이 책은 국토 순례에서 얻어진 나라 사랑의 마음을 잘 말해준 책이다. 모두 40항으로 되어 있다. 최남선은 이 기행문에서 우리나라의 국토 전체가 백두산으로 형성된 듯이 묘사하며 시작한다. 경원선을 타고 함경도를 지나며 그 산천과 평야와 해안선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그 지역에 얽힌 역사적 내력도 알려준다.

기행의 여정을 보면 풍산을 향해 후치령을 넘는데, 이 과정에서 함경도의 산속 생활의 여러 모습을 설명하고, 갑산과 단천에서 집마다 ‘제석동의’를 숭배하는 일을 설명하면서 우리나라 고유의 민간신앙이 단일한 천신족(天神族)의 신화인 단국천왕(檀國天王)에서 전해 내려옴을 일깨워 준다. 풍산을 지나 응덕령을 향하는 도중에는 북국 산악의 심오한 아름다움을 기록한다. 혜산진을 출발해서는 압록강의 이국적 풍물도 언급하며, 백두산 아래의 산중(山中) 촌과 태산리의 사정을 묘사하고, 허두령을 지나는 밀림의 도정(道程)도 그리고 있다.

『백두산근참기』의 문장은 사물과 그 내력과 감상을 말하는 데 막힘이나 궁색함이 없으며 긴 호흡으로 자연스럽게 펴나가며, 풍부한 어휘와 세밀한 관찰을 역력히 드러낸다. 신무치 무두봉 연지봉을 지나면서 이 지역에 설치되어 있는 정계비에 관한 사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국사학자로서 학술적 고증을 기술한다.

백두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감격은 대단한 것으로 29항에서 39항까지가 정상과 천지의 웅자와 신비를 예찬하는 기록이며 노래로 쓰고 있다.

육당 최남선은 1928년 10월 조선사편수회 촉탁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부터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부터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이 책은 그가 변절하기 이전에 저술한 책이니 만치 그의 민족 기개가 들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 책은 만약 육당 최남선이 친일로 변절하지만 않았다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하는 책이다.

2) 안재홍의 『백두산등척기』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 안재홍(安在鴻), 1책. 1931년 6월 30일, 유성사(流星社) 서점. 1993년 삼성출판박물관(관장 김종규) 영인본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안재홍은 1930년 8월 11일부터 9월 15일까지 [조선일보]에 34회에 걸쳐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를 연재.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 안재홍(安在鴻), 1책. 1931년 6월 30일, 유성사(流星社) 서점. 1993년 삼성출판박물관(관장 김종규) 영인본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안재홍은 1930년 8월 11일부터 9월 15일까지 [조선일보]에 34회에 걸쳐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를 연재.

안재홍 (安在鴻 ; 1891~1965)은 1930년 8월 11일부터 9월 15일까지 『조선일보』에 34회에 걸쳐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를 연재하였다. 이를 1931년 6월 30일 유성사(流星社) 서점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안재홍을 포함한 백두산 등반대 일행이 서울을 떠나 원산 무산 두만강 기슭을 거쳐,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 경관을 감격스럽게 바라보고, 다시 하산하여 압록강 연안의 혜산 풍산을 거쳐 북청 해안가에 들렀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이 선명하고도 장엄한 문체로 기록되어 있는 당대의 대표적인 기행문이다.

『백두산등척기』의 내용으로는 태봉(泰封) 고원의 청량미, 웅려명미한 옥저(沃沮) 산하의 풍경, 차유령(車踰嶺)을 넘어서 두만강 기슭으로, 홍단영사(紅湍靈祠)에 잠깐 들러, 천평(天坪) 건너는 나그네, 무한비장한 고원의 밤, 무두봉상(無頭峯上)무두대관(無頭大觀), 정계비 변산해비(邊山海悲), 장엄한 대백두(大白頭), 자일(慈日) 혜풍(惠風)의 성모애(聖母愛), 천지의 꿈! 유유탕탕한 만고몽(萬古夢), 백두산 문헌소초(文獻小抄), 웅대한 단조(單調)·영상(靈祥)한 평범, 정명섬려(貞明纖麗)한 삼미지(三美池), 백두정간(白頭正幹)의 허항령(虛項嶺), 백두화산(白頭火山) 활동의 자취, 변경(邊境) 동포의 생활상, 녹수중중(綠水重重)의 압강상류(鴨江上流), 졸본고원(卒本高原)넘기 등 내용의 과정이 선명하고도 장엄한 문체로 표기되어 있어 이 시기 기행문의 하나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관구와 김동업의 「백두산탐험비행기」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기자였던 이관구(李寬求, 1898~1991)가 비행기로 관찰한 백두산의 비경을 「백두산탐험비행기(白頭山探險飛行記)」라는 제목으로 [조선중앙일보]에 1935년 10월 11일부터 그해 11월 10일까지 연재하였다.

이외에도 같은 탐험 비행 기회를 이용하여 김동업(金東業)이 백두산 탐험 비행기에 탄 소감을 「성지 백두산 탐험비행기(聖地 白頭山 探險飛行記)」라는 글로 써서 『삼천리』 잡지 제7권 제10호(1935년 11월 1일 발행)에 기고한다.

다. 현대 백두산 문학의 태동

현대의 백두산 문학작품은 ‘현대문학사’에서의 연구 과제이다. 나는 문학사 연구자가 아니지만, 본 연재물의 흐름상 여기서는 백두산 문학에서 시와 소설 부문의 시작 만을 약간 언급하고자 한다.

1) 장편 서사시 『백두산』

백두산을 무대로 한 첫 현대 문학 작품은 북에서 나온 조기천(趙基天, 1913~1951)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으로 보인다. 이 장편 서사시는 1930년대 백두산을 거점으로 만주 일대와 함경도 국경 지대에서 활동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의 과정을 서사시의 형식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 작품의 핵심은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 승리를 예찬하는 데에 있다. ‘서두와 본시, 결말’의 3부로 되어 있으며 본시는 총7장으로 구성하고 있다. 조기천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은 1947년 2월에 창작한 작품으로 탈고와 동시에 북의 『로동신문』에 10회에 걸쳐 연재되었으며, 1947년 4월 30일에는 ‘로동신문사’에서 단행본 시집 첫판을 발행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재간(再刊)되었는데, 1940∼50년대에 출간된 것과 1980년대 이후 출간된 판본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후 판본에는 소련과 관계된 내용이 모두 삭제되어 있다. 현재 이 서사시는 ‘머리시’, 제1장∼제7장의 ‘본시’, ‘맺음시’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길이는 전체 1,564행이다.

한편, 남에서는 1984년 7월, 진태하(陳泰夏, 1939~2018)가 국토분단 이후 한국 국적으로서는 최초로 민족의 성역 백두산을 등정한 감격을 ‘백두산’이라는 시로써 토로한 것이 있다. 그러나 백두산에 대한 한국의 장편 서사시로는 고은(高銀)이 1987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하여 1994년에 완성한 장편 서사시집 『백두산』 7권이 있다. 이 시는 근대적 변혁과정이 시작되는 조선말기부터 일본 식민지 시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여 한국인들이 겪게 되는 역사적 고통과 그 극복의 과정을 격렬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이 시의 서시를 보면 “장군봉 망천후 사이 억겁 광풍이여 그 누구도 다스리지 못하는 광풍이여 조선 만리 무궁한 자손이 이것이다 보아라 우렁찬 천지 열여섯 봉우리마다 내 목숨 찢어 걸고 욕된 오늘 싸워 이 땅의 푸르른 날 찾아오리라.”라고 쓰고 있다.

2) 장편 소설

백두산을 무대로 한 소설은 이미륵(李彌勒, 1899~1950)의 장편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1946, 독일어)가 있다. 저자는 여기에서 백두산 주변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백두산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소설은 안수길(安壽吉, 1911~1977)의 장편 소설 『북간도(北間島)』이다. 1959년 4월 『사상계 思想界』에 제1부가 발표되면서 시작하여 1967년에 제5부로서 완료되었다. 문학 평론가 백철(白鐵)은 이 소설에 대하여 “해방 뒤 10여 년 내의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 『북간도』가 아니던가 느껴진다. 그만큼 『북간도』는 근래의 우리 문학사를 대표한 작품인 줄 안다.”라고 평하였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북간도가 배경으로 되어 있으나, 백두산 일대의 묘사와 그에 얽힌 전설도 많이 삽입되어 있다. 이 소설 전체에 흐르는 삶의 강인한 정신력이 등장인물 중 한복이를 통하여 나타나는데, 한복이는 백두산의 혼을 닮아 있다.

한편 이북에서 백두산을 무대로 한 소설은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기를 그린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강화한 주체주의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3) 전설 문학

『백두산』 부분, 최계근 작, 조선화, 1999년, 600호. 인민예술가 최계근 화백의 대표작이다. 사진Ⓒ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북측의 작가가 그린 백두산 그림 40여점과 남측의 작가가 그린 한라산 그림 40여점으로 ‘한라-백두전’을 개최하고 싶다. 주최할 단체와 협찬처를 찾는다.
『백두산』 부분, 최계근 작, 조선화, 1999년, 600호. 인민예술가 최계근 화백의 대표작이다. 사진Ⓒ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북측의 작가가 그린 백두산 그림 40여점과 남측의 작가가 그린 한라산 그림 40여점으로 ‘한라-백두전’을 개최하고 싶다. 주최할 단체와 협찬처를 찾는다.
『백두산』, 리경남 작, 1993년, 500오. 인민예술가 리경남 화백의 대표작이다. 1993년 가을에 북경에서 매입하였다. 사진Ⓒ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북측의 작가가 그린 백두산 그림 40여점과 남측의 작가가 그린 한라산 그림 40여점으로 ‘한라-백두전’을 개최하고 싶다. 주최할 단체와 협찬처를 찾는다.
『백두산』, 리경남 작, 1993년, 500오. 인민예술가 리경남 화백의 대표작이다. 1993년 가을에 북경에서 매입하였다. 사진Ⓒ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북측의 작가가 그린 백두산 그림 40여점과 남측의 작가가 그린 한라산 그림 40여점으로 ‘한라-백두전’을 개최하고 싶다. 주최할 단체와 협찬처를 찾는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 발상의 성지로서 이에 대한 전설(傳說, 說話)도 적지 않다. 백두산 설화가 본격적으로 수집 정리된 것은 청나라 말에 유건봉(劉建封)이 편찬한 『장백산강강지략(長白山江崗志略)』에서부터이다. 유건봉은 청나라 길림성 안도현 지현(知縣)을 역임한 사람으로 1908년 5월부터 국경을 감독하는 감계 위원으로 임명되어 백두산을 답사하고 이 책을 편찬했는데 여기에는 150편에 달하는 한족(漢族)‧만주족(滿洲族)‧조선족(朝鮮族)의 설화를 한문으로 적고 있다.

백두산에 대한 전설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동포들이 상당수 수집하여 전설고사집을 편찬하였다. 정길운이 수집‧정리하여 1962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간행한 『천지의 맑은 물』은 「천수(天水)」 「물」 「용천골」 「박지형」 「봉선화」 「신랑신부」 「힘센 총각」 「목동과 공주」 「선량한 바위」 「금송아지」 「보쌈 막은 총각」 「도적질 잘하는 사람」 「소는 어째 ‘이랴’하면 가는가?」 「나비 한 쌍」 등이 14편이 수록되었다.

이듬해(1963년) 정길운은 『천지의 맑은 물』 14편 가운데 일부 수정한 내용 12편을 넣고, 새로 수집한 설화를 보충하여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전체 38편을 엮은 『백일홍』을 내놓았다. 그러나 1967년부터 시작된 10년간의 문화 대혁명 기간에는 그가 편한 『천지의 맑은 물』 등이 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를 고취한 독초(毒草)로 비판당하였다.

이후 백두산 설화의 수집 간행은 이천록‧최룡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두 사람은 백두산 일대를 현지답사하여 수집한 설화 중 백두산에 얽힌 전설 35편만을 따로 모아 『백두산전설』이라는 이름으로 1989년 연변 인민출판사에서 한글로 간행하였다.

연변 인근에서 채집된 백두산에 관한 전설로, 「백두산의 목동과 선녀」‧「백두산의 사냥꾼과 호랑이」‧「오늘날 왜 호랑이가 보기 드문가?」‧「백두산의 화마」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백두산의 목동과 선녀」는 우리 민족의 발상과 재미있게 연관을 시켰으며, 우리 민족이 백두산을 마치 신앙처럼 숭상하고 좋아하는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백두산은 단군의 개국 신화 외에도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탄생설화와 관계가 있다. 이 설화의 줄거리는 왕건의 아버지 융(隆)이 백두산 기슭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유명한 승려 도선(道詵)을 만나 성자를 낳을 집터를 얻음으로써 왕건을 낳고, 그 성자가 자라서 고려의 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백두산에는 우리 민족뿐 아니라, 북방의 여러 민족의 발상 설화도 얽혀 있다. 『개국방략 開國方略』이라는 책에 청제(淸帝)의 탄생 설화가 있다. 곧 백두산에 포륵호리지(布勒湖哩池)라는 천지가 있는데, 선녀 세 자매가 이곳에 내려와 목욕하고 있을 때 신작(神鵲)이 붉은 열매를 물고 와서 셋째 선녀의 우의(羽衣) 위에 놓았다. 셋째 선녀는 이 열매를 먹고 잉태하여서 한 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의 이름을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 성을 애친각라라 하였으니, 곧 청제실(淸帝室)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형태로, 두만강 변에 지암이라는 바위 근처에 이좌수가 살았는데, 지암 물가에 사는 수달의 일종인 노라치라는 짐승이 좌수의 딸과 관계를 하여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커서 청나라 태조인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되었다는 설화도 있다.

라. 개화기 외국인들의 백두산 기행문 및 문학

『The Long White Mountain : or A Journey in Manchuria』 / 『장백산 : 만주의 여행』. 제임스(Henry Evan Murchison. James, 1846~1923), 1888년, 영국 런던의 Longmans, Green, And Co.에서 발행.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권두에 영국인 영허즈밴드(Francis Edward. Younghusband, 1863~1942)가 1886년에 그린 백두산 천지 그림이 들어가 있다.
『The Long White Mountain : or A Journey in Manchuria』 / 『장백산 : 만주의 여행』. 제임스(Henry Evan Murchison. James, 1846~1923), 1888년, 영국 런던의 Longmans, Green, And Co.에서 발행. Ⓒ 2022년 필자. [사진 제공 - 이양재] 권두에 영국인 영허즈밴드(Francis Edward. Younghusband, 1863~1942)가 1886년에 그린 백두산 천지 그림이 들어가 있다.

19세기 말 개화기(開化期)에, 즉 1886년과 1889년, 1891년에 백두산에 오르고 기행문을 남긴 서양인은 모두가 영국의 외교관이거나 군인이었다. 그런데 왜? 특히 영국이 백두산에 관심이 많았을까? 백두산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 챈 것일까? 이들 조선에 왔던 영국 군인들을 연구하여 보면, 일본이 조선을 감점하기 이전에 이미 영국이나 독일, 러시아, 미국 등의 서구 열강이 조선에 군침을 흘렸음을 일수 있다. 이들 영국인들의 백두산 여행기를 아래에 간략히 소개한다.

1) 『The Long White Mountain : or A Journey in Manchuria』 / 『장백산 : 만주의 여행』

저자는 제임스(Henry Evan Murchison. James, 1846~1923)이다. 1888년, 영국 런던의 Longmans, Green, And Co.에서 발행.

제임스는 1865년부터 1900년까지 인도 봄베이에서 근무하던 영국의 고위 공무원이었다. 그는 2년간 휴가를 얻어 영국 ‘왕립근위대’에 배속되어 있던 영허즈밴드(Francis Edward. Younghusband, 1863~1942) 중위와 1886년 3월부터 2년 동안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중국 동북부 3성과 러시아의 연해주 지방을 함께 여행했다. 이 책은 외교관인 그가 백두산과 만주 일대를 여행하고 쓴 여행기이다.

외교관과 영국왕립근위대 군인의 팀 구성이다....! 영허즈밴드는 특수 임무를 띈 영국 정보국의 정보원이었다. (참조 : https://en.wikipedia.org/wiki/Francis_Younghusband)

“In 1886–1887, on leave from his regiment, Younghusband made an expedition across Asia though still a young officer. After sailing to China his party set out, with Colonel Mark Bell's permission, to cross 1200 miles of desert with the ostensible authority to survey the geography; but in reality the purposes were to ascertain the strength of the Russian physical threats to the Raj. Departing Peking with a senior colleague, Henry E. M. James (on leave from his Indian Civil Service position) and a young British consular officer from Newchwang, Harry English Fulford, on 4 April 1887, Lieut Younghusband explored Manchuria, visiting the frontier areas of Chinese settlement in the region of the Changbai Mountains.”

즉, “1886-1887년에, 그의 연대를 떠나서, 영허즈밴드는 아직 젊은 장교였지만 아시아 전역을 탐험했다. 중국으로 항해 한 후 그의 일행은 마크 벨 대령의 허락을 받아 지리를 조사 할 수있는 표면상의 권한으로 1200 마일의 사막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목적은 라즈에 대한 러시아의 물리적 위협의 힘을 확인하는 것에 었다. 1887년 4월 4일 고위 동료인 헨리 E. M. 제임스(인도 공무원직에서 퇴사)와 뉴왕(요녕성 잉커우시, 营口市)으로부터 온 젊은 영국 영사 장교(통역관)인 해리 잉글리쉬 풀포드(Harry English Fulford, 1859~1929)와 함께 북경을 출발한 영허즈밴드 중위는 만주를 탐험하며 장백산맥 지역의 중국 정착촌 개척지를 방문했다.”

이 책의 권두(卷頭)에 함께 여행한 영국의 정보원 영허즈밴드가 백두산 천지를 그린 그림이 원색판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그림은 백두산 정상을 그린 최고(最古)의 그림이다. 천지의 모습을 거의 사실에 가깝도록 그렸다. 그는 백두산을 등정, 천지의 신비로움에 감탄했으며 도중에 만난 조선 이주민들의 삶의 모습을 5백 쪽에 달하는 여행기에 상세히 기록했다. 특히 동행했던 영허즈밴드는 그림에 솜씨가 있어 많은 삽화를 그렸는데 그 가운데 백두산 천지와 낚시하는 조선인의 모습은 눈길을 끈다. 사진기가 발달하지 않았을 시대의 정보원은 상당한 그림 솜씨를 지녀야 했다.

2) 『A Journey through North Korea to the Ch'ang-pai Shan』 / 『장백산』

캠벨(Charles W. Campbell, 1861~1927)의 1892년 작이다. 켐벨은 1884년부터 중국에서 영국의 영사 업무를 담당했으며, 잠시 조선 주재 영국 부영사로 서울에 체류하던 중이던 1889년 8월부터 11월까지 한반도 북부 지역을 여행하였다. 이 여행 경험을 1890년 12월 영국 의회에 보고하고, 1892년 1월 영국 왕립지리학회에서 발행한 『Proceedings of the Royal Geographic Society』 제14권 pp.141~161에 발표하였다.

이 여행기는 서양인이 한반도를 거쳐서 백두산을 등정한 최초의 기록으로, 그 동안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5년여 전에야 고서(古書) 경매를 통하여 비로소 실물을 입수하였다.

캠벨은 의회보고서에서 자신이 외교관으로서 관심을 기울였던 조선 사회의 현황과 산업 전망에 대한 시각을 강조했으며, 왕립지리학회 발표문에는 여행의 경위와 함께 금강산, 백두산 등 명승지의 지리적 특징과 풍광의 신비로움을 상세히 묘사하였다.

그는 후에 베이징과 톈진에 머물며 청일전쟁과 의화단사건을 겪었고, 1902년에는 몽골을 여행하였으며, 그 내용도 1903년 6월 영국 왕립지리학회에서 발표했다. 이후 중국 광둥과 쓰촨에서 총영사를 지냈고, 1905년부터 1911년까지 베이징 총영사로 일하다 은퇴했다.

3) 『Korea and the sacred white mountain ; being a brief account of a journey in Korea in 1891』 / 『백두산 가는 길』

[서울신문] 1991년 4월 10일자 9면 기사. 『Korea and the sacred white mountain ; being a brief account of a journey in Korea in 1891』 / 『백두산 가는 길』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서울신문] 1991년 4월 10일자 9면 기사. 『Korea and the sacred white mountain ; being a brief account of a journey in Korea in 1891』 / 『백두산 가는 길』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저자는 카벤디시(Alfred Edward John. Cavendish, 1859~1943)와 고올드-아담스(Hamilton John. Goold-Adams, 1858~19920)이다. 1894년에 발행된 이 책에는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의 풍속화 19점(원섹 7점, 흑백 12점)이 실려 있어 주목된다.

이 책의 저자 2인은 모두 영국 군인이다. 카벤디시는 제1차 중일전쟁 당시 그는 중국군과 부속하였고, 1897년 2월 12일에는 소령으로 승진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영국 원정군의 보조 장군으로 임명 된 후 준장으로 승진하여 1915 년 초에 V 군단의 참모진에 임명되었다. 그는 나중에 지중해 원정군과 다르다넬레스 군대의 보조 보조 장군으로 복무했으며, 1916년부터 남아프리카 사령부를 지휘했다.

그들은 1891년에 제물포로 조선에 입국하여 육로로 원산을 거쳐 백두산을 등정하였다. 이러한 이들의 백두산 여행기는 지금은 우리가 갈 수 없는 내륙을 통한 백두산 여행기라는 점에서 큰 흥미를 끈다. 또한 현대의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조선말기의 야생 그대로의 백두산 여행에 대한 기록은 어떠한 여행기보다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들은 여행 중 들르는 지역에 대한 소개, 만난 사람들에 대한 묘사에서 당시 조선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힌다.

1980년대 중반에 나는 이 책을 미국의 고서상에서 찾아내 입수한 후, [서울신문]에 기사를 제보하여 1991년 4월 10일자부터 3회에 걸쳐 크게 소개하게 하였다.

마. 맺음 시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혼백(魂魄)이다.
그만큼 백두산은
우리 민족주의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한겨울 백두산의 차가운 바람은
백두대간을 타고 한라산 백록담을 얼어 붙인다.
새봄의 한라산 백록담의 아지랑이 바람은
백두대간을 타고 백두산 천지가에 꽃을 피운다.
백두산과 한라산이 한 바람, 한 기운으로 어울리기에
한라산은 백두대간의 끝 산이다.
아~!
백두산과 한라산은 아주 머얼리 떨어진 것 같지만……,
우리 민족의 마음에는 지척(咫尺)이다.
나의 마음에도 지척이다.
한라산에서 눈을 감으면 보이는 듯한 지척의 백두산……. 조종의 산 백두산.

바. 붙임 말

이번 제24회 글은 처음에는 제23회 글에 연결하여 써나가던 글이다. 그러나 주제가 중대하여 글이 너무 길어지기에 ‘백두대간’과 ‘백두산’으로 나누었다. 그러고도 주제를 충실하게 다루지 못하고 미진하게 여겨진다. 독자분들에게 깊은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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