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한국에서 박정희, 전두환 등의 정치군인들이 두 차례에 걸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는 것을 승인해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짓을 저질렀다. 미국은 2차 대전을 전후 해 사회주의 세력인 소련, 중국 견제를 위한 극동전략을 추진했으며 한반도 전쟁 참전 등은 그런 목적을 위한 파병의 성격이 짙었다.

5.16과 ‘광주’ - 미국의 한국군 쿠데타, 양민학살 승인

한국에서 두 차례 발생한 군 쿠데타는 미국이 한국군에 대한 평시와 전시 작전지휘권을 행사해 한국의 군사주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발생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라는 대표적인 정치군인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한국군이 실질적인 한반도 전쟁 억지력이 아니라 미국이 그것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이 보장될 경우 한국군의 정치 참여를 사후 승인해 기정사실화 했다.

박정희와 미국

1961년 5월 20일 5.16 군사쿠데타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장도영과 부위원장 박정희(오른쪽)가 계엄사무소가 설치된 서울시청 본관 정문 앞에 서있다. [사진 출처 - 위키미디어]
1961년 5월 20일 5.16 군사쿠데타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장도영과 부위원장 박정희(오른쪽)가 계엄사무소가 설치된 서울시청 본관 정문 앞에 서있다. [사진 출처 - 위키미디어]

미국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자행한지 나흘 만에 승인했다. 당시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미국의 승인을 받고 싶어 하자 5월 20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한‧미 두 나라 사이의 우호관계는 확고하다는 메시지를, 쿠데타세력이 정부를 전복하고 그들의 통치기구로 만들어 놓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보냈다. 동시에 주한미군사령관은 쿠데타 지도자들이 동원한 군부대를 원상복귀 시킬 것을 촉구했다. 박정희는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를 미국이 지지하자 5월 27일 쿠데타 당일 선포했던 계엄령을 해제했다.1)

그해 6월 24일 주한 미 대사 사무엘 버거가 서울에서 박정희를 만나 미국은 박정희 정부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박정희에게 숙청과 불법 체포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7월 27일 미국무부 딘 러스크 장관은 미국이 한국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정부를 승인한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한편 이승만의 부정부패와 부정선거에 항의해 발생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당시 미국은 이승만의 하야를 압박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4.19 혁명 발생 1년 전인 1959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반공주의자로 유명했던 월터 주드 공화당 의원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 이 대통령이 후계자를 정하고 정계에서 물러나는 것을 권유했다. 당시 이 대통령은 웃어넘겼지만 4.19 혁명 발생 이후 미 대사와 주한미군 사령관이 이 대통령을 방문해 사태 수습을 권고하자 이 대통령은 하야의 길을 택했다.2)

4.19 혁명으로 제 2공화국이 발족한 뒤 이승만의 13년간 독재로 누적된 사회적 모순이 분출해 외견상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혁명 뒤 민주화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었는데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미국이 이를 승인하면서 4.19 혁명의 동력은 파괴되고 짓밟혔다.

미국이 민주주의에 역행한 쿠데타를 승인한 것은 한국의 민주화 보다 미국의 이익을 우선한 것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만약 박정희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한국은 이승만 독재와 친일 적폐 등을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미국은 친미 세력이 포진해 있는 군부가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하는 것이 미국에 더 이익이 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정은 쿠데타 발생 나흘 만에 케네디 대통령이 서둘러 쿠데타를 승인한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의 속셈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라 하겠다.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가 2020년 11월 10일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40주년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5.18민주화운동 전후 한국정치와 미국의 개입: 박정희 암살, 전두환 쿠데타, 광주 학살, 김대중 구명과 미국의 역할’ 가운데 박정희 암살 뒤 작성된 미국 비밀 자료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된 뒤 27-28일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국무부에 하루 몇 번씩 전문을 보냈다.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충격적인 사건이 잘 계획된 군사쿠데타인지, 일부 기득권 세력이 두려워하던 지도자를 제거해버린 사건인지, 또는 단순히 기상천외한 사건인지 아직 알 수 없다..... 한국 체제가 큰 혼란까지 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미국은 새로운 정권이 현저한 실수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징벌적 조치에 대한 공개적 언급을 피해야 한다..... 1960년대부터 한국에 대해 미국이 행사해온 압력 때문에 우리가 너무 강경하거나 너무 어리석게 한국의 체제개편을 압박해 나가면 극도로 부정적인 반미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군사쿠데타로 박 대통령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주변의 일부 인물들, 아마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이끄는 세력이 정부구조를 유지한 채 괜찮은 후계자를 내세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대통령을 제거했을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다..... 김재규가 박 대통령의 강경책이 한국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한명이었을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글라이스틴은 박정희의 후임이 누가 될지 촉각을 곤두세우며, 정치인, 군인, 재야인사, 목사, 교수, 언론인, 학생 등 “거의 모든 분야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하며 다양한 정보를 얻고 있었다. 김종필, 정일권, 김영삼, 김대중 등에 대한 인물평을 국무부에 보고하기도 하면서 11월 1일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우리는 영향력을 조용히 활용하여 지금이 보다 민주적인 헌법으로 나아갈 때라는 판단을 엘리트 지도층 내부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시켜야 한다. 국무부 인권국은 우리가 영향력을 ‘조용히’가 아니라 ‘완전히’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분노를 살 수 있는 ‘지도’나 ‘가르침’을 준다는 인상을 피해야 한다. 특정세력에게 반대하거나 편들면 안 되고, 상당수 한국인들이 생각하듯, 배후에서 킹 메이커 역할을 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된다.”

11월 초 미국하원에서 박정희 암살에 관한 청문회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글라이스틴은 이를 막아야 한다며 11월 8일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나는 청문회가 미국이 박정희 죽음을 공모했다는 의혹을 건드릴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를 공모한 적이 없으며 박 대통령을 비판했을 때도 그의 정부와 안보, 경제 등의 문제에 대한 협력을 지속하겠다는 신호를 함께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청문회에서 얘기하게 되면 우리가 박 대통령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더 증폭시키지 않을까 우려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공개적 이슈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대통령을 죽인 중앙정보부장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소문이 국내외에서 확산되자, 주한미국대사는 11월 19일 다음과 같은 내용 전문을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에 미국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이 한국에서 퍼지고 있다. 반체제인사들과 기독교단체들은 미국이 김재규 음모의 일부였으며 최소한 신호를 보냈으리라 믿고 있다. 학생들도 이러한 시각을 공유한다는 보고가 있었고, 박 대통령의 일부 측근도 미국이 어떤 형태로든 암살에 관여했지 않았을까 우려하고 있다. 공산주의 날조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의혹 외에도 일본은 물론 미국언론마저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것은 쿠데타 기도자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였다는 취지로 얘기하면서 음모론을 부채질하고 있다. 김재규가 나의 격려를 받고 박정희를 공격했다고 말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이 1년 이상 가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개인 또는 단체에 하고 다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나는 그러한 국가전복 행위에 관련된 적이 없지만, 박 대통령의 몇몇 조치에 대한 공개적 비판으로 일부 한국인들이 우리의 언행을 오해해 박정희 통치가 종반으로 치닫고 있으며 미국은 그가 사라지더라도 아무런 불만이 없으리라 생각했을 수 있다..... 나는 박 대통령의 임기 전망과 같이 민감한 주제를 제기할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내가 그런 언급과 가장 비슷한 얘기를 한 것이 9월 26일 우리의 마지막 대화 도중 김재규가 한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다. 김재규가 나에게 한국경제에 대한 분석과 향후 국내정치 전망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나는 경제 분석과 관련하여 향후 6-12개월 간 한국경제의 발전 속도가 느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두환과 미국

1980년 5월 광주항쟁기간 동안 태극기를 손에 든 시민들이 탄 버스가 광주 시가를 달리고 있다. [사진 출처 -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관]
1980년 5월 광주항쟁기간 동안 태극기를 손에 든 시민들이 탄 버스가 광주 시가를 달리고 있다. [사진 출처 -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관]

미국은 1979년 전두환 일당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자 주한 미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이 국무부에 전통을 보내 군의 소장파 젊은 난폭자들이 기존 지휘부로부터 권력을 쟁탈해 군 내부에서 추후 싸움이 더 벌어질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고 타전했다. 당시 전두환은 계엄사령관 정승화 장군을 박정희 암살범으로 체포하고 군 최고 지휘관으로 행세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을 비밀리에 만난 뒤 본국에 비밀 전문을 보냈다.3)

“전두환은 쿠데타를 미리 음모했다는 증거를 감추려 하고 있다. 전두환의 반대 세력이 반격을 가해 양측의 충돌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쿠데타가 발생한 현 상황은 북한의 도발 위험이 높아지고 있어 우려된다. 전두환과 그 일당은 미국의 지원을 보장받고 싶어 한다. 미국은 한국군 내부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하는데 향후 수주 또는 수 개 월 안에 극도로 예민한 선택을 해야 할 처지가 될 수도 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이 비상계엄을 확대하기 전에 전두환의 보좌관을 만났으며 그 때 그 보좌관은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 군은 정부 기관을 완전 장악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에서 민주화를 외치는 대학생들과 시민들을 사살 또는 무차별 구타, 연행했다. 광주항쟁이 발생하자 미국 카터 대통령은 1979년 발생한 이란 사태가 재연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카터 행정부는 광주항쟁이 발생한 뒤 전두환 일당에게 군이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것에 동의했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부의 비밀 문건의 내용은 대부분 한국에서 군부 독재에 대한 반대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4)

글라이스틴 대사는 1980년 5월 8일 전두환을 만나 미국은 군이 법과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을 양해하고 있으나 평화적 시위에 대해서는 과도한 진압을 삼가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비밀이 해제된 미 정부 자료에 따르면 미 국방부와 국무부는 5월 18일 이전 전두환이 특전사 부대를 광주와 다른 지역에 배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국은 5월 22일 백악관에서 국가안보회의를 열고 광주 항쟁은 군에 의해 제압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 회의 5일 뒤 계엄군은 광주로 진입해 전남 도청을 사수하던 시위대를 사살했다.

광주 미 공군기지는 5.18 당시 동북아 최대 핵무기 저장소

미국이 신군부의 광주항쟁에 대한 야만적 진압을 허가한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또는 비밀 자료가 아직 공개된 적은 없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주한미군이 광주 미공군기지에 보관하고 있던 핵무기가 광주항쟁으로 위협받을 가능성을 상정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런 추정은 광주항쟁 당시 광주 등 한국 내 여러 개의 미군기지가 미국의 핵무기 저장소였으며 다량의 핵무기가 저장되어 있었고, 미국은 자국의 핵무기가 제 3국인 등에 의해 탈취될 가능성 등에 최우선적으로 대응할 대책을 세워놓고 있다는 점 등에 의해 유추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관련 자료를 취합해 보면 아래와 같다.

① 일본 반핵운동 전문가인 곤도 가스코는 1982년 출판한 저서를 통해 미국이 광주항쟁을 핵위기와 연결시켜 대처했다고 아래와 같이 추정했다.5)

--- 광주는 미국의 베트남 패전이후 동북아 최대의 미군 핵탄두 저장기지가 되었다. 미군 사령관의 작전지휘권 아래에 있는 한국의 군부가 광주 진압에 병력을 출동시킨 배경에는 광주 미군기지의 미국 핵무기에 대한 민간인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광주항쟁을 진압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② 광주가 미국 핵무기 기지라는 사실은 1980년대 핵 전문가 등에 의해 언급된 바 있고 그 사례는 다음과 같다.6)

---1988년 7월 방한한 그레고리 핸더슨은 한국에 핵지뢰로 알려진 원자파괴탄(ADM)이 배치되어 있으며 광주는 핵저장 및 핵폭탄 정비기지로 핵무기가 비축되어 있다고 말했다.

---피터 헤이즈는 1988년 10월 자신의 저서에서 주한미군 핵기지는 군산, 광주 등 19개 지역이라고 주장했다.

③ 광주 미 공군 기지는 1991년 미군이 한국군에게 그 소유권을 반환하기 전까지 향후 한국전쟁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군장비와 병력을 배치할 수 있는 예비기지의 하나로 관리되었다. 주한 미 공군은 오산 기지를 사령부로 해서 광주, 대구 등 5개 기지를 후속부대의 체류 기지로 운영했다.7)

1992년 미국 정부는 광주 기지의 경우 종래의 작전을 중단하고 축소된 규모만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1999년 6월에는 광주 미군기지에 일본 카데나 미군기지에서 옮겨온 F-15C기 8대가 배치되었다. 한미 두 나라는 2002년 한국 내 미군기지에 대한 조정을 실시해 부지 반납 등을 실시했지만 광주의 경우는 예외로 해서 계속 미공군 기지로 활용키로 했다. 미군은 2004년 광주기지에 패트리어트 미사일 등의 배치를 시작했으나 현지 주민 등의 반대에 부딪혀 2006년 미군 방공포 부대는 다른 지역으로 이전했다.

④ 광주 미 공군기지는 주한미군이 핵무기를 한국에 배치하면서 미군의 주요 핵 저장소의 하나로 관리되어 온 사실을 미 의회가 확인했다. 지난 1975년 9월 미 상하원 원자력합동위원회의 한 분과위원회에서는 “한국에 저장된 미국의 핵탄두나 핵폭탄은 콘트리트 원형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보고되었다.8)

군산 미군기지는 미 하원에서 지난 1988년 공개된 미공군 자료에 따르면 동북아 전략용 미공군기지로 핵폭탄을 실은 전투기가 배치되어 있고 36개의 신형 핵폭탄 탄약고를 건설할 예정이었다. 광주 미 공군기지의 핵 저장 시설이 일본 핵전문가의 말처럼 동북아 최대 규모라면 미국 정부가 가장 중시했던 군사시설의 하나로 볼 수 있다.

⑤ 미국정부가 상위기관인 유엔사령부는 1958년 1월 한국에 핵무기가 도입됐다고 공식 발표하고 그 해 2월 3일 280미리 원자포와 지대지 미사일 어네스트존을 공개했다.

그 이후 한국에서 주한미군이 최소 1백 여 개에서 최고 1천 여 개에 달하는 핵무기를 도입했으며 핵무기 종류는 전술 핵무기와 중성자탄, 전략 핵무기와 전역 핵무기 등으로 보도되었다. 주한미군의 핵 기지도 군산, 광주 등 19개 지역으로 알려지기도 했다.9) 미국이 남한에 수 백기의 핵무기를 반입했을 경우 그것은 남한 내 여러 미군기지에 분산 배치해서 관리했을 가능성이 크고 광주 기지도 그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엄청난 양의 핵무기를 남한에 들여다 놓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로 가능했다. 미국은 당시 소련과의 냉전 중이었고 남한 핵무기는 비핵국인 북한보다 핵 강국인 소련 타격을 목표로 배치되었다. 미소 대결 차원에서 광주에도 핵무기가 다량 배치된 것이다.

광주항쟁 유혈진압 카터 대통령이 결정

⑥ 핵무기가 배치된 주한 미 공군 기지 가운데 광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 광주항쟁 발생 당시 미국 대통령이 미소 핵전략 차원에서 핵무기 보호 목적으로 한국군의 광주 유혈 진압을 허용한 정황이 아래의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미국은 1980년 5월 22일 지미 카터 대통령 주재로 리차드 홀부르크 국무부 차관보, 브래진스키 안보 보좌관 등이 긴급회동하고 광주 항쟁을 한국군 특전사가 무력으로 진압해야 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 후 5일 만에 한국군 9사단이 광주시내로 진입해 다수의 시민군을 살해하고 광주항쟁을 진압했다.10)---

미국 대통령이 직접 광주 항쟁을 무력진압토록 결정한 것은 광주 현지의 사태가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군사적 이해관계, 즉 미국 핵무기의 안전과 관련이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미국 대통령이 직접 해외 미군 주둔지에서의 정부군과 시민 대립 상황에 대해 무력진압을 결정하는 사례는 흔치 않은데, 유사한 사례의 경우 장관급이나 군사령관 수준에서 처리 방향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⑦ 1980년 5월 22일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한미연합사 소속의 한국군 20사단의 네 개 연대를 ‘폭동진압(Riot Control)’용으로 허용해 달라는 신군부의 요청을 승인해주었으며, 데프콘3 수준의 경계태세를 발동해 신군부의 광주 진압을 전후방에서 지원해주었다. 또한 미국은 보수정권인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 후 첫 방미인사로 전두환을 초청함으로써, 신군부 정권이 국제적인 정당성을 얻게 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⑧ 미국은 동북아 핵 전략 추진과정에서 미국의 이해관계와 공약을 위협할지 모를 각종 사태의 돌발가능성에 대비해왔다는 사실이 미 정치학자 윌리엄 오버홀트(미 허드슨대 연구소 연구원)에 의해 언급되었다. 오버홀트는 1979년 1월 서울에서 열린 한 국제학술대회에서 아시아에서 발생할지 모를 군사적 위기 중에는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핵위협과 한국에서의 혁명 등이 포함된다고 밝혔다.11)

그는 이어 미국은 적국과 우방국들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사태에 대비해 군사개입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개입의 대가 등을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에 배치하고 있는 미국 핵무기의 안전한 보존을 위해 신경을 쓰고 있으며 ‘주한미군이 핵무기의 통제력을 상실할 경우 초강대국간의 전면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점에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위와 같은 미국 정부의 핵무기 안전 보존 대책이 공개된 뒤 1년 후 카터 대통령의 광주 진압 결정이 내려졌다.

⑨ 1980년 당시 주한 미 대사 글라이스틴이 작성한 외교전문에 따르면 미국과 신군부는 1980년 5월 무렵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격화될 경우 이들 특수부대를 동원해 진압하는 문제에 대해서 긴밀하게 조율했으며, 신군부는 시위 진압을 목적으로 이동하는 부대의 동향을 한미연합사에 상세히 보고하고 있었고 상호간에 긴밀한 조율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특전사가 광주로 진입하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 26일 청와대로 들어가 최광수 비서관을 만나 “어떤 군사행동이든 인명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면서 “미국 정부는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행위가 장기화되고 있는 위험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 군사행동을 하는 것을 자제하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12)

미국 정부는 광주항쟁과 관련해 3,500 건의 비밀 자료를 공개했지만 핵무기 관련 자료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⑩ 지난 2020년 5월 열린 ‘5·18 증언회’에서 김용장 전 미군 501정보단 요원이 “5·18민주화운동 10일간의 항쟁기간 동안 40여건의 보고서를 썼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사살명령을 내렸다”고 증언해 충격을 준 바 있다.13)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미군이 광주항쟁 기간 동안 활발한 정보활동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어디에 어떤 목적으로 사용했느냐 하는 것이다.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조속히 정상 가동되어 새롭게 제기된 여러 문제들을 포함한 진상규명에 나서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상과 같이 10가지 자료를 연결시키면 광주항쟁 당시 미국이 어떤 이유로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 유혈진압을 허가했는지의 윤곽이 드러난다. 퍼즐 맞추기 형식인데 앞으로 좀더 많은 관련 자료가 드러나면 당시의 사실관계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광주 진상 규명, 미국 개입에 대한 진실 밝혀져야 가능

현재까지 공개된 광주항쟁과 미국의 관련 자료에서 광주 미군기지와 미국 핵무기 저장소라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나 카터 미 대통령이 왜 직접 백악관에서 광주 유혈진압을 한국 군부가 하도록 결정하는 회의를 주재했는지 등에 대해서도 여전히 안개속이다. 미국 외교사에서 제3국의 반정부 또는 소요사태에 미 대통령이 주요한 결정을 하거나 그것을 공개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지금까지 시도된 5·18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 성과는 여전히 미흡하다. 미국의 개입 여부에 대한 모든 사실 확인이 되어야 그 전모가 드러날 것이란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지금껏 5·18 민주화운동에서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부기구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규명한 적은 없다.

최근 일부 국회의원이 미국에 관련 정보 제공을 요청하는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미국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었고,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2018년 9월 전남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전남대 총학생회 집행부 등 학생 10여명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 학살의 책임이 미국 정부에 있다며 해리스 대사 방문을 반대했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관련 자료는 미국이 광주학살을 묵인한 방조자가 아니라, 명백히 책임이 있는 공모자로 5.17쿠데타를 용인했고 공수특전단의 광주 및 주요도시 출동을 승인했으며, 한국군의 학살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 있다.

미국은 2차 대전 종전 후 점령군으로 남한에 진주한 뒤 친일세력을 해방정국의 지배세력으로 만들면서 제주 4.3 항쟁과 6.25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대량 학살, 5.16 군사쿠데타 등에 직간접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있지만 그에 대한 진상 규명 등은 한미동맹의 유지라는 구실로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미동맹은 미국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군사적 주권이 실질적으로 미군에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어 이의 정상화가 시급하고 그래야 광주항쟁 등의 진상 규명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월 18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거행된 제42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5·18 항쟁은 “42년 전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피로써 지켜낸 항거로 5·18은 현재도 진행 중인 살아있는 역사이다. 5월 정신은 지금도 자유와 인권을 위협하는 일체의 불법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할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고 언급14)했는데 광주의 진실에 대해 규명하는 작업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가 2020년 11월 10일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40주년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5.18민주화운동 전후 한국정치와 미국의 개입: 박정희 암살, 전두환 쿠데타, 광주 학살, 김대중 구명과 미국의 역할’ 가운데 광주항쟁 전후해 작성된 미국 비밀 자료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980년 5월 대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자 군부는 즉각 특전사에 의한 진압을 준비하며 주한미군에 구체적으로 알렸고, 위컴 사령관은 승인할 계획을 세웠다. 5월 7일 글라이스틴 대사가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한국군은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병력을 이동시킨다고 미군 지휘부에 통보하였다. 제13공수여단을 서울로 이동하고, 제11공수여단을 김포로 이동해 제1공수여단과 함께 배치한다. 2개 여단 총 병력은 약 2,500명으로 학생 시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 중이다. 주한미군 지휘부는 포항의 해병대 제1사단이 대전, 부산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해병대 제1사단은 연합사 작전통제 병력으로 이동을 위해서는 미국의 승인이 필요한데, 유엔군사령관은 요청이 있을 경우 승인할 계획이다.”

글라이스틴은 8일 “모든 특전사 소속 부대들이 광범위한 폭동진압 훈련을 받고 있다”며, “특히 최루가스 사용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학생 시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며 ‘법과 질서’ 유지를 강조했다. “학생들이 거침없이 법과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정부는 필요하다면 군까지 동원해 질서를 유지하겠다고 다짐하는 듯하다..... 미국 정부는 필요한 경우 군병력이 경찰을 지원한다는 한국 정부의 법과 질서 유지를 위한 비상계획에 반대한다는 점을 어느 방식으로든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주한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군사령부는 18일부터 광주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들었다. 서울과 광주엔 특전사가, 부산엔 해병대가 예비 병력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위진압 특별훈련을 받은 20사단과 30사단이 연합사 지휘 아래서 빠져 광주에 투입되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부대를 연합사 통제에서 해제해 달라는 한국의 16일 공식요청을 ‘승인’한 터였다. 병력 동원에 대해 국무부와 국방부에 보고해 ‘동의’도 얻었다. 북한을 감시하기 위해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를 이동 배치해달라는 전두환 군부의 요구도 들어주었다. 주요 미국 해군함정들도 한반도 근해로 파견했다.

글라이스틴은 21일 “한국 군부는 공식적인 정부 인수를 거의 완료했다..... 이들을 현실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22일엔 한국 당국이 광주에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며, 질서 회복 뒤 군부를 압박해 정치 자유화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위컴은 24일 국방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전두환이 광주와 다른 지역에서의 불안을 최소한의 피해로 해결하여 사회적 화합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이상 그에게 섣불리 반대하고 나서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결국 조만간 전두환의 지위와 군의 결속이 굳건히 다져질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은 한 발 물러난 곳에서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고 있으며 청와대로 향한 행진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글라이스틴 대사와 나는 전두환과의 관계를 신중하게 지속시켜 나가되 그를 추켜세우거나 끌어내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군의 심각한 내분과 북한의 침투 위험을 가져올 뿐이며 또 다른 전두환을 낳게 되는 불상사를 불러올지 모른다. 한국 내정에 간섭했다는 불명예도 안게 될 것이다.”

위컴은 26일 광주 계엄사령관 소준열 중장으로부터 다음날 실시될 광주진압 작전계획을 구체적으로 보고받았다. “20사단 소속 보병부대가 공격 핵심역할을 맡을 것이며, 군인 3,000명씩 4개 부대가 이동할 예정이고, 사태 초기 광주에 진입하여 무자비한 공격을 단행했던 특전사 대원은 지원병 역할만 맡게 될 것이다..... 그들 모두 무기를 장전하고 자기 방어를 위해 총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글라이스틴 역시 26일 6,000명의 20사단과 민간인 복장의 특전사 병력이 광주에 들어가 시위를 진압할 것이라는 합참의장의 공식통보를 받고, “오늘 26일 밤 또는 내일 27일 아침 일찍 폭도들을 체포하고 무장 해제시키기 위해 병력이 광주시내에 대규모로 진입할 계획”이라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그리고 “광주 무법상태의 장기간 지속에 따른 위험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 군사 행동을 자제하라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글라이스틴은 27일 “계엄사령부로부터 03:30 한국군이 광주를 탈환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05:20 탈환을 선언했다는 비밀 연락을 받았다. 특수부대가 공격을 주도하였고 20사단 소속 전차 8대가 이에 가담하였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1999년 회고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5월 27일 새벽 3시 30분 광주에 진입한 계엄군은 약 2시간 후 시를 장악했다. 진입작전 중 희생자는 극히 미미했다. 그러나 전남도청을 사수하려던 약 30명의 중무장 시민군은 특전사 병력에 의해 사살됐다. 그것으로 광주항쟁은 막을 내렸고..... 우리는 20사단과 특전사 부대가 작전을 능숙하게 수행했다는 점에 최소한 안도했다.”

미국, 1987년 전두환 계엄령 선포 저지시켜

한편 1987년 6월 항쟁이 발생해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지자 전두환은 그 해 6월 19일 자정에 계엄령을 선포해 계속 집권할 시도를 하자 미국은 그럴 경우 한국에서 내전이 발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이를 저지하기 위해 레이건 대통령이 나서 저지시킨 것으로 밝혀졌다.15)

미국은 전두환이 계엄령 선포 계획을 실행하기 전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주한미대사관을 통해 전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에게 대통령 단임 약속을 지키고 권좌에서 물러나야 하며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통령 선거를 취소할 경우 한‧미 간에 심각한 사태가 날 것이라고 경고하는 서한을 작성해 주한 미 대사관을 통해 전두환에게 전달했다. 릴리 주한 미 대사는 1987년 6월 19일 오후 전두환을 직접 만나 전달하면서 워싱턴의 의중을 설명했다. 전두환은 결국 계엄령 선포 계획을 포기했다.

 

주)

1) https://en.wikipedia.org/wiki/May_16_coup#United_States_response

2) https://adst.org/2013/04/the-fall-of-south-korean-strongman-syngman-rhee-april-26-1960/

3) UPI 2920년 5월 15일.

https://www.upi.com/Top_News/World-News/2020/05/15/US-faced-tricky-choices-following-South-Korea-coup-documents-show/1021589548521/

4) https://popularresistance.org/qwang-ju-democracy-protest-and-massacre-us-was-complicit-in/

5) 고승우, 윤범모. 반해과 미술, 춘추언론, 1989. 111.

6) 고승우, 윤범모. 반해과 미술, 춘추언론, 1989. 116-118.

7) https://www.globalsecurity.org/military/facility/kwangju.htm

8) 고승우, 윤범모. 반핵과 미술, 춘추언론, 1989. 118-120.

9) 고승우, 윤범모. 반핵과 미술, 춘추언론, 1989. 111.

10) https://www.thenation.com/article/world/kwangju-uprising-and-american-hypocrisy-one-reporters-quest-truth-and-justice-korea/

11) 고승우, 윤범모. 반핵과 미술, 춘추언론, 1989. 111.

12) http://timshorrock.com/2020/05/19/gwangjuarchives-box1-file1/

13) 광주드림 2020년 5월 20일.

14) 중앙일보 2022년 5월 19일.

15) https://adst.org/2013/06/avoiding-martial-law-in-south-korea-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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