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민주기지노선·북한혁명의 빛과 그림자

해방과 함께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을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면서 이남지역과 이북지역에는 전혀 다른 상황이 조성되었다. 해방 후 5개월가량 지난 1946년 초부터 남과 북의 상황은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3상회담을 두고 이남에서는 반탁과 3상회담 지지로 나뉘어 좌우익이 대결하면서 분열이 깊어졌고, 결국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을 거치면서 물리적 폭력을 동원한 전면 대결 양상으로 발전했다. 반면, 이북에서는 신탁통치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던 조만식이 소련군에 의해 연금, 제거되면서 좌익세력 중심으로 정국이 재편, 정비되었다.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하고, 3월 토지개혁이 전격적으로 추진되었으며, 이후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포함, 노동법령 제정 등 일련의 민주개혁이 급속히 추진되었다.

38이북에서 진행된 이 같은 급진적인 사회개혁은 ‘북조선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내포하고 있었는데 바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었던 것이다. 그 핵심내용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 잔재를 청산하고, 지주-소작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봉건적 토지제도를 개혁하며, 8시간 노동제, 남녀평등권 보장, 사회보장제 실시 등 인민대중의 민주적 권익을 보장하는 민주 법령의 제정과 사회적 제도의 정비 등이었다.

지주들은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에 수긍할 수 없었고, 조선민주당과 기독교 등 우익세력은 공산당의 권력 장악도 용납할 수 없었다.
지주들은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에 수긍할 수 없었고, 조선민주당과 기독교 등 우익세력은 공산당의 권력 장악도 용납할 수 없었다.

북조선 지도부와 소련군측이 이남을 제외하고 이북지역에서만이라도 임시인민위원회의 주도로 토지개혁과 제반 민주개혁을 급속히 추진한 것은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 대해 믿지 못한 것이 하나의 이유였다. 나아가 미국이 모스크바 결정을 수용,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전체 한국(조선)임시정부를 추진할 경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임시정부의 경우, 정권형태로는 인민위원회를 확고히 주장하고, 남과 북의 정당·사회단체의 비율을 1대 1로 동등하게 함으로써 남한에서 좌익세력이 확보하는 지분까지 포함해 우익보다 확고한 우위를 점하려고 했던 것이다.

북조선 지도부의 이 같은 정책 추진의 바탕에는 이른바 ‘민주기지노선’이 자리하고 있었다. 민주기지노선의 핵심은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정세가 조성된 상황에서, 혁명 정세가 유리한 북조선 지역에서 민주개혁을 통해 민주기지를 공고히 하고, 그를 바탕으로 혁명역량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간다는 것이었다. 민주기지노선은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결성 때부터 그 단초가 드러났지만, 실제 내용면에서는 항일빨치산 투쟁 과정에서 있었던 유격근거지의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민주기지노선은 해방 후 북조선 지역의 공산당 건설과 정권 수립, 군대 창설 등 당·정·군과 관련된 제반 문제에 대한 김일성과 항일빨치산세력의 핵심적인 정치·조직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정국의 변화 과정에 따라 크게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째단계는 1945년 12월까지 당 건설을 중심으로 진행하던 민주기지 건설의 잠행기, 둘째단계는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미국과 남한 반탁세력의 의심스런 태도로 그 실현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해 민주개혁을 추진하는 민주기지건설의 기초공사기, 셋째단계는 1948년 이후 1950년 전반기까지 조선인민군 창설, 인민경제 계획 수립 등을 통해 전국적 차원의 민주주의혁명 준비하는 정치·경제·문화·군사적인 차원의 민주기지를 확보하는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주1)

토지개혁 등 북조선공산당의 급진적 사회개혁에 반발해 월남한 우익세력들은 서북청년회를 조직, 좌익에 대한 테러 활동에 나섰다.(사진=위키피디어)
토지개혁 등 북조선공산당의 급진적 사회개혁에 반발해 월남한 우익세력들은 서북청년회를 조직, 좌익에 대한 테러 활동에 나섰다.(사진=위키피디어)

북한은 이처럼 3단계를 거쳐 1950년대 전반기에는 민주기지 건설이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까 북한이 주장하는 “전국적 범위에서 국토의 완정(해방·통일)”을 위한 6.25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전 민주기지가 완성된 셈이다. 이러한 민주기지 노선에 따라 북조선 사회의 혁명적 변화가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식민지시대 지배층이었던 지주와 친일예속자본가는 몰락했으며, 노동자·농민·근로인테리 등 근로대중이 새 시대의 주인으로 떠올랐다. 북조선에서 일어난 급진적인 사회변화는 근로대중에게는 희망이 되었지만, 구 지배층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때문에 토지개혁 과정에서 몰락한 많은 지주와 자산가 출신들이 공산당 통치에 분노하면서 이남으로 피신하는 길을 선택했다.

북조선(북한) 혁명으로 부를 수 있는 이북지역의 급진적인 사회 개혁과 변화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한 부분이었지만, 동구 인민민주주의혁명이나 중국의 신민주주의혁명과 비교해도 매우 급진적이었다. 북조선 혁명은 이것들에 훨씬 ‘빠르고 철저하게’ 진행된 측면이 있었다. 북조선 혁명이 이처럼 빠르고 급진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나라에 비해 저항이 훨씬 미미했던 점도 하나의 요소로 작용했다. 국공내전 후 진행된 중국의 토지개혁에 대한 중국 지주와 부농들의 저항과 비교해도 북조선 지주들과 우익의 저항은 미미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북조선에 남아서 저항한 것이 아니라 남한으로 탈출해 그곳에서 북조선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북조선에서 저항하기보다 이남으로 탈출해 그곳에서 근거지를 확보해 더욱 근본적인 저항, 공격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이남으로 가장 먼저 탈출한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 권력기관에 있었던 친일인사들이었다. 특히 경찰계통이 가장 먼저, 거의 대부분 넘어왔고, 이들은 이남에서 반공경찰의 선봉을 형성, 남한의 좌익과 진보세력, 북한을 공격하는 선봉이 되었다. 이어서 모스크바 3상회담 후 조선민주당과 우익기독교세력 등이, 토지개혁 후 지주와 자본가 등이 월남 대열에 합류했다. 이처럼 ‘반혁명 세력’이 북조선을 떠남으로써 이북에서는 급진적인 혁명이 큰 혼란 없이 매우 빠르게 전개될 수 있었다. 혁명이 철저할수록 반대자의 저항도 격렬한 법이다. 작용이 강하면 반작용도 그만큼 크다. 북조선 혁명에 대한 북한 내에서가 아니라 남한에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남과 북 사이의 폭력적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일종의 ‘북조선 혁명’의 그림자, 어둠이었다.(주2)

공산당·신민당 합당과 북조선노동당 출범

북조선공산당은 토지개혁 과정에서 당 조직을 정비, 확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토지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평안북도당의 3,272명을 선두로 전체적으로 9,058명의 당원이 신규로 가입했지만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5월 1일 메이데이를 계기로 당원의 확대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당원 확대를 위해서는 조직사업에서 ‘관문주의’적 경향과 당원교육을 소홀히 하는 경향을 퇴치해야 한다고 강조되었다. 빈농층을 적극 가입시켜 농촌 세포를 강화함과 동시에 도당별로 산만하게 되어 있는 하부 당조직 체계를 통일적으로 정비하였고, 각 도·시·군당에 일정한 재량권을 주면서도 간부 임면과 이동에 대해서는 반드시 상급당의 허락을 받도록 통제했다. 지방당 조직체계를 정비하고 간부 인사 통제를 통해 북조선공산당 중앙은 아직 남아있던 지방당의 독자성을 완전히 억누를 수 있었다. 이처럼 당조직 체계를 정비하고 간부 인사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당원 수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946년 4월 20일 현재 2만6천여 명에서 북조선노동당 창립 직전인 8월에는 27만6천 명으로 증가했다.(주3) 토지개혁 수 불과 4개월 사이에 당세가 10배 이상으로 확대되었고, 북조선분국은 1946년 4월경에는 ‘북조선공산당’이란 명칭을 사용,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에 대한 독자성을 분명히 했다.(주4)

북조선공산당은 조선신민당과 합당하기 전 이미 대중정당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조선신민당과의 합당은 이러한 북조선에서 대중정당으로 가속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 직전인 7월 22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위원회(북조선민전)가 결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위원은 정당, 사회단체의 대표 17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위원장은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일성, 민주당 당수 최용건, 신민당 위원장 김두봉, 천도교청우당 위원장 김달현이 윤번으로 맡았다. 각 도에서 군에 이르기까지 지부조직을 설치하여 도 조직은 7월 28일까지, 군 조직은 8월 5일까지 완료하도록 하였다. 북조선민전은 상무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고도의 중앙집권적 기구였던 임시인민위원회가 수행하기 어려웠던 각 당, 단체들과의 협의체 역할을 수행하는 전선조직으로서, “남조선 인민들에게 호소하여, 북조선과 같은 민주개혁을 급속히 수행하도록 노력하기 위하여서도” 필요하다고 했던 것처럼 대남 통일전선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서도 필요한 기구였다.(주5)

1945년 12월 중순 평양에 들어온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간부들의 기념촬영. 왼쪽부터 박효삼 독립동맹 중앙위원, 한빈 부주석, 최창익 부주석, 김두봉 주석, 무정 조선의용군 사령관. 둘째 줄 오른쪽 세 번째가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린 김명시다.(사진=나무위키)
1945년 12월 중순 평양에 들어온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간부들의 기념촬영. 왼쪽부터 박효삼 독립동맹 중앙위원, 한빈 부주석, 최창익 부주석, 김두봉 주석, 무정 조선의용군 사령관. 둘째 줄 오른쪽 세 번째가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린 김명시다.(사진=나무위키)

조선신민당은 통일전선적 성격의 진보적 독립운동단체였던 독립동맹이 1946년 2월 정당조직으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독립동맹 성원 중 일부는 이미 북조선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였으나 대부분은 해방 후 상황에 맞게 강령을 고쳐서 활동을 계속했다. 독립동맹은 부주석 한빈을 서울에 파견해 남한지역의 조직작업에도 착수했는데, 1946년 2월 5일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는 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를 결성했다. 2월 16일 독립동맹은 정당체계로 개편해 조선신민당으로 다시 태어났고, 서울의 경성특별위원회는 남조선신민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노동자와 빈민이 중심인 공산당과 달리 신민당은 지식인과 중농층을 비롯해 소자산계급이 주요 기반이었으나, 조직이 확대되면서 일제 강점기부터 받아온 반공교육의 영향으로 일부 노동자와 빈농들도 신민당에 가입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하부조직에서는 공산당과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다. 북조선에서는 공산당과 신민당의 통합을 통해 대중조직으로 확대, 개편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등장했다.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출범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주석단 모습. 왼쪽 두 번째부터 박정애, 김일성, 김두봉, 레베데프 소련군 소장.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출범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주석단 모습. 왼쪽 두 번째부터 박정애, 김일성, 김두봉, 레베데프 소련군 소장.

북조선민전 결성 다음날인 7월 22일 신민당의 김두봉 위원장은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일성에게 서신을 보내 합당 문제를 제기하였다. 7월 23일 신민당은 지도부 회의를 열어 토론 끝에 통합을 결정하고, 그 필요성을 제안하는 서한을 공산당에 보내기로 하였다. 7월 24일 북조선공산당이 신민당에 보내는 회신을 채택하였고, 이를 받아 신민당이 토의를 진행하였다. 7월 27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합당을 승인하고, 정당의 명칭을 북조선노동당으로 결정하였다. 7월 28〜30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을 통한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당원수는 공산당 27만6천명, 신민당 9만명, 합계 36만6천여명이었다. 양당은 당원수에 관계없이 당대표 비율을 1:1로 했는데 이에 대해 공산당 일부에서는 반발하기도 했다. 합당 절차는 면→군→도의 절차를 밟은 뒤 8월 28일 중앙에서 818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이뤄졌다.(주6)

당중앙위원은 43명이었는데 출신 경력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항일빨치산계(4명): 김일성, 김책, 안길, 김일
연안계(19명): 김두봉, 최창익, 김창만, 허정숙, 무정, 리춘암, 김려필, 박효삼, 윤공흠, 김민산, 박훈일, 박일우, 김교영, 명희조, 한빈, 임해, 리종익, 김월송, 김도준
소련계(8명): 허가이, 박창식, 김영태, 김렬, 김재욱, 한일무, 태성수, 전성화
국내계(10명): 주영하, 박정애, 장순명, 한설야, 최경덕, 강진건, 장시우, 오기섭, 리순근, 장종식
기타(2명): 정두현, 김욱진(주7)

상무위원으로는 김두봉, 김일성, 주영하, 허가이, 김책, 최창익, 태성수, 김교영, 박일우, 김창만, 박정애, 박효삼, 오기섭 등 13명이 선출되었다. 위원장에 김두봉, 부위원장에 김일성이 선출되었고, 조직부장 허가이, 간부부장 박일우, 선전선동부장 김창만, 농민부장 박창식, 문화인부장 한설야, 부녀사업부장 박정애, 청년사업부장 김영태, 총무부장 장지만, 재정부장 변동윤, 당기관지주필 태성수, 중앙당학교장 전성화 등이 선출되었다. 김일성은 형식상 부위원장이었지만 실제로는 최고지도자였다. 항일빨치산계 외에도 허정숙, 김창만, 박정애 등이 지지하고 있었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개혁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 주도하면서 대중지도자로 확실히 각인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주8)

1946년 8월 30일 북조선노동당 결성 후 고위 간부들의 기념 촬영. 앞줄 왼쪽에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 뒷줄 왼쪽에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 등이 있다.
1946년 8월 30일 북조선노동당 결성 후 고위 간부들의 기념 촬영. 앞줄 왼쪽에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 뒷줄 왼쪽에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 등이 있다.
북조선로동당 당원증(사진=위키백과)
북조선로동당 당원증(사진=위키백과)

북조선노동당의 결성으로 이북의 모든 좌익세력이 하나로 통합, 망라됨으로써 좌익의 정치적 지도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반면, 민주당이나 청우당 등은 점차 왜소화되어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사실상 노동당의 위성정당처럼 되고 말았다. 북조선노동당의 결성으로 김일성의 위상이 더욱 강화되었고, 서울의 조선공산당(후에 남조선노동당)과의 관계에서도 사실상 우위에 서게 되었다. 북조선노동당이 출범한 뒤 남한에서도 공산당과 인민당·신민당의 합당이 제안, 추진되었다.

여운형 등 남한 정치가들과의 교류 및 남한 정세 개입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등을 거치면서 이북에서 김일성의 지도력은 점차 강화되었다. 북조선 내의 개혁 작업도 속도를 내고 정치적 안정도 확보되면서 남북 공산당의 위상도 바뀌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힘 관계도 변화되었다. 이런 상황 변화와 함께 북조선이 남한 정치 상황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그것은 남한의 주요 정치지도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서 그들을 지원하고, 조언을 하거나 사람을 직접 파견해 활동하는 방식이었다.

김일성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이후 남한의 정치세력이 사분오열된 상황에서부터 인물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은 박헌영, 여운형, 허헌, 백남운, 홍명희, 이극로 등과 접촉하여 남한 정치 상황에 영향을 미쳤다.

박헌영과는 1945년 10월 8일 휴전선 근방 소련군 사무실에서 처음 만난 이래, 1945년 말부터 1946년 1월 초, 1946년 4월 초, 1946년 6월 말부터 7월 중순 사이, 1946년 7월 중순, 1946년 10월 11일경 등 월북 전까지 수차례 만났다. 이 과정에서 북조선분국 문제, 통일전선 문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과 활동 방향, 남한의 3당합당 문제, 좌우합작문제, 9월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문제 등 주요한 문제들을 거의 논의하였다. 박헌영과 김일성의 관계는 처음에는 박헌영이 당중앙의 지도자로서 우위에 있었으나 점차 역전되어 1946년 7월 이후는 김일성이 주도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주9)

박헌영 못지않게 평양을 여러 차례 방문해 김일성과 만난 인물은 여운형이다. 여운형은 1946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해주와 평양을 방문해 미소공동위원회와 민족통일전선 관련 문제를 논의한 것을 비롯해 총 다섯 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 김일성 등과 협의하였다. 여운형은 1946년 4월 19일〜25일 평양을 방문해 모스크바 협정에 따른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였고, 1946년 7월 31일 연천 군당사무실에서 김일성과 만나 좌익3당합당문제, 좌우합작문제, 미군정에 대한 대응전술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이때 김일성은 여운형의 생각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체로 지지의견을 보냈으며, 박헌영의 여운형 비판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다른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여운형은 1946년 9월 23일〜30일 사이에 방북해 난관에 봉착한 3당합당 문제와 남한의 장세 등을 논의하였으며, 1946년 12월 28일〜1947년 1월 8일 평양을 방문해 좌익진영의 단결과 중간좌익정당 결성, 정계복귀 문제 등을 논의하고, 좌우합작,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운동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다.(주10)

1948년 8월 황해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백남운, 허헌, 박헌영, 홍명희(왼쪽부터). 김일성은 1946년부터 이들 남쪽 인사들과 개별적인 접촉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48년 8월 황해 해주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백남운, 허헌, 박헌영, 홍명희(왼쪽부터). 김일성은 1946년부터 이들 남쪽 인사들과 개별적인 접촉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38년 여운형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3녀 원구, 부인 진씨, 장녀 난구, 4남 붕구, 2남 홍구, 몽양, 2녀 연구, 3남 영구.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 남한 내의 좌우합작과 더불어 남북합작을 일관되게 추진했던 여운형은 자신에 대한 테러가 심해지자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두 딸과 아들을 평양으로 보냈다. 여운형의 두 딸과 아들은 1947년 3월 평양으로 보내졌고,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은 이들이 4,5개월 동안 평양에 체류할 때 보살핀 뒤, 7월에 모스크바로 유학을 보냈다. 둘째 딸 여연구는 후에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선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서기장·부의장 등 요직을 지냈다. 1991년 11월 서울에 개최된 제2회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에 관한 토론회’에 북한측 단장으로 참석했을 때 우이동에 있는 아버지 여운형의 묘소를 참배했다.
1938년 여운형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3녀 원구, 부인 진씨, 장녀 난구, 4남 붕구, 2남 홍구, 몽양, 2녀 연구, 3남 영구.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 남한 내의 좌우합작과 더불어 남북합작을 일관되게 추진했던 여운형은 자신에 대한 테러가 심해지자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두 딸과 아들을 평양으로 보냈다. 여운형의 두 딸과 아들은 1947년 3월 평양으로 보내졌고,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은 이들이 4,5개월 동안 평양에 체류할 때 보살핀 뒤, 7월에 모스크바로 유학을 보냈다. 둘째 딸 여연구는 후에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선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서기장·부의장 등 요직을 지냈다. 1991년 11월 서울에 개최된 제2회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에 관한 토론회’에 북한측 단장으로 참석했을 때 우이동에 있는 아버지 여운형의 묘소를 참배했다.

백남운의 경우는 1946년 김광진이 김일성의 친서를 가지고 남한의 인재들을 월북시키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을 때 본격적으로 연계가 맺어졌다. 백남운은 이때 남한의 교원, 학자 등 수십 명을 추천하여 북한으로 보내는 일을 도와주었다. 김일성은 이후 남한 지식인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하면서 조선신민당남조선특별당부 위원장으로 백남운을 추천하였다. 조선신민당 부위원장이었던 최창익과 한민은 백남운을 반대했지만, 김일성은 임해를 서울로 파견해 박헌영이 고찬보와 성주식을 남조선신민당에 입당시켜 백남운을 밀어주도록 해 성공하였다. 결국 이 때문에 백남운과 최창익·한빈은 관계가 매우 나빠졌다고 한다. 백남운은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처음으로 김일성을 만났지만 보천보 전투 소식을 들은 후 깊은 흠모의 마음을 가졌다고 회고했다고 한다.(주11)

홍명희는 1945년 11월 서울에서 김일성·무정장군 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북조선으로부터 주목을 끌었다. 박헌영은 홍명희를 별로 평가하지 않았으나 그의 아들 홍기무는 공산주의자로 조선공산당의 핵심인물인 김삼룡과 연결된 김기환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김두봉, 김책, 주영하 등도 홍명희와 잘 아는 사이였다. 김일성이 직접 서울로 파견해 활동했던 성시백이 처음으로 서울에 파견되었을 때 접촉한 인물도 홍명희였다. 1946년 3월 초에는 김책과 주영하가 연명으로 쓴 편지를 한설야가 직접 홍명희에게 전달하기도 했는데, 북조선 지도부는 홍명희를 광범위한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문화계 인사로 평가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홍명희의 평양 방문을 성사시켜 중간파와 문화인들을 결집하는 구심으로 삼기 위해 노력하였다. 홍명희는 1947년 민족주의 성향의 중간파 정치인들을 모아 민주독립당을 창당할 때 성시백 등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주12)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를 주도하다가 투옥되어 해방과 함께 석방된 이극로의 경우는 김일성이 조직한 조국광복회와 관련이 있었다. 그는 정의부 출신으로 중국 선양(심양)에서 동아일보 지국장 및 기자로 활동하며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기록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쓴 최형우(본명 최일천)과 연계되었던 것이다. 김광진과 함께 평양에 갔던 김병제가 1946년 4월 중순 서울에서 이극로를 대동하고 평양을 방문했고, 이후 이극로는 한글학자 등 지식인들을 정치적으로 결집해 건민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북에 남았으며, 무임소상, 조국전선 의장, 조평통 위원장 등을 지냈다. 이준 열사의 아들로 중국에서 한인사회당과 고려의용군 등에 참여했던 이용은 1936년 말 김정숙 등 항일유격대 공작원과 연결되었고, 해방 후에는 북로당의 파견으로 서울로 와서 신진당 당수로 활약했으며, 남북연석회의 때 북한에 체류, 도시경영상, 사법상, 무임소상 등을 역임하였다. 그밖에도 항일유격대에 참가했다가 해방 후 남한에 파견되어 활동한 조동욱, 조국광복회 회원으로 한국전쟁 당시 전남도당위원장이었던 박영발, 조국광복회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있었던 박달·권영벽·이제순 등과 함께 있었던 경성콤그룹 사건의 이현상 등 많은 이들이 북한과 연계를 맺거나 교류, 협력하였다.(주13)

여운형, 홍명희, 이극로 등 많은 이들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이 과정에서 북조선과 연계를 맺거나 교류, 협력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을 두고 북조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정확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북조선은 이들을 공산당이 주도하는 통일전선을 위한 합작과 제휴의 대상으로 파악하지만, 이들은 독자적인 사고와 판단 아래 통일독립국가의 수립을 위해 활동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민족간부양성, 보통강 개수공사, 건국사상총동원운동, 인민위원회 선거

임시인민위원회 출범 후 시급하게 추진한 개혁 과제 중에는 교육제도의 개선과 교육내용의 변혁이 있었다. 임시인민위는 당면과정 가운데 교육제도의 민주주의적 개혁을 포함시켰다. 북조선은 유치반(1년 반, 만6세)-인민학교(5년)-중학교·기술학교(3년)-고급중학(3년)·전문학교(3〜4년)-대학(4〜5년)·교원대학(2년)-연구원(2년)으로 이어지는 교육체계를 정비하고, 성인들의 문맹퇴치를 위해 한글학교(4개월)를 개설하고, 성인학교(2년)-성인중학교(3년)-직장기술학교(3년)-직장전문(3년)-대학으로 이어지는 직장과 성인교육체계도 정비하였다. 이처럼 교육체계가 정비되면서 민족간부 양성 사업이 크게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북조선당국은 민족간부를 양성, 충원하여 정치지도체제를 정착시키고자 했는데, 구지식인들을 교양, 개조하는 것과 함께 노동자·농민 출신의 새로운 기술자, 전문가들을 대대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빠르게 새로운 민족간부들이 육성, 충원되었다.

1942년 북조선 지역에는 1,339개 소학교에서 63만명의 아동이 공부하였고, 43개 중학교에서 9.560명의 학생이 공부했다. 대학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해방 후 교육부문의 발전은 놀라웠다. 1946년 9월 평안남도 중등학교 이상 입학생의 사회성분을 조사한 결과, 혁명자 35명(0.6%), 노동자 1,120명(18.5%), 농민 3,680명(60.7%), 지주 55명(0.9%), 기타 1,176명(19.4%)였다. 해방 직전 평양고등보통학교 학생 917명과 평양의학전문학교 학생 313명 가운데 노동자와 빈농의 자제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평양서문여고 학생 647명 가운데 노동자의 딸 1명과 빈농의 딸 2명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처럼 교육에서도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주14)

브루스 커밍스가 6.25전쟁 시기 포로들로부터 나온 정보들을 분석한 것에 따르면, 많은 응답자들이 북한체제의 엄격한 통제는 싫어했지만, 응답자 대부분이 수백만 명에게 새로운 경력과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몇 년 안에 전체 인구의 교육수준을 높인 사회혁명을 칭찬했다고 한다. 커밍스는 북조선 주민들이 혁명적 변화를 통해 구체적인 사회적 지위 향상과 물질적 혜택, 삶의 만족을 얻었기 때문에 기꺼이 새로운 체제를 지지하였다고 평가했다.(주15)

교육체제의 정비와 함께 교과과정이 정비되었고,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향상하기 위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임시인민위원회와 항일유격대의 활동 역사, 조국광복회 활동 등이 포함되었으며, 애국주의 교양도 강화되었다. 인민과 학생들의 정치의식과 애국주의 교양을 위해 애국가와 인민군행진곡 등을 창작하도록 김일성은 작가들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한편, 북조선임시인위는 중요 산업의 국유화와 함께 이를 관리·운영할 기술자들을 충원하는데서 일제시기부터 기술능력을 갖고 있던 이들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정책을 썼다. 일제시기 지주나 관료출신 집안에서 태어나 높은 교육을 받고 기술자로 활동했던 이들을 기술간부로 재등용했던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로는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성진제강소 기사장 강영창을 비롯하여 안주탄광 기사 조진용, 흥남비료공장 기술자 문성수, 원산철도검차구 기술자 박종득, 광산전무가 정준택 등이 대표적이다. 북조선 지도부는 과학기술자들의 경우 계급투쟁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과거의 반성을 전제로 새로운 국가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방향에서 정책을 폈다.(주16)

북조선에서 1946년 이룬 자연개조 사업의 큰 성과로는 보통강 개수공사가 있다. 보통강은 여름 장마만 오면 주변으로 물이 넘쳐 주민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토지개혁이 끝난 뒤 김일성은 보통강 개수공사를 발기했고, 이 사업은 1946년 5월 21일 처음 시작되었다. 많은 이들이 3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보았던 이 공사는 공산당원들과 주민들의 밤낮 없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불과 55일 만에 완성, 더 이상 장마가 와도 물이 넘치지 않게 되었다. 보통강 개수공사는 북조선 주민들에게 새국가 건설에 대한 열의와 믿음을 주었고, 이후 더 큰 과업들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주17)

1946년 5월 평양시민들은 보통강 개수공사에 나서 자연개조 사업의 첫발을 디뎠다.(사진=통일뉴스)
1946년 5월 평양시민들은 보통강 개수공사에 나서 자연개조 사업의 첫발을 디뎠다.(사진=통일뉴스)

민주개혁을 통해 대중적인 지지기반을 확보한 임시인민위는 이 성과를 사상운동을 발전시켜 그 효과를 더욱 증폭시키고자 했다. 김일성은 1946년 11월 25일 사상개조사업의 필요성을 제기, “개인보다 공공생활과 전체 이익을 존중하며 국가재산을 애호하는 새로운 국민도덕을 세위기 위하여 투쟁할 것”을 주창했다. 북조선노동당은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을 통해 주민들의 식민지·봉건 잔재의식을 청산하고, 애국주의 사상과 집단적 사상의식,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으로 무장하도록 하였다.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은 전체 군중을 조직적으로 동원, 교양, 계몽하는 대중운동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북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가장 큰 어려움은 원료와 연료 및 식량의 부족이었다.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을 통해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이 제기되었고, 애국미헌납운동도 그러한 하나의 경우에 해당한다. 이 같은 운동을 통해 1946년 말까지 황해 3,576명, 평북 4,052명, 평남 7,523명, 강원 2,750명, 함남 610명, 함북 266명이 애국미헌납운동에 참가하여 식량문제 해결에 큰 보탬이 되었다.

북조선은 1946년 토지개혁과 제반 민주적 개혁조치,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을 등을 통해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46년 11월부터 1947년 2월까지 각급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1947년 2월 17일 도, 시, 군 인민위원회 대회를 개최, 2월 20일 북조선인민회의를 조직했으며, 2월 22일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남과 북의 정치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달라져 갔다.

쌀을 헌납하기 위해 소달구지에 싣고 가는 모습. 1946년 3월 북조선에서 토지개혁을 통해 땅을 받은 농민 김제원이 수확한 쌀 30가마니를 국가에 헌납한 것을 계기로 각지의 농민이 애국미헌납운동을 벌였다.
쌀을 헌납하기 위해 소달구지에 싣고 가는 모습. 1946년 3월 북조선에서 토지개혁을 통해 땅을 받은 농민 김제원이 수확한 쌀 30가마니를 국가에 헌납한 것을 계기로 각지의 농민이 애국미헌납운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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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한국현대사 1』, 풀빛, 1991, 178〜179쪽

2) 임영태, 『북한50년사1』, 들녘, 1999, 97〜102쪽

3) 1946년 5월 20일자 소련군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공산당원 수는 4만3천명, 신민당 1만5천명, 민주당 14만1천명, 청우당 98명이었다. 공산당이 민주당을 능가하기 위해서는 급속한 당세 확장이 필요했다. 토지개혁은 공산당의 대중화의 기점이 되었고, 신민당과의 합당은 이에 박차를 가하는 길이었다. 북조선공산당은 7월 10만명, 8월 16만명에서 8월 26일 북로당 창립직전 27만6천명으로, 7월부터 불과 두 달 사이 7.7배나 증가했으며, 8월에만 10만명이 신규 가입했던 것이다.(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 선인, 2005, 166쪽)

4)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 선인, 2005, 163〜165쪽

5) 서동만, 위의 책, 169〜170쪽

6)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Ⅰ』, 선인, 2003, 367쪽

7) 서동만, 위의 책, 178〜179쪽

8)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 역사비평사, 1995, 197〜198쪽

9) 박병엽 구술/유영구·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15〜104쪽

10) 박병엽 구술/유영구·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109〜241쪽; 쪽중앙일보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90〜184쪽;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370〜389쪽

11) 김광운, 앞의 책, 350쪽

12) 박병엽 구술/유영구·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268〜282쪽

13) 김광운, 앞의 책, 352〜354쪽

14) 김광운, 앞의 책, 319〜322쪽

15) 김광운, 앞의 책, 322〜323쪽

16) 김광운, 앞의 책, 329〜337쪽

17) 박경순, 『현대조선의 탄생』, 내일을여는책, 2020, 178〜182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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