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내부 대립에서 국가적 차원의 무력충돌로 발전

해방 후 한국(조선)민의 가장 중요한 일차적 과제는 자주적인 통일독립국가의 건설이었다. 해방직후 한국민은 그런 사실을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3년 후에 남과 북에 두 개의 분단국가가 각각 세워질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단은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분할 점령으로 남북에는 각각 다른 체제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3년 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분단국가가 세워졌다. 두 개의 분단국가가 세워지는 과정은 좌익과 우익의 이념 대립, 미군정이 통치하는 남한과 소련군이 장악한 북조선의 대립, 식민지 시기의 친일파와 그에 저항했던 항일세력 사이의 끊임없는 대립과 투쟁의 종합적 결과였다. 그 바탕에는 한국민 내부의 이념적·계급적 대립, 항일세력과 친일세력 또는 외세와 반외세의 대립 외에도 국제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체제 대립, 즉 국제적 냉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렇게 남과 북에 들어선 두 개의 정부는 큰 차이를 보였다.

38선. 처음에는 군사적 분계선이었으나 남과 북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사실상 국경선이 되었다. 동시에 군사적 충돌 지점이 되었다.
38선. 처음에는 군사적 분계선이었으나 남과 북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사실상 국경선이 되었다. 동시에 군사적 충돌 지점이 되었다.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통치, 지배하는 동안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 등 일제가 남긴 유산을 청산하는 작업은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미군정은 일제의 통치기반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고, 대한민국은 미군정의 통치구조를 거의 대로 이어받아 세워졌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는 보통선거를 기본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 서구적 자유주의와 보편적 인권 개념, 삼권분립 등에 기초한 근대민주주의체제를 수립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주요산업의 국유화, 농지개혁 등 사회주의적 요소를 가미한 혼합경제체제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경찰과 군대 등 물리력과 사법기관, 행정조직의 중추는 대부분 친일세력이 장악하였고, 이승만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보다는 ‘반공’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은 ‘과대반공국가’를 구축하였다.

반면, 북조선에서는 정부 수립 전에 이미 일제 청산 작업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소련군의 주둔과 함께 북조선 경찰과 치안기관, 검찰, 사법기관, 관료조직에서는 친일인사들이 모두 축출되었다.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북조선의 행정권을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은 토지개혁과 주요산업 국유화, 8시간 노동제 등의 민주법령의 제정 등의 급속한 반제반봉건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진행하였다. 임시인민위원회, 인민위원회 등의 정권기관을 바탕으로 북조선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은 경찰과 군대, 행정·사법기구 등 권력기관에서 친일파를 철저히 제거하였으며, 기술자, 과학자 등의 경우 과거 친일행적에 대한 반성에 기초하여 새 국가 건설 과정에 등용하였다. ‘북조선 혁명’으로도 불리는 이 과정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북조선에서는 급속히 일제의 반봉건적인 사회·경제 기반이 해체되고 친일봉건세력과 지주·자본가 계급 또한 힘을 잃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개의 분단국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개의 분단국가.

‘북조선 혁명’ 과정에서 기득권을 박탈당한 친일경찰과 관료 출신들, 판·검사들, 지주와 자본가 계급 등 식민지 시기의 지배층들은 북조선을 떠나 남한으로 넘어왔고, 이들은 남한에서 과거의 그 지위를 회복하거나 이를 위해 극우 테러에 앞장서는 활동을 하였다. 친일경찰은 미군정경찰이 되었고,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장교·하사관들은 국방경비대(후에 국군) 장교가 되었다. 일제시기 판사·검사, 관료 출신들은 남한에서 대부분 판사·검사, 관료로 재등용 되었고, 북에서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상실한 채 월남한 지주·자본가 계급, 기독교 세력 등 우익청년들은 서북청년회 등 반공청년단을 조직해 남한에서 남로당, 인민당, 전평, 전농 등 좌익에 대한 테러 활동에 앞장섰다. 월남민들의 이북에서의 경험은 이남에서 좌익에 대한 테러와 극단적인 증오감으로 나타나 북에 대한 적대감과 대립의 격화를 부추기는 하나의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이남에서 활동하던 좌파의 중요인물들은 미군정과 우익세력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양쪽에 분단정부가 세워질 때 북쪽으로 넘어가서 당과 정부 등 권력기관에 자리를 잡았다. 이처럼 해방 후 3년 동안 이념 대립과 계급 갈등, 식민지 잔채 청산과 국가 수립 등을 두고 벌인 좌우세력의 투쟁으로 남북에 두 개의 정부가 세워졌을 때 양측의 적대의식은 매우 격심한 상태가 되었다.

남과 북에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지면서 양측의 대립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으로 발전했다. 지금까지는 주로 38선 이남에서 좌우 대립이 기본을 이루었지만,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선 뒤부터는 이남 내부의 좌우대립 뿐만 아니라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라는 두 개의 국가 사이의 갈등이 군대간의 무력 충돌 양상으로 상승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테러와 폭력의 차원을 넘어선 국가무력, 즉 군대와 군대가 충돌하는, 따라서 사실상 전쟁 상태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남북한 정부 수립 후 1949년부터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수시로 양측 군대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작은 전쟁’으로 불리는 상시적 전투 상태가 조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로당이 중심이 된 무장조직, 즉 무장게릴라를 남파시켜, 남한 정부 전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남한 내부에서도 내전에 버금가는 상태가 조성되었다. 남한의 한라산, 지리산과 덕유산, 속리산, 오대산, 태백산 등 큰 산 주변에는 유격전구가 형성되었고, 이를 토벌하기 위한 남한 군경과의 전투가 벌어지면서 산간지역에서는 한동안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공’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와 함께 남과 북의 양측 정부는 이념이 다른 집단을 배제, 통제하기 위한 체제 정비, 이념·사상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상대방을 힘으로 제압하고 무력통일을 이루겠다는 주장을 노골적으로 펴기 시작했다. 이른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과 김일성의 ‘국토완정론’이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한반도는 전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순사건과 숙군작업의 가속화, 제주도 민간인 학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권이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던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주1) 제14연대가 반란, 봉기했다. 봉기군은 삽시간에 여수 시가지를 장악했고, 남로당과 대중이 호응하면서 군대 반란을 넘어서 민중봉기, 항쟁으로 발전했다. 14연대 봉기군은 여수에 이어 순천을 휩쓸고, 계속해서 구례, 광양, 곡성, 보성, 고흥, 장흥, 화순 등 전남 동부지역을 장악했다. 군인들의 반란으로 시작해 민중봉기로 발전한 여순사건(또는 여순항쟁)은 당시 한국 사회의 수많은 갈등과 모순이 응축된 결과였다. 대한민국 정부 출범 불과 2개월여 만에 발생한 여순 사건은 당시 남한 사회, 나아가 한국 현대사 전체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여순사건 발발의 직접적인 계기는 제주도 문제였다.

여순 사건.
여순 사건.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이 주도하는 남한 단정저지 투쟁의 일환으로 시작된 제주4.3항쟁은 미군정과 이승만 등 우익단정세력의 강경진압 작전에 항쟁세력이 한라산 깊숙이 들어가 유격전을 벌이는 것으로 발전하면서 장기전 양상으로 발전했다. 결국 제주도에서는 5.10선거가 정상적으로 치러지지 못했고, 정부수립을 전후해서 한동안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수립된 8월 중순 이후 정부의 토벌작전이 재개되면서 다시 긴장상태가 조성되었는데, 특히 군사총책(남로당 제주도지부 조직부장, 유격대장)으로 제주항쟁의 중심인물이었던 김달삼(본명 이승진)이 1948년 8월 말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함으로써 한국 정부와 미군을 자극했다.(주2) 한국 정부는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대토벌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으며, 이를 위해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중 일부에 대해 제주도 출동을 명령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제주도 토벌 출동 명령에 14연대 병사들이 “동족상잔을 강요하는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주3)

여순 사건. 민간인을 모아 분류 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여순 사건. 민간인을 모아 분류 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신생 대한민국으로서는 국가무력의 중추인 군대의 대규모 반란 사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 정권은 심각한 위협을 느꼈고 미 군사고문단 또한 즉각적인 강경진압책을 수립하였다. 초기 정부군이 허둥지둥하는 동안 반란군은 삽시간에 전남 동부지역을 석권했지만, 미 군사고문단의 전격적인 지원과 지휘 아래 군대와 경찰을 총동원한 진압작전에 곧 패퇴하고 말았다. 10월 20일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소집한 관계자 회의가 열려 대책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는 미군 측에서 국방경비대 고문 하우스만, G-2 소속의 존 리드, 전 5여단 고문인 트레드 웰, 현 5여단 고문 프레이 대위가 참석했고, 국방경비대(9월 5일 국군으로 개칭되었으나 여전히 국방경비대로 불림) 쪽에서는 참모총장 채병덕,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정일권, 정보국장 백선엽, 정보장교 고정훈 등이 참석했다. 회의는 미 군사고문단이 주도했고, 미군은 진압작전을 펼칠 때 미국인 군사고문단 장교를 대동하도록 했다. 하우스만은 미 임시고문단을 대표하는 작전 책임자로서 송호성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의 고문 자격으로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에 배속되어 사실상 여순사건 토벌작전을 지휘, 감독하였다. 회의에서는 여수 진압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바로 진압작전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주4)

10월 23〜24일 국방경비대의 1차 여수탈환작전은 실패했지만, 10월 26〜27일 2차 작전을 전개해 여수 탈환에 성공했다. 2차 작전 때 정부군은 육·해·공 합동으로 작전을 진행했는데 장갑차 부대를 앞세워 여수를 초토화하며 진입하였다. 호남지구 전투사령부는 이때 여수에는 반란병사 200명, 민간무장폭도 1천명, 동조세력 등 모두 1만2천명이 저항하고 있었다고 발표했지만, 사실상 제대로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이 대부분이었다. 국방부는 “여수반란사건의 사상자가 4천명”이라고 발표했으나 여순사건 사상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여순봉기, 여순반란, 여순병란, 여순항쟁, 여순사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핵심주력인 14연대 반란병사들의 여수, 순천 등 전남지역 동부지역 점령은 곧 진압되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병사들과 봉기에 가담했던 남로당 핵심당원 등은 지리산과 주변의 산악지대로 숨어들었고, 정부군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무장대뿐만 아니라 비무장민간인들까지 대량으로 보복, 살상했다. 한국전쟁까지 이어지는 여순사건과 관련한 총사망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이 분야 최근 연구자로 치밀한 자료를 근거로 수치를 제시한 주철희는 1만4천여명으로 추산하였다.(주5)

여순사건의 여파는 전라도 지역에 대한 토벌로 끝나지 않았다. 이는 제주도 유격대에 대한 무차별적인 토벌작전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제주도민이 3만여명 이상 무참히 학살되는 참극이 연출되고 말았다. 또한 여순사건은 그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던 군부내 좌익과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나아가 국가보안법 제정을 통해 남한 사회를 ‘과대반공국가’로 탈바꿈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주6)

제주4.3사건으로 체포된 무장대.
제주4.3사건으로 체포된 무장대.

군부 내 좌익·민족주의세력 숙청작업인 숙군은 1947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데 여순사건이 발생한 1948년 10월부터 이듬해 1949년 7월까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군의 약 5%에 달하는 4,700여명이 숙청되었다. 이 중 2,000여명이 총살형에 처해졌는데 초급장교와 하사관의 경우에는 전체의 3분의 1이 체포, 구금, 처형되거나 제대를 당했다. 군 숙정 과정에서 남로당 군사부의 책임자 중 한명이었던 박정희도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동료들의 명단을 제공하는 등 숙군에 협력하고 만주군 인맥인 육본 정보국장 백선엽, 정보국 특무과장 김안일, 특무대 장교 김창룡 등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군부에서 숙청된 사람들 중에는 좌익도 있지만 극우적인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민족주의자들도 많았다. 숙군을 통해 이승만은 경찰과 함께 핵심무력인 군대를 자신에게 절대 충성하는 세력들도 채울 수 있었다.

군부 숙정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억울한 피해자들도 많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승만 정권의 입장에서는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일이 되었다. 군부 숙정이 없었다면 한국전쟁에서 한국 정부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군부 숙정 과정에서 좌익 성향의 인물이 대거 제거되어 인민군의 총공격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국군이 내부 반란 없이 방어전선을 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숙정 이후 군부는 광복군, 학병 출신들이 소외되고 일군과 만군 출신의 이승만에게 철저히 충성하는 친일·친미장교들이 요직을 장악, 득세하게 되었다. 경찰은 이미 친일경찰이 장악한 상태로 이승만에게 절대 충성하는 집단, 반공의 선봉대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양대 무력을 모두 확고히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군부의 숙군 경험과 이때 갖추어진 정보, 조직, 인력 자원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과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형무소 재소자 학살 등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에 그대로 활용되었다. 여순사건과 군부 숙정 과정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전쟁 때 CIC, 헌병대 등 군 정보기관과 경찰이 협력해 민간인 학살을 조직적·체계적으로 진행했다.(주7)

국가보안법 제정과 ‘과대반공국가’의 등장

여순사건은 군부 숙정과 제주도민 학살 외에도 한국 현대사에서 사실상 헌법 위에 군림하며 한국사회를 지배하게 될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직접적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9월 29일 ‘내란행위특별조치법’으로 제출되었다가 형법상 내란죄와 중복된다고 해서 이름을 바꾸어 11월 말 국회를 통과해 12월 1일 공포, 발효되었다. 국가보안법은 처음 많은 사람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무엇보다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하는 자’(1조)에 대한 처벌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는 결국 북조선과 남로당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상의 자유에 대한 헌법정신에도 위배될 뿐 아니라 당시 분단에 대한 의식이 확고히 자리잡지 않은 상태에서 같은 동족집단을 처벌 대상으로 삼은 것에 대한 비판이 강했다. 또한 ‘살인, 방화, 파괴, 또는 운수, 통신기관, 건조물 기타 중요 시설의 파괴 등의 범죄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결사나 집단을 조직한 자’(2조)라고 규정한 대상이 모호하고 포괄적이어서 얼마든지 좌익세력 전체, 나아가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너무 많았다. 국가보안법은 제정 이후 수차례의 개악 과정을 거쳤는데, 그 때마다 새로운 조항이 추가되거나 개악되면서 한국 사회 전체를 통제하는 가장 중요한 법이 되었다.(주8)

국가보안법은 이후 한국 사회의 모든 이념적 틀을 규제하고 사상의 자유와 인권 조항을 비롯한 민주주의 헌법의 가치를 사실상 무력화하는 괴물로 작동되었다. 북조선과 연결되었거나 진짜 공산주의자에 대한 처벌보다는 민주화운동가나 야당,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독재의 통치 도구로 악용되었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였다. 국가보안법은 일제 시대의 독립운동가, 애국자를 처벌하던 악랄한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표절한 채 반공의 옷을 입고” 이름만 바꾸어 등장한 것이라는 점에서도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해방된 나라에서 제정한 ‘훌륭한’ 헌법의 가치와 정신을 무참히 파괴하고 분단과 냉전을 고착화하는 것을 합리화하고 그에 저항하는 모든 사람을 처벌하게 만드는 가장 악랄한 수단이 된 것이 곧 국가보안법이었다.(주9) 그 괴물은 70년이 넘게 지난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다.

김옥주 의원 외 50여명 의원의 국가보안법 폐기 동의안 기사(조선일보 1948.11.16일자)
김옥주 의원 외 50여명 의원의 국가보안법 폐기 동의안 기사(조선일보 1948.11.16일자)

국가보안법의 제정과 함께 이승만 정권은 각종 국민통제장치를 만들고 남한 사회를 자유민주주의사회가 아니라 거대한 ‘반공국가’로 바꾸어갔다. 국가보안법 제정으로 남로당 등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에 대한 소급처벌을 포함해 진보적인 활동에 대한 탄압, 처벌이 본격화되었고, 그에 따라 남한의 감옥은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국가보안법 제정, 처벌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일제의 사상보도연맹·대화숙을 그대로 본뜬 국민보도연맹이란 것을 만들어 과거 좌익경력자들에게 가입을 강요, 감시, 구금, 예비검속 등을 본격화했다. 오제도, 이태희, 옥선진, 정희택, 선우종원 등 소위 ‘사상검사’들과 김태선, 최운하 등 경찰 수뇌들이 만든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전력자들에 대한 계도를 통해 비국민을 국민으로 만들고 이들을 대한민국 안에 포섭하겠다고 밝혔으나 이는 국민들에 대한 끊임없는 사상검토와 함께 과거 동지들에 대한 배신행위를 강요하고 감시망을 풀가동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보도연맹에는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고무신을 주겠다는 등의 회유를 통하거나 개인적으로 밉보인 것에 대한 보복과 협박 등에 의해 좌익전력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도 다수 가입했는데 이들도 모두 전쟁과 함께 처형대상이 되었다.(주10)

동아일보 1948.11.17일자 국가보안법 폐기안 부결, 제정 추진 기사.
동아일보 1948.11.17일자 국가보안법 폐기안 부결, 제정 추진 기사.

이승만 정권은 청년과 학생들을 조직적으로 반공전선에 동원하기 위한 정비작업에도 나섰다. 우익청년조직은 군과 경찰을 보조할 수 있는 준무력기구였으나 서북청년회, 대한청년회, 민족청년단(이범석), 대동청년단(이청천) 등 여러 조직으로 난립하고 있었고, 김구, 이범석, 이(지)청천(본명 지대형) 등이 사병이나 민병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이승만으로서는 이들 조직을 통합하여 하나의 통일적인 조직체계를 구축하고 그에 대한 지도, 통제권을 확고히 만들 필요가 있었다. 1948년 12월 19일 기존의 5개 반공청년단이 통합하여 대한청년단(한청)을 결성했는데, “이승만 총재의 명령에 절대복종한다”, “공산주의 주구배를 남김없이 말살하기를 맹세한다”고 해서 이승만의 절대적인 명령체계 아래서 좌익공격의 선봉대가 될 것임을 밝혔다. 한청의 총재에는 이승만이 추대되었고, 단장에는 내무부장관 신성모가 임명되었다.(주11) 외무부장관과 사회부장관까지 최고지도위원에 임명, 단순한 청년조직이 아니라 이승만을 떠받드는 준국가기관, 준무장력으로 위치 지워졌다. 1949년 5월에는 반공청년단 조직들에서 5만명을 선발하여 민병대 조직으로 호국군을 창설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전쟁 때 국민방위군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나아가 이승만 정권은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 50만명의 학도호국단을 조직하였고, 경찰의 대민사찰 활동을 보조하고 마을단위까지 민중통제를 보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민보단을 조직했다.(주12) 이처럼 촘촘한 반공망, 국민 통제 조직망을 구축함으로써 남한 내에서 좌익과 진보세력의 활동공간을 제거할 뿐 아니라 김구(한독당), 김규식(민족자주연맹) 등 남북협상파 인물·정당·단체들과 의회 내 소장파 혁신세력에 대한 압박, 통제의 수단을 마련하고자 했다.

여순사건 이후 국가보안법 제정과 군부 숙청, 대한청년단과 학도호국단 조직, 민보단 결성 등을 통해 이승만은 경찰과 군대, 청년단 등 준무력기구를 모두 장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은 확고하지 않았다. 분단정권 수립 과정에서 제기된 도덕적 정당성 문제가 있었고, 북조선과 남로당 등 좌익의 도전이 계속되었으며 민생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남한 내부에서 민중의 절대적인 요구 사항이었던 농지개혁과 친일파 청산문제가 전혀 진척되지 않고 있었고, 민중의 생활 안정, 그리고 통일문제 등에서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서 이승만 정권에게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는 의회 소장 개혁세력의 요구가 거세게 대두되었다. 이 문제를 두고 이승만 정권과 의회내 소장파 개혁세력이 충돌하면서 정국이 파열음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청년단 전라남도단부 결성대회.
대한청년단 전라남도단부 결성대회.
장흥 향보단 훈련 모습(사진=장흥문화원)
장흥 향보단 훈련 모습(사진=장흥문화원)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

친일파 청산 문제는 해방 후 농지개혁과 함께 가장 핵심적이며 일차적인 개혁 과제였다. 하지만 미군정 시기 친일파 청산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미군정은 친일경찰과 친일관료를 다시 등용했고, 미군정의 여당 노릇을 했던 친일지주정당으로 지탄받았던 한민당은 극력 친일파 청산과 농지개혁을 막았다. 미군정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치안확보를 맡은 친일경찰을 청산하는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해방 후 가장 강력한 물리력을 확보하고 있었고, 민중의 삶을 통제하는 일선에 있었던 경찰은 악질적인 고등계 출신을 비롯하여 친일경찰 일색이 되고 말았다. 친일경찰은 민중의 가장 큰 원성의 대상이었고, 민중항쟁과 주민저항의 밑바탕에는 늘 친일경찰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1946년 10월 항쟁, 1948년의 제주4.3항쟁과 여순항쟁에서 모두 친일경찰이 가장 주요한 공격 표적이 되었다.

친일파 청산을 위한 노력은 헌법에 부칙 조항이긴 하지만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법 제정을 명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초대헌법 제10장 부칙. “제101조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 이에 근거해 1948년 8월 5일 초대국회 제40차 본회의에서 김웅진 의원이 반민법 기초특별위원회 설치안을 제출해 가결되었다. 특별법기초위원회는 과도입법의원이 제정한 ‘특별조례법’을 토대로 만든 전문위원 안을 중심으로 일본의 공직자 추방령, 중국 국민당의 전범처리 규정, 북조선인민위원회법안 등을 참조하여 8월 16일 국회에 반민특위법 초안을 상정하였다. 국회 논의 과정에서 김준연, 곽상훈, 황호현, 서성달 등은 반민법이 시행되면 사회가 혼란에 빠진다는 이유로 반민법 제정을 반대하였고, 노일환, 김병희, 유성갑, 박해정, 황두연 등의 소장파 의원들은 공소시효의 연장, 가감례 조항의 삭제 등 처벌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며 대립하였다. 국회는 논의 끝에 9월 7일 재석 141명 중 찬성 103명, 반대 6명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통과시켰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는 반민법 시행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이를 거부할 경우 정부가 제출한 양곡매입법안이 통과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1948년 9월 22일 서명, 공포(법률3호)하였다.(주13)

1948년 9월 29일 반민법 제9조에 의하여 특별조사위원회 구성안이 제출, 통과되었고, 10월 23일 반민족행위조사특별위원회(반민특위)가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위원장에 임시정부 요인 출신의 김상덕(경북)이, 부위원장에는 김상돈(서울)이 선출되었고, 위원으로 조중현(경기), 박우경(충북), 김명동(충남), 오기열(전북), 김준연(전남), 김효석(경남), 이종순(강원), 김정배(제주 및 황해) 등 10명이 선출되었다. 11월 24일 조사업무를 담당할 기구를 만들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 조직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반민특위는 중앙에 중앙사무국을 두고, 각도 조사부에 사무분국을 설치하고 1949년 1월 각도별 조사책임자를 선임하였다. 각도별 조사부 책임자는 경기 이기룡, 충북 경혜춘, 충남 윤세중, 전북 손주탁, 전남 최종섭, 경북 정운일, 경남 강홍렬, 강원 김우종, 제주·활애 송창섭 등 10명으로 모두 직접 간접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들이었다.(주14)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5일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1월 8일 화신재벌 박흥식을 1호 검거자로 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만주에서 일본군 첩자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를 체포, 탄압한 이종형, 의열단의 강우규 열사를 체포한 친일 고등계 형사 출신의 김태석, 중추원 부의장 출신의 박중양, 33인의 한 사람이었다가 변절해 중추원 참의와 임전보국단장을 지낸 천도교의 최린, 경성방직 사장으로 중추원 참의와 만주국 명예총영사를 지낸 김연수(한민당 수석총무 김성수의 친동생), 수도경찰청 고문치사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친일 고등계 경찰의 대명사였던 전 서울시경 수사과장 노덕술, 공주 갑부로 널리 알려진 중추원 참의 출신의 김갑순, 중추원 참의를 지내며 학병 참여를 강요하고 다녔던 문필가 춘원 이광수, 히로부미의 양녀로 일제의 고급밀정이었던 배정자 등이 속속 체포되었다.

반민특위 공판 모습.
반민특위 공판 모습.

그러나 반민특위가 활동을 시작하자 방해공작도 잇따랐다. 반민법 제정을 반대했던 대통령 이승만은 특위 활동에 대해 “반민자 처단에 신중을 기하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제동을 걸었다. 그는 또한 노덕술을 비롯하여 친일경찰 간부들이 체포되자 반민특위 위원들을 불러 “이들을 석방하라”고 노골적인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고 민중도 지지를 보냈다. 이승만의 압박이 통하지 않자 친일파와 극우세력들은 반민특위 위원들에 대한 협박과 중상모략, 관제데모와 테러·감금 등 야만적인 방해 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테러리스트 백민태(일명 임정화)를 고용한 테러·암살 기도 사건이 드러났다.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최란,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전 수사과장 노덕술, 중부경찰서장 박경림 등은 1948년 10월 반민특위 위원 중 강경파 의원들과 정부 요인들에 대한 제거 계획을 세우고 전문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했던 것이다.(주15) 암살 대상자로는 김병로 특별재판부장(대법원장), 신익희 국회의장,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등을 비롯하여 김상돈, 권승렬, 서순영, 서용길 등 15명이나 되었다. 1월 초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되자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백민태가 자수하는 바람에 이 기도는 무위로 끝났으나 반민특위에 대한 음해 공작, 사고를 가장한 테러 공격 등 방해 활동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주16)

반민특위 조사관 회의 후 기념촬영(사진=민주화기념사업회)
반민특위 조사관 회의 후 기념촬영(사진=민주화기념사업회)

반대 시위, 테러 시도, 음해 공작에도 반민특위 활동을 제지할 수 없게 되자 친일극우세력은 아예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6.6사건을 벌였다.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이 반민특위 관제데모 사건의 배후로 밝혀져 반민특위에 ‘데모선동혐의’로 체포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은 처음 시경국장 김태선에게 지시를 요청했으나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자 다시 내무차관 장경근을 찾아가 허락을 받고 실력행사에 돌입했다. 윤기병은 부하경찰관 40명을 동원해 6월 6일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 아침에 출근하던 특위요원 35명(반민특위 특경대원 24명, 사무직원과 경호원 9명, 일보러 왔던 민간인 2명)을 체포, 연행, 구금하였다. 경찰에 연행된 특경대원 등 직원들은 경찰로부터 폭행을 당해 대부분 부상을 입었다. 반민특위 습격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에 달려와 경찰에 호통을 치던 검찰총장 권승렬도 경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같은 날 지방경찰도 도지부 사무실을 습격, 똑같은 행위를 저질렀다. 이는 헌법기관에 대한 직접적인 물리적 공격으로서 단순한 위법행위를 넘어선 쿠데타 행위나 다름없었다. 반민특위 습격 다음날인 6월 7일 이승만은 미국 연합통신사(AP)와의 기자회견에서 “특경대 해산은 대통령 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고 밝혔으며, 6월 11일에는 특별담화까지 발표하며 반민특위 특경대 해산은 정당하다는 주장을 폈다.(주17)

반민특위 습격사건 이후 반민특위 활동은 막대한 타격을 입고 사실상 와해되었다. 특경대원과 경호원이 감금되면서 무장력이 완전히 해제 당했고, 위원들도 감시당하거나 활동이 위축되었다. 더욱이 이와 함께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국회부의장 김약수, 이문원, 노일환, 서용길, 김병회, 김옥주, 박윤원, 강욱중, 황윤호 등 8명의 소장개혁파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육군헌병대에 구속되자 국회내에서 반민특위 활동을 적극 추진했던 세력의 힘이 극도로 약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민법의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로 하자는 한민당의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 통과되어 반민특위 활동이 끝나고 말았다. 반민특위 습격과 와해 사건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1949년 6월에 벌어진 국회프락치사건, 김구암살사건 등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과 국회 내 소장개혁파의 몰락

1949년 5월 17일 이문원, 최태규, 이구수 등 국회의원 3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6월 21일에는 김병회, 김옥주 의원이, 22일에는 노일환, 박윤원, 강욱중, 황윤호 의원이, 25일에는 국회부의장 김약수 의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헌병대에 비밀리에 체포되었다. 또한 8월 10일에는 배중혁, 차경모 의원이, 14일에는 서용길, 신성균, 김봉두 의원이 각각 체포되었다. 이로써 5월부터 8월 사이에 모두 15명의 국회의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는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했다.(주18)

이 사건으로 체포된 의원들은 국회에서 소장 개혁파를 대표하던 인물들이었다. 당시 59세였던 국회 부의장 김약수를 제외하면, 최소 28세(배중혁)에서 최고 43세(신성균)에 이르는 소장의원들로 평균 연령이 33세였다. 초대국회의원 평균 연령 47.1세에 비해 훨씬 젊었고, 개혁적인 주장을 폈으며, 특히 친일파 청산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농지개혁을 두고도 지주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던 한민당과 달리 농민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외국군의 완전 철수, 미 군사고문단 설치 반대,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남북정치회의 개최를 주장하는 등 이승만·한민당의 단정노선을 부정하고 있던 김구와 거의 유사한 주장을 펴며 사실상 연대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주19) 소장파 개혁의원들의 주장은 이승만과 한민당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근본뿌리를 흔드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상황에서 미 군사고문단 설치까지 반대한 것은 다소 급진적인 면이 있었으나 나머지 주장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1949년 초반까지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1949년 6월을 전후한 시기 이승만과 한민당이 합작해 개혁세력에 대한 총공세를 펼치면서 이러한 주장은 모두 국가보안법의 처벌 대상이 되고 말았다.(주20)

국회 프락치 사건 선고공판 보도 기사(동아일보 1950.3.15.일자)
국회 프락치 사건 선고공판 보도 기사(동아일보 1950.3.15.일자)

남로당의 조종을 받으며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국회의원들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정재한이란 여간첩이 국부에 소지하고 있었다는 ‘암호문서’였다. 이 정재한이 소지했었다는 암호문서는 ‘증제1호’로 법정에 제출되었으나 정재한은 법정에 출두하지 않았다. 변호인측은 되풀이하여 정재한의 출두를 요구하였으나 끝내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재한이란 인물이 실재하지 않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으나 정재한은 실재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검찰측은 정재한의 출두를 극구 반대하면서도 다른 방법으로 정재한이 소지했다는 이 문서의 신빙성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후에 동아일보 취재팀은 경찰이 정재한으로부터 압수한 서류는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여서 국회 프락치 사건과 관련한 국회 내 공작과 군사·경찰 기밀정보 등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없게 되어 있었고, 그녀의 은폐문서는 국회 프락치 사건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남로당의 통상적인 정보보고서로 밝혀졌다며 여러 점에서 조작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주21)

이 사건 담당검사였던 오제도는 국회프락치 사건 관련자들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았다는 증거로 여섯 가지를 제기했는데, 첫째가 정재한의 비밀문건이었다. 이는 사실상 조작 가능성이 높다. 둘째 노일환·이문원 의원이 남로당에 입당해 지령대로 행동했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한 증거는 없었다. 노일환 의원은 헌병대에서 고문에 못 이겨 허위진술했으나 검사에게서 그 사실을 부인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하였다. 셋째는 ‘증제1호’의 작성자라고 하는 이태철이라는 인물의 자백을 들었는데 신빙성이 없는 내용이다. 넷째는 앞의 1,2,3과 부합하는 피고인들과 증인들의 진술을 들었는데 이 또한 맞지 않는 내용이었다. 다섯째 ‘증제1호’를 압수한 경위 김호익과 그를 살해하려던 노동당 특수행동대 이용음의 자백을 들었는데 이 또한 증명력이 없는 것이었다. 여섯째 오제도는 조봉암의 증언을 들었는데,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조봉암은 미군철수 문제를 두고 김약수와 의견을 달리했으나 김약수가 남로당의 프락치라고 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주22)

법정에 선 국회프락치사건(경향신문 1949.11.18일자)
법정에 선 국회프락치사건(경향신문 1949.11.18일자)

국회 프락치 사건은 사실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목적에 따라 고문수사와 함께 사실이 왜곡, 확대, 과장, 조작되었다. 박명림 교수는 오제도를 면담하고 ‘이 사건의 증거가 있었느냐’고 묻자, 간단하고도 분명하게 “증거는 없다”고 대답했다고 자신의 책에 기록하였다. 그러면서 오제도는 “중요한 것은 증거가 아니라 그들(국회프락치 사건 관련자)의 주장이 당시에 공산당이 아니면 주장하지 않던 내용이라는 데 있다. 그런 주장은 당시에는 공산당들만이 하는 것인데 이는 그들이 남로당과 연계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반문했다는 것이다. 결국 오제도의 말은 “당시 국가가 가장 핵심으로 문제 삼았던 기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주23) 정말 어이가 없지만 오제도의 이 말은 이 사건이 물증이 없는 조작사건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해방 후 50년간 일어났던 수많은 공안사건과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주24) 가히 고문조작 사건의 출발점이라 할만하다.

더욱이 재판 또한 국가보안법 재판의 전범이라 할 만한 논고와 판결이 내려졌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검사 오제도는 사건 피고인들에게 “특히 미군철퇴 요구와 대미무기원조 반대, 한미협정 반대, 유엔한국위원단 철수 등으로 조국방위체제와 민심을 오도하고 국가 공익과 발전을 저해했기 때문에 국가변란의 반국가적 죄상이 명백하다”고 논고하였다. 이에 대해 재판장 사광욱은 “국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국회 외부에서 무책임하게도 유엔한위에 대하여 남로당이 주장하는 미군철퇴를 진언하고 선전하는 것은 결국 우리 동족간에 비참한 살육전을 전개시키고 양육강식의 무자비한 투쟁을 초래하여 우리 대한민국을 중대한 위기에 봉착케 하고 국가의 변란을 야기하여 마침내는 공산독재정권을 수립하려고 함에 그 의도가 있었다고 할 것이며, … 적어도 국회의원으로서 더욱 국회부장의 요직에 있는 자로서 국회 외부에서 유엔한위에 대하여 도리어 그 철폐를 진언하고 선전한다 하는 것은 도저히 용허할 수 없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반역이요 단호히 배격하여야 할 이적행위라고 단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바이며 …”라고 판결이유를 밝혔다.(주25) 증거를 바탕으로 재판을 해야 하는 판사의 판결문이 아니라, ‘사상판사’의 반공, 친미 강연문 같아 보인다.

1심 재판(재판장 부장판사 사광욱)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노일환·이문원 10년, 김약수·박윤원 8년, 김옥주·강욱중·김병회·황윤호 6년, 최태규·이구수·서용길·배중혁·신성균 3년, 오관(변호사) 4년, 최기표(이문원 선거사무장)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주26) 미군철수 주장이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고 반미주장은 반역죄가 되는 순간이었다. 여러 점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이 사건은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수없이 나타나는 고문에 의한 용공조작 사건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주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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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초대헌법과 함께 정부조직법 공포되면서 국방부가 설치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와 함께 미군정이 종식되어 통위부의 행정이 국방부로 이양되었다. 그리고 ‘남조선 과도정부의 행정이양 절차’에 의해 9월 1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의 국군 편입이 이뤄졌으며, 9월 5일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육군으로, 조선해안경비대가 대한민국 해군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1949년 10월 1일 육군에서 공군이 분리되면서 3군 체제가 형성되었다.(한용원, 한국군의 창군과 한국전쟁, 『전사』 1호, 국방부전사편찬연구소, 1999.9, 110쪽). 그러나 한동안은 국방경비대와 국군의 명칭이 혼용되었다.

2) 김달삼은 8월 2일 일행 4명과 함께 제주를 떠난 것으로 유추되고 있다. 해주 대회에 제주도 인민대표로 참석한 인물은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 문등용 등 6명이었다. 20대 중반의 김달삼은 해주대회 첫날인 8월 21일 허헌, 박헌영, 홍명희 등 거물들과 나란히 주석단의 일원으로 뽑혔다. 8월 25일에 있은 남한측 360명을 뽑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제주도 대표로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의 5명이 선출되었다.(김남식, 『남로당연구1』, 돌베개, 1984, 530〜531쪽) 김달삼은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투표에 앞서 벌어진 ‘입후보자에 대한 토론’ 시간에 토론자로 나서 제주4.3사건에 대해 연설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무장봉기의 발발 원인과 관련,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에 따른 분노가 폭발해 벌어진 자연발생적인 총궐기라고 주장했으며, 5.10선거를 보이코트한 무장대의 ‘전과’ 등을 길게 설명했다. 김살담의 월북이 제주4.3사건 발발 때의 기본적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단된 남과 북에 두 개의 적대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무장대 지도부가 북한 정권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남한 정부의 태도를 더욱 강경하게 만들었다.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제주도를 떠남에 따라 이덕구가 그 역할을 맡았다.(제주4.3위원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003, 240쪽)

3) 임영태, 『한국에서의 학살』, 통일뉴스, 2017, 74〜76쪽

4)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4, 104〜106쪽

5) 주철희, 예술작품을 통해 본 여순사건 연구, 전북대 박사논문, 2014, 143쪽

6) 여순사건 이후 남한의 반공국가화에 대해서는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 선인, 2009;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4를 참조.

7) 임영태, 위의 책, 87쪽

8) 자세한 내용은 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1,2,3』, 역사비평사, 1995〜1997 참조.

9) 임영태,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유리창, 2013, 153〜163쪽

10) 임영태, 『한국에서의 학살』, 199〜203쪽

11) 이범석은 민족청년단(족청)을 해산하고 대한청년단에 합류시키라는 요구를 거부했지만 이승만의 지시로 강행되었다. 족청의 해산과 함께 1949년 2월 이범석은 국방부 장관에서 해임되어(후임에는 신성모가 임명) 실권없는 총리로만 남았다.

12) 임영태, 위의 책, 196〜199쪽

13) 오익환, “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 『해방 전후사의 인식1』, 한길사, 1989(개정판), 112〜117쪽;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선인, 2003, 136〜140쪽

14) 오익환, 위의 글, 118쪽

15) 이 사건으로 최난수와 홍택희에게는 1949년 6월 26일 살인예비죄 및 폭발물 취체법 위반죄가 적용되어 각각 징역2년의 유죄가 선고되었으나, 노덕술과 박경림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16) 오익환, 위의 글, 122〜139쪽

17) 오익환, 위의 글, 139〜146쪽

18)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 역사비평사, 1996, 216〜217쪽

19)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Ⅱ』, 나남출판, 1996, 466쪽

20) 서중석, 위의 책, 217〜237쪽

21) 동아일보특별취재반, 『비화 제1공화국 2』, 홍우출판사, 1975, 62쪽

22) 서중석, 위의 책, 225〜226쪽

23)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Ⅱ』, 나남출판, 1996, 469쪽 주44) 참조.

24) 서중석, 위의 책, 226쪽

25) 「국회프락치사건 판결문」, 월간 다리, 1972년 4월호, 179〜207쪽; 서중석, 위의 책, 231〜232쪽

26) 김정기,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 2』, 한울, 2008, 210쪽

27) 국회프락치 사건에 대한 정치적 개입과 조작, 목적, 그 여파 등에 대해서는 김정기, 『국회프락치사건의 재발견 1, 2』, 한울, 2008을 참조.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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