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아내와 처음 만난 것은 1985년 가을이었다. 신돌석씨는 그해 가을에 노동조합을 만드는 데 참가했다가 해고를 당하였다. 노조는 무난히 만들었다. 당시 신림동에 있던 한국노총 금속노련 서울지부에서 지원을 하였다. 이곳이 노조 만드는 걸 도와준 뒤 회사에 팔아먹는다는 소문이 있던 때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들의 도움이 아니면 노조를 만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노조 결성식을 할 장소도 제공해 주었고, 결성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당시에는 노동법에 제3자 개입금지라는 악법 조항이 있어서 노동운동단체나 노동운동 관련 종교단체들은 대놓고 노조결성에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노총과 같은 든든한 후원자가 도와준다고 해야 노동자들이 덜 불안하게 노조결성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신돌석씨를 비롯해서 함께 노조를 만들었던 사람들에게는 정말 구세주 같은 사람들이었다. 당시 노조결성준비위에는 학생운동 출신인 조철구도 있었고,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몇 년 동안 해온 박용수도 있었지만, 노조 결성 전에 있었던 파업 때문에 해고된 상태였다. 그 밖의 사람들은 소모임의 경험은 있었어도 노동조합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를 못했다. 신돌석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단 노조를 만든 뒤 신고필증이 나온 다음에는 회사에 알리고, 매일같이 모임을 하였다. 회사에서 하는 모임이 끝나면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함께 하는 집’이란 곳에 가서 조철구, 박용수와 만나서 또 회의를 했다. 그리고 신돌석씨네보다 먼저 노조를 만들고 해고된 사람들과 함께 정보도 교환하고 서로 격려도 하는 모임도 자주 하였다. 정말 정신없이 보낸 시간이었다. 그때 아내는 몇 달 전에 먼저 노조를 만들었다가 회사의 방해로 와해된 뒤 해고된 상태였다. 당시 아내는 스물을 갓 넘겼었다. 신돌석씨는 별 생각없이 정말 어린 아가씨들이 어떻게 저렇게 씩씩할까 하는 생각만 했었다. 아내는 모르겠지만 신돌석씨는 그때 아내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그해 8월 8일에 공단 입구 삼거리에서 10명의 남녀가 유인물을 돌리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연좌시위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중에 지금의 아내가 있었다. 그때는 신돌석씨네는 아직 노조를 만들지 않고 준비위를 하는 단계였다. 신돌석씨는 출근하는 길에 그들이 시위하는 것을 보았다. 불과 1년 후와 비교해도 격세지감이 느껴질 때인데, 당시 그 지역에는 기동대가 없어서 그들을 모두 연행하는 데만 1시간 가까이가 걸렸다. 그들은 여자 다섯 명, 남자 다섯 명이었는데, 정말 어린 아가씨들이 경찰과 몸싸움을 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리고는 노조를 만들고 밤마다 ‘함께 하는 집’에 가서 그들을 볼 수 있었고, 아내도 그때부터 직접 보게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냥 여럿이 섞여서 볼 때였으므로 따로 이야기를 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여의치 않을 때였다.

그런데 두 달도 못 되어 노조가 와해되었다. 금속노련 서울지부가 회사에 팔아먹었는지, 와해 방법을 가르쳐 주었는지 어땠는지는 이후에도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다. 물론 의심이 들기는 했다. 금형기사를 주축으로 해서 회사측 사람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노조 사무실로 쳐들어와서 막무가내로 사무실 집기를 부수고, 노조 간부들을 회사 밖으로 쫓아냈다. 그리고는 회사 철문을 굳게 잠갔다. 당시만 해도 구사대가 그리 익숙하던 때가 아니었는데 그들이 바로 구사대의 구실을 한 셈이었다. 그날부터 회사에서 쫓겨나서 낮에는 회사 정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하고, 밤에는 ‘함께 하는 집’에 가서 회의도 하고, 나와서 술도 마시고 하면서 해고자 생활을 하였다. 이때부터 아내를 비롯하여 먼저 해고된 사람들과 거의 매일 만나서 함께 회의도 하고, 투쟁도 조직하고, 유인물도 만들고, 사적인 이야기들도 조금씩 하게 되었다. 그 지역에 노조라고는 어용노조가 몇 있었고, 그 전 해와 전전 해에 노조를 만들었다가 깨진 적은 있다고 들었다. 제법 큰 빵 공장이 그 지역에 세 군데나 있었는데 그 중 하나에는 아예 위원장이란 사람이 위장취업자 없나 하고 조사하고 다니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1985년이 되면서 상황은 굉장히 달라졌다. 신돌석씨네 노조가 깨질 때까지 노조를 만들거나,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려고 싸움을 벌인 곳이 그 지역에만 무려 20곳에 가까웠다. 아마도 그해 6월에 있었던 구로동맹파업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1987년에 있었던 6월민주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의 전조가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투쟁들에 의식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70년대 민주노조운동 출신이나 산업선교회, 가톨릭노동청년회, 노동사목 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당시로 보면 아무래도 학생운동 출신들이 대거 공장으로 오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했다. 신돌석씨 지역에서 있었던 여러 공장의 노동자들 중에서도 아내가 있었던 봉제공장의 해고자들이 단연 돋보일 정도로 투쟁적이었다. 이들은 거의 매일 새벽마다 유인물을 주택가에 살포했다. 당시에는 유인물을 뿌리다 걸리면 끌려가서 곤욕을 치러야했다. 물론 당시까지는 구류 정도만 살았지만, 그래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신돌석씨도 이들과 함께 유인물을 뿌리기도 하였는데,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서 하곤 했다. 하지만 아내와 한 조가 된 적은 없었다. 출근 시간에는 공단 입구로 가서 출근하는 노동자들에게 유인물을 나눠 주었는데, 5분에서 10분 정도 하고 빨리 자리를 떠야 했다. 그 사이에 수백 장의 유인물이 순식간에 노동자들의 손으로 넘겨졌다.

아내와 가까워진 것은 그해 10월 26일의 가두시위로 구류를 함께 살게 된 때부터였다. 이 시위가 어떻게 조직된 것인지 신돌석씨는 알지 못했다. 다만 조철구에게 이야기를 듣고, 같이 해고된 김철배, 김강배와 현장에 갔고, 거기서 연행되어서 구류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날 시위는 공단입구 사거리에 있는 전신주에 학생 출신 해고자 장선우가 올라가 메가폰으로 사이렌을 울리면서 시작되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인도에 있던 사람들이 차도로 밀려들었다. 주로 해고자들과 지역의 대학생들이었다. 순식간에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신돌석씨와 김철배, 김강배는 노조 결성 전후와 해고 직후까지 열정적으로 움직였지만, 이때는 조금 시들해지고 고민도 많아질 때였다. 신돌석씨는 이때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었다. 순덕이라는 이름의 아가씨로 안산에서 봉제공장에 다녔다. 시위가 있기 전날에 순덕이가 찾아 와서 다음 다음 날, 그러니까 시위 다음 날인 10월 27일에 장인 될 분을 함께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 놨다고 했다. 정말 순덕이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순덕이도 저 해고자들과 마찬가지로 중학교 나온 뒤 계속 봉제공장만 다녔다. 신돌석씨와 그가 만난 것은 벌써 3년이 넘었다. 신돌석씨가 노조준비위를 하기 전까지 둘 사이는 별 문제가 없었다. 둘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동거할 것도 여러 번 고려했었다. 하지만 서로 직장이 있는 지역이 달랐고, 신돌석씨의 알량한 자존심이 제동을 걸어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순덕이는 중학교만 나온 뒤 봉제공장만 죽 다녔기 때문에 이미 오야미싱사가 되어 있었고 적금을 들어서 모아 둔 것도 제법 많았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특별한 기술도 없고 군대 생활 3년의 공백이 있었기 때문에 모아 놓은 돈이 없었다. 순덕이가 전세방은 자기가 마련할 수 있으니 자기 있는 지역으로 오라고 했다. 신돌석씨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직장에 들어간 뒤에는 무리해서 적금도 들고 계도 들어서 돈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노조준비위를 하면서 모두 깨버렸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처음 친목회를 할 때, 그리고 노조준비위를 만들기 전 노동법 공부를 할 때, 그 뒤 노조준비위를 만들 때까지 순덕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드러나지 않게 신돌석씨를 도와 주었다. 지지하고 응원한다는 표시였다. 10년 가까운 세월을 봉제공장에서 고생한 순덕이니 이런 문제에 우호적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점점 활동의 정도가 강해지고, 마침내 적금도 해약하고 계까지 깨니 순덕이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 뒤로 순덕이와 여러 번 싸웠다. 그 전에는 주로 신돌석씨가 순덕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으나, 노조 준비위를 한 뒤에는 주로 순덕이가 신돌석씨를 찾아왔다. 순덕이는 변해 가는 신돌석씨를 처음에는 묵묵히 바라보다가 울며불며 소리치는 일도 있었다. 사실 변한 것은 신돌석씨인 것만은 아니었다. 신돌석씨가 앞으로 나아갈 때 순덕이는 멈춰 있거나 뒤로 가면서 신돌석씨를 앞으로 가지 못하게 붙잡으려고 하니까 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진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둘은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순덕이가 공장에서 있었던 일이나 드라마 본 것 등을 이야기할 때면 신돌석씨는 건성으로 들었다. 신돌석씨는 입만 열면 직장에서 있었던 문제, 이 사회의 문제 등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순덕이는 안 듣는 것 같았다. 아니 들으면서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듯했다. 결국 당시에 언론에서 마구 공격해대던 이른바 위장취업자 문제로 둘은 충돌하게 되었다. 순덕이는 자기네 현장에 위장취업자가 있었는데 잘렸다고 했다. 진짜 배고픈 게 뭔지 모르고 노동자들을 선동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 집에 가 보면 비싼 비누만 쓰더라고 하였다. 네가 가봤냐고 하면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가 시작되면 신돌석씨도 마구 헝클어졌다.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옳고 그름 이전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더욱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순덕이에게는 이런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순덕이는 ‘돌석씨는 위장취업자에게 이용만 당할 거야’라고까지 하였다. 그 말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순덕의 뺨을 때렸다. 순덕은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울기 시작했다. 신돌석씨도 당황했다. 순덕의 팔을 붙잡고, 다리를 붙들고 울며 매달렸다. 잘못했다고 했다. 다시 안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다툼이 있는 날이면 순덕이는 자고 갔다. 둘은 언제 싸웠냐는 듯 서로를 불태웠다. 순덕이는 다음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돌아갔는데 아침밥을 만들어 놓고 가는 것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뿐인가. 때로는 처박아둔 빨래까지 깨끗하게 빨아놓고 가곤 했었다. 이번에 장인 될 분을 만나자고 한 것은 일종의 최후통첩인 셈이었다.

마음에 갈등이 심해서 그런가. 이런 데서도 어정쩡해졌다. 하지만 해고자들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는데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신돌석씨도 김철배, 김강배와 함께 인도를 벗어나서 차도로 들어가 시위대에 합류했다. 시위대라야 10여 명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그 지역은 이렇다 할 기동대도 없었고, 파출소에서 급히 나온 경찰 몇 명이 교통정리하면서 해산을 종용하고 본서에서 지원 병력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가 지났을까. 본서에서 경찰 트럭이 오고 전경들이 거기서 내렸다. 시위대를 하나씩 연행해 갔다. 그냥 시위대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놔두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신돌석씨도 벗어날까 하다가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계속 구호를 따라 외치고 있었다. 결국 두 팔이 잡히고 트럭에 실려졌다. 트럭에 실린 사람들은 그냥 조용히 있었다. 신돌석씨도 먼저 구호를 외치거나 할 기분은 아니어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한 여자가 끌려 들어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 여자는 트럭에 실린 뒤에도 계속 구호를 외쳤다. 얼굴을 보니 ‘함께 하는 집’에서 많이 만났던 여자노동자였다. 그이가 계속 구호를 외치자 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전경 하나가 군홧발로 차서 넘어뜨리더니 온몸을 짓밟았다. 얼굴이 짓밟히자 코피가 터졌다. 그이의 카키색 점퍼와 새파란 스웨터에 새빨간 피가 얼룩을 만들며 번져 나갔다. 그이의 구호 소리가 신음소리와 함께 잦아들었다. 순간 트럭 안의 해고자 한 사람이 일어났다.

이 인간백정 같은 새끼들아…

그 소리와 함께 연행된 다른 사람들도 일어났고 트럭 안에서 전경들과 난투극이 벌어졌다. 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전경 하나도 안으로 달려와서 가세했다. 이제 문 앞에는 한 명의 전경만이 있었다. 신돌석씨는 순간적으로 갈등을 했다. 덤벼들어서 전경들을 패 주어야 하나, 아니면, 아니면… 아빠 만나는 시간 잊으면 안 돼. 순덕이의 다짐하던 말이 떠올랐다. 신돌석씨는 결심했다. 잽싸게 문을 가로막고 있던 전경의 배에 일격을 가한 뒤 밑으로 뛰어내렸다. 너무나 순간적인 일이라서 전경들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난투극이 벌어진 상황이니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신돌석씨는 그들이 쫓아가면서까지 꼭 잡아야 할 인물도 아니었다.

신돌석씨는 앞만 보고 달렸다. 누가 잡으려고 쫓아오지도 않았다. 곧이어 전경 버스가 도착했다. 그리고 전경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서울에 있는 기동대에서 증파된 모양이었다. 이어서 사다리차가 도착하고 전경들이 그 위에 올라서 전봇대에 올라간 장선우를 끌어내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버티면서 메가폰으로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이제 밑에서 구호를 외치거나 전경과 몸싸움을 벌이는 사람은 몇 명 없었고, 조금 떨어져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몰려 있을 뿐이었다. 신돌석씨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전봇대 위를 바라보았다. 장선우가 발을 뻗어서 사다리차를 타고 다가오는 전경을 차고 있었다. 그러면서 메가폰에 대고 계속 소리쳤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여러분, 전두환 군사독재는 우리의 기본 생존권마저 압살하고 있습니다. 광주학살로 손에 묻은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저들은 그 잔인한 손으로 우리의 생존권을 압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장선우의 말이 갑자기 끊겼다. 드디어 사다리차로 다가가던 전경이 장선우의 목덜미를 움켜쥔 것이었다. 장선우는 계속 소리를 쳐댔지만 밑에서 들리지는 않았다. 신돌석씨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순덕의 얼굴이 계속 앞을 가렸다. 몰려 있는 군중 속 여기저기에 순덕이가 있었다.

뭐하고 있어? 어서 와, 빨리 와. 계속 거기 있으면 이제 정말 끝이야…

그때였다. 뒤에서 ‘죽여’ ‘이 새끼가 진짜 악질이야’ 이런 외침들이 들려 왔다. 그리고는 외마디 비명소리. 다시 잦아드는 목소리로 ‘파쇼 타도’를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조철구였다. 그는 군부독재나 군사독재라는 말보다 '파쇼'라는 말을 쓰곤 했다. 평소에 쉬운 말을 골라서 쓰기 때문에 학생 출신이면서도 노동자들과 거리감이 없는 그였다. 그가 노조준비위에서 노동법을 설명할 때면 국민학교만 나온 어린 여성노동자들도 쉽게 이해하곤 하였다. 그런데 그는 유독 ‘파쇼’라는 말을 고집하였다. 그의 말로는 그래야만 현재의 독재를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지금은 노동자들이 모른다고 해도 자꾸 그런 말을 써서 그렇게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신돌석씨도 그 말이 무엇인지 잘 와 닿지 않았고, 꼭 그래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조철구가 외치는 ‘파쇼 타도’라는 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전경들이 그를 둘러싼 가운데 어느새 대열 속에서 튀어나온 사복형사 둘이 그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고 있었다. 아마도 급소 부분을 가격당한 것 같았다. 뭐라고 외치기는 하는데 그것이 소리가 되어 들려오지는 않았다. 신돌석씨는 뒤에서 무언가가 잡아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그만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고 말았다. 군중 속에서 순덕이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안 돼. 가지 마…

그러나 이미 그 소리는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야 이 새끼들아, 그것 놓지 못해…

그것이 신돌석씨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게 될 줄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신돌석씨는 조철구를 끌고 가는 사복형사들한테 달려들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전경들한테 두들겨 맞고, 이번에는 처음에 왔던 트럭이 아니라 전경 버스로 태워졌다. 상황이 진정된 뒤 버스는 경찰서로 갔다. 일단 연행된 사람들이 강당 같은 곳에 내려졌다. 거기서 트럭에서 구호를 외치다 구타를 당했던 여성노동자를 만났다. 점퍼와 스웨터에 피가 얼룩져 있었다. 얼굴에도 피가 다 닦이지 않은 듯했다. 많이 아프지 않냐고 다가가서 물으니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에 피 묻은 얼굴, 지친 표정이 왜 그렇게 예뻐 보였을까? 그이가 바로 지금의 아내였다. 이튿날에 법원에 가서 신돌석씨는 구류 10일, 그이는 구류 7일을 선고받았다. 유치장으로 옮겨졌다. 물론 방은 따로 있었다. 유치장에 방이 여덟 개인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방이 여자방이었다. 구치소와는 달리 반원형으로 된 공간에 남녀가 방만 따로 쓸 뿐 함께 있었다. 서로 얼굴도 볼 수 있었다. 물론 여자방은 커튼 같은 것을 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안 됐지만 그걸 걷고 통방도 했다. 7일 동안 그이는 신돌석씨에게 아저씨라고 했다가 형이라고 했다가 오빠라고 했다가 하면서 친근감을 표시했다. 7일이 지난 뒤 그이가 먼저 나갔다. 열흘을 채우고 나가던 날 새벽에 그이가 경찰서 문 앞에 와 있었다. 물론 혼자 온 것은 아니었고 해고자들 여럿과 함께 왔지만, 신돌석씨 눈에는 혼자라도 왔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점점 더 가까워진 두 사람은 결국 동거를 했고, 아이도 낳았고, 결혼식도 올렸다. 순덕이 생각은 잊어버렸다. 그렇게 잊을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어쩌다 생각이 날 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립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몇 년이 지난 뒤 길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를 하는 순덕이를 보았다. 다가가서 어깨를 툭 쳤다. 순덕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둘이 차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신돌석씨는 어쨌든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사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순덕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하게 자기를 부르는 것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하긴 신돌석씨 스스로도 희한하다는 생각을 했다. 순덕이는 결혼할 사람이 생겼고, 이제 곧 결혼할 거라고 하였다. 축하한다고 했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차 한잔 마시고 헤어졌다. 그 뒤로는 만난 적이 없고, 소식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잘된 일이었다. 순덕이와는 맺어졌어도 다시 갈등이 생겼을 것이다. 순덕이를 위해서도 잘된 일이다. 신돌석씨는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았고, 순덕이는 그 길에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또한 신돌석씨 역시 순덕이와 같이 걷던 길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새로 찾은 길을 함께 손잡고 걸을 여자가 나타났다. 지금의 아내였다. 순덕이가 아니라 아내와 맺어진 것은 흔히 말하듯 운명인 것도 아니고, 내가 내 길을 가다 나와 맞는 사람을 만난 것이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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