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사육신공원으로 가는 길에 종로학원이 있었다. 재수할 때 박성환이 다니던 학원도 종로학원이었다. 물론 그때는 종로에 있었다. 건너편에 한샘학원이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힘찬이를 데리고 배치상담 받으러 온 적이 있어서 기억이 났다. 노량진에 있는 종로학원은 얼마 전까지 중앙학원이었던 곳이다. 중앙학원도 오래된 곳인데 어떻게 해서 종로학원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는 신돌석씨는 알지 못한다. 군대를 제대한 뒤 형이 다시 공부해 보라고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 신돌석씨가 끝내 등록을 하지 않아서 다니지 않았지만 형이 얼마나 신돌석씨가 공부하기를 바랐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콧날이 시큰거린다. 형은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것 때문에 차별받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고, 동생은 그러지 않았으면 했던 것이다. 신돌석씨가 대학에 들어갔어도 제대로 다닐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잘 살 수 있었을지도 회의적이다. 하지만 당시에 대학을 나온 친구들은 대기업에 별로 어렵지 않게 취직했고, 10년 이내에 아파트를 분양 받아서 입주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 젊은 세대는 대학을 나와도 대기업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이고, 수도권에서 아파트를 사는 것은 10년이 아니라 더 이상이 걸려도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물론 신돌석씨 또래에서 대기업에 취직한 친구들의 상당수는 40대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고, 지금 경비원, 대리운전, 쿠팡맨 등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공원 안에는 날이 따뜻해서 그런지 여기저기 사람들이 있었다. 꼭대기까지 올라가자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빈 벤치가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술도 깰 겸 못 다한 이야기도 하기 위해서였다. 신돌석씨는 본래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30 넘을 때까지 거의 안 마셨던 것 같다. 그 뒤로는 남이 마시면 따라 마시는 정도였다. 그런데 요즘 와서 자꾸 찾게 된다. 오래 전에 알았던 후배 하나가 감옥에 들어가니 담배보다 커피 생각이 더 나더라는 이야기를 해서 별 우스운 친구 다 있다 생각했는데 만약 요즘 신돌석씨가 그런 경우라면 마찬가지일 것 같다. 담배는 요즘 안 피우니까 더욱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중독성이란 건 참 무서운 게다. 길 가다 보면 서너 가게 너머 하나 있는 게 커피점이다. 그런데 박성환은 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까? 그러다가 왜 냉커피를 마시냐고 정정해서 물었다. 신돌석씨 또래에서는 아이스를 마시는 사람이 거의 없다. 원래 젊은 사람 취향이기도 하지만 속이 부대껴서 찬 것은 못 마시겠다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도 박성환은 찬 커피를 찾았다. 이전에도 그랬던 것 같다. 박성환 말이 워낙 속에서 열불이 나나 보단다. 그러니 찬 것을 찾는다나.

박성환이 먼저 신돌석씨에게 요즘 노동운동은 어떠냐고 물었다. 신돌석씨는 딱히 한마디로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이 노동운동 일선에서 뛰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고, 전체 판을 읽을 만한 위치나 역량도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신돌석씨가 아는 정도는 박성환이 다 알 것 같기도 하여 말이 주저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주섬주섬 이야기를 해보았다. 제도개선 투쟁과 관련해서는 전태일 3법을 개정, 제정하기 위해 작년 말에 힘을 쏟았는데 잘 된 것 같지 않고, ILO기본협약 중 비준하지 않았던 넷 중 셋은 올 2월 임시국회에서 비준되었지만, 그를 뒷받침할 노동법 개정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정치일정과 관련해서는 내년 대선에 맞추어서 올해 가을부터 각 부문별로 노동자대회, 농민대회, 빈민대회를 한 뒤 대선 직전인 내년 초에 민중대회를 열어서 민중역량을 최대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의견들이 모아진다고 하였다. 투쟁의 주전선은 이제 비정규직, 플랫폼노동자 등으로 옮겨 오고 있다고 보이는데, 아직 전선을 단일대오로 형성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자 박성환은 민중운동이 주민자치, 마을자치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솔직히 민중운동이 그럴 의사가 있는지도 의문이고, 그럴 여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가 들었다. 현 정부가 노동문제에서 개혁 역주행을 한 점이 문제의 근본이겠지만, 어쨌든 그에 대한 노동진영의 대처도 여러 가지로 미숙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자본측이 걸어오는 싸움들 때문에 노동진영은 허덕이고 있는데, 지금 새삼 주민자치, 마을자치 등을 노동진영에서 이슈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뭔가 안 맞아 보였다. 게다가 아직 신돌석씨는 이런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적지 않게 있었다. 지나치게 제도 내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거의 무정부주의 성향을 띠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이 직접민주주의라는 같은 목표를 말한다고 해서 하나의 이념적 지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박성환에게는 하지 않았다. 공연히 이야기가 샛길로 갈 것 같아서였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박성환의 말은 이랬다. 20여 년 전부터 지방자치가 본격화될 때 주민자치는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제도정치권이나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로 인식되었고, 이른바 민중운동진영 혹은 진보정치는 그에 대해 거의 대비가 없었다. 대비가 없었다는 것은 인식 정도가 미약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주민자치는 오히려 보수적인 색채를 띤 사람들이 훨씬 자리를 잡았다. 이들을 단순히 수구와 같은 사람들로 보면 안 된다. 이들은 그 나름대로 주민자치에 대한 이론도 갖추고 있고, 전국적인 네트워크도 형성하고 있다. 이전과 같은 관변조직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일부 시민단체 인사들이 주민자치의 역량 강화를 위해 주민자치 중간조직, 마을공동체를 조직하며 뛰어들었고,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민관협치를 통해 이들이 정부 여당이 단체장을 배출한 지자체의 지원을 알게 모르게 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특히 박원순 시장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뒤 본격화되었다. 작년 가을에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에 그 동안 시범사업으로만 하던 주민자치회의 근거 조항이 들어갔는데, 야당의 끈질긴 반대로 삭제되는 일이 있었다. 이들의 주민자치회의 법적 근거 조항에 대한 거부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민주당에서도 문제를 느끼는 의원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주로 단체장 출신으로 이전부터 주민자치에 소신을 가졌던 의원 몇몇이 그렇고 대다수는 생각이 별로 없거나 야당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박성환의 말로는 주민자치회의 법적 근거 조항이 삭제되었을 때 성명서도 내고 하였지만, 당사자인 주민자치회는 아직 시범사업으로 전국 읍면동에서는 일부에 지나지 않을 뿐이어서 투쟁의 주체로 나서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중간조직이나 마을센터 등이 나서기도 모양새가 안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진보정치나 민중운동진영에서 이 문제에 제대로 된 관심을 갖고 있는 조직을 발견하기 어렵더라고 한다. 자기네 지역에서도 풀뿌리 주민운동을 하는 곳이 아니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지방자치법 근거조항이 삭제된 뒤 지방자치법 재개정을 여당 의원들이 발의하였고, 아예 주민자치기본법을 발의하여 주민자치회에 대한 규정과 지원 등을 법적으로 제도화하려고 하는 여당 의원의 발의가 있었다. 구청장 출신인 이 의원의 대표 발의에 일부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 특히 자치단체장 출신 의원들이 공동발의자로 참여하였다. 이번에는 야당에서 반대안이 발의되었다. 그 안에서도 주민자치회의 법제화를 이야기하였지만 핵심적인 내용에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 안은 여러모로 함량 미달이었다. 그러자 야당 의원이 발의한 안과 기본 내용은 같으면서 좀더 세련된 안이 여당 중진 의원에 의해 대표 발의되고, 훨씬 더 많은 여당 의원들이 공동발의에 참여하였다. 더욱이 진보정당의 이름만 말하면 알 중진의원도 공동발의 명단에 들어가 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가? 박성환은 주민자치 법제화에 대해 정치적 논리가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되고, 진보정치나 민중운동진영은 이에 대해 아무런 견해가 없는 것 같다고 한다. 이제 그나마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을 무로 되돌리려는 야당의 공세가 시작될 것이고, 그와 결합되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부 조직이 주민자치라는 명분으로 시민단체, 중간조직 거세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풀뿌리 자치가 아니라 풀뿌리 보수로 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심각성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이 말을 들으면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새로 듣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대체로 아는 이야기였다. 지역에서 논의할 때는 신돌석씨는 주민자치 활동가 단체들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견해를 많이 말하였다. 하지만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 진보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무관심이었다. 잘 모르기도 하려니와 그런 것에 우리가 왜 힘을 쏟아야 하느냐는 생각인 듯하였다.

어차피 둘이 이야기한다고 어떤 결론이 날 수는 없었다. 다만 상황과 문제의식을 공유한 것이 의미가 있었다. 커피를 다 마시니 시간이 꽤 늦었다. 슬슬 내려갈 때가 되었다. 내려가는 길에 박성환이 신돌석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돌석아, 내가 왜 너를 좋아하는지 아냐?”

신돌석씨는 뚱딴지같은 소리에 피식 웃었다.

“야, 그거야 임마 좋으니까 좋은 거겠지? 아니 니가 나 좋아하긴 하냐?”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 나와 닮았기 때문이다. 기억나냐? 재수 때 예비고사 보고 매미집 갔던 일. 그때 다른 친구들과 달리 여자들 보고 껄떡거리지 않아서 좋았지. 그리고 우리 이야기 많이 했잖아. 이제 다 잊어버렸지만 네가 어렵게 살았다는 이야기, 공장 다니면서 예비고사 보았다는 이야기에 울컥했다. 그때 왠지 언젠가 네가 노동운동 같은 걸 하리라고 생각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둘이 닮았다는 것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뭐가 닮았을까? 매미집에서 여자 보고 껄덕대지 않는 것이야 그렇지. 신돌석씨는 둘이 같이 룸싸롱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박성환이 사장을 하던 시절 어느날 룸싸롱 가본 적 있냐고 물었다. 신돌석씨는 그때까지 스텐드 바 등은 몰라도 룸싸롱에는 간 적이 없었다. 그렇게 말하자 박성환이 룸싸롱에 한 번 데리고 가겠다고 하였다. 자기는 수도 없이 가는데,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룸싸롱에서 둘은 술 마시고 노래만 하다가 나왔다. 박성환이 그때 신돌석에게 말했다. 호스테스 애들이 너한테 무지하게 고마워 할 거라고 했다. 걔들 정말 불쌍하다는 것이 박성환의 말이었다. 자기는 사업 때문에 자주 가게 되어서 아는데 자기가 귀찮게 하지 않으니까 자기한테 이야기를 많이 했단다. 제일 싫은 인간들이 검사, 경찰 등인데, 지가 무슨 제왕이나 된 듯이 여자들을 괴롭힌단다. 교수, 교사 등도 그런 데 오면 그런 개차반이 없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들을 신기한 듯 들었다고 신돌석씨가 말하자 박성환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듯 ‘그런 일이 있었나’라고만 하였다. 그게 무슨 닮은 거냐고 하니까 그게 잘 보여주는 게 있단다.

“바로 치사하게 사는 걸 제일 싫어한다는 거지.”

치사하게 사는 걸 싫어한다는 말에 신돌석씨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박성환은 자기는 치사하게 사는 걸 못 참아서 결국 이 길로 나섰다고 한다. 그냥 잠깐 눈 감고 치사하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거라는 거였다. 신돌석씨도 그 말에는 공감이 갔다. 그 오래 된 시절 시위장에서 붙잡혀서 트럭에 태워졌다가 경찰을 패고 뛰어내렸는데 끌려가는 조철구를 보고 달려가서 결국 다시 잡혔던 일이 떠올랐다. 그냥 눈 감았으면, 치사하게 생각되어도 못 본 체 했더라면 신돌석씨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박성환은 말했다. 우리는 영웅도 아니고, 천재도 아니다. 그렇다고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치사하게 구차하게 살기는 싫다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것이 우리를 노동운동으로, 풀뿌리주민운동으로 이끌었다. 누가 여기까지 오라고 한 게 아니고, 바로 우리의 그러한 성격이, 인생관이 우리를 이 길을 가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 노량진 전철역까지 가면서 박성환은 그 이야기를 이렇게 저렇게 바꿔 가면서 계속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너나 나나 누가 하라고 해서 할 사람은 아니지. 신돌석씨도 맞장구를 쳤다. 밤바람이지만 높아진 기온 때문에 꽤나 시원하게 느껴졌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