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인 1921년의 일이다. 중국 상하이(上海) 혜령전문학교(惠靈專門學校)에서 큰 소동이 벌어졌다. 혜령전문학교는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도 잠시 영어를 가르치던 곳으로, 우리 유학생들도 여러 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소동의 발단은 량치차오(梁啓超)의 강연이었다. 캉유웨이(康有爲)의 제자로 근대 중국의 개혁사상을 이끈 량치차오의 강연에는 1천여 명의 교수·학생이 운집하였다. 문제는 대일(對日)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불거진 그의 한국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었다. 한국이 원나라로부터 명·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단정한 것이다.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이 조공(朝貢)이었다.

당시 강연장에 있었던 우리 유학생 중 하나가 소지했던 책 한 권을 량치차오에게 던지며 항의했다. 강연장은 순간 난장판이 되었다. 수많은 중국 교직원과 학생들의 지탄 속에 그 학생은 퇴장을 당했다. 축출당하듯 장렬하게 쫓겨난 학생의 이름은 나절로로, 본명은 우승규(禹昇圭)다.

나절로는 초라한 등사기 한 대로 임시정부의 신문을 발행하며 항일의 울분을 토했던 인물이다. 나절로라는 이름도 상하이 시절 백연(白淵) 김두봉(金枓奉)으로부터 받은 필명이다. ‘나혼자’라는 뜻의 ‘나’와 자연 그대로라는 의미의 ‘절로’라는 말이 합성된 순우리말 아호였다.

당시 나절로는 분을 참지 못하고 임시정부 인사들을 찾아 적극 항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 지도자들 역시 망국민으로 빌붙어 사는 처지 아니었던가. 그들은 슬슬 눈치만 보다 핫바지 방귀 새듯 그 사건을 뭉개 버렸다. 식민 공간에 있었던 애달팠던 비사(祕史)다.

얼마전 독립의 공간에서는 더 참괴한 일이 벌어졌다.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한 우리 대표단과 선수들이 중화에 속한 소수민족임을 전세계에 알리는 선포식을 기습적으로 당한 것이다. 그 자리에는 우리 정부의 대표단 단장으로 파견된 문화부장관도 한복을 입고 참석하여 봉변을 당했다. 마치 소수민족의 벼슬아치로 취급된 듯한 모멸감을 감출 수 없는 자리였다.

그나마 한복을 입은 우리의 대통령이 참석하여 소수민족의 수장처럼 비치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랄까. 아무튼 이번 사태는 어떠한 변명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한복(韓服)의 한복(漢服)화로 불거진 우리 정체성의 대참사였다.

전자가 식민의 공간에서 쫓겨난 망국민의 수모였다면, 후자는 독립의 공간에서 파견된 소수민족으로서의 개망신이었다. 노예로 빌붙어 먹으며 천대받은 것이 아닌, 주인으로 내 돈 쓰며 소수민족 취급을 당했음에 더더욱 울화가 치민 사건이다.

도대체 그 개망신의 단초는 무엇일까. 내가 나를 망각한 데서 온 인과응보다. 내가 나를 대접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평가해 줄 것인가. 네 탓이 아닌 ‘내 탓이로소이다’로 귀착된다. 이것은 자학(自虐)이 아니다. 냉철한 반성이다. 그러한 반성이 없이는 개과천선의 길도 찾을 수 없다.

따져보면 식민의 공간과 독립의 공간에서의 우리의 태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식민의 공간에서 용솟음쳤던 정체성을 위한 치열함이 독립의 공간으로 오며 깡그리 짓밟히지 않았던가. 주인에게 올려야 할 밥그릇을, 옮기던 노예들이 슬그머니 먹어버린 것이다.

일제가 수많은 한국사료를 약탈·환작(幻作)하면서 『삼국사기』와 『조선왕조실록』을 멀쩡히 둔 이유도 궁금해진다. 한마디로 중국에 대한 조공의 역사가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이 사서들은 전통 시대의 중화사관을 충실히 반영한 서책들로, 일제식민지사관 확립에 주요 전거로 활용되었다.

지금 우리는 중화사관과 식민지사관이 혼재된 역사인식을 경험하고 있다. ‘나를 잊어버린[忘我]’ 시대에 살며 희희덕대는 철부지시대, 이것이 독립의 시대를 사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전통의 시대(중화사관)→식민의 시대(일제식민지사관)→독립의 시대[망아사관(忘我史觀)]’ 그 어느 시기에도 우리의 정체성은 중심부와 너무 거리가 멀었다.

이번 한복 사태 당시 일부 외국인들이 한복을 입고 대한민국을 두둔했다는 것으로 흥분한 이들도 있다. 이에 국제사회가 우리 편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부류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시라. 그것은 그저 그들의 기호일 뿐,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우리를 대신해 줄 집단(국가)이나 지식인들은 없다.

19세기 말, 한국의 문학이나 교육체계·조상숭배 등 문화적 사유 양식이 모두 ‘중국문화의 패러디’라고 규정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책(《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Korea and her Neighbours》, 1898)을 기억해 보라. 그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뒤, 한국문화를 ‘중국문화의 종속’으로 단정한 에드윈 라이샤워와 죤 킹 페어뱅크이 저술(《동아시아:위대한 전통, East Asia-The Great Tradition》, 1960) 또한 지금도 생생하다.

어디 그뿐인가. 1990년대 들어 문명사적 관점에서 국제질서의 변화를 예견한 새뮤얼 헌팅턴의 저서(《문명의 충돌,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claiming of World Order》, 1993)를 보자. 그는 중국과 일본의 문명은 말하면서도 한국문명은 아예 언급도 안 했다. 19세기부터 21세기 지금까지도 한국문화는 중국과 일본문화의 아류라는 인식이 더욱 심화 되어 감을 말해 줄 뿐이다.

이것은 원나라가 아니라 한나라 시기부터 우리 한반도의 북쪽까지 지배했다는 현금 중국의 사관에서도 확인된다. 100년전 량치차오가 우리 역사를 원나라 이후 중국의 속국이라 왜곡한 것에서 무려 1천 년 이상을 더 소급한 강도적 역사인식이 지금의 중화사관이다. 나절로가 살아 있다면 책 던짐이 아니라 머리를 박으며 피를 튀겼을 듯하다.

독립의 공간에서, 내가 나의 이야기도 떳떳하게 기록하지 못하는 집단에 무슨 역사인식이 잡힐 것인가. 우리가 싸서 뭉갠 것은 우리가 치우고 닦아야 하건만, 무엇을 싸질렀는지도 뭉개버렸는지도 모르는 삶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업수임을 당하는 근본적 원인이 나를 망각한 데서 온 자업자득임을 곱씹어 볼 때, 모든 것이 우리로 인함이라는 성찰로 다시 돌아온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통일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