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가 성공회서울대교구성당에 도착한 것은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벌써 마당에는 삭발을 기다리고 있는 민족민주운동유가족 일곱 분이 흰 천을 두르고 앉아 있었다. 부친이 세 분, 모친이 두 분, 부인이 한 분, 형님이 한 분이었다. 거의 대부분 팔순을 넘기신 분들이었다. 그 뒤에 10여 명이 서 있었다. 그 중에는 다른 유가족들도 있었고, 민주유공자법을 발의한 국회의원도 있었다. 그밖에도 민족민주운동단체에서 활동하는 분들도 여럿 보였다. 앞에는 사진을 찍는 기자들과 삭발식을 보러 온 사람들 30여 명이 있었다. 신돌석씨와 잘 아는 사람들도 있었고, 낯이 꽤 익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진행자가 이 행사의 취지를 설명하는 중이었다. 삭발을 기다리며 앉아 있는 분들 뒤 나무에 걸려 있는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민주유공자법 없는 6월민주항쟁기념식은 허구이다’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이 구호가 오늘 행사의 취지를 한마디로 요약해 주는 것이라고 진행자가 말하였다. 삭발식 한 시간 뒤에는 바로 이곳에서 6월민주항쟁기념식이 열린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기념식인데 정부 주도 기념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6월민주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주로 참석하지만, 정부 주도의 훈포장 수여식도 있고, 정부의 최고위급 인사도 참석한다. 지난 몇 년 동안은 대통령이 오기도 하였다. 올해도 임기 첫해니까 오지 않을까 했는데 안 오기로 하고, 국무총리가 대신 온다고 한다. 아마도 삭발식을 주관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나 민주유공자법제정추진단은 행사에 맞추어 삭발식을 계획했을 것이다. 신돌석씨 생각으로는 구상이 괜찮았던 것 같다. 벌써 1년 가까이 천막농성을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렇게 6월민주항쟁 기념식에 맞추어서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 좋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진행자의 취지 설명이 끝나고 삭발이 진행되었다. 두 사람이 삭발기를 들고 양쪽에서 삭발을 하기 시작했다. 뒤에 서 있는 사람들과 앞에서 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침통해졌다. 어머니들의 머리털이 잘려나갈 때는 사람들 속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10시에 하는 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 온 사람들 중에 발걸음을 멈추고 보기도 하였다. 신돌석씨도 알 만한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삭발식에 온 사람들과 10시에 하는 기념식에 오는 사람들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삭발을 한 사람들이나 함께 한 유족들 중에는 기념식에서 훈포장을 받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기념식에 온 사람들도 삭발식을 보면서 심정이 착잡했을 것이다. 이 행사가 끝나야 기념식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들도 삭발식을 하릴없이 보면서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삭발식의 마지막 순서로 유가협 회장의 인사말이 있었다. 삭발 대상자이기도 한 회장은 삭발을 한 그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는 다른 것 필요없다. 우리를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것만 없어지게 만들어 달라. 그것은 바로 민주유공자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열사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는 일은 열사들이 민주유공자가 되는 일이다.’ 신돌석씨는 이 말을 듣자 민주유공자법이 제정되어야 하는 이유를 아주 간명하게 설명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민주유공자법 하면 또 무슨 돈을 원하냐는 식으로 나온다. 심지어 진보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 직설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지금 돈을 더 받겠다는 것이 국민공감대가 있냐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런데 지금 발의되어 있는 민주유공자법은 돌아가신 분이나 중상해를 입은 분들에게만 적용하자는 것이다. 물론 신돌석씨는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해를 입으신 분이나 공을 세우신 분들은 모두 유공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발의된 법안이 그랬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여론 지형상으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새로이 발의된 것이 지금의 법안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가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 등이 모두 민주유공자가 아니다. 이들은 민주화운동관련자라는 희한한 이름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리고 대부분 이 말을 들으면 깜짝 놀란다. 진보적인 사람은 물론이고 중도적이면서 진보에 우호적인 사람들은 그럴 리가 있냐고 한다. 그 까닭은 민주유공자는 오직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에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4.19혁명 유공자는 일찍이 국가유공자로 분류되었다.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는 그것에 국한된 유공자로 인정되었다. 수구세력은 4.19혁명을 부정선거에만 저항한 순수한 학생의거로 한정지으려 하고, 5.18광주민주화운동도 북한군개입설 등 온갖 폄훼를 하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한발 물러서서 기념식 참가 등으로 국한시키려고 한다. 말하자면 화석화하려는 것이다. 그 동안에 수구세력 중 일부는 5.18유공자를 돈 먹는 괴물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까지 모욕적인 비난을 해왔고, 지금도 수구유튜버들은 그런 소리를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말을 듣고 민주유공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발의되어 있는 민주유공자법 대상자들은 생존 당시에 10% 정도가 기혼이었고, 그 자제들은 대부분 4-50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실제 배보상은 별로 있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저들이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민주유공자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의 뿌리인 독재정권을 반국가세력으로 공인하는 것이 되고, 자신들의 정당성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기 때문이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삭발식이 끝나고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삭발한 분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기념식 주최측에서는 행사를 시작할 테니 성당으로 빨리 들어오라는 방송을 계속하였다. 신돌석씨는 오늘 삭발하신 분 중 한 분인 노동열사의 어머니께 다가가서 인사를 드렸다. 신돌석씨가 여기 온 이유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너무 오래 돼서 그런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신돌석씨의 손을 꼭 잡고 ‘고맙다’는 말씀을 연신 하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그런지 어머니는 예전 같지 않았다. 예전에는 기운이 펄펄 나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열사는 신돌석씨가 처음 노동운동을 한 지역에서 분신한 분이었다. 1988년이었던 것 같다. 이전 해인 1987년에 있었던 6월민주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의 여파로 이듬해인 1988년에도 계속적으로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주로 노동조합결성투쟁과 어용노조민주화투쟁, 그리고 이에 대한 탄압이었다. 열사는 1986년 인천 5.3항쟁으로 구속되었던 학생운동 출신이었다. 출소한 뒤 중소기업에 들어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그런데 회사가 노조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단체교섭도 응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중소기업 사장들은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해 자신도 억울하다는 식의 생각을 하였다. 자신들이 노력해서 겨우 이 정도 올라섰는데 왜 니들이 방해하느냐는 식이었다. 그러면서도 노동자들을 마치 자신들의 머슴이나 되는 듯 대했다. 그러니 단체교섭이라는 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신돌석씨 공장에서도 노조를 만들자 사장이나 전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전무는 사장에게 ‘애들하고 무슨 교섭을 해요?’라고 하면서 노골적으로 대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도 했다. 열사가 다니던 회사도 다를 바 없었다. 마침내 열사는 몸에 신나를 뿌리고 교섭을 요구하다 분신을 하게 되었다. 신돌석씨는 열사를 생전에 몇 번 보지 못했다. 회사가 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니 지역의 노동운동, 시민운동, 종교단체 등이 도와주기를 요청할 때 여러 사람과 함께 만난 정도였다. 열사가 분신하고 운명한 뒤 노조 사람들과 같이 시신 사수 투쟁과 노조 인정 요구 투쟁을 하였고, 그때 지역에 찾아와 있던 어머니를 여러 차례 뵈었었다. 그 뒤에도 어머니를 지역 사람들과 함께 찾아가 뵌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옳은 일 하는 것은 알지만 꼭 그렇게 앞장서야 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기까지 해야 하느냐는 말씀을 하면서도 회사측이나 경찰에 대한 분노는 적극적으로 표현하였다. 다른 열사를 보아도 그런데 이후 행적을 보면 그 어머니에 그 자식이었다. 어머니는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 나가면서 이소선 어머니 등과 함께 활동하더니 어느새 가장 열정적인 투사 중 한 분이 되었다. 그 세월이 벌써 34년이 된 것이다. 신돌석씨가 지역을 떠난 뒤에는 거의 뵙지 못했다. 오늘 삭발식을 하는데 어머니도 하신다고 이전에 지역에서 함께 활동하던 사람이 연락을 하면서 함께 뵙자고 했었다. 그런데 정작 그 친구는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겨서 못 온다고 신돌석씨만이라도 꼭 가보라고 했었다.

10시가 넘었다. 기념식을 한다고 빨리 성당 안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하는 방송이 계속 나왔다. 사람들도 하나 둘 성당 안으로 들어가고, 삭발을 한 유가족들도 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신돌석씨는 자기가 굳이 거기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성당 밖으로 나왔다. 오후 1시에 시민사회단체 주도의 기념식이 있는데 거기에 갈 생각으로 서울 나온 김에 그 동안 못 봤던 선배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미리 연락을 했으니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선배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경험이 있고, 산업선교회에서 실무자로 일하면서 신돌석씨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역으로 신돌석씨에게 지역 현장 소식을 듣기도 했었다. 그때가 1980년대 중반 무렵이었으니 신돌석씨와 알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된 사람이었다. 지금은 안국동 부근에 있는 518서울기념사업회라는 곳에서 간부직을 맡고 있다고 하였다. 오늘 거기서 회의가 있으니 행사 끝나고 오라고 하였다. 같이 점심을 먹고 1시 기념식에 함께 가기로 했었다. 처음에 신돌석씨는 그 사람이 518유공자라는 데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녔고, 항쟁 기간에 광주에 간 적도 없는데 어떻게 518유공자일까? 518유공자 이야기를 할 때면 1990년대 초쯤에 지역에서 만난 노조활동가 후배 하나가 518유공자가 되어 보상을 받았다는 말을 했던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친구는 항쟁 때 고등학생이었다. 광주에서 학살이 자행되자 거기서 온 유인물을 뿌리고 다니다 검거되어서 구속되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유공자가 된 것은 광주에 가까운 도시이라서 그런지 유인물 뿌린 걸로 광주로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상무대 영창에 구속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때 어떤 친구 하나가 웃으면서 그 정도로 유공자면 자기는 몇 번을 받았겠다고 했었다. 그때는 그냥 웃고 넘겼다. 그런 말을 한 친구는 자기도 518유공자가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꾸지 않았다고 하고, 그냥 농담으로 해본 것이었다. 하지만 보상 시기가 거듭되면서 3차인지 4차인지에서부터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전국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고 한다. 그해 5월에 항쟁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물론 항쟁이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이후라도 그에 대해 알리고, 항의하는 활동을 하다가 피해를 본 사람이라면 어느 지역에 있었든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보상 대상이 되었다. 신돌석씨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광주에 있었어야만 518민중항쟁의 유공자라는 생각은 얼마나 항쟁의 정신을 좁히는 일인가? 아마 이 선배는 그해 가을 학내에서 광주학살을 규탄하는 시위를 하다 구속되었고, 계엄법 위반으로 실형을 살았는데 그 때문에 518유공자가 되고, 서울기념사업회의 간부로 활동하는 모양이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선배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한 뒤 다시 성공회 대성당으로 갔다. 시민사회단체인 사단법인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가 35주년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왔다. 사실 6월민주항쟁은 신돌석씨에게는 뭐라고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돌멩이를 던지며 싸웠는데 전체적인 구도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날 항쟁의 지도부가 여기 이 자리에 모여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민주항쟁을 선포했다고 한다. 신돌석씨로서는 당연히 모르는 일이고, 나중에야 들어서 안 일이었다. 그때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데 아마 6월 10일에는 신돌석씨는 지역 사람들과 함께 지역에서 시위를 조직했었던 것 같다. 시민들의 호응과 참여가 너무 좋아서 경찰의 저지선은 속속들이 무너졌던 기억이 있다. 정말 신나게 시위하던 때였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식인가 하는 것을 무슨 호텔에서 해서 거기를 포위한다고 서울로 갔었다. 전두환이 노태우를 지명하는 날이었다. 그때 그리로 다가가는 시위대와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경찰과 밀고 밀리는 싸움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시 지역으로 돌아왔는데 며칠 뒤에는 지역에는 거의 경찰이 사라져서 마음놓고 휘젓고 다니다가 싱거워서 서울로 갔던 기억이 난다. 기념식에서는 주최측이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침묵과 굴종을 강요당했던 우리는 6월민주항쟁을 통해 비로소 ‘자유’가 되고 ‘시민’이 되었”다고 하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기념식에서 신돌석씨가 흥미롭게 본 것은, 식전 행사로 최동원에 대해 추억하는 이야기마당이었다. 최동원은 신돌석씨와 같은 58년 개띠이다. 아마 고3 때 경남고 투수로 청룡기 우승을 차지한 것으로 안다. 그 뒤 연세대에 들어가서 다른 대학의 내로라 하는 선수들을 꼼짝못하게 만들고, 1984년에는 코리안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하는 대기록을 세웠었다. 그 전에 프로야구 출범 전인 1981년에 세미프로인 롯데에서 뛰면서 한국시리즈에서 그때도 혼자 4승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신돌석씨가 군대에 있을 때였다. 그런데 그 최동원이 6월민주항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같이 스크럼을 하고 뛰던 사람들이 최동원 같아서 물어 보니 맞다고 하더란다. 고액 연봉을 받는 스타로서 몸 사릴 텐데 시민들과 함께 시위 대열에서 뛰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최동원이 돌을 던졌다고 하는데 이야기마당을 이끄는 사람의 말로는 그건 사실이 아니란다. 최동원이 돌을 던지면 너무 세고, 정확해서 전경들을 다치게 할 게 거의 틀림없기 때문에 일부러 피했다고 한다. 민주항쟁에 참여한 정신 때문인지 그는 선수노조 결성을 위해 노력하다가 트레이드 되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고 한다.

여러 분들이 인사말, 격려사, 축사 등으로 말씀을 했는데 신돌석씨는 아무래도 현재와 연관짓는 이야기에 귀가 기울여졌다. 어떤 분은 축사를 통해 “6월민주항쟁 35주년을 맞아 한 뼘이라도 성장한 역사의 전진과 민주주의의 확대를 보고해야 할 이 자리에서 박근혜 일당을 몰아낸 촛불의 성과가 불과 5년 만에 앙상해져 버린 현실을 보고”하는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어서 이 상황에서 누구 탓만 하고 있겠는가고 반문하고는 갈 길은 험난하지만 다시 신발 끈을 묶고 연대와 투쟁으로 제2의 촛불항쟁을 만들어 가자고 호소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젊은 사람이 나와서 축사를 하면서 6월항쟁을 통해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앞길을 개척한 선배들의 헌신에 존경의 인사를 드린다고 한 뒤, 암울과 굴욕이 당연했던 시대를 절대 후대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선배들의 마음을 새기고 청년들은 새로운 촛불을 준비하겠다고 결의했다. 사실 이렇게 현실의 문제를 개척해 나가려는 의지가 없으면, 그야말로 기념식은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역시 오전에 있었던 삭발식을 언급한 이도 있었다. 그는 6월항쟁 당시 대표적인 대학생 조직이었던 전대협 출신들이 만든 동우회의 회장이라고 하였다. 먼저 유가협 부모님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다고 고개를 숙이며 사죄의 말씀을 드린 뒤, 6월항쟁 이후 전대협 이름으로 살아온 우리는 열사들에게 어떤 답을 드려야 할까,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위해 유가협 부모님들이 삭발을 하고 계실 때 국회 안에 있는 전대협 출신 국회의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 생각해 봤다고 하면서 국회의원 이름을 하나 하나 호명했는데, 많은 줄은 알았지만 정말 많았다. 그런데도 이런 법 하나 만들지 못하는 그들에 대해 새삼 화가 났다. 그는 열사의 이름으로, 민주주의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국회의원이 되어줄 것을 호소하는 것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신돌석씨는 역시 6월민주항쟁 35주년의 가장 큰 이슈는 민주유공자법 제정이고, 그것을 위한 투쟁이 바로 6월민주항쟁의 정신을 오늘날에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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