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요즘은 뉴스를 많이 타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다루지만, 사실 보통 사람들은 검사가 무엇하는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한다. 신돌석씨도 고등학교 동창 중에서 검사가 나오기 전까지는 검사 얼굴도 보지 못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자기가 검사라고 하니까, 친구 하나가 그럼 자가용도 나오고 그러냐고 물었다. 그 선생님이 말하는 검사는 직장에서 제품을 검사한다는 뜻이었는데 그 친구는 검찰청 검사로 알아들은 것이다. 당시는 검사한테 기사 딸린 자가용이 나온다고 하였다. 그때 신돌석씨는 검사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검사는 월급을 많이 받고 자가용 타고 다니는 사람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자가용이란 말도 안 쓸 정도로 차 없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 정도인데 그때만 해도 자가용이 있다는 것은 매우 부유한 것을 뜻했다. 그 후 검사라는 말은 아랫동네 어떤 형한테서 들었다. 그 형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집을 고치는 데 트럭이 와서 자재들을 실어놓고 갔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아버지는 파면당하고 구속되었다. 그 형이 신돌석씨의 형한테 하는 이야기를 옆에서 들었다. 자기 아버지가 억울하게 뒤집어썼다고 하면서 그래서 자기더러 아버지가 이전부터 꼭 검사가 되라고 했단다. 자기가 검사였으면 아버지는 이런 일로 구속되지는 않았을 거란다. 그때 신돌석씨는 검사란 것은 꽤 힘이 센 직업이고, 죄를 저질러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신돌석씨가 사는 망태산 동네에서는 검사와 아는 사람도 없었고, 검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런데 중학교 들어가니까 장차 검사가 되겠다는 애들이 꽤 있었다. 공부를 잘하는 애들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애는 생활기록부에 쓰는 장래 소망에 검사라고 썼다가 담임한테 너같이 공부 못하는 놈이 무슨 검사가 되냐고 애들 다 있는 데서 망신을 당했다. 생활기록부에는 그렇게 쓰지 않아도 같이 이야기를 오래 해보면 자기는 검사가 될 거라고 하거나, 자기 아버지가 검사가 되라고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애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신돌석씨로서는 좀 의아한 일이었는데 그만큼 사람들은 자식이 판검사가 되어서 신분상승을 해보겠다는 욕구가 강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학교 때 신돌석씨가 즐겨 듣던 방송 중에 특별수사본부라는 실록드라마가 있었다. 해방 정국에서 6.25전쟁까지 좌익사범을 검거하던 경찰들 이야기였다. 거기에 검사가 나왔는데 그 드라마에서는 사상검사라고 불렀다. 그 사람은 직접 경찰을 지휘하면서 사건을 해결해 나갔다. 그런데 경찰들에 대해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었다. 비슷한 나이거나 경찰들이 오히려 많은 것 같은데도 경찰들은 검사를 영감님이라고 불렀다. 이 드라마가 시작될 때 사이렌이 울리면서 ‘이 드라마는 검군경찰의 수사기록과 법원의 판결 및 증언을 토대로 한다’는 말이 나왔다. 검군경찰이라고 하듯 그 순서로만 해도 군보다 앞섰다. 드라마 내용에서는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김창용이라는 특무대장이 이 검사한테는 절절맸다. 그의 강직하면서 불철주야 좌익 소탕에 헌신하는 것을 보고 신돌석씨는 그를 은근히 존경하게 되었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면서 저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것은 아마 권력과 돈이 가까이 오는 검사라는 직업보다 사상검사처럼 싸우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 치기어린 생각은 당연히 곧 사라졌다. 그러다 바로 그 검사가 3.15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시위이고 4.19혁명의 기폭제가 됐다고 할 수 있는 3.15의거를 두고 공산당이 배후에 있다고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술 마시다 확 깨는 느낌이랄까. 신돌석씨로서는 이미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갈 때지만 뭔가 허전함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아무튼 그때까지도 신돌석씨는 검사가 무엇하는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기소라는 것도 알지 못할 때였고, 그 드라마에서도 그 검사는 기소는 어디 가고 수사를 지휘하는 일만 하였다. 그것도 다른 조직구조에서 계통을 통해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지휘하고 수사하는 일을 하였다. 장래 검사가 되겠다고 하던 친구들도 검사가 무엇하는 사람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힘이 세다. 출세를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인식만 가지고 검사가 되겠다고 했던 것 같다.

신돌석씨는 평준화가 시작된 첫해에 고등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에 학교 내에 다양한 학생들이 있었다. 나중에 검사가 된 동창이 몇 명 있는데 신돌석씨와 친한 사람은 없었다. 지금 기억에 남는 친구 중 하나는 경상도에서 올라온 친구인데 앞으로 검사가 되겠다고 하곤 하였다. 학과 성적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시사상식 등에 상당히 밝았다. 이 친구가 자기는 검사가 되고 대통령이 될 거라고 하였다. 옆에 있던 어떤 친구가 검사면 검사고 대통령이면 대통령이지 둘 다 되는 건 뭐냐고 놀렸는데, 이 친구가 정색을 하면서 검사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먼저 검사가 되고 난 뒤에 명성을 얻고 정치에 나가서 대통령이 된다고 하였다. 다들 갸우뚱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시사상식이 있는 그 친구와 달리 다들 그런 일이 가능한가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긴 그때 학생들은 육사 가서 대통령 된다는 것이 오히려 훨씬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10년 전쯤 만나보았을 때 그 친구는 대통령은 물론 검사도 되지 못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공장에서 해고된 뒤 해고자들과 자주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를 넘기면서 해고자 중 절반 정도는 학생출신들이었다. 사실 노동자들은 그렇게 오래 놀면서 해고투쟁을 할 형편도 안 되었고, 지치고 두렵기도 해서 이탈하기 시작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로 학생출신 해고자들과 술을 마시다 검사가 세냐, 경찰이 세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신돌석씨가 있던 지역은 주로 중소기업이라 그런지 학생출신들이 시위 전력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교도소, 구치소, 유치장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술좌석에서 많이 나왔다. 아주 우연치않게 나온 이야기였는데 한 친구가 검사를 꼭두각시 비슷하게 이야기했던 데서 이 논란이 시작되었다. 사실 학생시위와 관련된 사건에서 검사는 그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경찰에서 수사해서 송치하면 그냥 대충 물어보고, 재판할 때 형식적으로 묻고 구형하는 식이었다. 그건 판사도 그랬다. 그때 검사의 구형과 판사의 판결은 거의 천편일률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이해될 수도 있었다. 경찰서에서 실컷 두들겨 맞고 검찰청으로 송치되었는데, 검사는 별로 쳐다보지도 않고 계장이란 자가 경찰에서 한 말 확인하는 조서를 쓰는 정도가 많았다. 사실 그런 사건은 검찰보다는 정보기관이나 당시의 대공분실에서 경찰을 지휘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검사는 그저 형식적으로만 있는 존재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나온 이야기를 보면 그것은 검사라는 직업에 대해 아주 부분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공안부에서 조사를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경찰의 대공계통이나 정보기관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이가 많은 한 사람은 선배들 사건에 참고인으로 불려가서 검사한테 직접 슬리퍼로 얻어맞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검사가 전두환 정권이 된 뒤에 안기부로 파견 나가더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중앙정보나 안전기획부 등에서 수사를 지휘하던 고위직 중에 검사 출신이 상당히 많았다. 어찌 보면 그들이 꼭두각시처럼 보이던 사건은 그들에게 신경 쓸 별다른 이유가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검찰개혁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볼 때 신돌석씨로서는 의아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은연중에 경찰은 반인권적이고 그것을 감독할 수 있는 것이 검찰이라는 생각이었다. 경찰이 오랜 세월 그랬던 것은 틀림없다. 김민호의 말처럼 김근태, 박종철, 권인숙을 고문한 것은 경찰이고, 시국사건만이 아니라 화성연쇄살인사건 등에서 보듯 생사람 잡는 곳이 경찰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휘하고 감독할 권한을 가진 것은 검찰이었고, 검찰이 경찰의 그런 반인권적 행태를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시국사건의 경우에는 정보기관에서 고문을 당하고 송치되어 온 사람들에게 검사는 부인하면 다시 그곳으로 보내겠다는 것으로 협박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수사기관에서 고문당했음을 호소해 보았자 통하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공화당, 민정당, 민자당 등 이전의 군사독재정권의 여당을 육법당이라고 불렀듯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정치군인에 가장 밀착해서 협조하고 그 덕을 누린 이들이 바로 검사들이었다. 그들은 정부요직, 정보기관요직, 집권당 요직 등을 정치군인 다음으로 차지하고 있었다. 검찰이 정치군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물론 군인들 모두가 그러하지 않고 정치군인들이 그러했듯, 검사 모두가 그러했다기보다는 정치검사들이 그러했겠지만, 검사들은 군인보다 훨씬 더 출세에 민감한 이들이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부터 오랫동안 검사라는 직업을 출세를 위해 택해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한 구조적 문제가 그들에게 얼마나 야비한 짓을 하게 하는지를 신돌석씨는 주변에서 아주 생생하게 본 적이 있다.

신돌석씨와 어린 시절 같이 지낸 세 살 위의 김동학이라는 사람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좀 거칠게 살았다. 고교 시절 같은 반 애와 싸우다 잘못 맞아서 사망하게 만들었다. 폭행치사가 된 것이었다. 그 죄로 그는 소년교도소에서 3년을 살았다. 그 뒤 나와서 이것저것 하면서 살았는데 그의 전과 때문에 조직폭력배와 가까이하게 되었다. 이후 패싸움에 끼어들어서 두 번 더 전과가 생겼다. 전과 3범에 도합 징역 6년을 살았다. 보통 사람들이 보면 괜히 으스스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보면 좀 거친 사람일 뿐이었다. 1980년 여름 신돌석씨는 그와 함께 경찰에 연행된 일이 있었다. 그가 술집 웨이터를 하다 그만두었는데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하였다. 그걸 받으러 간다고 신돌석씨에게 같이 가자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당시에 신체검사를 받았지만 공사장에서 추락하여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영장이 연기되어 있는 상태였다. 다리는 거의 다 나았지만 아직 영장이 나오지 않아 대기하고 있었다. 김동학과는 매우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술 한잔 사준다는데 안 갈 이유도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그는 술집에서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부근 대포집에서 술 한잔 하고 있는데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날이 삼청교육대로 끌고 가기 위해 일제 검거를 하던 날이었다. 김동학은 전과가 있으니 여지없이 끌려갈 대상이었다. 하지만 김동학으로서야 죄도 없는데 괜히 끌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반항을 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아마 김동학이 밀린 돈을 받으러 갔던 술집에서 경찰에 연락을 하고 그래서 형사들이 잡으러 온 것일 터였다. 신돌석씨는 동네 형이 자기와 술 마시다 끌려가는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함께 저항을 하다 역시 끌려가게 되었다. 그 길로 김동학은 삼청교육대로 갔고, 신돌석씨는 끌고갈 아무 구실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때 보호실에서 만난 이필수의 아버지가 빼주었는지 아무튼 풀려났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김동학이 검사와 악연이 된 건 그 직후다. 삼청교육대를 갔다 온 뒤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우고 나서 자그마한 정비소를 차렸다. 그리고 동네 아줌마의 소개를 받아서 참한 여자와 결혼도 하였다. 1982년에 정말 평생에 다시 없을 꿈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정비소를 열심히 운영하였다. 때마침 아내가 임신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동네 가게 앞에서 간단하게 술 한 잔 마시고 있는데 동네 동생 몇이 술을 마시다 싸우는 것이었다.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고 했는데도 계속 싸우는 것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그 중 한 놈을 따귀를 갈겼다. 김동학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지라 대들지는 못하고 자기들끼리 막 떠들고 있는데 경찰이 왔다. 파출소로 연행되었고 싸운 사람 둘과 김동학이 함께 입건되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뒤 검찰청에서 소환장이 왔다. 가서 사실대로 말하였다. 벌금 정도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거기서 덜컥 구속이 되어 버렸다. 이해가 안 되었지만 전과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기소유예 아니면 집행유예로 나가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 일을 겪어보지 못한, 임신한 아내가 걱정되었지만, 그런 일이라면 수도 없이 겪어 본 어머니가 있어서 안심하였다. 이제 막 자리잡기 시작한 정비소가 문제였지만 동네 친구들과 동생들이 잘 해주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기소가 될 때 그가 입은 수의 왼쪽 가슴에 퍼런 딱지가 붙었다. 보호감호 딱지였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사회보호법이란 걸 만들었다. 징역 3년 이상 살았던 사람은 보호감호 7년, 5년 이상 살았던 사람은 보호감호 10년에 처한다는 법이었다. 물론 범죄단체 조직, 마약 밀매 등에도 보호감호를 하는 규정이 있었지만 당시 보호감호는 대부분 이전에 전과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보호감호를 위해 경북 청송에 감호소까지 만들었다. 박정희가 만든 사회안전법은 좌익사범을 감호에 처하는 것이었는데, 일반 형사범을 감호에 처하는 법을 전두환이 그걸 흉내내서 만든 것이었다. 김동학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되면 기소유예는커녕 집행유예도 안 된다. 얼마를 받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10년을 더 살아야 한다. 이럴 수가 있는가? 이렇게 되면 자기의 삶은 송두리째 망가지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 따귀 때린 것까지 부인하기로 마음먹었다. 1심이 열렸다. 검사는 징역 3년에 감호 10년을 구형하였다. 김동학은 심리과정에서 자기는 말리기만 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기에게 따귀 맞은 후배도 그런 일 없고 그냥 말리기만 했다고 진술했다. 그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한 적은 없었다. 무죄였다. 재판정에 동네 사람들이 몰려 왔는데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서 있는 아내의 부른 배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무죄를 받았지만 석방되지 못했다. 형사소송법에 구형 10년 이상이면 2심에서 무죄가 나올 때까지는 석방되지 못한다고 한다. 구치소로 돌아와서 호송차에 올라탈 때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아내의 얼굴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탈옥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도 내일 아침이면 면회를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침에 출정이란다. 재판이 끝났는데 무슨 출정이냐고 담당에게 묻자 검찰청 소환이란다. 검찰청의 구치감에 가서 하루 종일 있었는데 검사가 부르지를 않는다. 저녁에 구치소로 돌아왔다. 구치소는 그래도 자리가 잡혀서 하루를 보내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이른바 닭장집이라고 하는 검찰청 임시 대기소는 그야말로 곱징역이었다. 도대체 왜 자기를 부른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가운데 그런 일이 며칠 계속되었다.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니 가족과 면회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 짓을 한다는 것이었다. 검사들이 종종 하는 짓이란다. 그래서 검사를 불러조져라고 한단다. 부글부글 끓었지만 달리 방법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머니와 아내는 매일 구치소에 왔다가 허탕 치고 간다는 이야기였다. 그 다음날 아침부터 김동학은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이 보고되었는지 며칠이 지난 뒤에 그날도 구치감에 있는데 검사가 부른다는 것이었다. 검사실에 들어서니 검사가 보자마자 다짜고짜 슬리퍼로 뺨을 마구 때렸다. 이 새끼가 단식하면 뭐 누가 불쌍하게 봐줄줄 알아? 그리고는 빨리 불라고 하였다. 그날은 그렇게 얻어만 맞고 돌아왔다. 이튿날 또 불렀다. 검사는 다른 사람을 취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검사의 오른쪽에 90도로 놓여 있는 책상에 앉은 계장이 김동학을 그 앞에 앉으라고 했다. 계장은 오리발 내민다고 될 일이 아니니 실토하라고 하였다. 사실이라고 하니까 정말 혼좀 나야 알겠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검사가 하던 말을 멈추고 감호는 떼줄 테니까 3년만 살고 나오라고 하였다. 어이가 없었다. 검사님 같으면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3년을 살겠냐고 하면서 3년이 장난인 줄 아냐고 말했다. 그러자 계장이 벌떡 일어나서 책상 앞으로 나오더니 별안간 발길질을 했다. 김동학은 포승줄에 묶여 있었는데 그냥 벌렁 나자빠졌다. 머리가 심하게 부딪혔다. 차라리 이대로 정신을 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때 계장이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 귀를 울렸다. 이 새끼가 정신을 못차렸네. 이 깡패 새끼야 너하고 영감님하고 같은 인간인 줄 알아? 어디서 게기고 지랄이야. 김동학은 그 말이 자극제가 되었는지 몸을 비틀어서 반쯤 일어났다. 그리고는 계장과 검사를 쏘아보면서 외쳤다. 내가 13년 살고 나가면 그냥 있을 줄 알아. 당신들을 죽이지 않고 내가 어찌 살겠어? 그러자 다시 계장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그러자 검사가 계장에게 그만하라고 하더니 김동학을 데리고 왔던 교도관에게 데리고 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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