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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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
‎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
‎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
‎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
‎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
‎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
‎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타인과 함께, 타인을 통해서 협력할 때에야 비로소 위대한 것이 탄생한다. -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


 학부모 대상의 강연을 하게 되면 ‘자녀들이 서로 싸울 때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럴 때 나는 대답한다. “아이들이 싸울 낌새가 보면 나가세요. ‘얘들아, 마트에 다녀올게.’하고 밖으로 나가세요.”

 그러면 내 말에 수긍하는 분들도 있지만, 의아해하는 분들도 많다. 그러면 나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준다.

 아이들이 부모 앞에서 싸우는 이유는 ‘인정투쟁’이다. 부모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다.

 그럴 때 많은 부모님들은 재판관이 되려 한다. 아이들의 말을 다 들어보고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솔로몬의 재판처럼 지혜로운 재판이 가능할까? 부모의 재판에 아이들은 수긍할까?

 부모 앞에서는 수긍하는 척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다들 불만일 것이다. 자신이 받는 사랑이 더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다.

 설령 공정한 재판이었다고 해도, 두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우애 있게 지낼 수 있을까?    

 형제간의 싸움에 재판관이 된 부모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두 형제가 케이크를 앞에 놓고 논쟁을 하더란다.

 작은 아이가 말했다. “나는 어리니까 많이 먹어야 해! 형처럼 크려면 형보다 더 많이 먹어야 하잖아.”

 형이 대받아 친다. “야, 형이 많이 먹어야지. 형은 덩치가 너보다 다 크잖아. 당연히 더 많이 먹어야지.”

 이 두 형제 앞에서 솔로몬의 판결이 가능할까? 나는 그런 논쟁을 하는 형제를 내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버리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사라지면 둘만 달랑 남은 아이들은 자신들이 함께 잘 지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들은 서로 싸우며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며 둘 다 만족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부모가 곁에 있으면 부모의 인정을 받는 투쟁으로 변질되어 싸움이 고대 아테네에서 행해졌던 ‘멋진 경쟁(아곤)’이 되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타고난 공정과 정의에 대한 감각이 있다. 절대적 권력자, 부모가 사라지면 아이들은 멋진 경쟁을 하며 멋진 결론을 찾아낸다.

 우리는 인간을 믿어야 한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아름다운 민주시민이 되어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이끌어 갈 것이다.

 생택쥐페리는 말했다. “타인과 함께, 타인을 통해서 협력할 때에야 비로소 위대한 것이 탄생한다.” 

 공정과 정의는 타인이 없는 ‘나’라는 개인주의, 이기주의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나이면서 우리가 되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윤리다.

 공정과 정의는 부모가 대신해 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정부도 우리를 대신해 줄 수 없다. 

 우리(민民) 스스로 주(主)가 되어 세워가야 한다. 어느 누가 해주기 바라는 것은 민주시민의 의식이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우리는 주인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인 역할을 다해야 정계, 재계, 언론계 등 모든 사회세력이 공정과 정의의 길에 동참할 것이다. 

 
 내가 사람이라는 게 싫을 때가 있다. 
 나는 양복점에도 들어가 보고 영화관에도 들어가 본다. 
 펠트로 만든 백조처럼 바싹 말라붙고, 방수가 되어 
 자궁들과 재의 물 속으로 나아간다. 

 이발관 냄새는 나로 하여금 문득 쉰소리로 흐느껴 울게 한다. 
 내가 오직 바라는 건 돌이나 양모처럼 가만히 놓여 있는 것. 
 내가 오직 바라는 건 더 이상 상점들을 보지 않고 
 상품, 광경들, 엘리베이터들을 보지 않는 것. 

 내 발이 싫어지고 내 손톱과 
 내 머리카락 그리고 내 그림자가 싫을 때가 있다. 
 내가 사람이라는 게 도무지 싫을 때가 있다. 

                                                                        - 파블로 네루다, <산보> 부분  

   
 공정의 정의를 향한 긴 여정에서 끝내 승리하려면, 우리는 지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사람이라는 게 싫을 때, 우리는 시인처럼 ‘산보’를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좋아질 때까지 무조건 걷고 또 걸어야 할 것이다.

   

 

고석근 시인 약력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철도고등학교 운전과를 졸업한 후 기관조사로 근무하다 충북대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잠시 전교조 활동을 했습니다. 교직을 떠난 후 빈민단체(주거연합)에서 활동하다 한길문학예술연구원에서 시 창작을 공부했습니다. ‘리얼리스트 100’에서 주는 제6회 민들레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며 글을 쓰고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나무’ 산문집 ‘명시 인문학’ 에세이집 ‘숲’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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