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공산당 대회파의 당대회 추진과 9월 총파업

조선공산당 내의 대회파와 인민당·신민당 내의 합당반대파 또는 합당보류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박헌영은 3당합당을 전격적으로 추진하였다. 9월 4일 박헌영파는 인민당과 신민당의 ‘무조건 합당파’들과 회합하여 3당합동 준비위원회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인민당과 신민당 위원장이 배제된 가운데 열린 이날 회의에서 3당합당 결정서가 정식으로 가결되고 선언과 강령초안이 작성, 발표되었다. 박헌영파 중심으로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 준비위원회가 구성되고 결당 준비공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같은 박헌영파의 일방적인 합당추진 작업에 조공 대회파와 인민당·신민당의 조건부 합당파가 크게 반발하였다. 남로당 위원장으로 내정된 것으로 알려진 여운형도 성급하고 무원칙한 합당결정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9월 7일 인민당은 여운형의 의견에 따라 합당결정에 대한 격렬한 비판 내용을 담은 결정서를 발표했다.

“3당합당은 서로 평등한 입장에서 우당적 신의와 전당원을 포섭하는 태세에서 결정되야 할 과업임에도 불구하고 신행활 동당의 지도권을 자기 일파에서 장악하려는 심산에서 모략적 합당중앙결정서를 발표한 것은, 신의와 정치적 양심을 몰각한 행위라고 생각하고 인민당으로서는 이 결정서를 비법적인 것이라고 규정한다.”(주1)

신민당 위원장 백남운도 9월 5일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보다 더 합리적인 합당공작을 추진해야 할 것인데 부지중에 너무나 조급하게 발표된 점에 있어서, 우리의 합당촉진책과는 배치되므로 나로서는 책임을 질 수 없다”고 박헌영파의 합당추진 방법을 비판하였다.

한편, 당대회 소집을 준비하고 있던 조선공산당 대회파도 당대회 준비위원장 윤일의 이름으로 “5일에 발표한 합동이라는 것은 아당과 우당의 당수 및 당내 군중의 절대다수를 배제하고 각당내의 소부분만의 분열적 합당을 발표한 것”으로 이것은 “어느 일파가 미리부터 준비해둔 그의 자파 일색으로 합동당을 구성”하려는 의도라고 비판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는 합당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3당 전체의 합당, 각당 내부의 자색주의와 분파 청산, 평등한 위치에서 3당의 합동 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대회파의 당대회 소집과 합당 추진은 9월 중순 박헌영의 신전술이 구체화되면서 현실적으로 실행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박헌영파와 대회파의 3당합당 공작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9월 6일 미군헌병들이 조선인민보 등 32개 신문사에 대해 압수, 수색을 벌였으며, 미군정은 이 날짜로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을 무기정간 처분했다. 9월 7일 조공 간부인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9월 8일에는 이주하가 경찰에 구속되었다.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은 해방 후 남한 정계의 최대의 정치사건이었지만 경찰관계자들은 그 이유를 일체 밝히지 않았다. 경기도 경찰부장인 장택상은 기자들의 질문에 “이 사건은 나에게 묻지 말아주오. 나에게도 함구령이 내리었다. 이번 사건은 상부 명령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대답했다.(주2) 미군정 경찰은 이주하가 검거되었을 때에도 상부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며칠 후 언론에서는 이주하는 박헌영 체포령과는 관계가 없고 2개월 전부터 지명수배된 상태여서 체포되었다고 보도했다.(주3) 미군정 기록에는 박헌영과 이강국 체포령은 간첩행위와 관련되었다고 했으나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북한에서 진행된 박헌영의 재판기록에는 민전에서 미국의 차관 5백만 달러 제공에 반대성명을 낸 것을 체포령의 빌미로 삼아 월북할 계기를 만들었다고 나오고 있다.(주4)

조선공산당 간부로 민전 사무장이었던 이강국은 미군정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지자 월북하였다. 그의 월북과정에 과거 애인으로 당시 미군 대령이었던 베어드와 동거 중이었던 김수임이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진다.
조선공산당 간부로 민전 사무장이었던 이강국은 미군정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지자 월북하였다. 그의 월북과정에 과거 애인으로 당시 미군 대령이었던 베어드와 동거 중이었던 김수임이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진다.

박헌영의 체포령과 그의 월북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면이 있었다. 미군정이 체포령을 내린 이유도 불명확했고, 미군정이 얻고자 했던 정치적 이득도 애매한 점이 있었다. 박헌영 체포령은 형사 사건이 아니라 정치 사건이었는데, 미군정이 박헌영을 탄압함으로써 3당합당에 영향을 미치려 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군정이 박헌영을 탄압함으로써 반대파를 지원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반박헌영파에 정치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미군정이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내림으로써 소련군측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향후 재개될 미소공동위원회의 제약 조건이 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그 정치적 의도가 확실치 않다. 아무튼 이주하의 경우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는데 박헌영의 경우 죄목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체포하더라도 중형을 선고하기는 어려웠던 상황이었다.(주5)

박헌영은 체포령 이후 도피하다가 10월 인민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10월 초 월북하였다. 당시 공산당원들과 10월 항쟁에 참여하고 있던 좌익세력들, 대중들은 박헌영이 서울에서 자신들의 투쟁을 지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최고 지도자였던 박헌영이 심각한 항쟁의 결말이 나기도 전에 북으로 도피한 것은 문제가 있었다.(주6) 월북한 이후 박헌영은 북한에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당(남로당)을 지도하게 되면서 북한의 남한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강해질 수밖에 없었고, 박헌영의 지위 또한 김일성에게 밀리게 되었다.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져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한때 대회파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고, 대회파는 당대회 소집을 계속 추진하여 9월 19일 모임을 갖고 9월 28일 당대회 준비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0월로 계획했던 전평의 ‘총파업’ 투쟁을 박헌영이 9월로 앞당길 것을 지시하면서 합법공간을 필요로 하는 당대회 소집은 불가능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극우신문인 『대동신문』은 10월 3일자 기사에서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긴 것은 9월 28일 서울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던 조공 대회파의 당대회에 참가할 지방대의원의 상경로를 끊어서 대회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도했는데 일리가 있었다. 9월 28일의 당대회 준비모임에는 원래 4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철도파업으로 인한 긴박한 상황 때문에 경남, 전북, 충남, 충북지역의 대표자 200명밖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조공 대회파는 9월 30일 발표한 ‘조선공산당 남조선대회 선언’에서 박헌영파를 “정치적 기회주의와 조직적 자색주의”라고 비판하면서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하였다.(주7)

10월 인민항쟁과 남로당·사로당의 분열

대회파는 이 같은 선언과 함께 당대회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가까운 장래에 서울에서 열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대회파는 총파업에 반대하고 자신들이 영향력 아래 있는 지방당 조직에 파업을 거부하라고 지시하였으며, 이러한 행동은 “우리 진영의 파괴를 유치하고 전위를 대중으로부터 고립하게 하고 국제문제를 험악하게 하는 크나큰 죄악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9월 총파업은 10월 항쟁으로 연결되었고, 공산당의 합법적 공간을 없애버림으로써 대회파의 입지와 활동공간을 약화시키고 말았다.(주8)

대회파는 9월 총파업을 반대하였으나 10월 인민항쟁이 벌어지면서 남한 전역이 비상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 활동이 사실상 지하로 들어간 상태에서 대회파를 지지하던 당원들도 점차 이탈하기 시작했다. 또한 대회파는 당대회 준비에 힘을 쏟는 바람에 10월 항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함으로서 당원대중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지도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당 대회파, 인만당과 신민당의 조건부 합당파로 구성된 교섭위원 27명이 10월 16일 서울대학병원 여운형 입원실에서 모여 3당합당 문제를 토의한 후 ‘사회노동당’(이하 사로당)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사로당은 10월 16일 3당합당 준비위원 선출, 10월 31일 중앙3당합동준비위원회 개최 후, 11월 1일 사로당 임시중앙위원을 선출하였다.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백남운, 강진이 선출되었다. 11월 중앙상무위원회를 거쳐 17일 사회노동당이 정식으로 발족하였다.(주9)

사로당의 지방조직들은 공산당 대회파가 중심이 되어 조직했다. 서울의 경우, 강진, 김근, 문갑송 등의 중앙위원과 영등포지구의 변재철, 구소현, 이은우 등이 중심이 되었다. 전남지역은 도당위원장 출신의 유혁을 중심으로 윤석원, 한종식 등 이정윤 계열이, 전북지역에서는 김철수의 사위인 이복기가 중심이 되었다. 경남·부산지역에서는 도당위원장 박용선과 한인식, 김태영 등이 활동했으며, 충남, 충북, 경기도 등에도 사로당 세력이 존재했다. 고준석은 콤그룹 지지가 60%, 대회파 지지가 40% 정도였다 주장했는데,(주10) 다소 과장됐다고 해도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사로당 세력은 1946년 초의 당대회 소집 요구 때보다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것은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의 분열보다는 통일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했고, 결국 불만이 있었던 사람들도 남로당 결성에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주11)

서울대 병원으로 여운형을 병문안 온 백남운.
서울대 병원으로 여운형을 병문안 온 백남운.

공산당 대회파를 중심으로 사로당이 결성되는 것과 함께 공산당 간부파가 주도하는 남로당이 따로 추진, 결성되었다. 1946년 11월 23〜24일 이틀 동안 서울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결당식이 개최되었다. 결당식이 끝난 뒤인 12월 10일 3당합동 준비위원 연석회의를 개최, 중앙위원 29명과 중앙감찰위원 11명을 선출하고 위원장에 허헌, 부위원장에 박헌영, 이기석 등을 선출하였다. 중앙위원은 공산당계 14명, 인민당 9명, 신민당 6명으로 박헌영, 이기석, 이승엽, 구재수, 김삼룡, 김용암, 강문석, 유영준, 이현상, 고찬보, 김오성, 송을 수, 윤경철, 이재우, 김상혁, 김영재, 김계림, 김광수, 정노식, 성유경, 정윤, 김진국, 현우현, 홍남표, 박문규, 이주하, 김태준, 허성택, 허헌 등이었다. 외형적으로는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 인물들을 안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산당 내 박헌영파와 인민당·신민당 내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결국 남로당은 명분과는 달리 각계각층을 포용할 수 있는 대중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주12)

남조선노동당 결성 소식(조선일보 1946년 11월 24일자)
남조선노동당 결성 소식(조선일보 1946년 11월 24일자)

더욱이 남로당의 결성 작업은 9월총파업과 10월 항쟁으로 비합법적인 상황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특히 그러했다. 여운형은 “남로당은 당 역량의 절반이 지하에 잠복한 채 운영되고 있”다면서 “공산당 간부집단이 파벌집단과 통합하여 남로당을 조직했지만 일반적으로 이것은 지하작업으로 진행되었고 공개된 것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결국 여운형이 지적한 것처럼 남로당측의 3당합당 작업은 비합법적인 상황에서 자파세력만을 포괄하여 진행한 것이었다.(주13)

남로당 준비 과정은 비합법적인 영역을 안고 진행되었지만, 결성대회는 합법적으로 열릴 수 있었다. 당수로 결정된 허헌이 “남로당은 군정과 협력할 것”이라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남로당은 결당대회 후 미군정과의 마찰을 가급적 피하면서 대중에 대한 지도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국민주청년동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등 대중조직의 전국대회를 소집해 조직을 정비하였다. 사로당계열에 대해서는 개별적인 포섭공작을 적극 추진하면서 향후 재개될 제2차 미소공위에 대비하였다. 남로당은 파괴된 조직을 복구하는 한편,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당원 확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좌익3당의 합당 과정은 남로당과 사로당으로 분립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조직력에서 앞선 남로당측이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특히 1946년 9월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을 통해 남로당측은 대중조직에 대한 조직적 장악력과 지도력을 강화한 반면, 합법적 영역을 바탕으로 좌우합작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던 사로당측은 대중적 지도력을 상실하고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결국 3당합당 과정에서 남로당과 사로당이 각각 따로 결성되었으나 주도권 경쟁에서 패배한 사로당은 해체되는 운명을 맞고 말았다.

3당합당 관련 남북연합회의와 남로당 출범

1946년 11월 23일 우여곡절 끝에 3당 합당을 통해 결당식을 치른 남로당은 조직체계를 정비하는 한편, 합당을 둘러싼 분열 끝에 만들어진 사로당을 내부에서부터 와해시키고 그 조직원들을 흡수하는 데 힘을 썼다. 사로당에 가장 큰 타격이 된 것은 11월 16일 북로당(북조선노동당)에서 사로당을 부정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일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이 가장 정당한 노선임을 시인하며 이를 절대 지지한다. 당내에서 좌익기회주의 노선이 사회노동당을 형성하기까지에 이른 것은 적의 반동정책에 발맞추어 줄 중대한 범죄라는 것을 지적한다. 2) 북로당은 강진, 백남운 등 분자들은 좌익정당의 분열을 조장한 것이며, 또한 민족반역자 진영을 방조한 행동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3) 북로당은 박헌영을 우두머리로 한 남조선공산당과 좌익정당들이 남조선노동당을 창설하려는 사업 행정(行程)을 전체적으로 지지하며 사로당은 우리와 하등의 공통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주14)

이 성명서가 나오게 된 것은 박헌영의 월북 후 활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박헌영은 10월 15〜16일경 김일성, 김두봉, 김책, 허가이, 최창익, 박일우, 주영하, 박정애 등 북로당 정치위원들과 한 자리에 모여 남한 정세와 10월 인민항쟁, 3당합당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때 박헌영은 인민항쟁은 정당한 사업이고 투쟁을 잘 전개하면 미군이 굴복할 것이며 당사업도 아래로부터 합당과정을 통해 당대회를 거쳐 완성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박헌영은 합당과 관련해 자신이 전적으로 옳고 이정윤, 서중석, 강진 등은 종파분자, 심지어 미국 특무기관의 조종을 받는다는 주장까지 폈다. 좌우합작과 관련해서는 여운형과 김규식이 공산당이 제시한 원칙을 접수하지 않아 우경적 오류를 범했다는 점을 부각하며 여운형이 미군정의 손에 놀아났다는 식으로 강하게 비판했다.(주15)

그러자 합당을 위해 서울에 열흘 가량 머물며 이남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최창익이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는 10월항쟁과 관련 미군정이 순순히 양보할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9월 말경 대회파가 당대회를 소집하기로 한 것을 파탄시키려고 총파업을 앞당긴 것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또한 그는 “폭력적 방법은 정권 쟁취를 위한 공산주의자의 최고의 투쟁형태이자 마지막 수단”이라며 “미군정의 탄압에 반대하기 위해 10월 인민항쟁이라는 폭력적 방법으로 비약시킬 필요가 있었는가”라며 따졌다. 3당합당과 관련해서는 박헌영의 공산당이 여운형·백남운과 합의하지 못한 상태에서 인민당과 남조선신민당에 숨겨두었던 프락치들을 활용해 합당을 추진하려 함으로써 자색주의로 흘렀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도 이정윤, 서중석, 강진 등 대회파에 대해서는 ‘새앙쥐 같은 놈들’이라는 격렬한 표현까지 써가며 혹독하게 비판했다.(주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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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 잠시 머물며 이남 사정을 파악했던 최창익은 3당합당과 관련한 박헌영의 일방적인 주장에 이의를 달기도 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최창익의 문제제기에 대해 이남의 당내 사정을 몰라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식으로 대응하였다. 이날 회의 말미에서 김일성은 노동계급의 투쟁과 당 지도부의 지도노선은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파업이든 폭동이든 군중이 투쟁에 나설 경우 이는 인정되어야 하고 지지를 보내야 마땅하지만 당의 지도노선이 극좌로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9월 총파업이나 10월 인민항쟁과 관련해서도 노동자 파업과 인민들의 항쟁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당의 노선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는 이와 다른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날 회의 이후 김일성과 박헌영은 따로 만나서 이남의 현안 문제들을 논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10월 인민항쟁을 더 이상 확산하지 말고 수습한 뒤 합당사업을 추진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박헌영이 이북에 있는 것이 좋으며, 빠른 시일내에 남로당 준비위 간부들과 북로당 정치위원들의 합동회의를 소집해 구체적인 대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10월 말경 박헌영의 월북이 최종적으로 정리되었고, 11월 5일경 조선공산당의 이승엽, 김삼룡, 허성택, 이기석 등과 인민당의 이만규, 김오성, 이여성 등, 그리고 신민당의 허헌, 백남운, 구재수 등이 평양으로 가서 북로당 정치위원들과 연합회의를 열었다.(주17)

11월 5일의 연합회의에서 총파업과 인민항쟁에 대해서는 이승엽이, 3당합당에 대해서는 김삼룡이 각각 보고했다. 이승엽의 보고는 박헌영의 주장과 대동소이했으나 오히려 더 부풀려진 측면이 있었다. 이승엽의 보고에 대해 백남운, 이만규 등 인민당과 신민당 인물들이 비판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합당사업에 대해서는 공산당의 김삼룡이 보고하였고, 인민당의 이만규와 신민당의 백남운도 각 당의 사정을 설명했다. 김삼룡은 공산당 지도부 내의 섹트주의적이고 편협한 행동으로 인해 합당을 원만히 이끌 수 없었다는 점을 비판하였다. 그는 대회파의 오류는 심각하지만 인민당과 신민당 내의 합당준비위원들이 공산당의 프락치로 인정되는 사람들이어서 합당사업에 지장을 초래한 점을 밝혔고, 공산당이 자기비판적 관점에서 합당사업을 새로 풀어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3당합당을 둘러싸고 공산당 내에서 박헌영·이주하와 김삼룡 사이에 적지 않은 이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박헌영과 경성콤그룹 때부터 깊은 동지관계를 맺어왔던 김삼룡의 이 같은 평가는 인민당과 신민당 관계자들로부터 동의를 받았고, 북로당에서도 김삼룡에 대해 새롭게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주18) 김삼룡은 공산당(남로당)이 지도부를 북으로 완전히 이동시킨 뒤에도 서울지도부의 책임자로 남아서 활동하다가 1950년 3월 말에 검거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되어 있던 중 한국전쟁 발발 직후 처형되었다.

3당합당과 관련해 조선공산당의 분파적인 사업 방식을 자기비판한 김삼룡. 그는 박헌영 월북 후 이주하와 함께 남로당 지하지도부의 총책으로 활동했다.
3당합당과 관련해 조선공산당의 분파적인 사업 방식을 자기비판한 김삼룡. 그는 박헌영 월북 후 이주하와 함께 남로당 지하지도부의 총책으로 활동했다.

11월 5일의 연합회의에서는 11월 안으로 미군정의 허가 아래 합법적으로 3당합당 대회를 개최하기로 방침을 결정했다. 또한 이남의 공산당 지도자들은 북로당에 이남의 사회노동당 해체를 촉구하는 특별결정서 채택을 요청했고, 북로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11월 16일 사로당 해체를 촉구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와 함께 북로당은 정치공작원을 서울에 파견해 사로당 해체를 촉구하는 등 막후 작업을 진행, 3당합당을 통한 남로당 결성을 지원하였다. 북로당 성명 이후 사로당은 사실상 해체의 길로 들어섰고, 남로당은 11월 23〜24일의 결당식을 거쳐, 12월 10일 중앙위원과 감찰위원, 위원장과 부위원장 등 당지도부 선출로 당의 체제를 정비하였다.

사로당 해체와 근로인민당 창당

북로당 중앙위원회 성명 발표 이후 사로당이 크게 동요하면서 사실상 해체의 길로 들어섰으나 남로당은 그 역량을 모두 흡수, 통합하지 못하였다. 좌익세력 다수는 남로당으로 통합되었으나 3당합당 과정에서 끝내 남로당에 가입하지 못하였거나 거부한 사람들은 결국 근로인민당을 따로 조직함으로써 좌익세력은 완전통합에 실패하고 끝내 두 개의 당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 같은 좌익세력의 불완전한 통합은 박헌영측의 지나치게 협소하고 편협한 행태가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1946년 11월 23〜24일 미군정의 승인 아래 합법적인 결당대회를 치른 남로당은 12월 10일 중앙위원과 감찰위원, 위원장(허헌)과 부위원장(박헌영·이기석)을 선출함으로써 일차적으로 체제정비를 마무리했다. 이어 1947년 1월 25일에는 남로당의 외곽단체들인 전평, 전농, 부녀총동맹, 민청, 문학가동맹 등의 주최로 남로당 창건 경축대회를 개최, 세력을 과시하며 조직 확대에 나섰다.

남로당은 1946년 연말과 1947년 연초에 걸쳐 사로당 해체에 주력하면서 당조직 확대,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박헌영측은 사로당의 해체 후 조직적 입당을 거부하고 ‘개별심사를 통한 선별입당’ 방침을 고수함으로써 사로당을 철저히 공중분해시키는 작전을 썼다. 이 문제와 관련해 당시 몽양 여운형은 사로당 해체 후 남로당측에서 집단 수용을 한다면 개별적으로 서약서를 쓸 수도 있다고 밝혔다. 북로당측도 같은 견해였고 박헌영측에 이를 수용할 것을 제기했으며, 남로당 내부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박헌영은 “개별적으로 심사해서 받아들일 사람은 받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받지 말아야 앞으로 그런 일이 없다. 사로당이 평소엔 안 그러다 궁지에 몰리니까 우리한테 와서 집단적 수용을 요구하는 것”이라며 끝내 집단입당을 거부하였다. 박헌영의 주장대로 사로당 인사들은 선별적으로 수용되었고, 입당을 거부당한 사람들은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에 참가하거나, 아니면 ‘정치낭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주19)

북로당의 비판과 함께 사로당의 동요는 가시화되었고 탈당이 줄을 이었다, 11월 9일 조공 대회파의 남두우의 등의 탈당을 시발로 11월 20일에는 박헌영으로부터 정권처분을 받은 서중석이 ‘자기비판’을 하고 사로당을 탈당, 남로당 결당 대회에 참석하였다. 12월 8일에는 윤구섭 등이, 12월 11일에는 인민당 31인파 황진남, 김양하 등이 탈당했다. 인민당 31인파의 황진남, 김양하 등 사로당 중앙위원 11명은 “임시중앙위 구성으로 발족한 사로당이 당초에 표방한 대중정당으로서 계급적 편향성을 지양한다는 것이 오히려 파쟁을 첨예화시켰다. 그렇게 때문에 여운형이 지도하는 인민당에 복귀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고 사로당을 탈당했다. 사실상 3당합당 작업이 실패했음을 밝히고 있는 셈이었다. 1947년 1월 1일에는 북한에서 호된 비판을 당하고 돌아온 이영이 신문지상에 자기비판서를 발표함과 동시에 사로당을 탈당했다. 1월 7일에는 대회파 이우적, 하필원, 신용우, 온낙중 등이, 1월 29일에는 사로당의 핵심이던 강진마저 탈당했다. 2월 25일에는 문갑송, 윤혁, 성기원, 이림수, 김용암, 김명진, 성대경, 최익한, 이문홍 등이 탈당함으로써 사실상 사로당의 실체가 없어져버렸다. 결국 사로당은 1947년 2월 27일 제1회 당대회를 열고 ‘남조선 민주진영의 세력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자기비판과 함께 생명을 다하였다.(주20)

남로당 위원장으로 선출된 허헌이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는 모습.

한편, 3당합당으로 출범할 대중정당의 위원장으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박헌영의 견제로 사로당 위원장에 뽑혔던 여운형은 12월 4일 ‘좌우합작합당공작을 단념하면서’라는 자기비판서를 발표하고 사실상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는 성명서에서 “좌익3당 합동문제에서 분열을 초래한 것은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그 책임을 느끼게 된다. 남로당과 사로당의 무조건 통일, 그리고 사로당을 해체하고 남로당에 통일할 것을 간청했으나, 이것마저 실패했다. 이는 내가 역량없는 탓이며 과오 많은 내가 차라리 민중 앞에 사과하고 중책에서 물러감이 옳다고 생각한다.”라고 발표하였다. 또한 사로당 부위원장 백남운도 12월 7일 그 직책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정계 일선에서 물러났다.(주21)

이처럼 남로당의 협소한 통합 방식 때문에 여운형, 백남운을 비롯하여 오랜 활동경력과 연륜을 가진 상당수 인물들이 고립되어 활동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에 여운형은 1946년 연말부터 1947년 연초 사이 북한을 방문해 이 문제를 비롯해 여러 현안문제들을 논의하고 돌아온 뒤 남로당에 가담하지 못한 사람들을 비롯하여 ‘광범위한 민주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새로운 대중정당의 조직 작업에 착수하였다. 구 인민당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신민당계 및 개별화된 인물들을 모아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근민당)을 창당하였다. 결국 3당통합은 실패, 남로당과 근민당으로 분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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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독립신보 1946,9.9

2) 동아일보 1946.9.10

3)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442쪽

4) 김남식·심지연 편저, 『박헌영 노선 비판』, 세계, 1986, 466쪽

5) 서중석, 위의 책, 442〜443쪽

6) 김남식, 『남로당연구』, 돌베개, 1984, 263쪽

7) 정창현, 1946년 좌익정치세력의 ‘삼당합당’ 노선과 추진과정, 한국사론30, 1993, 276〜277쪽

8) 김남식, 남로당연구, 259쪽

9) 정창현, 앞의 글, 277〜278쪽

10) 고영민, 『해방정국의 증언: 어느 혁명가의 수기』, 사계절, 1987, 125쪽

11) 정창현, 앞의 글, 278〜279쪽

12) 김남식, 남로당연구, 265쪽

13) 정창현, 앞의 글, 281〜282쪽

14) 독립신보 1946.11.27.; 김남식, 『남로당연구』돌베개, 1984, 266쪽 재인용

15) 박병엽 구술/유영구·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93〜95쪽

16) 박병엽, 위의 책, 95〜96쪽

17) 박병엽, 위의 책, 97〜101쪽

18) 박병엽, 위의 책, 101〜102쪽

19) 정병준, 『몽양여운형 평전』, 한울, 1995, 365〜366쪽

20) 정병준, 위의 책, 367쪽; 김남식, 남로당연구, 267〜268쪽

21) 정병준, 위의 책, 368쪽; 김남식, 남로당연구, 267〜268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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