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반세기 가까이 지났는데도 신돌석씨는 기옥이 누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환갑이 훨씬 넘어서 지공거사가 되었을 텐데 여전히 통통하면서 귀여운 인상이었다. 지금도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죽 그런 것인지 도중에 바뀌었다가 다시 단발머리를 한 것인지는 물론 알 수 없었다. 80년에 유행했던 조용필의 노래 ‘단발머리’를 들으면 기옥이 누나가 떠오른 적이 있었다. 군대 가기 전후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기옥이 누나를 짝사랑했다거나 그런 것은 분명히 아닐 텐데 그 노래를 들으면 떠올랐다. 몇 년 전에는 택시운전사에서 그 노래가 나왔다. 80년의 봄과 여름이 생각났다. 그때도 기옥이 누나를 떠올렸는지는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아주 오랜만에 만난 기옥이 누나는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고, 옛날처럼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먼저 와 있던 기옥이 누나가 신돌석씨가 카페에 들어서자 일어나서 맞았다. 돌석씨 너무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존댓말을 썼다. 신돌석씨는 갑자기 좀 당황스러웠다. 하긴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돼서 만나서 반말을 한다는 것도 우스우리라. 둘이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옥이 누나는 시장통에서 작은 식당을 했는데, 함께 하던 남편이 갑자기 쓰러져서 많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신돌석씨도 그 동안 있었던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했다. 자신이 긴급조치 관련되는 일을 잘 아는 사람과 안다는 것을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기옥이 누나는 아버지 일이 있기 전에는 자기 가족과 그런 일은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아버지가 고초를 당하신 뒤에는 일부러 그런 일은 피해 다녔다고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랬던 것이 후회스럽다고 하였다. 아버지와 같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가족 중에는 일찍부터 억울함을 호소하며 싸워온 사람들이 있단다. 인권단체나 종교단체라도 찾아갈 걸 그랬나 보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는 사람이 긴급조치가 위헌 판결을 받아서 형사보상금을 받았다는 것을 들었는데 그 사람도 역시 우연히 들어서 가톨릭 인권단체를 찾아가서 도움을 받았다고 했단다. 그러면서 알고 싶으면 직접 찾아가라는 말만 하더란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형과 만났을 때 그냥 이야기해 본 건데 이렇게 신돌석씨가 아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다행이라고 하였다.

기옥이 누나에게 들은 이야기는 대략 이랬다.

78년 여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아버지가 복덕방을 잠실로 옮겨서 했는데 누나는 거기 일을 도와주러 나갔다고 한다. 여상을 졸업하고, 3년 정도 중소기업 경리로 일하다 아버지 복덕방이 갑자기 잘 되면서 월급을 많이 줄 테니 와서 일하라고 해서 갔다고 한다. 당시는 한창 강남 개발 붐이 일 때인데, 잠실도 그에 버금가게 부동산 경기가 활활 타오를 때였다. 잠실로 옮긴 아버지 복덕방은 이름도 부동산으로 바꾸고, 이전처럼 노인네들이 모여서 화투 치고 장기 두는 곳이 아니라, 아주 세련된 회사처럼 변해 있었다. 당시에는 잠실 시영아파트, 잠실 주공아파트, 장미아파트 등이 지어져서 입주하기 시작했거나, 막 짓고 있는 상태였다. 시영아파트 부근에만 부동산이 다섯 개가 있었는데, 이전처럼 노인들이 하는 곳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이 하는 곳도 있었다. 아버지와 같이 하는 사람들은 이전 동네에서 할 때 함께 하던 세 명에 한 사람이 더 붙어서 모두 네 명이 동업하는 중이었다. 원래 하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아버지 고향 선배였고, 또 한 사람은 남쪽에 와서 만난 사람이었다. 새로 함께 하게 된 사람은 고향 선배가 데리고 온 사람이었는데 공무원 출신이어서 관청과 관련된 일을 맡아서 하곤 하였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돈 많은 투기꾼들, 복부인들이 들락날락거리면서 부동산 사무실은 한창 정신없을 때였는데, 어느 날 오후 서너 시 경에 갑자기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사무실에는 아버지와 또 한 사람의 동업자가 있었고, 기옥이 누나도 있었다. 고향 선배와 최근에 같이 하는 사람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요즘 같으면 체포영장이나 수색영장을 내밀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아니 당시에도 영장은 있었지만 으레 제시하지 않고 수사기관 마음대로 연행하고 압수수색하던 시대였다. 긴급조치라는 법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할 수 있는 조항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장 있냐고 물을 생각도 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긴급조치가 발동되기 이전부터 사람들은 수사기관에서 나와서 잡아가면 잡혀가고, 뒤지면 뒤지는가 보다 하는 식이었다. 특히 공안사건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랬다. 기관원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아버지와 또 한 사람에게 수갑을 채우고 차에 태워 가면서 남은 세 사람이 부동산 사무실을 뒤졌다. 기옥이 누나는 한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한참 뒤지던 사람들이 사장 어디 있냐고 물었다. 아버지의 고향 선배를 일컫는 것이었다. 동업인데 가장 연장자인 그 사람이 사장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당시는 공인중개사가 없기 때문에 아무나 부동산 업체를 차릴 수 있었는데, 다들 서로 사장이라고 불러주었지만 가장 돈을 많이 내고 이 방면에 전문성이나 경험도 어느 정도 갖춘 사람이 대표직을 맡았다. 아버지 고향 선배가 바로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이었다. 그는 남쪽에 내려와서 잠시 직장 생활을 하고는 이내 복덕방을 하기 시작했다. 잠실에 부동산 열풍이 일 것이니 그리로 복덕방을 옮기자고 한 것도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무엇 때문인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기관원들은 몇 시간을 압수수색을 하다가 사장 오면 바로 연락하라고 말하고는 갔다. 그런데 어디로 연락을 하라는 것인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장은 이미 다른 곳에서 연행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들이 가고 난 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사장이 갔을 만한 곳에 전화를 했는데 한 군데만 오전에 다녀갔다고 하고, 나머지는 모두 안 왔다고 하였다. 이미 연행되었으니 당연히 없을 것이었다. 어머니와 친척들에게 연락을 했다. 어머니가 달려왔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있을 수 없었다. 더욱이 이런 일을 당해 보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 일단 사무실 문을 닫고 집으로 갔다. 그날 어떻게 잠을 잤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에 더 크게 벌어졌다. 억지로 출근을 해서 사무실 문을 열었는데, 점심 때도 되기 전에 어제 왔던 사람들이 다시 왔다. 잠시 가자고 하더니 기옥이 누나를 연행해 갔다. 승용차 뒤에 태운 뒤 양쪽에 그들이 앉았다. 앞자리에도 운전자와 그 옆에 한 사람이 앉았다. 차를 타고 동네를 벗어나서 강변대로로 들어갔는데 거기서부터 눈을 가렸다. 눈가리개 밑으로 조금씩 보이는 곳으로 가늠을 해보았는데 강변대로에서 빠져 나와 삼각지 쪽으로 가는 것 같았다. 삼각지는 기옥이 누나가 학교 다니고 직장 다닐 때 버스 타고 지나던 곳이어서 익숙한 곳이었다. 그리고는 어디 쇠문 있는 곳 앞에 멈추더니 자기들끼리 어쩌구 하다가 기옥이 누나를 데리고 내렸다. 눈을 가리운 채 걸어서 어느 건물로 들어갔다. 어느 방에 들어가니 침대만이 놓여 있었다. 아마 숙직실인 듯하였다. 기옥이 누나는 거기 오니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침대가 방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어서 거기서 무얼 어떻게 할 것 같지가 않았다. 하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기를 데려다가 무엇을 하겠는가. 공연히 자기가 겁을 낸 것인가 하고 생각을 하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잘못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몸이 와들와들 떨리기도 하였다.

좁은 방에서 잠시 기다렸는데 두 사람이 들어오더니 눈가리개를 풀어 주었다. 두 사람 중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 사람이 종이 몇 장을 주며 부동산에 근무하면서 있었던 일, 특히 드나들었던 사람들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쓰라고 하였다. 기옥이 누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황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부동산에서 일하게 된 것도 1년이 넘었는데 어떻게 그 많은 일을 쓸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안 하겠다고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이어서 당부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덧붙였다. 아버지를 위해서 있는 그대로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지금 남의 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는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라서 여기서 벗어나려면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러면 그렇지 아버지가 조금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은 있지만 무슨 죄를 저지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의자에 앉아서 침대에 책받침을 놓고 그 위에 종이를 대고 쓰기 시작했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되는 대로 막 써서 다섯 장 정도 써서 주었더니 가지고 나갔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먼저 들어온 두 사람과 함께 나이가 좀더 많은 사람이 들어왔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이 에미나이래 뒈디려고 환장한 거 아이가. 썅놈의 새끼들아 이걸 진술서라고 받네? 이러고도 빨갱이 제대로 잡갔어?”

아버지한테서 잘 듣던 평안도 사투리였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기옥이 누나의 뺨을 후려갈겼다. 기옥이 누나는 그대로 침대로 자빠졌다.

“잘 들으라. 여긴 장난 노는 곳이 아니야. 니 애비 살리고프면 똑바로 해. 알갔어? 다시 써.”

그러면서 기옥이 누나가 쓴 종이를 집어던졌다. 기옥이 누나는 멍한 상태로 다시 종이와 펜을 받아들고 쓰기 시작했다. 헌데 무엇이 잘 못 된 것인지, 어떤 내용을 써야 하는 것인지 정말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을 다시 쓰고 쓰고 하다가 지하실로 데리고 내려갔다. 지하실에는 양쪽으로 방이 죽 있었는데 그 중 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니 옆방에서 소리가 들렸다. 흐느끼는 소리였다. 아버지였다. 살려달라고 하였다. 기옥이 누나가 잡혀 왔다는 걸 아는지 내 딸만 내보내 주면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하였다. 자존심이 강한 아버지가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들으면서 정말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다시 숙직실 같은 방에 돌아왔을 때 수사관한테 물었다. 자기가 무엇을 말하면 되는 거냐고 했다. 사장이 한 말을 그대로 하면 된다고 하였다. 사장이 정부를 비판하고 북한을 찬양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그런 질문을 듣자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사장은 입버릇처럼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한다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영구집권할 거라고 하였다. 7.4공동성명은 정말 잘 된 것이라면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런 말했다는 것은 말하지 않고 사장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진술서에 적었다. 수사관들이 흐뭇해하면서 가지고 갔는데, 이번에도 평안도 사투리 쓰는 그 자한테 퇴짜를 맞았는지 들어오자마자 기옥이 누나를 마구 두들겨 팼다. 그리고는 씩씩거리다가 다시 쓰라고 하면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더니 이번에는 인상착의를 말하면서 사장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냐고 물었다. 아닌 것 같은데 하도 채근을 해서 그렇다고 하였다.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해서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머리채를 휘어잡더니 패대기를 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또 7.4공동성명 이야기를 했더니, 이번에는 사장이 북한 방송을 듣지 않았냐고 하였다. 그런 일 없다고 하니까 또 구타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숙직실은 창문도 없어서 시간이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기옥이 누나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손수건을 꺼내 닦더니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나갔다.

“돌석아, 나 정말 잊고 살려고 했는데 진짜 못 잊겠어. 그놈들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나면 확 죽여 버리고 싶어. 하지만 이젠 아마 죽었든지 아니면 죽을 때 다 된 노인이 됐겠지. 어쨌든 국가한테 보상이라도 받아야 우리 아버지 한도 풀리고 내 한도 풀릴 것 같아서 이 일 하자는 거야.”

어느새 기옥이 누나는 신돌석씨를 돌석씨에서 돌석이라고 부르고, 존댓말도 반말로 변해 있었다. 그날인지 다음날인지 어쩌면 다음 다음 날인지 모를 날에 기옥이 누나는 그만 숙직실에서 옷에 소변을 보았다고 한다. 화장실에도 데려가지 않고 계속 쓰라고만 하니 결국 그렇게 되었단다. 그리고는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취조관들도 머쓱해 하더니 나갔다 와서 옷 갈아입으라고 여자 옷을 갖다 주더란다. 그리고는 무엇이 어찌됐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곧 풀려났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지금까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거기서 어디론가 또 옮겼다가 한 달쯤 지난 뒤에 그때 지은 지 얼마 안 된 성동구치소에서 보게 되었다. 구치소로 가기 전에 어느 경찰서에서 구치소로 갔다고 연락이 왔는데 어디인지는 지금 기억이 안 난다. 부동산이 있는 지역의 관할 경찰서인 모양인데 지금과 달리 그때는 그 지역에 경찰서도 없던 시절이라서 성동구쯤에 있는 경찰서인 것 같다. 그런데 아버지는 경찰서에는 있었던 적도 없다고 한다. 조사받던 곳에서 경찰서에 들러 잠시 서류를 작성하고는 곧바로 구치소로 갔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고 한다. 마치 경찰서에 있다가 구치소로 보낸 것처럼 하려고 하는 것으로 신돌석씨도 많이 들어본 이야기였다. 기옥이 누나와 아버지가 있었던 곳은 삼각지를 지나갔다고 하니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일 수도 있는데, 신돌석씨가 견학하고 온 구조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경찰서에서 따로 차린 곳일까? 당시에는 그런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 경찰서에서 여관 등을 빌려서 마치 안가인 것처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언젠가 어느 선배한테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갈월동 부근에 보안사 분실이 있었다고 한다. 주로 하는 일이 간첩 수사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간첩 조작도 심심치 않게 하였다. 거기서 간첩이 아니라는 게 너무나 분명해지면 서빙고로 보냈다고 한다. 신돌석씨한테 이야기한 그 선배도 거기서 엄청나게 고문을 당하고 서빙고로 갔다가 구치소로 옮겨졌다고 한다. 거기 들어갔을 때 첫마디가 200대만 맞고 시작하자고 하더니 매일 200대 이상을 때렸단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다. 기옥이 누나 아버지도 처음에는 사장을 수괴로 한 간첩단으로 조작하려다가 말이 너무 안 되니까 북한 방송 청취 정도로 하려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자 긴급조치 위반으로 넘겼다고 한다. 어느 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아무튼 그런 사실들이 정확히 밝혀져야 이후 형사보상이나 손해배상청구에 도움이 될 텐데 여러 가지로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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