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정규군 창설을 위한 준비 작업

1947년 8월 이후 남북한은 각각 미국과 소련의 지원 아래 정부 수립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북조선의 경우 헌법 초안을 마련하고 정규무력인 인민군을 창설하였다. 남한의 단정에 대한 비판과 명분 축적을 위해 헌법초안 발표는 뒤로 미루었으나 정규군 창설은 예정대로 진행, 1948년 2월 8일 인민군이 공식 창건되었다. 남한의 경우, 경찰예비대 형식으로 출발한 국방경비대의 무장력을 확장하면서 정규군의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었지만, 정식군대인 국군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후의 일이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조선 지도자들은 당과 함께 군대 창설을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삼았고, 정규군 창설을 위한 준비 작업은 항일빨치산세력이 중심이 되었다. 항일빨치산세력은 어떤 부문보다 군대 장악에 많은 공을 들였고 최고 지도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북조선 인민군의 모체가 어디인가 하는 것은 연구자들에 따라 차이가 있다. 1945년 10월에 창설된 보안대, 1945년 11월 평양학원, 1946년 8월 조직된 보안간부훈련대대부, 또한 간부훈련대대부의 전신인 보안대대, 철도경비대 등 견해가 다양하다.(주1)

평양학원생들에게 강의하는 김일성. 그 옆은 원장인 김책.
평양학원생들에게 강의하는 김일성. 그 옆은 원장인 김책.

북한측에서는 창군 작업의 출발점을 평양학원으로 보고 있다. 평양학원은 1945년 11월 17일 김일성이 현대적 정규군대를 창건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 간부가 필요하므로 학원을 창설하고 현대적 정규무력의 골간이 될 군사·정치간부들을 키우라고 지시했다. 평양학원은 1946년 1월 3일 건국실, 강의실, 훈련장, 병실 등을 갖추고 600명의 학생으로 정식 개교하였다. 평양학원은 정치반과 군사반으로 편성되었다. 이곳 출신들은 이후 북한 인민군의 핵심이 되었는데, 이 학교는 항일빨치산 출신들이 주도했다. 초대 학원장은 김책, 후에는 안길이 맡았으며, 김일성은 명예원장으로 추대되었다. 평양학원 창설은 항일빨치산 출신의 안길과 정치부교장 조정철, 교무주임 심태산, 김증동 등이 주도했다.(주2)

한편, 1945년 10월 12일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성명서를 통해 각종 치안조직, 무장조직을 전부 해산하고 각도인민위원회에 ‘보안대’(경찰)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11월 5도행정국 산하에 각도의 보안대를 관할하는 보안국장에 만주항일유격대 출신의 최용건이 취임했다. 보안국 산하에는 보안대 외에도 1946년 1월 무장경비 조직으로 ‘철도보안대’가 창설되었다. 철도보안대 초기 사업은 항일빨치산 출신으로 당(북조선 분국) 조직부장을 맡고 있던 김일이 수행했다. 1946년 7월 각도에 설치된 철도보안대를 통합하여 북조선철도경비대로 개편되었다. 38선 경비를 책임진 38경비보안대는 1946년 중반 항일유격대 출신의 김창봉을 대대장으로 사리원에서 조직되어 이후 3개 연대로 확대되었다. 군관양성기관의 설치, 보안대 통합, 철도경비대, 38경비대 창설에 이어 1946년 6월 평남 개천에 본격적인 정규군을 창설을 위한 핵심 무력부대로 보안간부훈련소를 설치하였다. 이어서 신주의에 보안간부훈련소 제1소, 나남에 제2소, 강계에 제3소를 설치, 운영하였다.(주3)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된 뒤 1946년 3월 전문적인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중앙보안간부학교’ 창설이 준비되어 7월 8일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초급군사간부 양성기관인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는 평양학원 군사반과 보안간부훈련소를 통합하여 조직되었는데, 항일유격대 출신 30여명과 평양학원 단기수료생 10여명이 핵심 창설멤버였다. 학생모집은 무정, 최용건, 김책, 김웅, 장종식 등 5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맡았다. 초대 교장은 누군지 확인되지 않는데 정치부교장에는 조선의용군 출신의 김웅이, 군사부교장에는 항일빨치산 출신의 최용진이 임명되었다. 전술학부장 유성철, 포병학부장 정학순, 사격학부장 박길남, 통신학부장 이종인 등이었고, 박영민, 전학준, 박길남, 이종인, 이두익, 태병렬, 오찬복 등이 간부로 활동하였다. 1기생 정원은 500명이었고, 교육기간은 12개월이었다. 이 학교는 보병, 포병, 통신병, 공병 등 여러 병과 지휘관들이 전문적으로 양성되었는데, 한국전쟁 기간 인민군 중·하급 장교 대부분이 이 학교 출신이었다.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는 1948년 12월 평양으로 이동, 제1군관학교로, 1950년 12월에는 강건종합군관학교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주4)

1946년 중반 무렵 북조선의 무력집단을 정리해 보면, 치안경비를 담당한 보안대와 철도경비를 담당한 철도경비대가 있었고, 사병양성기관으로 보안훈련소(개천)와 철도경비훈련소(개천과 나남)가 설치되었다. 또한 간부 양성기관으로 평양학원과 중앙보안간부학교가 운영되었다. 이 가운데 보안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규군 건설을 목표로 운영되고 있었다.

1946년 8월 15일 북조선 당국은 무력 기관을 통합 지휘하기 위한 기구로 보안간부훈련대대부를 새로이 설치하였다. 보안간부훈련대대부는 명칭과 달리 실질적으로 정규무력의 최고참모부였다. 사령관 최용건, 부사령관 겸 문화부사령관 김일, 포병부사령관 무정, 총참모장 안길, 후방부사령관 최홍극, 작전부장 류신, 간부부장 이림, 통신부장 박영순, 통신부부장 이청송, 공병부장 황호림, 굥병부부장 박길남, 정찰부장 최원 등이었다. 항일유격대 출신의 최용건, 김일, 안길, 박영순 등이 요직을 차지했는데, 이 사업을 주도한 것은 역시 항일유격대 출신의 김책이었다.(주5)

1946년 6월에는 소련 군사고문단(단장 스미르노프 소장)이 북조선에 도착, 각 훈련소와 군사학교에 배치되었다. 소련 군사고문단의 임무는 군 장교들을 훈련시켜 정규군 편성을 촉진하는 것이었다.(주6)

1946년 7월부터 1947년 6월 사이에 중국 국공내전이 펼쳐지고 있던 만주지역에서 국민당군이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 동북의 주요 도시와 산동성 연안까지 점령하였다. 동북지역 국민당군과 남한의 미군 점령 지역 사이에 끼인 꼴인 된 북조선은 국경경비대 등 무력을 증강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와 함께 북조선은 1947년 초반 북중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국민당군과 싸우고 있던 중국 공산당군의 배후지 역할을 하며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수세에 몰린 동북민주연군(공산당군)이 국경을 넘어와 북한 땅에서 부상병을 치료하고 휴식을 취하고 돌아가 싸울 수 있게 지원했으며, 일본군 무장해제로 북한지역에서 확보한 10만 정 이상의 소총을 무상으로 중국 공산군에 지원했다. 식량도 지원하고 물자, 의료지원 등 김일성 등 북조선 지도부는 국공내전에 참전하고 있는 중국 공산당군을 아낌없이 지원했다.(주7)

이와 함께 해방 직후 북한으로 귀국하지 않고 동북지역으로 가서 만주지역 치안유지와 토비 토벌작전, 국공내전에 참전하고 있던 항일빨치산계나 연안계 군사간부 중 일부가 1946년부터 북조선으로 입국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북조선의 당, 인민위원회, 군대 등에서 활동하면서 무력·보안기관의 창설, 정비,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 외에도 동북지역의 많은 중국공산당 출신 조선족 청년들이 군, 보안기관 등 북조선 체제 건설작업에 대거 참여했는데, 이들은 수천명에 달했다.(주8) 항일빨치산 출신의 강건(강신태), 임춘추, 임철, 김광협 등이 귀국해 군 창설에 참여하였고, 조선의용군 출신의 박효삼, 김웅, 이익성, 이근산, 김연, 주연 등은 군 창설에, 박일우는 당간부부장을 거쳐 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 이상조는 당조직부부장(뒤에 당간부부장), 박훈일은 황해도당위원장 등을 맡았다. 수적으로 제한되었던 항일빨치산계는 군대에 집중했으나 인적자원이 풍부했던 연안계는 군대와 보안기관, 당에도 대거 진출하였다. 연안계는 박일우에서 알 수 있듯이 초기 보안기관에 집중되었으나 보안기관과 내무기관 안에서도 정보계통은 방학세(내무국정보처 책임자), 김파(정보처 부책임자) 등 소련계가 장악했다. 중국 내에서 국공내전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병력을 증강하고 있던 보안간부훈련대대부는 임시인민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는데 따라 1947년 5월경부터는 내부적으로 ‘인민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주9)

북조선 정규군 인민군 창건

북조선 정규군 창설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것은 1947년 5월이다. 김일성은 1947년 4월 15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북한 주둔 25군 사령관 코드코프 중장에게 북한군 전력 강화를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북조선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력을 강화하고 전체 군대를 재편성했다.(주10) 5월 17일에는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산하 전 대원들에게 정식 군계급장을 부여해 군관과 하전사를 식별하도록 하였고, 장교는 14계급으로 구분되었다. 장교는 원수, 차수, 대장, 상장, 중장, 소장, 대좌, 상좌, 중좌, 소좌, 대위, 상위, 중위, 소위 등이었다.(주11) 소련파로 인민군 작전국장 등 북한 고위직을 지낸 유성철은 1948년 인민군이 창설될 때까지 사단편성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증언했으나 이 무렵 미군 정보는 2개 사단과 제3독립혼성여단의 집단군으로 편제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미군 정보당국이 파악한 당시 주요 간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주12)

출처: 6.25전쟁사 1권, 248쪽
출처: 6.25전쟁사 1권, 248쪽

ㅇ 본부
사령관 최용건, 부사령관 겸 포병사령관 무정, 참모장 안길, 문화부사령관 김일, 후방부사령관 최홍극, 작전부장 유신, 간부부장 이림, 통신부장 박영순, 통신부부장 이청송, 공병부장 황호림, 공병부부장 박길남, 정찰부장 최원

ㅇ 제1사단(개천)
사단장 김웅, 부사단장 김봉률, 참모장 최광
제1연대장 이권무, 참모장 김대홍
제2연대장 최원
제3연대장 최춘국(최현에서 교체), 부연대장 서철
제4연대장 이봉복

ㅇ 제2사단(나남)
사단장 강건, 문화부사단장 임해, 참모장 이익성
제1연대(회령)장 강치흠 
제2연대(나남)장 이봉수
제3연대장 허봉학
제4연대장 류경수, 참모장 장평산

ㅇ 제3독립혼성여단(평양)
여단장 김광협, 제1대대(함흥)장 전문섭, 제2대대(성진)장 유영구, 제3대대(평양)장 김창봉, 포병대대장 박우섭, 통신대대장 최인덕, 박격포대대장 김려중
중앙경비대대(평양)장 강상호
평양학원 원장 기석영, 부원장 겸 문화부주임 전창철, 군사부주임 심태산, 제1훈련 대대장 주도일

북한인민군은 총사령관 최용건, 참모장 안길, 문화부사령관 김일, 2사단장 강건(강신태), 독립혼성여단장 김광협을 비롯하여 항일빨치산계가 핵심요직을 차지했고, 조선의용군과 소련군 출신들도 고위 간부에 등용되었다. 반면 중대장과 소대장은 해방 후 양성된 빈농·노동자 출신들이 맡았다. 1948년 2월 2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결정과 2월 4일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에 따라 북한군대의 ‘행정적 통제부서’로서 ‘민족보위국’을 신설하고 초대국장에 김책을 임명하였다. 민족보위국이 독립 조직으로 설치된 것은 인민정권의 보위 기능과 무력의 활동 능력을 강화하려는 조치였다.(주13)

북조선은 1948년 2월 8일 인민군 창건을 공식 선포하였다. 이날 평양 역전에서 40만 인파가 모인 가운데 인민군 창건 경축 열병식이 거행되었다. 김일성은 기념식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오늘 우리가 인민군대를 가지게 되는 것은 우리 조국의 민주주의 조선 완전 자주독립을 일층 촉진시키기 위서입니다. … 어떠한 국가를 물론하고 자주 독립국가는 자기의 군대를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 조선인민은 어디까지든지 자기 운명을 자기 손에 틀어쥐고 자기가 주인으로 되는 완전 자주 독립국가 건설을 위하여 자기의 손으로 통일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모든 준비와 대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주14)

김일성은 인민군은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인민의 아들딸로써 조직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인민의 군대”로서, “과거 일제의 가혹한 탄압하에서 우리 조국과 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반일무장투쟁에 일생을 바쳐온 진정한 조선의 애국자들을 골간으로 하여 창설”되었다고 밝혔다. 인민군 창건 이후 김일성의 항일유격투쟁 전통을 강조하면서 인민군이 그러한 전통 위에서 만들어진 군대임을 선전하는 활동이 진행되었다.(주15)

북한은 이후 1977년까지 2월 8일을 인민군 창건일로 기념했으나 1978년부터 1932년 반일유격대 창건일로 알려진 4월 25일을 인민군 창건일로 변경했다. 그러다가 2018년 1월 22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다시 2월 8일을 건군절로 변경하였다.

인민군 창설 선포 때 2사단장 강건이 안길(1947년 12월 병사)을 대신하여 총참모장으로 이동하고, 김광협이 2사단장이 되는 등 몇 가지 외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인민군이 창설됨으로써 북조선의 정부 수립은 시간과 절차만 남게 되었다.

북한 인민군 첫 열병식 모습(북한 뉴스 갈무리, 뉴스1)
북한 인민군 첫 열병식 모습(북한 뉴스 갈무리, 뉴스1)
1948.2.8. 창건한 북조선 인민군의 해방 4주년 기념식(1949.8.15.) 모습
1948.2.8. 창건한 북조선 인민군의 해방 4주년 기념식(1949.8.15.) 모습

김구·김규식의 남북회담 제안과 북조선의 대응

북조선은 2월 8일 인민군 창건을 선포하고, 2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발표하는 등 남한의 단선에 대응하여 북조선의 독자적인 정부 수립 절차를 밟아 나갔다. 그런 가운데 2월 중순 새로운 변수가 발생했다. 2월 초순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에서 남북회담을 제안하고, 김구와 김규식 등 남한 민족주의자들이 이에 호응하게 되면서 북측으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2월 16일 김구·김규식이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하는 서신을 보냈고, 이에 북조선측은 면밀한 상황 검토에 들어갔다. 북조선 지도부는 김구와 김규식의 제안이 진정성이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북로당 대남연락부장 임해가 남한에 급파되어 홍명희와 김규식의 측근이었던 박건웅·권태양 등을 만났다. 이와 별도로 김일성의 직계라인인 성시백이 파견되어 김구의 비서였던 안우생 등을 만났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북조선측은 김구·김규식의 제안이 애국적 결단에서 나온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주16)

이와 함께 2월 말에서 3월 초반 사이에 북조선 내에서 남한 우익에 대한 평가와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판단에 변화가 나타났다. 2월 24일 북조선민전 24차 중앙위원회는 한반도 문제 해결과 관련해 단선반대 투쟁과 함께 “외국군대가 철퇴한 다음에 인민회의의 전조선적 선거 실시”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는데, 총선거의 내용을 ‘인민회의의 전국적 실시’로 규정함으로써 북한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인민위원회 체제를 남한에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그런데 3월 9일 북조선민전 25차 중앙위원회에서 있은 김일성의 보고는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김일성은 남한 단선 반대와 외국군대 철수 후 총선 실시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도 ‘인민회의’가 아닌 ‘최고입법기관’의 전국적 실시를 주장하였다. 이는 북한에서 권력 형태를 두고 남한 우익과의 협상과정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여지를 보인 것을 의미했다.(주17)

3월 초까지도 북조선측은 김구를 이승만·김성수 등 단정 추진세력과 구분하지 않은 채, ‘미제국주의의 주구’ ‘민족반역자’ ‘반동분자’ ‘민족의 원수’ 등으로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의 3월 9일 보고 후 북조선에서 김구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다. 3월 12일 북조선민전에서 발표한 ‘남조선 반동적 단독정부 선거 실시 및 유엔소총회 결정 반대에 대한 표어’에는 이승만·김성수 비판만 있을 뿐 김구에 대한 언급은 사라졌다. 이후 북한의 선전물에서는 남한 우익세력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판을 자제하면서 단독선거와 유엔위원단 반대로 중심이 옮겨갔다. 북한은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안에 대해 공식적인 답변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3월 7〜9일 사이에 이들과의 제휴를 구체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 평양 을밀대 앞에 선 김구와 김규식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해 평양 을밀대 앞에 선 김구와 김규식

북조선측에서 김구·김규식 등 남한 민족주의자들과의 제휴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은 김구가 이승만과 결별하는 과정과 함께 이후의 김구 행적을 예의 주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김구·김규식의 2월 16일 김일성·김두봉에 대한 서신과 함께 남북협상 제안을 받고 북조선측은 임해, 성시백 등을 남에 파견해 이들의 제안이 가진 진정성을 확인하였다. 이와 함께 3월 초 김구의 행적도 북측에는 긍정적이었다. 3월 1일 경교장에서 있은 3.1절 기념식에서 김구는 남한 단선 불참, 이승만과의 제휴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확고히 피력하였고, 3월 2일 김구는 김규식·홍명희와 회동, 남한 총선에 대한 행동통일을 모색하였다. 또한 김구는 3월 7일에는 이승만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남한 극우진영이 유엔한국위원단과 협의하기 위해 구성한 민족대표단 참가를 거부하였다. 북조선은 김구·김규식·홍명희 등 남북협상을 요구하며 단선에 반대하는 남한 민족주의자들과 남한의 단선반대 동향을 파악하고, 과거의 반탁세력까지 포괄하는 남북정당·단체들의 연석회의 방침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주18)

북조선측이 내부적으로는 김구·김규식 등 우익민족주의 세력까지 포괄하는 정당·사회단체들의 회합을 확정했으면서도 공식적으로 남북연석회의를 제안하는 3월 25일까지는 공개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남한의 선거 일정과 관련이 있었다. 미군정은 유엔임시조선위원단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가결하기 전인 3월 1일 남한 단선을 5월 9일(이날은 개기일식이 있을 예정이고 일요일이라는 이유로 나중에 5월 10일로 변경)에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의견이 갈려 격론을 벌였던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3월 12일에야 찬성4, 반대2, 기권2로 남한단선을 결정했다. 남한 단선이 확정되자 비로소 북조선은 정당·사회단체대표자 회의와 남북요인회담을 포괄하는 남북연석회의를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이것은 남북연석회의를 통해 남한 단선의 ‘반민족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연석회의에 참석한 남한 대표들이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남한 단선에 참여할 수 없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주19)

그러나 더욱 중요한 요인은 북조선 내부 사정에 있었다. 남북연석회의 개최는 정부 수립 문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기 때문에 헌법초안을 채택할 인민회의 특별회의와 노동당 전당대회 일정과 연계해서 확정할 수밖에 없었다. 북로당 중앙상무위원회는 3월 15일에야 그동안 헌법초안 토의 등을 이유로 연기해왔던 2차 전당대회 날짜를 확정했다. 이날 헌법초안 승인을 위한 인민회의 특별회의를 4월 중으로 연기한다는 결정도 있었다. 또한 김구·김규식에 대한 답신도 3월 15일에 작성되었다. 김일성은 3월 12일 답신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두봉에게 “국가적 사업은 일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서두르는가?”라며 반문했는데, 충분한 준비가 끝난 뒤 남측 대표를 맞이함으로써 주도권을 쥐고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북조선은 헌법초안에 대한 북로당 내부 논의가 완료된 시점에서 당 대회 일정을 확정하고 연석회의를 검토하였으며, 연석회의의 공개 제안은 북한의 헌법초안에 대한 대책과 남한 선거 일정을 고려해 정했던 것이다. 더욱이 북조선측이 헌법초안 논의를 위한 인민회의 특별회의 날짜를 명확히 확정하지 않고 4월 중에 개최한다고 한 것은 연석회의 상황에 따라 이 일정을 조정하고자 했던 것이었다.(주20)

3월 25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북조선민전) 명의로 평양방송을 통해 「남조선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에 고함」을 발표, 남북연석회의를 공식 제안하였다. 북조선민전은 이와 함께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 투쟁하는 남북조선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4월 14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제안하는 서한을 남조선노동당, 한국독립당, 민주독립당 등 17개 주요 정당·사회단체 앞으로 각각 보냈다.(주21)

남북연석회의와 북조선 임시헌법 토의

1948년 4월 19일부터 5월 초까지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되었고, 그 사이 남한에서는 남로당의 2.7구국투쟁과 제주4.3항쟁 등 단선반대투쟁과 미군정·경찰·우익세력의 저지 노력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유혈사태를 야기했다. 북조선은 연석회의 개최 결정 후 헌법초안 토의를 미루고 단정수립 반대 및 통일정부 수립에 집중했으나 독자적인 정부수립 계획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이 무렵 북조선 내에서는 통일정부 수립과 독자적인 정부 수립이라는 두 가지 흐름이 교차되어 진행되고 있었다.

남북연석회의 개막일인 4월 19일 소련측 핵심인물들인 말리크, 스티코프, 둔킨은 소련 외상 말리크에게 보낸 공동서신에서 ‘남한에서 5월 10일로 예정된 선거를 실시하고 남한 단독정부를 구성한 이후에 북한지역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초안을 실시하고 최고인민회의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내각 형태로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석회의 개최 전에 이미 소련측은 남한에서 선거가 실시되고 나면 북한에서도 헌법의 실시, 최고인민회의 선거, 정부 수립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북연석회의 개최(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개최(1948년 4월)

북조선측이 정부 수립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문제는 이 정부가 남한의 단선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점이 부각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남북연석회의의 성공적인 진행이 필요했고, 이 성공이 북조선측의 계획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남북연석회의는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남북제정당사회단체가 모인 대규모 연석회의와 4월 26일에서 30일 사이에 열린 남북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등의 소규모 연석회의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소련측과 북조선 지도부는 자신들이 추진하는 정부수립에 김구와 김규식이 참여한다면 정통성 있는 정부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 북조선 지도부는 김구와 김규식이 대규모 연석회의에 적극 참여하기를 기대하고 요청했다.(주22)

그러나 김구는 연석회의 주석단에 포함되어 축사를 했지만 북한의 희망과 달리 남한측 대표로 보고를 하는데는 동의하지 않았다. 김규식은 아예 병을 핑계로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김구·김규식은 그동안 모스크바 결정과 관련한 정세와 활동에 대해서도 이견을 보였고, 북조선 주장과 달리 소련 또한 동일한 외세로 인식하였다. 남한 단독정부와 마찬가지로 북조선의 정부수립 또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인식하였다. 김구·김규식은 북측의 프로그램에 따라 진행되는 대규모 연석회의보다는 정치지도자들간의 긴밀한 대화와 토론이 가능한 4김회담과 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 등 소규모 연석회의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이같은 견해차로 인해 대규모 연석회의에서 「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를 채택하면서 남한의 5.10단정 반대투쟁에는 합의했으나 통일정부 수립 문제는 이후의 소규모 연석회의의 논의 과제로 미루었다.(주23)

그런데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대규모 연석회의가 진행중이던 4월 22일 그동안 연기해왔던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를 4월 28〜29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는 소규모 연석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임시헌법초안을 토의하고 4월 29일 헌법제정위원회에서 작성한 조선헌법 수정초안을 원안대로 ‘찬동’한다는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다만 북조선인민회의가 ‘전조선’ 헌법을 채택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비준’ 또는 ‘채택’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북조선은 ‘인민공화국’이라는 또 다른 단독정부를 수립하려 한다는 남한측의 선전에 대응하는 한편, 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한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주24)

북조선 헌법초안은 인민위원회를 국가권력의 기초로 하는 인민적 국가형태와 인민주권 형식을 담고 있었고, 경제구성에서 국가소유, 협동단체의 소유, 개인소유를 모두 인정하는 ‘인민민주주의’ 성격으로 되어 있었다. 북조선 헌법초안은 소련 헌법의 영향을 받았으나 2차 대전 후 동유럽과 동북아시아에서 일반화하고 있던 ‘인민민주주의’ 국가 건설의 틀을 수용하였다. 그러면서도 남북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주25)

전반적으로 사회주의적 성격보다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인민민주주의혁명) 수행이라는 목표에 어울리는 내용이었고, 자본주의적 요소도 일정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개인소유와 상속권, 중소산업과 상공업의 자유 경영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었다. 대한민국의 초대헌법 내용과 비교해도 많은 부분 서로 근접하는 부분이 있었다. 권력 형태와 권력구조 등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경제체제에서는 중요산업 국유화 등 남북한 공히 사회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북조선 토지개혁에서 한도가 5정보였던 토지소유도 5정보 또는 20정보까지 최대한도를 설정했는데 이는 향후 남한의 토지개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헌법초안에서는 국기와 관련해 태극기 대신 신국기(인공기)를 채택하였다. 김두봉은 신국기 제정 이유로 태극기는 그 유래가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이어서 새로이 건립될 민주국가의 성격에 맞지 않으므로 새 민주국가의 성격에 맞는 국기를 새로 채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주26) 이로써 북조선 헌법초안은 향후 설치하게 될 최고인민회의의 형식적 ‘채택’ 절차만 남겨놓은 상태가 되었고, 북조선 또한 단독정부 수립에 한 걸음 다가가고 있었다.(주27)

1948.7.8. 북조선인민회의 5차 회의에서 애국가와 태극기 폐지하고 인공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기)를 채택했다.
1948.7.8. 북조선인민회의 5차 회의에서 애국가와 태극기 폐지하고 인공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기)를 채택했다.

2차 남북지도자협의회와 북조선 단독정부 수립 결정

1차 남북연석회의는 북측 입장에서 보면 성공적이었다. 북조선은 남북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치밀하게 준비하여 용의주도하게 진행하였다. 또한 남북연석회의를 통해 미소 양군 철수와 단선단정 반대 목소리를 한껏 높일 수 있었고, 남한에서 단선이 끝난 뒤 추진하게 될 북조선 정부 수립의 명분과 정당성도 많은 부분 확보할 수 있었다. 남북연석회의 후 남한 대표로 참석했던 이들 중에서 홍명희, 백남운, 이극로, 이영, 이용(신진당 대표), 김일성(민주한독당 대표), 장권(사회민주당 대표) 등을 비롯한 70여명의 대표들이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았다. 이들은 남북한 정권 수립을 앞두고 최종적으로 북조선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들의 북조선 잔류는 북측의 정당성과 명분 확보에도 도움이 되었는데 특히 홍명희나 이극로를 북조선에서 확보하게 된 것은 큰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북측과는 관점이 다르지만, 김구와 김규식도 서울로 돌아온 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면서 통일운동의 출발점으로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미군정과 이승만·한민당의 주장을 일축했다. 그들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해서 싸워나갈 의지를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그러나 남로당 등의 강력한 단선반대투쟁과 남북연석회의에서 5.10선거에 대한 보이콧 공동투쟁 결의 등에도 불구하고 남한 선거는 예정대로 치러졌다. 제주지역 2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연기되어 1년 뒤에 치러졌지만 나머지는 유혈사태 속에서도 애초 예상과 달리 비교적 성공적으로 선거가 끝났다. 이로써 남한 단독선거가 기정사실로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북조선의 단독정부 수립도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 국토 분단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연석회의를 통해 ‘내란을 피하고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한다’는 합의는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남북에 두 개의 정부 수립과 함께 대결이 격화하면서 분단이 고정화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전쟁이라는 위험한 방법을 선택하려는 요구가 강하게 분출했던 것이다.

남한에서 5.10선거가 끝나고 초대국회가 소집되어 헌법과 법률을 제정하고, 초대 내각 구성 등 정부수립 절차에 들어가자 북조선도 본격적인 독자정부 수립에 나섰다. 6월 2일 북로당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조선)헌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통일적인 입법기구를 세우기 위한 총선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6월 3일에는 남한민전 대표들도 함께한 가운데 북조선민전 확대중앙위원회 회의를 개최, 북로당의 방침에 따라 제2차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2차 남북지도자협의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2차 남북지도자협의회는 6월 29일부터 7월 5일에 걸쳐 남과 북의 32개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주28)

북조선민전은 6월 5일 김구와 김규식, 여운홍(사회민주당), 장건상(근로인민당), 유림(독립노농당), 김창숙(유림계) 등에게 2차 남북지도자협의회 참석을 요청하는 초청장을 보냈으나 1차 회의 때와는 상황이 달라져 김구와 김규식 등이 북행길에 오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규와 김규식은 “지금은 상황이 변해 갈 수 없으니 이와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홍명희를 서울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홍명희는 두 사람의 편지를 보고 서울로 오겠다는 입장을 피력했으나 북조선 지도부가 강력히 만류했다. 홍명희가 서울에 갈 경우 미군정과 이승만, 우익들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6월 20일경 북조선 지도부는 재차 김구·김규식에게 “통일입법기구 구성을 위한 선거문제를 토의하고자 하니 두 분 선생님도 여기에 적극 호응해 주기를 요망한다”는 내용의 2차 서신을 보냈다. 이에 두 사람은 “국토양단과 민족분열을 막자고 4월에 평양 회담을 가졌고 앞으로도 계속 통일을 모색하자고 약속해놓고, 이제 와서 남한에서 단정이 수립되니 북조선에서도 단정을 수립하겠다는 것은 민족 분열행위가 아닌가”라는 항의조의 답신을 보냈다.(주29)

이렇게 해서 제2차 남북지도자협의회는 김구·김규식이 불참한 가운데 북쪽에서 북로당 등 15개 정당·사회단체 대표와 남쪽에서 연석회의 때 잔류하거나 비밀리에 38선을 넘은 17개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참석해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평양(애초 김구·김규식의 북행을 고려해 해주로 계획했으나 참가 인원이 적어 평양으로 바뀜)에서 개최되었다. 남측에서는 남로당과 근로인민당 등 5개 중도좌파 정당 등 좌파가 다수를 차지했고, 중도우파는 민주독립당(홍명희), 근로대중당(강순), 건민회(이극로)밖에 참여하지 못했다.(주30)

2차 남북지도자협의회는 북로당이 짜놓은 수순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김일성은 6월 29일 정세보고에서 “지체없이 조선 인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전조선 최고입법기관을 수립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실시하자”고 강조했으며, 다른 대표들도 유사한 내용으로 연설했다. 2차 협의회의 의제였던 「남조선 단독선거 실시와 관련한 정치 정세와 조국통일 위한 장래 투쟁대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헌법과 입법기관 선거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다. 7월 5일 남북지도자협의회는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남북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결정서」와 「최고인민회의 선거 절차에 관한 합의서」 등을 채택했다. 결국 2차 남북지도자협의회는 북조선 정부수립을 위한 명분 쌓기에 불과했던 것이다.(주31)

남북연석회의 모습. 1차 남북연석회의와 달리 2차 남북지도자협의회 북조선 정권 수립을 위한 명분 쌓기 절차에 불과했다.
남북연석회의 모습. 1차 남북연석회의와 달리 2차 남북지도자협의회 북조선 정권 수립을 위한 명분 쌓기 절차에 불과했다.

7월 9〜10일부터 북조선인민회의는 제5차 회의를 열고 북조선공화국 수립 일정과 방법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회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8월 25일에 실시하기로 하고 대의원 선거규정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조직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통일입법기구를 내세웠던 만큼 북조선인민회는 선거를 북한 지역만이 아니라 남한 지역에서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7월 12일 북조선민전과 북로당 중앙위원회는 인민회의 결의 사항을 확인하였고, 이로써 북조선과 남한좌익세력은 인민대표 선거체제로 돌입하였다.(주32)

7월 19일 김구·김규식은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북조선의 움직임에 대해 비판하였다. 두 사람은 “2차 회의는 일방의 독단일 뿐 아니라 그 참가단체로 보더라도 제1차 협상에 남한을 대표해 참가한 정당·사회단체 31개 비하여 미미하다”면서 “북조선은 민의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서 인민회의를 통해 일방적으로 결정한 헌법에 따라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국기까지 바꿨다”고 비판하였다. 이는 “시기와 지역과 수단·방법에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반조각 국토 위에 국가를 세우려는 의도는 마찬가지”라면서 “이로부터 남북은 상호 경쟁적으로 국토를 분열해 동족상잔의 길로 나갈 것”이라고 비판한 뒤, “이에 우리는 진정한 애국동포와 더불어 민주적 자주통일의 국가를 건립하려는 그 노선을 더욱 굳게 지켜 최후까지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주33)

이 성명이 나오기 전인 7월 4일 김일성·김두봉은 김구와 김규식에게 서신을 보내 북한의 입장을 밝힌 바 있었다. 그 서신의 요지는 “4월 30일의 공동성명은 정당한 것이었으나 현시점에서는 맞지 않으며, 북조선에서도 즉시 중앙정부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북측의 단독정부 강행에도 불구하고 김구와 김규식은 남과 북의 정권 수립을 모두 단독정부로 규정하고 통일정부를 위한 통일운동에 적극 매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내각 구성과 정부 수립

북조선 지역에서는 8월 25일 정권 수립을 위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북조선에서는 212개 선거구에 227명이 입후보자로 등록했다. 북조선민전 후보자 외에 일부 선거구에서 복수 후보가 나왔던 것이다. 물론 선거 방식은 흑백함 찬반투표였다. 선거 결과 전체 유권자 452만6,065명 중 99.97%인 452만4,942명이 투표를 했으며, 민전 후보에 대한 찬성률은 98.4%였다. 북한지역을 대표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212명이 선출되었다.

1948.8.25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1948.8.25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이와 함께 남한지역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가 8월 21〜26일 해주에서 개최되었다. 해주 대회에는 7월 중순부터 비밀선거를 통해 선출된 1,080명의 남한 대표가 참석했으며, 그 중에서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남한지역 인민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은 철저하게 비밀선거로 치러졌는데, 남로당은 이 선거에서 남한 전체 유권자의 77.52%인 673만2,407명이 투표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한지역 투표는 대부분 개별 방문과 서명 날인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졌고, 당원들이 간접 날인한 경우도 많아서 남로당의 이런 주장은 다분히 과장된 것이었다. 남한의 비밀투표는 남로당이 주도했는데, 남로당의 정치군사간부 양성소인 강동정치학원생들이 행동대원으로 동원되었고 강압적으로 날인을 요구하는 등 비밀선거가 가진 많은 맹점과 한계를 노정하기도 했다.(주34)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끝난 뒤 북조선 정부 수립 절차에 들어갔다. 9월 2〜10일에 걸쳐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의 주요 안건은 최고인민회의 의장단 구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채택, 내각 구성, 정부 정강 결정 등이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북조선의 권력구조를 결정하는 최고인민회의 의장단과 내각 구성이었다. 최고인민회의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심의, 채택하고 이 헌법을 “전조선 지역에서 실시한다”고 선언하였으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도 구성하였다. 이어 9월 9일에는 내각 구성, 최고재판소 선거, 검사총장 임명 등의 국기기관 조직을 완료함으로써 북조선 정권이 수립되었다. 9일간의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는 9월 10일 정권 수립을 축하하는 경축 연회로 마무리되었다.(주35)

당시 북조선에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세력,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 허가이를 중심으로 한 소련계, 김두봉·무정 등을 중심으로 한 연안 독립동맹·조선의용군 세력,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조선민주당, 천도교 청우당, 남에서 올라간 군소정당 세력 등이 난립하고 있어서 권력 배분을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이 전개되었다. 이 때문에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내각 등은 거국정부 형태로 구성되었지만, 권력지분 중 가장 큰 몫은 북로당과 남로당이 차지했다. 내부적으로 줄다리기를 한 끝에 내각은 북로당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대신, 최고인민회의 의장단과 상임위원회는 남로당과 남한 출신들에게 많이 할애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최고인민회의 의장에는 허헌(남로당), 부의장에는 김달현(청우당)과 이영(남로당)이 각각 선출되었다. 상임위원회 위원장에는 김두봉(북로당, 연안계), 부위원장에 홍남표(남로당)·홍기주(북로당), 서기장에 강량욱(조선민주당)이 선출되었다. 상임위원으로는 강진건(북로당), 성주식(인민공화당), 구재수(남로당), 이구훈(전농), 박정애(북로당), 김창순(기독교민주연맹), 장순명(북로당), 장권(사회민주당), 유영준(남조선민주여성동맹), 박윤길(북조선청우당), 나승규(민중동맹), 최경덕(북조선민청), 이농종(민주한독당), 김병제(남조선청우당), 이기영(조소문화협회), 강순(근로대중당), 조운(조선문학가동맹) 등이 선출되어 남한 출신들이 다수를 이루었다.(주36)

북한 정권 초대 내각. 1열 좌부터 정준택, 김책, 홍명희, 김일성, 박헌영, 최용건, 허정숙. 2열 리영남, 김원봉, 백남운, 주영하, 장시우, 최창익, 박일우. 제3열 박문규, 리극노, 리용, 김정주, 리승엽, 최성택.
북한 정권 초대 내각. 1열 좌부터 정준택, 김책, 홍명희, 김일성, 박헌영, 최용건, 허정숙. 2열 리영남, 김원봉, 백남운, 주영하, 장시우, 최창익, 박일우. 제3열 박문규, 리극노, 리용, 김정주, 리승엽, 최성택.

내각의 경우 수상에는 김일성이 일찍부터 결정되었고, 부수상에 박헌영·홍명희·김책이 선정되었다. 박헌영은 외무상을 겸임했고, 김책은 산업산을 겸임해 실세임을 보여주었다. 내각의 70%는 남북노동당이 차지했는데 힘있는 부서는 북로당이 잡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거국내각의 행태를 띠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김일성과 북로당이 장악한 상태였다. 권력은 크게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계열과 박헌영의 남로당, 김두봉의 연안계로 나뉘었는데, 그 중에서도 김일성이 권력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한편, 당시 권력의 한축을 담당했던 허가이의 소련계는 내각에서는 부상에 일부가 참여하는 정도였지만 당과 군대에서는 요직을 차지했다.(주37)

북조선 정부 수립으로 남과 북에는 두 개의 정부가 세워졌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두 자신이 정통성 있는 정부라고 주장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모두 분단정부, 단독정부였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정부가 출범함으로써 해방정국의 치열했던 국가 건설의 과제는 일차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통일된 정부를 세우지 못함으로써 두 개의 분단정부는 자신의 정통성과 통일에서의 주도권을 위해 심각한 대립과 경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남과 북에 정부 형태의 권력구조가 들어서기 전부터 좌우의 이념대립과 갈등은 이미 심각한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에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진 상태에서 전개되는 갈등과 투쟁의 양상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국가 대 국가의 투쟁으로 이는 사실상 전쟁 상태를 의미했다.

북한 초대 내각 구성
북한 초대 내각 구성

 

북한 초대 내각 구성
북한 초대 내각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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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Ⅰ』, 선인, 2003, 568쪽. 인민군 기원과 관련된 연구 자료에 전쟁기념사업회, 『한국전쟁사1』, 1990; 장준익, 『북한인민군대사』, 한국발전연구원, 1991; 일본육전사연구보급회 편, 『한국전쟁1』, 육군본부, 1987; 최완규, 「조선인민군의 형성과 발전」, 『북한체제의 수립과정: 1945〜1948』, 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 1991; 최태환, 「6.25전쟁 발발의 실상을 밝힌다: 팔로군 출신 방호산사단 정치보위부 최태환의 증언」, 『역사비평』 1988년 가을호; 중앙일보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중앙일보사, 1993; 주영복, 『내가 겪은 조선전쟁』, 고려원, 1990 등이 있다.

2) 김광운, 위의 책, 474〜477쪽; 박경순, 『현대 조선의 탄생』, 내일을여는책, 2020, 248〜257쪽

3) 서동만, 『북한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선인, 2005, 251〜252쪽; 김광운, 위의 책, 572쪽

4) 김광운, 위의 책, 477〜479쪽; 서동만, 위의 책, 253쪽

5) 김광운, 위의 책, 575〜576쪽

6) 김광운, 위의 책, 577쪽

7) 김명호, 북-중 교류 60년 (8) 북한이 준 총 10만 자루...중공은 각목을 버리고 환호했다, 한겨레 2014.4.14.; 김명호, 북-중 교류 60년(10) 중공 ‘후방’ 자처한 북한, 한겨레 2014.7.21.; 김명호, 북-중 교류 60년(12) 승전보 접한 마오쩌둥 “김일성은 일국 지도자...예의 갖춰라”, 한겨레 2014.8.4.

8) 이종석, 『북한-중국 관계 1945〜2000』, 중심, 2000, 113쪽

9) 서동만, 위의 책, 255〜256쪽

10) 김광운, 위의 책, 582쪽

11) 김광운, 위의 책, 581〜582쪽

12) 서동만, 위의 책, 257〜258쪽; 김광운, 위의 책, 582〜583쪽

13) 김광운, 위의 책, 583〜584쪽

14) 김광운, 위의 책, 584쪽 재인용

15) 서동만, 위의 책, 262〜268쪽; 박경순, 위의 책, 265〜269쪽

16) 강영주, 홍명희와 남북연석회의, 역사비평 1998년 5월, 72쪽

17) 윤경섭, 1947〜1948년 북한의 정부수립 문제와 남북연석회의, 『사림』 제21호(수선사학회, 2004), 44쪽

18) 윤경섭, 위의 글, 45〜46쪽

19) 서중석, “좌우합작과 남북협상”, 『한국사 시민강좌 12』, 일조각, 1993, 81〜82쪽

20) 윤경섭, 위의 글, 46〜47쪽

21) 연석회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임영태, 남북연석회의 (1) (2), 통일뉴스 2021.8.30./9.6 참조

22) 윤경섭, 위의 글, 48〜53쪽

23) 서중석, 『남북협상-김구 김규식의 길』, 한울, 2000, 203〜210쪽

24) 중앙일보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

25) 김성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한국사 52』, 국사편찬위원회, 2002, 462쪽

26) 안성규, 인공기는 어떠한 과정으로 만들어졌나, 역사비평 1992년 가을호, 319쪽

27) 정해구, 남북한 분단정권 수립 과정 연구, 고려대 박사논문, 1995, 174〜176쪽

28) 정해구, 위의 논문, 211쪽

29) 중앙일보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369〜370쪽

30)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304쪽

31) 중앙일보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371쪽

32) 중앙일보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372쪽

33) 중앙일보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373쪽

34) 중앙일보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374〜379쪽

35) 임영태, 『북한50년사 1』, 들녘, 1999, 198쪽

36) 정해구, 위의 논문, 219〜220쪽

37) 임영태, 위의 책, 199〜200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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