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역사 이야기에서 이번에 다룰 문제는 해방 초기 북한에서 좌우연합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일제 식민지 통치에 항거해 싸웠던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민족주의자도 있었고 사회주의자도 있었습니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사상이 다른 세력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해방 후 나라를 건설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당연히 좌우가 함께 풀어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좌우간의 협력과 합작은 해방 후 정치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특히 공산당은 이 문제를 통일전선이란 차원에서 접근하게 됩니다. 그러면 북한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갔을까요? 그 이야기를 몇 번에 걸쳐 살펴볼까 합니다.


1. 해방 후 통일전선 문제


공산주의자의 전략전술에서 통일전선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통일전선은 처음 단순히 자신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전술적 문제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전략적 문제로 그 비중이 높아져 갔습니다.

통일전선의 시초가 된 것은 레닌의 러시아 혁명에서 노농동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레닌은 노동계급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러시아에서 노동계급 혁명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의식수준은 낮지만 당시 숫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1917년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당의 지도를 받는 노농동맹에 의해 소비에트 정권이 탄생하였습니다.

통일전선전술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것은 유럽에서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한 인민전선이 조직되면서였습니다. 1930년대 유럽에서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 등 나치즘이 등장해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이 도래하자 그전까지 적대적 관계에 있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손을 잡은 것입니다. 반파시즘 인민전선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통일전선운동은 대체로 좌파 내에서의 연합 문제였습니다. 통일전선 전술을 보다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계기는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해방투쟁 과정에서 만들어집니다.

공산주의 운동은 중국, 조선을 비롯한 제3세계 나라의 민족해방투쟁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식민지에서는 제국주의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세력이 손을 잡고 민족해방을 성공적으로 쟁취한 바탕 위에서 혁명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함께 손을 잡고 민족해방투쟁에서 공동전선을 형성하게 됩니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좌익세력과 민족부르주아가 사상과 이념, 정파를 초월해 손을 잡게 되는 좌우익 연합전선이 그것입니다.
중국에서의 국공합작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으며, 만주의 동북항일연군도 그 연장선 위에 선 것이었습니다. 또 김구가 김원봉과 손잡고 임시정부를 공동으로 구성하려 했던 것 역시 이런 노력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공산당에게 있어 민족부르주아 세력과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문제는 민족해방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전술적인 차원을 넘어 전략적 차원의 문제로까지 발전해 갑니다. 당연히 해방후 북한에서도 이 문제는 공산당의 정치노선을 결정하는 데서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해방후 한국 공산주의 내부에는 통일전선 문제를 둘러싸고 이견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뉘었습니다. 박헌영이 장악한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과 김일성이 이끌고 있던 북한의 항일빨치산 세력. 이들은 두 흐름을 대표하는 세력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박헌영은 계급 연합 형식인 인민전선을 주장했고, 김일성은 계급과 당파를 초월한 반제 민족통일전선을 주장했습니다. 이런 차이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두 사람의 다른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처음 혁명운동에 참가하는 청년시절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자들과 밀접히 교류하면서 활동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게 됩니다. 물질적 도움도 받았고, 그의 동지가 된 사람들 가운데는 민족주의자로 출발해서 공산주의자로 변신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김일성은 민족주의자들의 폐해나 약점도 잘 알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영향력과 강점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만주에서의 유격투쟁 경험을 통해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느끼게 됩니다. 나라를 잃고 만주로 떠나온 조선백성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민족적 감성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대중노선을 관철하는 핵심문제의 하나였습니다.

반면 박헌영의 경우는 엄혹한 일제의 탄압으로 합법활동이 전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혁명운동을 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자와 공동으로 활동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 국내에 있으면서 민족개량주의자들의 한계를 너무도 분명히 보았고, 민족 지도자를 자처하던 자들이 친일파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서 민족주의자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갖게 됐을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이런 경험의 차이로 인해 통일전선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에서도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대한 이론적 이해는 박헌영이 앞서 있었을지 몰라도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 얻은 경험적 교훈을 받아들이는 데서는 김일성이 앞서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만주와 소련령에서 빨치산 투쟁과정에서 계속해서 코민테른과 소련 공산당 지도자들과 접촉함으로써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경험과 정보를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던 반면, 박헌영은 국내에서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하면서 활동하기도 어려운 조건이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취약했습니다.

두 사람의 통일전선과 정세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는 해방 초기 남북한 공산주의 세력에 혼선으로 작용했습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일성-박헌영 회동이 마련되었고, 그것이 1945년 10월 8일 밤이었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 지난 이야기는 [임영태의 북한 역사이야기] 메뉴에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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