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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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
‎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
‎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
‎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
‎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
‎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
‎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이란 빈 통에 물 채우기가 아니라, 불을 밝혀 주는 것이다.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교육(education)은 선천적 능력을 끄집어낸다(educare)는 뜻이다. 그래서 인류의 스승으로 불리는 소크라테스의 교육을 ‘산파술’이라고 했다.

 교육은 산파가 산모에게서 아이를 받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잠재력을 끄집어내느냐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아버지의 이기적인 명예욕 때문에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자연을 사랑하고 감수성이 뛰어나지만 순종적인 한스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마을의 목사, 교장 선생님, 마을 사람들의 기대감 속에 시골 마을의 영재답게 신학교에 차석으로 합격한다.

 그는 스파르타식 신학교 생활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해 나가며 잘 적응한다. 그러다 ‘자유로운 영혼 하일러’를 만난다.       

 하일러는 천재적이고 반항적인 시를 쓰는 몽상가다. 한스는 그와 가까워지며 그의 안에 꽁꽁 갇혀 있던 잠재력, 자유로운 영혼이 깨어난다.

 하지만 신학교의 교육은 자유로운 영혼을 깨우는 곳이 아니다. 한스의 성적은 차츰 떨어지게 되고 그는 학교에 반항하게 된다. 

 결국 유일한 친구 하일러가 퇴학을 당하고 한스의 마음과 몸도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다.    

 교육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지내던 그는 끝내 신학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게 된다.

 낙향한 그는 자연의 품에 안기려 한다. 하지만 자연의 품에서 그는 평온을 찾지 못한다. 

 ‘한 그루의 나무는 줄기를 잘라버리면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움이 돋아나지만, 그것은 다시 나무가 되지는 못한다.’   

 그는 심한 우울증을 겪으며 방황하다 사랑하는 엠마를 만나지만 그녀의 유혹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좌절한다.

 그는 대장간의 견습공이 되어 고된 노등을 하며 견디던 어느 날, 기계공들과의 술자리를 가진 후 만취해 집으로 돌아오다 강물에 빠져 죽게 된다.

 구둣방 주인 플라이크가 한스에게 해주었던 말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지치면 안 돼. 그러면 수레바퀴 밑에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천지자연은 지치지 않는다. 지친다는 건, 천지자연의 이치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한스를 지치게 한 커다란 수레, 그 수레는 지쳐 나자빠진 사람들을 마구 짓밟으며 굴러간다.

 한스는 잃어버린 어머니를 자연에서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을 대표하는 아버지는 자연을 떠나 사회 속으로 가라고 명령한다.   

 그럼 사회 속에서 한스는 어떻게 자유로운 숨을 쉴 수 있나? 바로 하일러의 자유로운 영혼이다. 시적 상상력을 통해 그의 모든 아픔이 승화되었어야 했다.

 한스는 친구를 잃어 시적 상상력이 막히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평생 시를 쓰며 수레바퀴에 깔려 죽지 않았다.

 나는 고1때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었다. 나도 그때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막막한 고등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 안의 시적 감수성을 깨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시를 쓰나?’ 갑각류가 되어 딱딱한 껍질로 속살을 보호했다.

 나는 밤이 되면 어슬렁어슬렁 기어 만화가게로 가서 무협지를 빌려왔다. 밤새워 무림의 세계에서 노닐었다.

 다행히 무사히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단단한 껍질 안의 여린 속살의 비명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 비명 소리를 잠재우는데 수십 년이 걸렸다. 이제 인생의 말년, 나는 내 여린 속살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돌을 통한 하나의 교육: 수업을 통해, 밖에서 안으로 
 돌에게서 배우기 위해서는 그를 자주 찾아야 한다. 
 사람과는 다르고 생기 없는 그의 목소리를 잡아라. 
〔......〕

 돌로부터의 또 다른 교육: 오지에서 
 안에서 밖으로, 그리고 예비교육 
 오지에서는 돌이 가르칠 줄 모른다. 
 그리고 가르친다 해도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하리라 
 거기서는 돌은 배우지 않는다: 거기서 돌은 
 탄생의 돌이고, 이미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 조앙 까브랑 지 멜루 네뚜, <돌을 통한 교육> 부분 
 
 
 시인은 ‘돌을 통한 교육’을 노래한다. 돌은 ‘탄생의 돌이고, 이미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문명사회에 사는 우리는 ‘돌에게서 배우기 위해서는 그를 자주 찾아야 한다.’ 

 돌에게서 더 이상 배우지 못할 때, 돌에 대해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을 때, 우리는 서서히 죽어가게 된다. 

 

 

고석근 시인 약력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철도고등학교 운전과를 졸업한 후 기관조사로 근무하다 충북대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잠시 전교조 활동을 했습니다. 교직을 떠난 후 빈민단체(주거연합)에서 활동하다 한길문학예술연구원에서 시 창작을 공부했습니다. ‘리얼리스트 100’에서 주는 제6회 민들레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며 글을 쓰고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나무’ 산문집 ‘명시 인문학’ 에세이집 ‘숲’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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