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폭동인가, 인민항쟁인가

‘10월 항쟁’을 두고는 오랫동안 대구폭동, 10.1폭동, 영남폭동, 10.1소요, 영남소요, 추수폭동 등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미군정의 경우는 ‘소요’로, 우익은 ‘폭동’으로 좌익은 ‘항쟁’으로 표현했다. 한국전쟁 연구에 한 획을 긋는 업적을 남긴 브루스 커밍스 같은 경우는 ‘농민반란’, ‘추수봉기’ 등으로 설명했다.(주1) 이 밖에도 사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중립적인 성격의 ‘대구10.1사건’ ‘대구10월사건’ ‘영남10월사건’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2016년 8월 대구시 의회가 「대구시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면서 ‘10월 항쟁’이라고 공식화했다.(주2) 이로써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일어난 ‘10월 항쟁’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게 되었다. 과거 한때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지역 중 한곳이었으나 지금은 가장 보수적인 지역인 대구조차도 시대적 흐름을 역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10월 항쟁은 대단히 복합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 사건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커밍스가 보는 것처럼 농민만이 주체였던 것도 아니고 자연발생성의 측면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항쟁에는 농민뿐만 아니라 노동자, 학생, 지식인 등 다양한 계층과 계급이 함께 참여했다. 이처럼 소수의 사람들의 즉자적인 반항이 아니라 대규모 민중이 참여하는 거대한 항쟁이 가능했던 것은 일제시기의 민족해방운동과 해방직후의 인민위원회, 농민조합, 노동조합 등 변혁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10월 항쟁은 전국적인 조직성과 체계성을 지니고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경북지역의 군 차원에서는 그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좌익 인사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사건은 변혁운동세력의 조직성과 대중의 자연발생성이 혼재되어 나타났으며, 인민대중의 변혁적 열망과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인민(민중)항쟁’으로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주3)

10월 항쟁은 해방 직후 미군정 통치와 그 정책에 불만을 품은 민중과 좌익세력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시위와 봉기 등의 저항운동과 항쟁으로,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되어 10월 초까지 경북의 농촌지역 대부분으로 확산되었다. 미군정이 발 빠르게 대응하여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등 주변지역 군정경찰과 미전술군을 동원하고, 우익청년단이 지원부대로 합류, 압도적인 물리력을 바탕으로 대구·경북의 항쟁은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지만 12월까지 남한 전역에 그 여파가 이어졌을 정도로 충격이 엄청났다.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 지 1년 뒤 왜 이 같은 대규모 민중항쟁이 일어났던 것일까?

남한주둔군 사령관 하지(J. R. Hodge)는 10월 항쟁을 “남조선에 거주하지 않는 외부선동자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조선국가의 적인 선동자들이 동포들에게 범죄적 흉행(兇行)을 감행하는 파열적 폭동”으로 규정했다. 미군정은 공산주의자들과 북한·소련군의 배후조종으로 폭동화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승만은 “매국적 적들의 선동으로 살인, 방화, 강탈 등과 모든 비인도적 행동에 유도하여 전국적 대혼란을 일으켜 저의 조국에 우리 3천리 강토를 예속시키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이끌고 있던 중도우파의 대표적 인물인 김규식은 “국제적으로 조선 민족의 위신을 떨어뜨려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사회노동당과 좌우합작파는 양비론을 펴, “군정의 정책이 옳지 못한 데 인민항쟁의 원인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폭력 수단으로까지 나와서 혼란을 일으키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미군정과 극좌세력에 대해 동시에 책임을 물은 것으로써 중도파의 정치적 행보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조선공산당 내에서 박헌영의 간부파와 대립하고 있던 김철수, 서중석, 강진 등의 대회파는 10월 항쟁을 “대중으로부터 전위를 고립시키는 소아다운 선동”이라고 규정하면서 ‘조선공산당 간부파의 이립삼 노선적 과오’라고 혹평했다. 이는 공산당·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당을 둘러싸고 내부 갈등이 심화되면서 10월 항쟁을 주도한 박헌영의 간부파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드러낸 것이었다. 반면, 조선공산당의 주류이자 지도자였던 박헌영은 10월 항쟁에 대해 “인민의 생활이 악화되어 굶주림과 아사선상에 있는 가운데 미군정과 친일파 등 반동파의 무력강압정책은 인민들의 분개를 일으켰으며, 북조선의 민주개혁 실시는 커다란 정치적 영향을 주어, 대중적 여론과 평화적 요구의 방법이 당국으로부터 무시됨에 있어서야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인민들이 깨닫게 되어 반동공세에 대하여 대중투쟁이 반격의 방향으로 발전한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으로 규정했다.(주4)

당시 북한 주둔 소련군의 실세였던 스티코프가 남긴 비망록 『스티코프 일기』에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에 대한 언급이 있다. 스티코프는 9월 총파업과 관련해 ‘인민위원회로의 권력 이양’과 같은 요구조건을 배제할 것을 요구하였고, 또한 총파업이 폭동(10월 항쟁)으로 전화한 것과 관련해 무장대오가 북으로 넘어가 북한이 무장투쟁의 배후기지가 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소련군과 북한지도부는 남한의 정세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개입하고 충고하려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스티코프의 일기는 역설적으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조차도 10월 항쟁에서는 충분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지경이었으니, 북한 소련군이나 북한 지도부가 남한의 민중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주5)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과 관련해 김일성은 공산당 지도부가 급진적인 노선으로 미군정과 정면대결하는 것에는 반대했으나 대중의 자발적인 투쟁의지의 분출에 대해서는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10월 중순에 나눈 토론에서 ‘10월 항쟁’을 더 이상 확산시키지 않고 수습한 뒤 좌익3당의 합당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합의하였다.(주6)

대구 9월파업과 10월항쟁 참가자였던 이일재 선생이 2006년 10월항쟁 60주년 추모제에서 “폭동이 아니라 항쟁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사진=[평화뉴스] 2006. 10. 1)
대구 9월파업과 10월항쟁 참가자였던 이일재 선생이 2006년 10월항쟁 60주년 추모제에서 “폭동이 아니라 항쟁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사진=[평화뉴스] 2006. 10. 1)

친일경찰의 발호와 미군정 정책 실패가 주된 원인

당시 각 정치세력은 10월 항쟁을 보는 시각에는 차이가 컸지만 이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상당히 근접한 입장을 나타냈다. 정치세력에 따라 약간씩 강조점이 다르지만, 대체로 친일관리, 특히 친일경찰에 대한 불만과 미곡수집·쌀배급 등의 경제문제, 통일독립국가 건설의 지연 등에서 공통점을 보였다. 미군정 정책에 대한 민중의 불신이 강하며 그 가운데서도 친일경찰과 강제적인 미곡수집정책에 대해 강력한 불만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여러 정치세력의 주장과 함께 미군 정보자료, 학계의 연구 성과들을 종합하면 10월 항쟁의 원인은 대략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주7)

첫째, 좌익세력의 전술 변화와 미군정-대구·경북지역 사회세력의 관계 악화가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이후 미군정은 ‘조선정판사 사건’ 등을 빌미로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여운형 등 온건 중도좌파와의 좌우합작을 지원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폈다. 이에 박헌영이 주도하는 좌익내의 강경 세력은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미군정과 정면대결하는 ‘신전술’을 채택하였다. 당시 대구지역은 조직적 역량이 강했지만 운동노선 면에서는 유연한 편이었고 미군정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이 강경노선인 신전술을 채택함에 따라 박헌영계 ‘간부파’의 영향력이 강했던 대구지역에서는 미군정과의 대결구도가 강화되었고 9월 총파업을 계기로 미군정의 탄압이 강화되자 정면대결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둘째, 해방 후 식량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미군정의 가혹한 식량공출정책이 민심의 이반을 촉진시켰다. 미군정은 초기 자유곡가제에서 1946년 1월부터 공정가격제로 전환했다. 하지만 모리배에 의한 매점매석 등으로 곡가가 급상승하자 미군정은 ‘미곡수집령’을 발표하고 쌀의 강제수집정책을 실시하면서 춘궁기에 하곡까지 강제수집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여기에 5월에 콜레라가 창궐하고 6월에는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자 미군정 당국이 방역을 명분으로 아예 교통을 차단, 사람들의 이동을 봉쇄하면서 산간지방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하였으며, 다른 지역도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기아상태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군정은 양곡 수집을 더욱 강압적으로 밀어붙였다. 10월 항쟁 과정에서 경북지역에서 폭발적인 봉기와 함께 과격한 행동이 벌어지는 것은 이러한 미곡수집 과정에서 당한 농민들의 고통과 분노가 큰 영향을 미쳤다.

셋째, 해방 직후부터 대구․경북지역에는 30만 명에 이르는 가장 많은 귀환동포가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했는데도 미군정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고, 그 때문에 아사자가 발생하고 자살자가 늘어나며 실업과 범죄가 증가하는 등 사회적 불안과 불만이 증폭되었다. 농민들의 경우에는 농지개혁이 지연되면서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이 심해졌는데,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특히 논농사 지역인 영천 등에서 농민들의 불만이 커 봉기가 격렬하게 일어났다.

넷째, 친일경찰의 횡포와 지연되고 있는 통일독립국가의 가능성에 대한 불만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는데 일제 강점기부터 경찰에게 혹독하게 시달린 한국민들은 일제의 경찰이 고스란히 미군정 경찰이 되어 민중을 괴롭히는 역할을 계속하자 그에 대한 증오심을 10월 항쟁에서 폭발시켰다. 일제 말기 경상북도 경찰관 2,100명 가운데 873명이 한국인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미군정 경찰로 재기용되었다. 일제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미군정 경찰은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수사관행과 인권탄압으로 주민의 원성을 샀는데 특히 양곡수집 과정에서 악행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그 때문에 10월 항쟁 당시 경찰은 군중의 가장 주요한 공격대상이 되었다.

부산신문 1946.7.7.자 신문(자료=국립중앙도서관) 쌀 문제가 10월 인민항쟁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부산신문 1946.7.7.자 신문(자료=국립중앙도서관) 쌀 문제가 10월 인민항쟁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미군정청의 식량 포스터(1945-46년 제작)(자료=국사편찬위원회). 미군정의 미곡정책 실패가 10월 항쟁의 주요한 경제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미군정청의 식량 포스터(1945-46년 제작)(자료=국사편찬위원회). 미군정의 미곡정책 실패가 10월 항쟁의 주요한 경제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10월 인민항쟁은 이러한 요인을 바탕에 깔고 1946년 초부터 있었던 ‘기민(飢民) 시위’(주8)와 9월 총파업의 연장선상에서 발행한 사건이었다. 특히 9월 총파업은 10월 항쟁의 구체적인 계기를 제공했는데 좌익내부의 전술변화, 신전술의 채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민간인 학살의 출발점이 된 사건

미군정보(G-2) 보고에 따르면, 10월 항쟁으로 경북도에서 입은 총 피해액은 4억원, 경찰측 인명피해는 보안대(경찰보조원 및 마을 자경대원)를 포함해 사망 80명, 행방불명 및 납치가 145명, 부상이 96명이었다. G-2 보고서는 시위대의 피해에 대해서는 사망 48명, 부상 63명, 체포 1,503명으로 집계했다. 대부분 습격을 받은 관리나 우익인사를 나타냈던 민간인 사상자수는 사망 24명, 부상 41명, 납치 21명으로 집계했다. 미군정 보고 외에도 또 다른 자료들이 각기 다른 수치를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 <표>와 같다.

<표> 각종 자료에 제시된 대구10월사건 관련 민간인 피해규모

 

사망

부상

체포

비고

Thomas W. Herren papers

(G-2 Summay of Kyongsang)(주9)

88명

55명

33명

1946.12.1.현재

10.1사건대책위원회(주10)

73명

129명

 

1946.10.20.현재

G-2 보고서(주11)

48명

63명

 

 

조병옥의 경위보고서(주12)

17명

25명

635명

1946.10.2.현재

자료 출처: 경찰청과거사위 보고서(2006);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4, 112쪽

그러나 당시 사건 관련자들이 보복이 두려워 신고를 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 통계들은 정확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다. 특히 10월 항쟁 중에 동료들의 참극을 목격한 경찰과 우익청년들이 가혹한 앙갚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는데 그 숫자가 정확히 반영되지 않았다.

 

 

 

 

대구의 군중 시위 때 피살된 사람들(사진=미국국립문서보관소,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우선, 경찰의 보복은 주모자와 그 용의자들에 대한 대량검거선풍으로 나타났다. 대구에 계엄령이 내려진 10월 2일 밤부터 11월말 사이에 경북에서만 총 7,400명, 대구와 그 주변지역에서 2,250명의 좌익 정당 및 사회단체 간부, 학생, 노동자, 농민, 도시하층민, 부랑자들이 검거되었다. 이 중 6,580명은 1947년 1월말까지 석방되었는데 석방되기까지 경찰의 극심한 고문으로 초죽음이 되었다. 나머지 피검자 중 280명은 군사재판을 거쳐 형이 확정되었고 640여 명은 조사 중이거나 재판에 계류 중이었다.(주13)

10월 12일부터 대구경찰서에서 군정재판이 시작되었다. 일반군정재판의 경우 최고 형량이 징역 5년이었으므로 특별군정재판을 열어 최고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사형 선고는 경찰관 사상자를 많이 낸 화원, 하빈, 영천 사건 주동자들에게 내려졌다. 이들은 이듬해 6월까지 길고 지루한 재판 끝에 대부분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계엄포고령에 따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체포, 투옥되어 재판 등으로 처벌받은 사람보다도 경찰과 청년단 등에게 사적으로 보복을 당한 경우가 더 많았다. 경찰의 보복은 주모자나 적극 가담자 외에 이름 없는 민초들에게도 가해졌다. 고문경찰의 손에 농민 한 사람이 맞아죽는 일이 수도 없이 발생했지만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드러나지 않은 채 변사로 위장 처리된 고문사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이나 미군이 쏜 총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살상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주14)

1960년, 달성군 가창면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숨진 대구지구 희생자의 공동분묘 앞에서 상복 차림의 유가족들이 묘 표지를 세운 뒤 오열하고 있다.
1960년, 달성군 가창면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숨진 대구지구 희생자의 공동분묘 앞에서 상복 차림의 유가족들이 묘 표지를 세운 뒤 오열하고 있다.

시위군중의 폭력이 난무했던 칠곡군에서는 김우도 등 주민 11명이 토벌 나온 충남경찰부대에 의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대대병력으로 추정되는 경찰이 마을을 포위하며 들어오자 여성과 노약자는 집안에 숨고 남성들은 미처 마을을 벗어나지 못해 논으로 달려가 수확을 앞둔 논의 벼 사이에 숨었는데, 이때 경찰은 논을 포위하고 숨어있던 사람들에게 일어서면 살려준다고 명령한 뒤 사살했다. 경찰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일어서지 않았던 사람들은 살아남았다.(주15)

항쟁이 경북 도내의 군 지역으로 확산된 뒤 충남북과 강원도 등에서 경찰부대가 증원되었고, 이들은 토벌을 위해 수시로 마을에 들이닥쳐 젊은 남자들을 연행해 갔고, 구타와 고문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총살하기도 했다. 10월 항쟁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고 외부에서 경찰력이 증원되고 우익청년단까지 파견되어 진압에 나서면서 폭력과 고문은 일상사로 자행되었다. 즉결처형과 함께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에 대한 무차별적인 총격 등 보복행위가 수시로 자행되었다. 경찰뿐 아니라 독촉국민회, 독촉청년연맹,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도 조직적으로 보복을 자행했다. 지방에 따라 일부 우익청년단체는 좌익관계자를 직접 체포 혹은 구타하는 사형(私刑)을 감행하고 좌익관계자의 가재(家財)를 파괴하는 테러를 일삼기도 했다.

당시 토벌대상이 된 마을에서 “청년들이 군경의 진압을 피해 입산하거나 도시로 이주하자 토벌부대가 수시로 와서 주민들을 구타하거나 마을 앞 못물에 넣는 등 고문을 했”으며 벼락부대(서북청년단으로 이뤄진 토벌대)가 여러 명의 청년들을 “당산나무 밑에서 주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 사살”하기도 했다. 또한 벼락부대가 도피자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의 아내와 마을주민들을 살해하려 하자 구장이 소를 잡아 대접하고 설득하여 주민들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주16)

10월 항쟁 관련자 중 다수는 미군정이 발포한 포고령2호 위반 등의 혐의로 미군정이 설치한 군정재판과 특별군정재판에 회부되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인 처벌 절차 없이 토벌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불법적으로 살해되었지만 그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이 같은 경찰과 우익의 불법적인 민간인 학살은 그 뒤 여순사건, 4.3제주사건 등에서 훨씬 강하게 재현, 증폭되었다. 그런 점에서 10월 항쟁의 민간인 학살은 한반도를 피의 바다로 만드는 전주곡이 되었다. 10월 항쟁에 연루되어 형무소나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던 사람들은 1950년 6·25 전쟁을 전후해서 달성군 가창골, 경산의 코발트광산, 수감 중인 형무소 등에서 집단학살 되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예비검속되어 역시 집단학살 되었다.(주17) 이들을 모두 10월 항쟁의 직접적 희생자로 보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10월 항쟁이 계기가 되어 체포, 구속, 수감되거나 국민보도연맹, 예비검속, 형무소 등을 통해 한국전쟁 전후에 학살된 인원은 수천 명에 이르고 있다.

공산당과 인민위원회, 그리고 전평·전농 등 대중조직 역량의 파괴

한편 G-2 보고서에 따르면 소총 204자루, 권총 11자루, 탄약 2,688발이 탈취당했으나 회수된 것은 소총 118자루, 권총 3자루, 탄약 1,035발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회수되지 못한 무기가 뒷날 빨치산의 전신인 야산대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10월 항쟁은 결국 남한 사회에서 피의 대결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대구에서 시작되어 경북 전역으로 확산된 10월 민중항쟁의 여파는 경남, 전남, 전북, 충남, 충북, 강원도, 나아가 경기도 일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0월 7일 진주와 마산을 시작으로 진해, 부산, 양산, 동래 등 경남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0월 말경에는 서울 근교의 광주, 수색, 개성 등지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충남의 경우, 강력한 인민위원회가 존재했던 예산, 홍성, 천안, 당진, 서산 등지에서 주로 봉기가 일어났다. 충북의 경우는 영동을 제외하고는 잠잠했다. 전남의 경우는 10월 말부터 11월 중순까지 화순, 목포, 함평, 해남 등 곳곳에서 50건 이상의 시위사건이 벌어졌다. 특히 화순 탄광에서 노동자들이 봉기해 광주를 향해 행진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미군이 동원되어서야 진압할 수 있었다. 1946년 10월 민중항쟁은 38선 이남 전역으로 확산되었을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주18)

이처럼 엄청난 소용돌이를 몰고온 10월 항쟁의 피해 또한 엄청났다. 200명 이상의 경찰이 피살되었고, 좌익에게 피살된 사람들을 포함에 군경에 의해 학살된 사람 등 민간인 사망자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천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재산피해 또한 광범하였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민간측 피해액 2억2천만원, 경찰측 피해액 1억2천만원, 기타 관공리의 피해액 1천6백원이라고 했으나 10.1사건대책위원회에서 발표한 것에 따르면 영천군만 해도 피해액이 10억원이 넘는다고 한 것을 감안할 때 이는 지나치게 축소한 것이었다.(주19)

1946년 10월 1일 대구 군중시위에 대한 경찰의 발포 현장 사진(사진=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1946년 10월 1일 대구 군중시위에 대한 경찰의 발포 현장 사진(사진=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체포된 사람의 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으나 경북에서만 7,8천명, 전국적으로 3만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앞에서 봤듯이 10월 중에 전평은 노동자만 1만 1,624명이 체포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개성지역에서만 3천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전남에서도 4천명이 체포되는 등 남한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주20)

10월 항쟁으로 좌익은 큰 타격을 받았는데 특히 경북지역은 매우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전평과 전농, 민전, 지역인민위원회 지도자나 주요인물들이 체포되거나 수배되면서 조직이 사실상 붕괴되었다. 사건이 발생하고 거의 4개월이 지난 1947년 2월말에 이르러서야 대구의 좌익단체들이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을 지경이었다. 1946년에는 3.1절 기념행사를 좌우익이 공동 개최했으나 1947년에는 민전측은 수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달성공원에서, 우익측은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회당에서 따로 개최하였다. 좌익의 조직력은 10월 항쟁 이전에 비해 확실히 약화되었다. 1947년에 있었던 3.22총파업 때 대구에서는 역기관구 방직공장 2개소에서 약간의 소요가 있고 송신두절이 있었을 뿐 잠잠했다. 6개월 전 9월 총파업에서 대구지역 노동자들이 보인 조직적인 총파업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차이였다. 5월 1일의 메이데이 행사도 우익은 당일 치렀으나 좌익은 5월 4일로 연기해야 했다. 1947년 5월 19일에는 경북민청동맹본부가 경찰의 습격을 받아 해산되었고, 8월 13일에는 대구부내 좌익진영에 대한 광범위한 일제검거가 실시되었으며, 11월 3일부터 경북도내 전역에 걸쳐 좌익간부에 대한 전면적인 검거가 실시되어 7일 현재 332명이 검거되었다.(주21)

10월 인민항쟁의 결과 수많은 민중들이 감옥으로 갔으며, 일부는 산으로, 또 일부는 지하로 잠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중단체, 특히 그 중에서도 농민단체들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대구·경북지역의 경우 10월 항쟁은 ‘인민항쟁’이라 부를 만했다. 그러나 인민항쟁은 미군정과 우익에 의해 강제진압되었고, 경북지역의 좌익조직과 대중단체들은 조직이 대거 파괴되면서 투쟁 역량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10월 항쟁에서 제기된 인민과 진보세력의 변혁요구는 전면적으로 거부되었고, 대구·경북에서는 이후 광범위한 대중을 동원한 운동, 투쟁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좌익세력이 약화되자 그 공간을 미군정과 경찰, 우익세력이 장악해 물리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이지만 남한 전역에서 10월 항쟁을 통해 변혁 지향적 대중의 요구, 투쟁역량과 보수반동적 세력의 물리력 사이의 힘의 관계가 역전되고 말았다.(주22)

10월 인민항쟁은 중앙의 좌익지도부와 경북지역의 좌익세력 및 민중의 괴리 현상으로 인해 인민의 엄청난 에너지가 폭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성과를 낼 수 없었다. 중앙지도부는 분파투쟁과 노선갈등의 일환으로 9월 총파업 투쟁(그리고 이어지는 10월항쟁)을 시작했으나 민중은 일제 때부터 쌓여온 원한과 불만,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로 삼았고, 이는 경찰서와 행정기관의 공격, 파괴, 접수 등 새로운 민중적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혁명적이면서도 파괴적인 행동으로 발전하였다. 결국 중앙지도부는 전국적인 전망과 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분파를 동원, 인민의 혁명적 열정에 불을 질렀을 뿐 항쟁을 체계적으로 조직, 지도하지 못하였다. 10월 인민항쟁은 중앙지도부의 잘못된 지도와 지방 활동가 헌신적인 노력, 폭발적인 민중투쟁이 결합한 결과였다.

‘대구10월사건’ 유족들에 대한 법원의 국가배상 판결 결정을 보도한 <한겨레> 2013년 1월 22일자 기사.

중앙지도부의 체계적인 지도가 없는 상황에서도 인민들은 엄청난 혁명적 에너지를 분출시켰다. 만일 미전술군이 조기에 동원되지 않았다면 미군정 경찰력만으로는 이 사태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급격히 남한 전역이 혁명적 상황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그런 조건이었다. 미군정이 빠르게 전술군을 동원하고 다른 도에서 경찰을 차출, 증원하고, 우익청년단까지 합세해서야 인민항쟁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해방정국에서 10월 인민항쟁은 민중의 거대한 힘이 분출, 폭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실패했으며, 그 때문에 이후 좌익세력의 조직역량은 크게 파괴, 위축되었다. 그것은 이후 더욱 중요하고 필요한 결정적 시기에 광범위한 조직역량을 동원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의미했다. 너무 일찍 조직역량이 파괴되어 반드시 필요한 대중투쟁, 혁명투쟁을 전개하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인민항쟁은 민중의 변혁에 대한 거대한 열망과 에너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사건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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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438〜473쪽

2) 박태우, “대구에 ‘10월 항쟁’ 등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과거사정리위 권고 10년만에”, 경향신문 2020.10.13.

3) 정해구, 『10월인민항쟁의 전개과정과 성격에 관한 연구』,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1987, 5~8쪽 참고

4) 정해구, 위의 논문, 12쪽

5) 전현수, ‘쒸띄꼬프 일기’가 말하는 북한정권의 성립 과정, 역사비평, 1995년 8월, 159〜162쪽

6) 박병엽 구술/유영구·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97쪽

7) 진실화해위원회, 「대구10월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 사건」,『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10, 65∼66쪽

8) 굶주림에 시달리던 민중은 미군정을 향해 ‘쌀을 달라’며 시위를 벌였으며, 3, 4월 춘궁기에 특히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9) 같은 통계에 경찰 및 국방경비대 측 피해자 수는 사망 82명, 부상 129명, 실종 및 포로 151명으로 집계되어 있다.(Thomas W. Herren papers, 앞의 글, 1946)

10) 같은 통계에 관리측 피해자 수는 사망자 63명, 부상자 133명으로 집계되어 있다.(정해구, 앞의 책, 1988, 156쪽)

11) 같은 통계에 경찰 측 피해자 수는 사망자 80명, 부상자 96명, 행방불명 및 납치 145명. 우익인사 사망자 24명, 부상자 41명, 행방불명 및 납치 21명으로 집계되어 있다.(경찰청과거사위(2006), 42쪽; 대구MBC 보도자료, 2005)

12) 같은 통계에 경찰 측 피해자 수는 사망자 33명, 중경상자 135명, 경찰관 가족 사망자 1명, 부상자 33명으로 집계되어 있다.(경찰청과거사위, 2006, 42쪽)

13) 전현수,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10.1사건”, <신동아> 558호(2006년 3월)

14)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77∼81쪽

15)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83쪽

16)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93쪽

17) 이런 집단학살극은 대구․경북만 아니라 대전형무소 등 전국에서 벌어졌다. 형무소재소자학살사건은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과 함께 대표적인 국가권력의 범죄행위, 조직적 민간인 집단학살이다.

18)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449〜459쪽

19) 정해구, 위의 논문, 105쪽

20)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471쪽

21) 정해구, 위의 논문, 109〜110쪽

22) 정해구, 위의 논문, 116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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