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검찰개혁이 이번 정권에서 어렵다고 하더라도 꾸준히 제기하고, 무언가 개혁진보세력의 합의안을 만들고, 공감대를 확대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정환이가 이야기한 검사장 직선제, 민호가 이야기한 기소 배심제 등도 다 논의를 확대해 나가면서 공감대를 형성해야지. 그런 걸 위해 지역에서 우리 노동자들이 할 일이 무엇일까?”

신돌석씨가 뭔가 대화를 이어 나가보려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저는 이번 정권에서는 검찰개혁을 하는 것보다 검찰공화국을 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한동훈이 법무장관에 임명되었잖아요. 정말 기가 막힌 일이네요. 조국 전 장관 가족에게 한 것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만 해도 이런 일이 있겠어요? 바로 전날 국회에서 협치 어쩌구 하더니 하는 게 꼭 이렇잖아요. 2차 대전 때 영국의 거국내각을 거론하던데 그럼 공동정부 구성은 몰라도 야당이 격하게 반대하는 건 받아주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기대할 게 없어요. 싸워서 저지시켜야지요.”

박정환이 격하게 말했다. 그러자 김민호도 한마디 하고 나섰다.

“한동훈 임명에는 더민주의 한심한 실책이 크게 작용했어. 그게 다 조국 사건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생긴 거야. 그러니까 야당이 한동훈을 격렬하게 반대하더니 결국 별로 나온 게 없지 않냐는 쪽으로 여론도 흘러가잖아.”

“실책은 실책대로 비판 받아야겠지만 왜 나온 게 없어요? 핸폰 비번 안 깐 것만 해도 법무장관 될 자격이 없잖아요.”

“그건 또 다른 문제지. 자신의 유죄 혐의를 방어하는 것은 기본권에 해당하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 또 한동훈 편든다고 하겠지만, 그건 분명히 아니고 핸폰에 그 문제 말고도 사생활과 관련되는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잖아. 그걸 까는 게 올바르다고 하는 것은 기본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볼 수 있어.”

“무슨 그런 말이 있어요? 공무상 행한 일과 관련해서 자기가 밝히지 않고 형사처벌을 피하겠다면 법을 집행하는 장관직은 맡지 말아야지요. 어째서 그렇게 사사건건 저쪽 편만 드는 논리를 말해요? 그러니 국힘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을 듣지요.”

“뭐가 어째? 너야말로 매 사안마다 더민주 편을 들고 나오냐? 더민주에 비판만 하면 쌍심지를 켜고 국힘편으로 몰아 붙이냐? 우리가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가 퇴행한 것이 윤석열이 된 시점이 아니라는 것이야. 문재인 정부 때부터 그건 시작이 된 것이지.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식의 말이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야. 그런 점에서 돌석이형도 자꾸 개혁진보세력이라는 말을 하시는데 그런 불분명한 개념 때문에 우리 행동이 꼬이게 된다고 생각해요. 이젠 개혁세력이란 건 없어요. 그들과는 확실히 선을 그어야 한다고요.”

우려했던 대로 다시 더민주 편이냐 국힘 편이냐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신돌석씨는 큰소리로 그만 하라고 제지하고는 공감이 되는 것부터 이야기하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일단 검찰이 인권을 보호해주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김동학의 예를 들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검사는 그 뒤로는 김동학을 부르지 않았다. 그때부터 어머니와 아내를 면회할 수가 있었다. 어머니와 아내는 김동학에게 변호사를 선임했으니 잘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김동학은 뭘 쓸데없이 생돈 주고 변호사를 선임하냐고 안 만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서 열흘쯤 지났을 때 변호사가 왔다. 1심 때는 별일 없을 거라 생각하고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었다. 말은 안 만나겠다고 했지만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더욱이 2심 변호사는 동네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선임해 주었다고 하였다. 고마운 일이었다. 동네 사람들 기대를 저버릴 수도 없었다. 변호사는 인권변호사라서 그런지 이전에 김동학이 알던 변호사들과 좀 달랐다. 김동학은 실형을 산 전과만 세 번이므로 변호사를 여러 번 만났다. 특히 첫 번째는 소년수라서 국선 변호인이었는데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고, 막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렸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라면서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변호사는 차분하게 말을 했다. 자기도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경우는 창피한 일이다. 이런 일로 감호를 붙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검사는 지금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인사고과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검사도 동의하고 김동학도 동의할 수 있는 수를 찾아보자고 하였다. 김동학은 단호하게 말했다. 자기는 무죄 이외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변호사가 그냥 한숨만 쉬고는 돌아갔다. 며칠 뒤 다시 검사가 불렀다. 불러놓고는 검사도 계장도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10분쯤 지났을 때 문이 열리더니 수의를 입고 포승줄에 묶인 사람이 들어왔다. 김동학에게 따귀를 맞은 동네 후배였다. 그는 불구속 기소되었고, 1심에서도 집행유예를 받았었다. 어찌 된 일인지 의아해하자 그가 울먹이며 말했다. 자기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1심이 끝난 뒤 김동학과 마찬가지로 그도 계속 불러들인 모양이었다. 김동학이야 구속된 상태니까 부를 수 있다고 쳐도 그는 증인에 불과하니까 사실 그렇게 마구 부르면 안 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몰라도 1980년대 초에 검사가 부르는데 안 갈 정도로 간이 큰 사람은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검사는 그에게 김동학에게 맞지 않았냐고 계속 추궁했다. 그는 계속 부인했지만 그렇게 집요하게 불러대니 마음이 흔들렸다. 그냥 말리면서 따귀 석 대 때렸다고 하면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자기 합리화도 생겼다. 검사는 그에게 시인만 하면 다시는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재판정에도 부르지 않고 진술서로 대체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결국 시인을 하고 말았다. 진술서를 쓰고 지장을 찍었다. 그런데 지장을 찍은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구속이 되어 버렸다. 죄명은 위증죄였다. 검사가 이미 영장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때는 영장실질심사라는 제도도 없을 때였다. 검사는 그가 재판정에서 번복을 하지 못하게 아예 위증죄로 구속을 시켜 버린 것이다. 검사와 계장은 괜히 주변 사람 피해 주지 말라고 김동학에게 압박을 가했고, 후배는 울먹이기만 했다. 김동학은 마음이 많이 흔들렸지만 그래도 시인하지 않았다. 다만 후배는 풀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는데 그것이 검사에게 여지를 남긴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2심 시작하기 직전에 변호사가 왔다. 판사, 검사와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감호는 물론 떼고 형량도 징역 10월 정도로 한다는 것이었다. 원래 기소 내용은 폭력 행위 등에 관한 처벌법 위반인데 그것을 형법의 폭행으로 바꾸면 형량이 줄어들 수 있다고 하였다. 김동학이 이미 8개월 가량 살았기 때문에 2심만 하면 만기로 나갈 수도 있었다. 김동학이 생각해도 묘수였다. 판검사와 변호사가 재판을 이렇게 미리 짜기도 하는구나 생각하니 기가 막히기도 하였다. 그래도 여기서 멈추는 것도 생각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김동학은 거부했다. 이런 부당한 일을 그냥 참아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변호사가 돌아갔다가 다음날 또 왔다. 김동학은 여전히 안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안간힘을 쓰는 게 역력했다. 어머니와 친구들도 와서 고집 그만 부리라고 하였다. 아내는 어머니가 올 때마다 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훔쳤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갓 낳은 아이를 안고 왔다. 보안과장실에서 특별면회를 했다. 아이의 손발을 만지작거리던 김동학은 결국 무너졌다. 김동학이 변호사와 어머니, 아내, 친구, 그리고 아들이 있는 가운데 울부짖으며 한 말이 이랬다. “세상에 이런 좆 겉은 경우가 있냐. 원통해서 어떻게 사냐.”

김동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박정환과 김민호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신돌석씨는 여기서 좀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검찰개혁의 문제는 단순히 더민주와 국힘의 싸움도 아니고, 검사와 경찰의 싸움은 더더욱 아니다. 이것 역시 이 사회의 거대한 수구기득권과 진보세력 내지는 민중의 싸움이다. 이번 청문회에서 왜 자꾸 딸의 스펙 이야기에만 몰입하냐? 그 스펙이란 것이 결국 계급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조국이 검찰의 집중적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와 검찰이라는 식으로 전선을 형성해서는 안 된다. 이번 청문회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세습자본주의가 얼마나 공고하게 형성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당사자들이나 그들을 둘러싼 정치인들, 관료, 언론, 지식인, 심지어는 시민단체까지도 그것의 문제점을 제대로 반성하거나 비판하지 못하고 있다. 한동훈 장관 후보 청문회에서 더민주 의원들이 한 실수만 갖고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다. 그것 말고도 그는 세습자본주의의 온갖 혜택을 받은 자이고, 그것을 다시 자기 딸에게 물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더 철옹성이 되어 요즘 말대로 넘사벽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번 청문회에서 드러난 것만 해도 그렇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그는 1998년 스물 다섯살의 나이로 서초구 잠원동의 아파트를 매입한다. 당시 아파트 가격이 1억원 남짓이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법연수원을 갓 수료한 사람으로서는 구입하기에 벅찬 돈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매입했는가? 그에게 그 집을 판 사람이 한후보의 모친으로부터 1억원을 빌려서 그 집을 사고, 그 모친이 근저당을 설정한 뒤, 그 근저당이 설정된 상태로 한후보는 이 집을 샀다. 그리고 한후보가 이 집을 산 뒤 곧바로 근저당을 해제했다. 이 과정을 보면 70년대부터 횡행했던 딱지거래가 보인다. 원래 재개발 등을 하면 거기 있던 집의 소유주나 세입자가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딱지를 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 상당수가 거기에 들어갈 돈이 없다. 이때 부동산업자들이 끼어들어서 딱지를 사들인다. 그렇지 않으면 부동산업자들이 돈 많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서 산 뒤 그 사람, 혹은 그 사람과 관련된 사람에게 다시 파는 수법으로 집을 넘긴다. 이렇게 해서 여러 채 심지어는 수십 채까지 사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을 우리가 ‘복부인’이라고 불렀다. 복부인은 부동산 투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이것도 성차별적 언어라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대규모 부동산 투기에 남자도 많을 것이다. 기업형 투기는 남자들이 더많이 할 것이다. 그런데 어쨌든 7-80년대에는 돈 잘 버는 사람의 부인이 나서서 이런 일을 많이 했다. 한후보의 어머니는 누가 보더라도 복부인인 것이다. 이것을 종잣돈으로 해서 그는 이후 엄청나게 재산을 불린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3층짜리 건물을 부천시에 갖고 있다. 이 건물이 불법증개축을 했다. 옥상에 불법건물을 지었고, 1층과 2층에 통로를 막으면서까지 개축을 했다. 이에 대한 시정 명령이 있었으나, 부분적으로만 시정하고 다시 시정 명령을 받았다. 청문회에서 이 이야기가 나왔다. 야당 의원의 질의에 대해 그는 어머니가 관리해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마마보이인가? 최근에 전철역이 지어지면서 40억을 호가한다고 하는 건물이 어떻게 되는지 어머니가 관리해서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실무자에게 물어보겠다고 하고는 청문회장에서 귓속말로 물어본다. 이야말로 집사나 마름을 두던 옛날의 양반 지주들의 행태와 무엇이 다를까? 이런 이야기들이 청문회에서 나왔지만 이후 언론들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더민주 의원들의 실수가 문제이지 별것 없다는 소리만 한다. 정말 한심한 작태이다. 이야말로 언론들이 쫄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측근이라서 소통령이라고 한 자의 불법적 행태를 드러내서 좋을 것 없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쫄아서라기보다 적극적인 협조인지도 모른다. 언론이야 원래 그런 줄 알았다지만 진보적이라는 사람들까지 이런 문제를 부각시키지 않고 더민주의 무능과 실수만 거론하는 것을 볼 때마다 신돌석씨는 울화통이 치밀었다. 이럴 때 이런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사람들이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 아닌가? 이것이 어찌 더민주의 문제인가?

딱지를 팔아본 사람은 안다. 그가 집을 처음 샀다는 때보다 20년도 더 이전에 망태산 산동네에서 살다가 하루 아침에 집이 철거되고, 무허가라고 하지만 그 집이 금이야 옥이야 내 집이라고 살았던 사람들은 안다. 돈이 없어서 재개발된 동네에 세워진 아파트에 못 들어가고 딱지 하나 받아서 그걸 팔고 저 멀리, 당시에는 수도도 연결되지 않았던 성남시 단대동, 은행동에 가서 살았던 신돌석씨는 안다. 아주 가끔씩이라도 술 한잔 걸치면 자기가 살던 동네에 와서 흔적이라도 찾아보고 싶어 안타까워하다가 쓸쓸히 돌아서야 하는, 그 많은 아파트에 왜 내가 들어갈 곳 한 군데 없을까 생각해봤던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런 악취 나는 불법, 편법과 그들에게 끽소리 못하고 살던 집 내어주어야 했던 일이 수십 년 이어졌다. 그리고 그 더러움이 켜켜이 쌓여서 오늘의 강남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흉내를 내려고 마용성이라나 점점 더 서울 전반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자식들을 검사 만들고, 검사 집안과 사돈을 맺고, 서로서로 봐주면서 자기들 세상을 유지시켜 가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검찰개혁을 해야 하는 본질적 이유이다. 검찰개혁이 이러한 세습자본주의의 타파라는 목표와 결합되지 않는 한 또다시 그 타령이 될 것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정신 차려야 한다. 이 세습자본주의에서 노예처럼 살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복부인의 자손이 검사가 되고, 장관이 되고, 정권 실세가 되고, 외국으로 유학 가는 세상. 그 때문에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죽어나가고, 그들을 죽게 만든 자들은 얼마든지 법으로 보호되는 그러한 세상. 그러한 세상이 우리를 분노하게 만든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신돌석씨는 어느덧 자신이 너무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서 말을 그쳤다. 박정환과 김민호는 숙연해지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다. 이런 것을 알게 된 것만 해도, 서로 공유할 수 있고 싸워나갈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앞서간 선배들의 피와 땀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이다. 신돌석씨는 박정환과 김민호의 어깨를 얼싸안으며 80년대에 한창 불렀던 노래를 나지막이 불렀다.

가자! 가자! 이 어둠을 뚫고, 우리것 우리가 찾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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