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연세대 앞 철길 아래에서 31년전 1991년 5월 18일 분신, 투신으로 민주화와 통일의 역사를 한걸음 앞으로 밀고 간 이정순 열사의 추모비 제막식이 거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25일 오후 연세대 앞 철길 아래에서 31년전 1991년 5월 18일 분신, 투신으로 민주화와 통일의 역사를 한걸음 앞으로 밀고 간 이정순 열사의 추모비 제막식이 거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31년 전 이름없는 한 여인이 불꽃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 이땅 민주화와 통일의 역사를 한걸음 앞으로 밀고갔다.

당시 39살의 그녀는 1991년 5월 18일 오전 11시 30분경 강경대 학생의 노제행렬이 지나가는 연세대학교 앞 철길에서 분신과 투신으로 부정한 독재권력의 퇴진과 갈라진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자신의 뜻을 밝혔다.

'백골단'으로 불리던 사복경찰에 의해 명지대생 강경대가 폭행, 사망당한 1991년 4월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투쟁이 이어지던 때였다. 

'공안통치 종식, 노태우 퇴진, 백골단 해체'를 외친 그녀의 항거에 대해 언론은 '4남매의 자녀를 둔 30대 여인의 죽음'으로 제목을 달아 보도했고, 당시 노태우 정부는 이혼과 정신병력 운운하며 의로운 주검에 난도질을 가했다.

31여년이 지난 2022년 6월 25일 오후 연세대 앞 철길(정문을 마주보고 오른쪽 인도 방향) 아래에 그녀의 이름을 '평화의 사도 이정순 카타리나 열사'라고 새겨넣은 190cm 높이의 추모비 제막식이 거행됐다.

추모비에는 전라남도 순천에서 독립운동가 아버지와 여순항쟁 피해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1952년) 독실한 가톨릭 신앙생활과 독학, 틈틈히 시와 글로 한반도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염원했던 고인의 삶이 적혀있다.

이정순 열사. [사진제공-유가족]
이정순 열사. [사진제공-유가족]

추모비의 다른 한 면에는 고인이 남긴 유작시 중 한편을 골라 새겼다.

"듣는 이 없어 몇자 적어본다
꼭 꼭 닫아버린 문
어이해 열릴거나
답답한 캄캄 속
어느 때나 비출거나
별도 빛이련만
달도 빛이련만
해도 빛이련만
등불도 빛이련만
내 빛은 어느 빛이련가
나즈막한 소리는
어디서 어느곳에서
바람결에 들리듯
이렇듯 알리듯 스며
젖어들고
안타까운 가슴은
눈망울에 구슬이 맺히도록
서려오고
일으키는 빛은 어느 곳에서
비추나
빛은 알지 못함이어리"
(유고시집 '내 빛은 어느 빛이련가' 중에서)

이정순 열사 동생 이옥자씨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똑똑한 언니를 독립군으로 키웠다고 기억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정순 열사 동생 이옥자씨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똑똑한 언니를 독립군으로 키웠다고 기억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추모비를 제작한 오종선 조각가.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추모비를 제작한 오종선 조각가.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추모비를 제작한 오종선 조각가는 "바람불어도 다시는 꺼지지 않을 불꽃을 형상한 빨간 무늬를 넣었다. 지나가는 연세대생들이 이정순 열사를 기억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열사의 동생 이옥자씨는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언니에게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내 몸을 초개와 같이 던져야 한다', '나라가 없으면 가족도 없다', '미국과 일본은 한편이다. 믿어선 안된다', '양식이 없어도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한다'며, 독립군으로 키웠다"고 추억했다.

어려서부터 예쁘고 야물고 똑똑하고 무술도 잘했던 언니는 죽음을 건 투쟁을 결행하기 전 명지대생 강경대와 전남대생 박승희의 죽음을 접하고는 가톨릭 교리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한 듯 "수많은 열사들은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이니 자살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했다는 기억도 떠올렸다.

또 미리 죽음을 각오한 듯 "무슨 일이 있어도 너무 놀라지 말라"고 했다며, 수많은 언론이 이정순 열사의 죽음 이후 '이혼녀', '정신병자'라며 모욕한데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지난 9일 이화여대 앞 대현문화공원에 김종태 열사 42주기를 맞아 '오월걸상' 제막을 도운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은 6월 말까지 임기가 끝나기 전 이정순 열사 추모비 건립까지 마무리하게 되어 뜻깊게 생각한다며, "열사들의 죽음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한 것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소회를 밝혔다.

강경대 열사의 부친 강민조씨는 "경대의 장례행렬이 지나가던 그날 철길 위에서 불이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름도 모르는 30대 주부가 자식들을 놔두고 갔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이후 지금까지 경대의 추모제때마다 이정순 열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기우 신부와 함세웅 신부가 집전한 가톨릭 추모비사에서 교인들은 "이정순 카타리나 열사는 '통일할 나라 대한민국, 축복의 나라 통일의 나라 대한민국'을 꿈꾸며 기도했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며 그 꿈을 온 몸으로 우리에게 전했다. 사실 그 꿈은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했지만 열사로 인해 더욱 절절하게 와닿는 꿈이 되었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열사의 장녀 공문정씨(왼쪽)와 윤순녀 새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회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열사의 장녀 공문정씨(왼쪽)와 윤순녀 새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회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1991년 5월 18일 당시 강경대 열사 노제에 참석했던 연세대앞에서 가톨릭 신자로서 부름을 받아 이정순 열사의 빈소를 지키며 장례 일정을 함께 한 윤순녀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회장은 이날 추모비 제막식에 대해 "이름없는 여인 이정순 카타리나가 오늘 해방되는 날이다"라고 감회를 밝혔다.

이날 이정순 열사 추모비 제막식은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와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91년열사투쟁30주년기념사업회 등이 나서 준비했다.

가수 이광석씨가 이정순 열사의 시에 곡을 붙인 추모곡 '내 한 몸 바쳐지리라'를 헌정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가수 이광석씨가 이정순 열사의 시에 곡을 붙인 추모곡 '내 한 몸 바쳐지리라'를 헌정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한편, 이정순 열사는 1952년 전남 순천 출생으로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와 여순사건 피해자인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 순천에서 버스안내양과 가발공장, 1970년 상경후 한독실업 노동자로 생활하며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다 1973년 결혼해 슬하에 1남3녀를 두었다.

1989년 합의 이혼 후 서울에서 포장마차, 식당일을 하다 1991년 5월 18일 오전 11시 30분 강경대 열사의 노제가 경찰에 의해 저지당하던 중 연세대 정문 앞 철교위에서 분신후 투신했다.

1991년 5월 21일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되었다가 2014년 4월 26일 이천 민주화기념공원 민주묘역으로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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