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부터 54년 9월까지 ‘북조선 실록’ 100권 발간

『북조선 실록』 100권을 발간한 김광운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석좌교수를 11일 오후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북조선 실록』 100권을 발간한 김광운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석좌교수를 11일 오후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 『일성록』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의 역사기록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없는 기록문화의 결정체로 모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당당히 등재돼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눈앞에 『북조선 실록』(민속원) 100권이 나타났다. 각권 평균 8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더구나 그 모든 사료를 기획부터 발간까지 단 사람이 총괄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오는 13일 ‘『북조선 실록』 100권 간행 기념 국제학술회의’를 앞두고 있는 김광운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석좌교수를 11일 오후 2시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실에서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김광운 교수는 “국호는 고유명사니까 서로 존중해 줘야 하고 남북이 있으니까 남한, 북조선으로 부르는 게 좋겠다고 한 고 서동만 교수의 견해를 받아들였고, 우리 고유의 역사기록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보자는 의미에서 북한에서 발생했던 일들을 편년의 형식을 빌려서 기록하는 것이니까 조선왕조실록 처럼 실록을 붙여 북조선실록이라고 했다”고 운을 뗐다.

이어 “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1945년 8월 15일 광복부터 시작해서 계속 내려오며 일별로 정리하는데, 같은 날짜일 경우에는 북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영향을 많이 끼치는 문제를 중심으로 선별한다”며 “북이 생산한 자료들도 있지만 국외에서 생산한 자료들도 찾아서 집어 넣는다”고 설명했다.

1945년 8월 15일부터 1954년 9월 23일까지를 일지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 124권이고, 그 중 연내 발간 예정인 한국전쟁시기 74-97권을 제외하면 딱 100권이 출간된 것. 각권 평균 800쪽이니 약 8만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자료 수집, 선별, 편집은 혼자 한다”

1945년 8월 15일부터 1954년 9월 23일까지, 한국전쟁 시기(74-97권)을 제외하고 1-124권 딱 100권이 출간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1945년 8월 15일부터 1954년 9월 23일까지, 한국전쟁 시기(74-97권)을 제외하고 1-124권 딱 100권이 출간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원자료에 대해서는 “북한 자료에서 기본은 노동신문, 민주조선, 청년전위, 조선인민군, 평양신문이고, 당 기관잡지 근로자 등에서도 자료를 뽑고 있다”며 “국외의 자료로는 중국 인민일보의 북한 관련 자료는 다 선별 번역해서 싣고 있고, 미국 국무부 외교자료(FRUS)에서 북한 관련 자료 주요한 것을 선별해서 내고 있고, 소련 자료도 번역해서 싣는 식으로 북한 관련된 것은 모을 수 있는 것은 다 모으고, 서울에서 내는 것도 북한자료에서는 안 나타나는 것을 집어넣는 식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러다 보니 분량이 많아지게 마련. “초기에는 3,4개월(분량)이 (한 권에)들어가지만 뒤로 가면 보름이면 8,9백 페이지가 된다”는 것. 실제로 73권의 경우 1951.1128-12.17 20일 분량이 9백 쪽이 넘는다.

실로 방대한 ‘실록’ 작업을 혼자서 진두지휘하고 있는 김광운 교수는 “자료 수집, 선별, 편집은 혼자 한다”며 “나누어서도 시도해 봤지만 일관된 작업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실무는 작업팀 5명과 외부의 몇 명이 맡고 있고, 출판, 번역 등은 외부에서 다 해 준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같은 안정된 출간 체계는 박재규 경남대 총장의 전적인 공감과 지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6.15남북정상회담 당시 통일부장관을 역임한 박 총장은 북한 자료의 필요성을 절감해 “흔쾌히” 지원에 나섰다고.

NARA 국편 부스부터 IMF 외환위기 기회까지

국사편찬위원회(국편)에 오랫동안 몸담아온 김광운 교수가 『북조선 실록』발간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국편 자료수집 행정업무를 보면서 김대중 정부 시기 △한국현대사 △민주화운동 △북한통일 관련 자료들을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본격적으로 수집하면서부터였다고. 당시 국편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2층에 별도 부스를 설치해 자료를 수집할 정도로 열성적이었고, 그때 확보한 독도 관련 자료는 이후 일본과의 독도 논쟁에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다고.

이같은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국편은 한국현대사 자료 수집에 주력하게 됐고,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생겨 맡게 됐지만 북한통일 관련 자료는 제대로 수집하는 기관이 없어 자신이 관심을 두고 수집하게 됐다는 것.

기회는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오는 것일까. 김 교수는 “IMF 외환위기가 하나의 계기였다”고 회고했다. IMF로 인해 대학이나 연구기관들이 제일 먼저 없앤 게 자료실이고, 북한통일 자료를 모으고 있던 김 교수에게 ‘버리다시피한’ 자료들이 쏟아져 들어오게 됐다.

더구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북한 관련 자료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북한 자료를 거저 가져올 수 있는 기회도 적지 않았다고.

김 교수는 “자료가 있다면 안 간 곳이 없다. 무조건 찾아가서 살펴보고 부탁, 사정하고 어쩔 때는 안 주면 복사라도 해왔다”며 “요즘에는 ‘북조선 실록’이 나오니까 자기 자료 일부를 주는 분들도 있다”고 전했다.

내년 4월 150권 발간...“자료발굴, 연구 기초 제공일 뿐”

김광운 교수는 북한 연구의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이 자료를 온전히 활용해 연구결과를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의미”라고 말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김광운 교수는 북한 연구의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이 자료를 온전히 활용해 연구결과를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의미”라고 말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추후 계획은 일단 연내로 한국전쟁 시기에 해당하는 74-97권을 발간하고, 내년 4월까지 1954년 9월부터 1955년 10월까지 125-150권을 발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나아가 “과거 북한 자료를 PDF 형식이나 영인방식으로 출판한 것은 읽기도 힘들고 활용에도 한계가 있다”며 “어렵고 더디지만 풀텍스트를 입력해 종이책을 내고 검색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자료발굴이 연구라고 착각한 적이 있다”며 “최초 발굴도 연구는 아니다. 연구의 기초 제공일 뿐”이라고 선을 긋고 “자료발굴을 더 이상 크게 의미 없는 걸로 만들어가는 거다”라고 ‘북조선 실록’ 발간에 의미를 부여했다.

나아가 “이 자료를 온전히 활용해 연구결과를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의미”라며 “미국 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미국 자료 일부와 북한 자료를 활용해서 냉전의 기원을 찾았다면, 우리는 북한 자료를 찾아서 우리의 현실에서 필요한 평화군축의 가능성 찾을 수 있다”고 제시했다.

실제로 북한 원자료들을 검토해 보면,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1월 1일 김일성 주석의 신년사에 평화라는 단어가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가 하면, 1950년대 중반에는 북한에서 주도적으로 군축을 제안하기도 했다는 것.

자력갱생, 중공업 우선, 시장...“맥락을 알아야 한다”

그는 또한 “조선로동당이 걸어온 맥락을 알아야 한다”며 “자력갱생이라는 조선로동당의 기본 이념, 철학이 만들어진 계기는 가장 가까운 중국에 의한 것”이라고 짚었다. 1951년 1월 2일자 노동신문에 실린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에서 진술한 김일성 동지의 보고’ 중 “우리 민족의 자력갱생 여하는 우리 당사업과 우리 인민군 투쟁여하에 달려있습니다”라는 언명에서 처음으로 자력갱생이 언급된 것.

그는 “중국인민지원군이 들어와서 대국주의를 한 거다. 그래서 소련이나 중국의 도움을 받지만 전쟁 승리 여부는 기본적으로 조선인민의 자력갱생에 달려있다고 한 것”이라며 “자력갱생이 외부적 봉쇄로 인한 경제적 자립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맥락에서 1953년 8월 5일 조선로동당 중앙위 제6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은 역사적인 ‘모든 것을 전후인민경제복구발전을 위하여’를 발표했지만 그 연설문이 노동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당시 소련이 복구비용 10억 루블을 지원하면서 박창옥 국가계획위원장을 내세워 중공업은 소련 등 사회주의권 분업체계에 맡기라며 ‘중공업 우선, 경공업·농업 동시발전’ 노선을 무시했다는 것. 결국 1956년 종파투쟁을 거친 뒤에야 김 주석의 노선이 온전히 승리할 수 있었다고. 그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누구나 쓸 수 있도록 자료를 제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 주석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또한 “북한에서 시장이 없던 시절은 없었지만 시장화는 자본주의 시장경제화로 서로 다른 것”이라며 “북한 연구자가 시장과 시장화의 차이도 모르면 안 되지 않나”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13일 국제학술회의...이만열 “북한 연구를 한 단계 올릴 수 있을 것”

13일  ‘『북조선 실록』 100권 간행 기념 국제학술회의’가 온.오프 방식을 병행해 열린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13일  ‘『북조선 실록』 100권 간행 기념 국제학술회의’가 온.오프 방식을 병행해 열린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한편, ‘『북조선 실록』 100권 간행 기념 국제학술회의’는 오는 13일 오전 10시부터 북한대학원대학교 대회의실과 인터넷 줌 화상회의 방식을 병행해 진행되며 박재규 경남대 총장의 개회사, 오코노기 마사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교수의 기조발제에 이어 김광운 교수를 비롯한 국내외 학자들이 참여하는 토론회로 진행될 예정이다.

자문위원으로 힘을 보탠 이만열 전 국편 위원장은 “북조선실록의 간행으로 북한 연구를 한 단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며 “북한 관련 거짓 지식과 정보를 없앨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헌사했다.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연구자들에게 최고의 희소식”이라며 “북한 텍스트 정본화는 대립·갈등·분열의 작업에서 화해·협력의 원점이 될 작업”이라고 기대감을 비쳤다.

썬즈화 중국 화동사범대학 종신교수는 “북조선실록은 거의 복음과 같은 자료집”이라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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