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정 시인의 시집 『서사시 골령골』(어린작가) 표지.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김희정 시인의 시집 『서사시 골령골』(어린작가) 표지.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김희정 시인이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서사시로 시집을 냈다.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기 대전지역에서 발생한 형무소 재소자 및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이다. 최대 7천명 가랑이 군경에 의해 총살되어 암매장된 장소인 산내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도 불린다.

서사시라면 대부분 역사적 사건을 줄거리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김희정 시인의 『서사시 골령골』(어린작가)은 49편의 연작시를 순서대로 쓰지 않고 한 편 한 편 독립적으로 시를 창작했고, 연결하면 하나의 이야기 시로 나온다.

소설적 기법을 동원해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시를 끌고 간다. 시인이 희생자의 한 사람이 되어 가족이란 무엇이고 아버지, 어머니, 아내, 아이들이 어떤 그리움으로 남아있는지 시는 독백처럼 이야기한다.

김희정 시인이 시집을 들고 골령골 학살 사건 현장을 찾았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김희정 시인이 시집을 들고 골령골 학살 사건 현장을 찾았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김희정 시인은 시집을 내게 된 이유에 대해 “대전 지역에서 시를 쓰는 한 사람으로서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보지 않고 학살로 희생된 분들의 죽음으로 남은 아픔, 상처, 슬픔, 억울함, 그리움, 기다림, 한(恨)을 개인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생각해 보고, 시라는 이름으로 옷을 입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더불어 유가족들의 아픔과 희생자들의 삶을 돌아보고 그들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저마다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골령골·첫 번째

꿈에서 엄마를 보았다 행복해 보여 마음이 놓였다 자식 걱정에 잠 못 이룰 줄 알았는데

햇살이 눈도 뜨기 전 밖은 시끄럽다 간밤에 엄마를 보아서인지 기분이 좋다 부스스한 얼굴로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이쪽저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계절은 여름으로 달려가는데 찬 기운이 몸을 휘감고 돈다 엄마가 웃고 있었는데 나에게 오라고 손짓했는데 곧 집으로 가겠다고 말했는데 나에게 뭐라고 말했는데, 듣지 못했다

엄마 웃는 모습만 생생하다

김희정 시인이 산내 골령골 사건으로 시를 처음 쓴 것은 7년 전이다. 당시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추모시를 써달라는 제안이 있었고, 그때 대전 지역에도 민간인 학살 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다.

그러면서 시를 쓰기 위해 그 현장을 향해 차를 몰았다. 시인이 도착한 곳은 어느 산밑,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 불리는 산내 골령골이었다.

그때 유해발굴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낮은 봉분을 만들어 놓은 모습을 보고 쓴 시가 이번 시집에 ‘시인의 말’을 대신했던 ‘벌초’라는 시다. 그 후로 김 시인은 산내 골령골 사건으로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 시인은 “정확하게 말한다면 쓸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시 한 편으로 골령골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도 하고, ‘죽음’을 가지고 또 다른 시를 쓴다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2021년 9월경, 전국의 여러 시인들이 자신의 지역에서 일어난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주제로 시를 써 인터넷 매체에 연재를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때 다시 용기 내어 골령골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49편의 서사시가 되었다. 김 시인은 “그것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시를 써 내려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2021년도 11월 말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하루에 열 편을 쓰는 날도 있었지만, 단 한 편도 쓰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며, “시를 쓰면서 울컥거리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노트북을 끄고 밖으로 나가 겨울바람을 맞으며 심호흡을 했다”고 덧붙였다. 김희정 시인은 그렇게 한 달 만에 49편을 완성했다.

김희정 시인이 시집을 들고 골령골 학살 사건 현장을 찾았다. 학살지 표석 앞에 시집을 올려놓고, 희생자들을 위해 술 한잔 올리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김희정 시인이 시집을 들고 골령골 학살 사건 현장을 찾았다. 학살지 표석 앞에 시집을 올려놓고, 희생자들을 위해 술 한잔 올리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시집에 49편의 시를 담은 이유에 대해 김희정 시인은 “사람이 죽으면 이승에서 49일을 보내고 떠난다는 종교적인 의식이 있다”며, “그 의식을 치루지 못한 희생자들의 마음을 시인이 빙의해 풀어냈다는 의미에서 49편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골령골·마흔아홉 번째

이승에서 사십구일이 되면 떠나야 한다 사십구일이 열 번 지나고 그 사십구일이 또 열 번 지나 열 번이 지난 사십구일이 절반을 넘었다 어떤 아픔 안아도 불귀의 객이 되지 않으려면 발길 잡아야 했는데, 갈 수가 없다

새끼들이 운다 그날 아침 꿈에서 본 엄마가 운다 알아볼 수 없게 나이를 먹은 아내가 운다 나도 저 밑에서 울고 울었다 처음에는 원통해서 울었고 나중에는 보고 싶은 얼굴들 잊혀져서 울었다 울고 울다 긴 세월 이곳에 머물렀다

“사랑한다!”는 말은 들리는 것이 아니라 느껴진다 엄마, 아버지한테 먼저 와 미안하다는 말 못했다 만나면 꼭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아직 나는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엄마, 아버지 만나 “사랑한다! 그리고 죄송하다!” 말하고 싶다

이제, 국가 차례이다

김희정 시인의 시집 『서사시 골령골』 뒤편으로 구덩이가 파 있다. 지난 6월 7일부터 산내 골령골에서 유해 발굴을 시작하면서 파놓은 구덩이다. 지난해 이곳에서 900여 구의 유해가 수습되었다. 올해는 지난해 미처 발굴하지 못한 유해들을 발굴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김희정 시인의 시집 『서사시 골령골』 뒤편으로 구덩이가 파 있다. 지난 6월 7일부터 산내 골령골에서 유해 발굴을 시작하면서 파놓은 구덩이다. 지난해 이곳에서 900여 구의 유해가 수습되었다. 올해는 지난해 미처 발굴하지 못한 유해들을 발굴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사진-통일뉴스 임재근 객원기자]

『서사시 골령골』 시집은 2022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 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이번에 출간에 이르게 되었다.

200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희정 시인은 『백년이 지나도 소리는 여전하다』, 『아고라』,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유목의 피』 등의 시집을 냈고, 산문집으로 『십 원짜리 분노』와 『김희정 시인의 시 익는 빵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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