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는 조중동 폐간 실천 1인 시위를 하러 오전 11시30분에 맞춰 광화문 원표공원에 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다. 10월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더운 날씨가 연일 계속되었는데 어제부터 비가 내리더니 조금 더위가 가라앉은 듯하다. 오늘도 남부지방은 최고 기온이 30도 가까이 올라간단다. 신돌석씨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서울 밖으로 나가 살지만 종종 서울에 오는데 원표공원이란 말은 못 들어봤다. 9월에 이어 오늘 두 번째 하는 것인데 1인 시위를 주관하는 사람이 원표공원이라고 해서 묻지 않고 대충 어디이겠거니 하고 갔는데 맞았다. 이전부터 거기서 조선 동아 폐간 촉구 시위를 계속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들은 ‘조중동 폐간 위한 무기한 시민 실천단’이라고 했다. 벌써 650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1인 시위를 하는 곳 옆에 보니 바위에 '도로원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도로 원표는 지역과 지역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기 위해 주요 지역 중심지에 세운 도로 표식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제의 유산이고, 다른 나라에서는 이런 것을 쓰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9월에 1인 시위를 하러 와서 알게 된 뒤 관련된 내용을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찾아 보다 알게 된 것이었다. 신돌석씨가 이 1인 시위에 참가하게 된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인천의 활동가로부터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8월 중순쯤이었던 것 같다. 이 사람이 전화를 걸어 와서, 신돌석씨가 지역에서 같이 활동한 적이 있는 후배 하나가 1인 시위를 하고 있는데, 코로나19 백신을 맞는 날이 되어서 못하게 되니 대신 하라는 것이었다. 말은 대신 하라는 것이었지만 이 투쟁에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후배 대신이라는 것은 명분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사업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돌석씨는 흔쾌히 응했다.

이 땅의 기득권 세력과 싸우면서 모순을 해결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치고 조중동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하지만 이들의 끈질김은 사실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오늘 원표공원으로 오는 길에 광화문역에서 내려서 걸어가는데 동화면세점 앞에서 00혁명당 기자회견이란 걸 하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대장동 문제를 거론하면서 부동산이 문재인 정부 들어서 얼마나 올랐느냐, 이제 젊은 사람들은 희망이 없다며 열을 내서 연설을 하였다. 맞는 말을 한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서 이승만, 박정희 정신을 살려야 한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이들은 진짜 이승만, 박정희를 존경하는가? 다른 건 둘째 치고 서울시민을 팽개치고 혼자 도망가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어처구니없는 부정선거를 저질러서 쫓겨난 이승만을 진정 국부로 생각하는가?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것은 그렇다 치고 정적을 암살하고 끝내 자기 딸보다 어린 여자와 술 먹다 부하의 총에 죽은 박정희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일까? 이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게 된 데는 조선과 동아가 끈질기게 학습한 거짓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제 조금만 양심을 가지고, 슬기를 가지고 우리 현대사를 본다면 알 수 있는 일이리라. 이런 사람들이 말하는 혁명은 사실 '반(反)혁명'으로 세상을 거꾸로 돌려 놓겠다는 것인데, 감히 '혁명'이란 말을 쓰는 것도 우습지만, 그만큼 이 사회의 변화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건 아닐까?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원표공원 가운데에는 마치 야외 공연장에서 보듯 널찍한 무대가 있다. 그리고 그 무대에 계단이 놓여 있다. 신돌석씨가 도착하였을 때 실천단의 한 분이 그 계단에 피켓들을 놓고 있었다. 인사를 하자 그도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피켓을 주었다. 지난 달에 왔을 때 본 사람이었다. 신돌석씨가 받은 피켓은 중앙일보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피켓 위쪽에는 검은 글자로 크게 '귀족언론'이라고 써 있고, 그 밑에 붉은 글자로 '재벌수족'이라고 씌어 있다.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중앙일보'라고 써 있고, 밑에 다시 큰 글자로 검게 '필벌응징', 붉게 '족벌중앙'이라고 써 있었다. 중앙일보 하면 생각나는 게 있다. 20대 후반이었으니 80년대 말이었다. 그때만 해도 중앙일보는 별로 신문으로 쳐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삼성그룹의 것이었으니 그들이 돈으로 밀어주면서 신문 영업을 하였다. 특히 80년 신군부가 삼성그룹 소유의 동양방송을 강제로 KBS에 통합시키니까 사주인 이병철 회장이 중앙일보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강했다고 알려졌다. 중앙일보 영업하는 사람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1년 공짜로 보게 해주고 사은품을 준다고 하고 다녔다. 거기까지는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만 신문을 그냥 막 넣고 다녔다. 몇 달이 지나도 그래서 문 앞에 쌓아 놓으니까 그 위에다 놓고 갔다. 그래서 쫓아 나와서 가져가라고 하니까 그러면 한 달치만 달라고 한다. 총각 때 기억인데 아내와 결혼하고도 한참 동안을 그랬으니 90년대까지도 그랬던 것 같다.

신돌석씨가 들고 있는 피켓 아래로 계단에 '조중동 폐간을 위한 무기한 시민 실천단'이라고 써 있고, 650일째라고 써 있었다. 650일이면 2년이 다 되어 간다는 말이 된다. 하기는 작년 조선 동아 100주년 규탄 1인 시위를 할 때 이전부터 이들은 여기서 하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동아일보 앞에서 했었다. 100주년 규탄 1인 시위는 한 달 정도 돌아가면서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마침 신돌석씨가 하는 날에 비바람이 몹시 심하게 몰아쳤었다. 신돌석씨는 1인 시위가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상당히 많이 해봤지만 그날처럼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 비가 내려서 비옷까지 입고 갔는데 바람이 어떻게 심하게 부는지 피켓을 들고 서 있기가 힘들었다. 그때가 3월이었던 것 같은데 추운 정도가 한 겨울에 벌판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동아일보 앞 1인 시위는 100주년 규탄 전시 및 기자회견과 더불어서 끝을 맺었는데 그 뒤에도 원표공원 쪽에서는 계속 했다는 말은 들었다. 물론 거기가 원표공원인 줄은 그때는 몰랐었다. 요즘 와서 신돌석씨는 우리는 너무 조급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슈를 가지고 싸우다가도 금세 잊어버리고 다른 것으로 옮아간다. 그러면서 불평을 늘어 놓는다. 그런 점에서 무기한 실천하겠다고 하는 이들을 보면 경외감이 생긴다. 신돌석씨가 아는 한에서 이분들 중 아주 일부를 제외하면 이전에 노동운동,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은 별로 없다. 이분들은 대부분 광우병 이후 투쟁을 통해서 민족민주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분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분들이야말로 이제 운동의 신주류 아니냐고 하였다. 그런지 안 그런지야 신돌석씨로서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이들의 끈질긴 투쟁 자세는 높이 사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1인 시위에 흔쾌히 동참하게 만들었다.

피켓을 받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도로원표가 새겨진 바위 너머로 조선일보 건물이 보였다. 코로나19가 극성을 부리기 전까지는 광화문 세월호광장이나 일본대사관 앞 등에서 시위를 한 뒤 조선일보 앞에서 마무리를 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조선일보의 아부, 배신, 협잡의 역사를 규탄했다. 그들은 일관되게 민주진보개혁세력을 공격하고, 공공연하게 가짜 뉴스도 퍼뜨려 왔다. 최근에는 대통령이 방탄소년단과 함께 유엔총회에 가면서 비행기값도 주지 않고 공짜로 이용했다는 보도를 하였다. 청와대측에서 그런 일이 없다고 반박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뻔한 거짓말을 하고 나서 아님 말고 라는 식으로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신돌석씨가 서 있는 정면에 실천단 중 한 명이 가로등과 나무 사이에 현수막을 걸었다. '오욕과 거짓의 100년 조선일보'라고 쓰여 있었다. 그 왼쪽으로 역시 나무와 가로등 사이에 '신문부수 조작 5.18북한군 조작 희대의 범죄집단'이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신문부수 조작은 이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다. 신돌석씨가 조선일보 폐간 1인 시위를 하러 간다고 하니까 누군가 농담을 하면서 조선일보 폐간 되면 계란판은 어떻게 만드냐고 하였다. 신문을 대량으로 만들어 놓고 팔리지 않으니 그걸로 계란판을 만든다는 것이 알려진 지 꽤 되었다. 그러면서 신문부수를 조작해서 많이 팔리는 것처럼 하고 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5.18민중항쟁에 북한군이 들어와서 개입했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도 한참 동안 주장한 것이 조선일보였다. 신돌석씨는 이 문제로 고모와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까지 했었다. 고모처럼 수구적인 사람도 1987년 6월 항쟁 때는 전두환이 너무 한다고 하면서 학생 시민들 편도 들었다. 당시 길거리를 막고, 지하철 입구 골목 등에도 서 있던 전경을 보면 ‘뭐하는 짓들이냐’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에 다시 본색이 드러나더니 그 다음에는 해괴한 소리까지 했다. 자기가 그때 광주 살았던 사람한테 들었는데 진압군이 약을 먹은 것 같더라, 우리나라 군대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조선일보의 이야기를 인용하였다. 신돌석씨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면서 전두환이 대통령일 때 그걸 그냥 넘겼겠냐고 하니까, 그러니까 전두환이 멍청하다면서 지금이라도 밝혀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 같으면 안 그럴 텐데 그때까지만 해도 신돌석씨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화부터 냈다. 아마도 그것은 차분히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신돌석씨도 그런 생각을 가지기 시작한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을 때니까 스스로 마음이 복잡하기도 했었다. 그때 가끔씩 조선일보를 보면 정말 태워 버리고 싶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학생운동, 노동운동, 재야운동을 공격하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신돌석씨의 집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조선일보를 구독하였다. 친가는 경상도이고, 외가는 이북이니 그럴 만도 하였다. 아침이면 아버지는 조선일보를 읽는 것으로 시작을 하였다. 그것을 가지고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이 요즘 같지 않아서 재래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냄새 나는 곳에 쭈그려 앉아서 신문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는데 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서 30분 정도를 그러다 나왔다. 아버지는 지식인은 아니었다. 고향 어디에서 중학교 다니다 그만두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확실하게 들은 적이 없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시장통에서 구두 고치는 사람, 항상 술에 취해 있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시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신문을 아침마다 한참 읽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신돌석씨는 왜 그런지 그때는 몰랐는데 그냥 그러려니 했고, 자라면서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조선일보 이외에는 보지 않았고, 형도 최근까지 조선일보를 보았다. 형은 조선일보 이외에는 볼 만한 신문이 없다고 하였다.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은 너무 내용이 빈약하다고 하였다. 어떤 점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형이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조선일보를 안 보기 시작했다. 특히 형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들 집안이 혐의를 받는 범죄행각 때문이었다. 배우 장자연의 자살과 관련한 일이라든가 방상훈 사장의 동생 방용훈 아내의 자살과 그 자식들의 이야기 등을 알고 난 뒤 형은 만정이 떨어진다고 하였다. 특히 방상훈과 그 일가의 부동산이 무려 2조가 넘는다는 것을 알게 된 뒤 더욱 조선일보를 싫어하게 되었다. 신돌석씨는 작년에 코로나19 때문에 차량 시위를 할 때 흑석동의 방상훈 집을 거쳐 서초동으로 간 적이 있었다. 흑석동에 있는 그의 집 밑에서 시위를 했는데 멀리서 보기에도 어마어마하게 보였다. 신돌석씨가 서 있는 곳 바로 밑에 1인 시위 시행 날짜가 있고, 그 옆으로 '족벌언론 친일언론 조선일보 폐간하라! 조선일보 방사장 비리를 단죄하자!' 라는 구호가 적힌 피켓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 말했었다. 삼성그룹보다 더 센 게 조선일보라고.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은 사실상 총수인데 감옥에 들어갔다 가석방이 되느니 마느니 하다가 나왔는데, 방씨 일가는 검찰도 경찰도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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