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관심이 이렇게 큰데, 자칫 회담 성사에 실패하면 비난의 화살이 모조리 우리 전민련에게 쏟아질 겁니다. 내가 모든 책임을 질게요. 정부의 요구를 수용합시다.”

1990년 7월 26일 판문점, ‘8.15범민족대회’ 실무회담을 위해 전금철 북측준비위원장 등 북측 대표단 5명과 기자단 10명이 판문점으로 내려오겠다고 했지만 남측 정부의 까다로운 의전 요구 등으로 무산 위기에 놓였을 때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이창복 상임의장은 이렇게 결단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판문점에서 최초의 남북 민간 실무회담과 그해 남북해외가 서울에 모여 개최하려했던 8.15범민족대회는 무산됐지만 당시 재야운동의 결집체인 전민련의 상임의장이었던 이창복은 실무회담과 대회 성사를 위해 쉽지 않은 결정들을 내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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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복, 이창복회고록-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치열하게, 2022.. 삼인.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역구 국회의원까지 지냈지만 전민련,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6.15남측위원회 등 주요 재야단체의 대표를 도맡아 ‘의장’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운 이창복의 회고록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치열하게』가 삼인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출판기념회는 5월 3일 오후 4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87년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김대중 대통령 후보 비판적 지지를 결정하게 된 과정이나 88~91년 범민련(범민족통일운동연합) 결성과 범민족대회 추진 과정, 김대중 정부 첫 해인 98년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결성 등 역사적 현장을 ‘가장 치열하게’ 겪어온 과정이 담겼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의 권유로 2000년 16대 총선에 고향 원주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4년간 여당 정치인을 한 것이 잠깐 동안의 외출이었다면, 대학생 시절 농촌운동에 뜻을 둔 이래 원주에서 ‘쌍다리 밑 아이들’과 걸식을 같이하면서부터 80대 중반에 이른 지금까지 ‘가장 낮은 곳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일생이 담겼다.

평소 작달막한 키에 조근조근한 목소리라 온순한 인상이지만 4차례 5년간 수감생활을 견뎌냈고, “내 몸 한 번 제대로 돌본 적이 없지만 가족들 역시 단 한 번도 제대로 돌본 적이 없었다”는 전형적인 강골 운동가다. 당시 가장 민감한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린 「찢어진 깃폭」과 고 조영래 변호사의『전태일 평전』발간도 그의 손을 거쳤다.

60년대부터 활동 전면에 나섰으니 역사적 인물들과의 인연도 넘친다. “내 일생을 통틀어 정신적인 지주가 두 분 계신다고 감히 말한다면, 장일순 성생과 함석헌 선생이다”. “문익환 목사나 계훈제 선생, 백기완 선생, 다들 성격이 분명하고 개성이 강한 분들이다. 모시기가 쉽지 않았다”, “아, 지 주교입니다... 웬 독지가가 찾아와 통성명을 하는 줄 알았다. 성이 지씨고 이름이 주교라는 줄 알았다” 대충 이런 식이다.

그의 회고록에서 엿보이는 특별한 대목은 14대째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고향 원주라는 터전이다. “한마디로 정확하고 강한 추진력을 가진 능력자” 지학순 가톨릭 주교와 “사랑의 결정체 같은 분” 장일순 선생 등을 필두로 당시 ‘민주화의 성지’로까지 불리운 곳이다.

쌍다리 밑에 기거하는 넝마주이 10대들의 자립을 돕던 그는 지학순 주교의 천거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전국 회장을 맡게 됐고, 이후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게 됐지만 원주를 떠나지 않았고, 심지어 오랜 기간을 원주와 서울을 출퇴근하기도 했다. 1999년 출범부터 맡아온 원주한지문화제 위원장 활동에 많은 지면을 각별히 할애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넝마주이 10대들과 ‘걸밥’을 나눠먹던 20대 청년은 이제 여든 넷의 할아버지가 됐고, 최근에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도 들린다. 백기완 선생의 타계 등 재야 원로들의 시대도 저물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나 “바삐 살아왔지만 제대로 이룬 것이 없는 것만 같은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도 “그간 살아온 삶을 돌아보자면, 나는 일반대중-민중 편에 서서 살아온 사람이었다”고 자평할 수 있으니 큰 다행 아닐까.

6.15민족공동위원회 남북해외 위원장회의는 보수 정권이 불허했지만 이창복 상임대표의장은 불법을 무릅쓰고 중국에서라도 개최했다. 왼쪽부터 박명철 6.15북측위원회 위원장,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손형근 6.15해외측위원회 위원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6.15민족공동위원회 남북해외 위원장회의는 보수 정권이 불허했지만 이창복 상임대표의장은 불법을 무릅쓰고 중국에서라도 개최했다. 왼쪽부터 박명철 6.15북측위원회 위원장,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손형근 6.15해외측위원회 위원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4년 간의 국회의원 생활을 미련없이 정리했는가 하면, 2013년부터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을 맡아 보수정부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6.15민족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회의를 제3국에서 몇 차례나 강행했던 것은 범민련 결성과 범민족대회를 추진했던 90년대의 결기가 아직도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민족통일을 화두의 하나로 여겼던 그는 이 책 맨 마지막에 “우리 민족이 한데 합치면 8천만 명이 넘는다. 남과 북이 하나 되면 국토의 지정학적 가치가 천지 차이로 달라진다. 통일은 우리의 희망이다. 그러나 통일은 제 혼자 오지 않는다. 우리가 준비하는 만큼 찾아온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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