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12월 12일자 동아일보 ‘신채호 부인 방문기’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시내 인사동(仁寺洞) 69번지 앞 거리를 지내노라면 산파 박자혜(産婆 朴慈惠)라고 쓴 낡은 간판이 주인의 가긍함을 말하는 듯이 붙어 있어 추운 날 저녁볕에 음산한 기분을 나아 내니 이 집이 조선사람으로서는 거개 다 아는 풍운아(風雲兒) 신채호(申采浩) 가정이다.”

박자혜는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는 말로 우리에게 익숙해 있는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부인이면서 독립운동가이다. 그러나 박자혜를 독립운동가로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인사동에 박자혜가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살았던 ‘박자혜 산파원’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쓰레기 속에 방치된 ‘박자혜 산파원’ 표석

박자혜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고 조사를 하던 중 지난 2020년 8월 26일, 서울시가 인사동 그 곳에 ‘박자혜 산파터’ 표석을 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서울시에서 세운 최초의 여성독립운동가 표석이라고 한다.

지난 3월 1일에 함께 기억하고 연대하기를 원하는 분들과 함께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길 박자혜산파원이 있었다는 그 곳을 찾았다.

종로구 인사동길에 있는 박자혜 산파터 표지석. 남인사마당 보수공사로 현재 방치된 모습이다. [사진제공-윤미향]
종로구 인사동길에 있는 박자혜 산파터 표지석. 남인사마당 보수공사로 현재 방치된 모습이다. [사진제공-윤미향]

그런데 그 곳이 하필이면 공사 중이어서 사람이 서 있기에도 안전하지 않는 곳으로 보였다. 공사용 펜스가 쳐져 있기도 했지만, 쓰레기와 건축물 등이 놓여있어서 표석을 찾기도 어려웠다. 힘겹게 남인사마당 앞쪽 기둥 구석에 처박혀 있다시피 한 ‘박자혜 산파터’ 표석을 찾았다.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박자혜(1895∼1943) 간호사가 산파를 개원한 곳이다. 박자혜는 3·1운동 때 간호사들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후 단재 신채호 선생과 결혼했다. 서울로 돌아와 산파로 활동하며 나석주 열사의 의거(1926년)를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내용은 짧았지만 역사의 수난시절에 주체적인 여성으로 당당하고 숭고한 삶을 살았다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고 느껴졌다.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죄스러움과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던 분들의 역사 위에 우리의 삶이 영위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여성인권운동’을 해왔다고 하면서도 단재 신채호는 알고 기억했지만, 그의 부인으로도, 독립운동가 박자혜로도, 간호사 박자혜로도, 산파 박자혜로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게다가 박자혜 산파터가 현재 겪고 있는 모습처럼 여성독립운동가의 삶 역시 대한민국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존중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분노마저 느껴졌다.

박자혜의 생애

박자혜는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애기나인으로 궁에 입궐하여 대비 처소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제병합으로 인해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1911년 강제 출궁을 당하였다.

출궁 후 박자혜는 나인 시절에 대비 윤 씨의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사립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에 입학하고, 1914년에는 사립 조산부양성소에 들어가 산파 교육을 받는다. 산파면허증을 획득한 박자혜는 1916년경부터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였다. 그 곳에서 1919년 3.1운동을 맞닥뜨리게 되었고, 그 역사는 간호사 박자혜의 삶에 큰 변화를 만들어 냈다.

한국의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우리나라 여성에 의한 최초의 여권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독립협회가 활동하던 시기인 1898년이라 할 수 있다.

당시에 양반 부인들은 조선 최초의 여성교육운동단체였던 ‘찬양회(여학교설시찬양회)’를 결성하고,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에 “1. 문명·개화정치를 수행하는 민족대열에 여자도 참여할 권리가 있다. 2. 남자와 평등하게 직업을 가지고 일할 권리를 갖고 있다. 3.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교육을 받음으로써 독립된 인격을 가질 수 있다.”는 내용으로 정치권·직업권·교육권 등이 제시된 여권통문(女權通文)을 발표하고, 만민공동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하던 1907년에는 여성들이 국채보상운동에 나서는 등 정치활동에 나섰고, 여성들도 근대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1919년 3.1운동 때에는 여성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어 여학생, 교사, 전도부인, 간호사 등 여성들이 거리로 나섰다.

특히, 김효숙, 양한나, 신정완, 최혜순, 방순희, 지경희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최초 여성의원이었던 김마리아는 2.8 독립선언 이후 국내에서 부산, 광주, 황해 등 3.1운동을 전국화 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렇게 정치영역에 여성들의 주체적인 역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에 ‘남녀평등’의 조항이 포함되게 하고, 임시의정원법에 여성 참정권이 포함되게 하는 역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 격동기 속에서 박자혜는 궁인으로, 학교 학생으로, 나아가 산파라는 전문직을 획득하고, 졸업 후에 간호사로 일하는 경제적인 능력을 보유한 여성으로 살았다. 그 가운데 3.1운동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한편, 3.1운동 전까지 박자혜의 삶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할 만한 조직과의 연관이나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3.1만세운동 중 부상을 입고 병원에 몰려오는 조선사람들을 치료하면서 민족의 울분을 느꼈고, 일제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져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직접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독립운동 간호사 조직인 간우회를 창설하고, 간호사들로 하여금 만세운동을 고창하게 하고, 동맹파업 참여를 이끌며, 3‧10만세운동을 계획하는 등 열렬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일경에 낙인이 찍혀 체포, 수감생활에 이르게 된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조선총독부의「조선인 감시 보고서」에 따르면 박자혜는 ‘과격하고 언변이 능한자, 총독부 의원·간호사 모두를 대상으로 독립 만세를 고창한 주동자’였다.

수감에서 풀려난 박자혜는 병원을 떠나 중국 북경 옌칭대학 의학과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한다. 그러던 중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소개로 신채호를 만나 박자혜 24살, 신채호 39살이던 1920년에 결혼하여, 1921년에는 아들을 낳아 홀로 키우며 신채호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그러나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북경에서 더 이상 지낼 수 없었던 박자혜는 신채호에게는 생활고는 숨긴 채 ‘조선의 아이를 이역에서 키우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하고 1922년 두 살 된 아들과 임신 5개월인 몸으로 홀로 귀국한다.

그리고 종로구 인사동 69번지에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고 조산원 문을 열어 생계를 유지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계속해 나갔다. 일본 경찰에게 시달리면서도 자녀교육, 생계, 신채호의 옥바라지, 중국과 국내 독립운동을 연결해주는 가교역할 등을 마다하지 않고 해냈던 것이다.

박자혜는 1926년 12월, 의열단원 나석주를 도와 일제의 수탈기관인 조선식산은행과 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질 때 위치를 알려주는 등 길잡이 역할을 하고, 그를 은신시키는 등 나석주의 의거에 함께 하게 된다. 신채호가 1928년 일경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형무소에 수감된 후에는 남편의 옥바라지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곳에도 여러 산파원이 문을 열고 있었고, 독립운동가 아내가 운영하는 산파원에 대한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생계유지도 어려워 아들이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그런데 신채호가 투옥 8년 만에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는다. 큰아들과 뤼순에 도착하여 남편을 만났지만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 20분, 남편을 감옥에서 잃게 된다. 박자혜는 신채호가 세상을 떠난 후 “인제는 모든 희망이 아조 끊어지고 말았습니다”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신채호가 세상을 떠난 이후 박자혜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북경에서 귀국할 때 박자혜 뱃속에 있었던 아들은 1942년 열다섯 살에 영양실조와 폐결핵으로 떠났고,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자취를 찾아 만주로 떠났다.

홀로 남겨진 박자혜는 병고와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해방을 10개월 남겨둔 1944년 10월 16일, 단칸 셋방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져 재 한줌조차도 남기지 못했다.

독립운동가 박자혜의 삶을 기리며

그의 삶이 서려있는 그 곳, ‘박자혜 산파터’, 그 공간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가 얼마나 큰 무게감을 갖고 있는지 이제야 깨닫게 된다.

3월의 끝자락에 다시 찾은 인사동, 그러나 여전히 박자혜 산파터 표석이 있는 곳은 처절했다. 표석은 여전히 공사장 펜스와 대리석 등 건축물 한쪽에 처박혀 있었다.

그 모습은 현재 우리가 역사를 마주하는 태도라는 생각을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대한민국 정부가 박자혜의 독립운동을 기리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음에도, 독립운동의 근거지이자 근대 의료기관인 ‘박자혜 산파터’가 이렇게 아픈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지난 3.1절을 맞아 윤미향 의원실,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세브란스병원노동조합 등이 박자혜 산파터 앞에서 독립운동가 박자혜 선생 기림 모임을 열었다. [사진제공-윤미향]
지난 3.1절을 맞아 윤미향 의원실,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세브란스병원노동조합 등이 박자혜 산파터 앞에서 독립운동가 박자혜 선생 기림 모임을 열었다. [사진제공-윤미향]

그리고 그 곳에서 조금 더 걷다 보면 일본대사관이 보이고, 지난 2011년 12월 14일에 1000번째 수요시위를 맞이하며 시민들이 세운 소녀상이 보인다. 그런데 이번에는 ‘위안부 사기 이제 그만’, ‘소녀상을 철거하라’, ‘수요시위 중단하라’ 등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2차 가해 현장과 만나게 된다.

피해를 침묵당하고 부정당한 일제 피해의 역사들, 버려지고 외면당한 일제 독립의 역사들의 현주소이다. 기록하지 않은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 보존하고 보전하지 않은 기록은 역사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모르는 이 있을까?

“남들은 해방이라 기뻐하며 만세를 불렀지만 우리는 아직 해방이 안된기라. 일본이 우리 문제를 해결해야 우리에게도 해방이라 할 수 있지 그러기 전에는 해방이라 할 수 없어.”

이 말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면서,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의 삶으로 해방 이후 완전한 해방을 위해 살았던 김복동 할머니께서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서 자주 하셨던 말씀이다.

그랬다. 일제에 의해 노동자로, 병사로 강제로 끌려갔던 피해자들은 가해자인 일본정부로부터 사죄와 배상은커녕 강제노동성을 부정당한지 오래이고, 사죄와 배상을 판결한 한국법원의 판결조차 ‘한일 간의 실리 외교’ 아래 집행되지 않은 채 정의는 잠자고 있고, 피해자는 삶의 시간 마지막에 다다르고 있다.

조선인들의 고된 노동착취와 죽음이 서려있는 일제의 강제노동 현장은 일본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등 과거의 참혹했던 전쟁범죄의 역사를 미화하고 은폐하는 일도 서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순국하신 선열들의 역사는 기억과 교육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으며, 조각조각 흩어지고, 외면되고 있다.

지난 역사를 잊지 않고 기록하고 기념하고 교육에 반영하는 것은, 아팠던 역사를 새김으로써 우리 미래세대들이 다시는 아픔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잘못한 역사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자랑스런 역사는 미래세대들이 계승하고 확산하여 정의로운 사회, 인권과 평화가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함일 것이다.

그 활동 속에 독립운동가, 간호사, 산파 박자혜의 삶을 제대로 기억하고, 그의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터였던 ‘박자혜 산파터’에 대한 보존, 복원이 이루어지길 소망해 본다.

필자는 국회의원으로서 여성독립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한 제도를 정책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윤미향 의원 약력

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상임대표

전 일본군성노예제해결정의기억연대(정의연) 이사장

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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