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조선공산당의 노선 전환과 수세에 몰린 좌익

1946년 1월 1일까지 모스크바 결정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던 조선공산당은 1월 2일 중앙위원회 명의로 발표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에 대한 태도’에서 “모스크바 삼상회담의 결정을 신중히 검토한 결과 이번 회담은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또 한 걸음 진보”이며 “이러한 국제적 결정은 금일 조선을 위하여 가장 정당한 것이라 우리는 인정한다”고 밝혔다. 또한 “삼국의 우의적 원조와 협력‘신탁’을 흡사 제국주의적 신탁통치제라고 왜곡하고 연합국을 적대방면으로 대중을 기만하는 정책을 쓰고자 하는 김구일파의 소위 반신탁운동은 조선을 위하여 극히 위험천만한 결과를 나타낼 것은 필연이다”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는 같은 날 미영중소 4개국에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전문을 보내는 등 좌익은 이른바 ‘3상회의 결정 전면 지지노선’을 명확히 했다.(주1)

우익의 신탁통치 반대와 달리 ‘삼상회의 결정 절대지지’를 주장한 좌익의 집회.
우익의 신탁통치 반대와 달리 ‘삼상회의 결정 절대지지’를 주장한 좌익의 집회.

1월 3일 조선공산당은 모스크바 결정 지지노선을 더욱 명확히 드러냈으며 탁치는 식민지화가 아니라 독립을 위한 것이라며 탁치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해설하였다. 조공은 “삼상회담에서 즉시절대독립”은 승인되지 못했지만 일방적인 식지화의 위험이 제거되고 “우리 실력 여하에 따라 자주독립이 성립될 수 있는 보장을 얻은 것”은 “실로 조선 문제 해결에 대한 커다란 진전”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신탁이 5개년 기간 내에 어느 때든지 “우리민족의 역량에 의하여 철폐할 것을 결정한 것”은 “신탁이 독립과 대립된 것이 아니”고 “독립을 촉성하는 신탁”이며, 따라서 “시급히 민족통일전선(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여 “자주독립을 전취할 것을 대중 앞에 제의하”고 “반신탁운동을 민족통일전선 전환하는 동시”에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절대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주2)

조선공산당은 신탁을 거친 독립 보다 즉시 독립을 선호했으나 탁치가 독립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독립을 위한 방책이므로 이에 찬성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도 국민들의 반탁감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찬탁’이란 표현은 쓰지 않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삼상회담 결정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반신탁운동을 민족통일전선 결성 운동을 위한 삼상결정 지지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공산당은 1월 3일을 기점으로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를 명확히 함으로써 우익의 탁치반대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월 3일 서울운동장에서는 서울시인민위원회, 정(町: 현재의 동)연합회, 반파쇼투쟁위원회 공동주최로 ‘탁치반대 민족통일촉성시민대회’를 개최하기로 예고되어 있었는데, 이 대회는 탁치반대노선 대신 삼상회의 결정지지노선으로 뒤바뀌었다. 이 대회에서는 지지전문을 통해 ‘신탁’은 곧 ‘협력’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조선공산당의 노선 변경으로 조선공산당은 대중으로부터 큰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의 노선 선회를 두고 우익에서는 ‘소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소련 지령설’은 박헌영이 1945년 12월 29일부터 1946년 1월 1일까지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고 나서 노선전환이 이뤄진 것이었기에 대중에게는 매우 설득력 있게 먹혀들었다.

실제로 박헌영은 이 기간 동안 평양을 방문해 소련군사령부 지도자, 김일성 등 북한의 주요 정치지도자들과 모스크바 결정과 관련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박헌영은 이때 소련군측으로부터 모스크바 결정과 관련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소련군측은 미국과 소련의 의견이 달랐고 미국이 신탁통치를 강력 주장해 하는 수없이 절충안으로 5년간의 후견제를 수용하게 된 것이며, 후견제는 신탁통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밝혔다. 박헌영은 북한 방문을 통해 반탁이 아니라 모스크바 결정지지를 어떻게 대중적으로 실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아울러 모스크바 결정에서 제기된 조선의 제정당·사회단체들과 협의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문제를 중점 논의했는데 남북의 정당과 사회단체를 재정비, 확대 강화하기 위해 당조직을 정비하고 대중단체들과의 통일전선을 강화하는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주3)

박헌영이 평양을 방문해 소련군과 김일성을 만난 것이 조선공산당의 1946년 1월 3일의 노선 전환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것은 명확하다. 그러나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소련의 지령에 따른 갑작스런 노선변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공산당은 1945년 10월에 빈센트 국장의 발언에 대해 ‘반탁’ 의견을 밝힌 것은 즉시 독립에 대한 당연한 요구였고, 모스크바 협상후 12월 28일부터는 조심스런 입장을 보이다가 1946년 1월 초의 모스크바 지지노선은 삼상회의에 대한 자세한 배경과 내용 확인한 뒤 모스크바지지 입장을 표명한 것이었다. 실제로 모스크바 결정 과정과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련의 설명이 타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상황은 소련의 설명이 먹혀들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중적으로 반탁 감정이 너무 강렬했고, 공산당의 태도가 소련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라는 주장이 먹힐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이용, 임정의 주도 아래 한민당, 동아일보 등 우익세력이 ‘찬탁=친소=친공=매국’ ‘반탁=반공=애국’이라는 등식을 끊임없이 주장함으로써 대립 전선의 전환과 정치적 주도권 확보에 성공할 수 있었다.

소련의 모스크바 결정 과정 공개와 갈등

더욱이 1월 5일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국내외 기자들과 가진 기자회견 내용이 왜곡되어 보도되면서 공산당과 좌익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미군정과 친밀했던 소수의 기자 중 한명이었던 『뉴욕 타임즈』 특파원 존 스톤(John Stone)은 박헌영이 한국에서 소련 일국의 신탁통치안과 소련 연방 가입을 주장했다고 보도했다고 한국 언론에 인용 보도된 것이다. 이 보도는 『뉴욕 타임즈』에 실리지도 않았는데 『뉴욕 타임즈』발로 인용되어 국내 언론에 대서특필한 것이었다. 이 보도는 ‘악질 공산분자에게 터트린 원자폭탄’과도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기사가 보도되자 한민당은 “박헌영을 타도하라”는 전단을 유포하였고, 우익들은 ‘악질 공산주의자’ 박헌영을 매국노로 몰아갔다. 반탁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상황에서 조공이 찬탁(삼상결정지지)으로 돌아선 시점에서 이런 대형 악재가 터졌으니 모두 소련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 이는 한국의 우익세력과 언론에 의해 박헌영과 공산당이 소련의 괴뢰에 불과하다는 증거로 널리 유포되었다.(주4)

당시 이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다른 미국기자들은 박헌영이 “한국인에 의하여 한국을 위하여 운영되는 한국”을 원한다는 내용으로 말했다고 주장했으며, 많은 한국인 기자들도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발언을 했다. 미군정 내부 보고들은 박헌영이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하였으며 그의 발언이 “완전히 그릇되게 전달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당시 대민홍보국에서 ‘정계동향(Political Trends)을 작성하고 있던 버취 중위는 존 스톤의 보도가 허위였다는 정정기사를 써도 되겠냐고 공보국장 뉴먼 대령에게 질문했더니 뉴먼은 ’안된다‘며 “그냥 내버려두라”고 했다. 하지는 후에 이에 대해 “신탁통치, 소련의 지배 및 공산주의는 전부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이러한 의미들을 반드시 하나로 묶어서 쓰게 마련이었다”고 회고했다.(주5)

1945년 12월 28일부터 시작된 탁치반대 운동의 거센 열풍이 1946년 1월 중순까지도 꺼지지 않고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좌익이 정치적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탁통치 주장이 소련에 의해 제기된 것이라는 왜곡 주장이 난무하면서 반소, 반공 감정이 대중들 사이에 강하게 자리잡게 되었고, 공산당과 좌익은 소련의 괴뢰, 꼭두각시처럼 선동되었다. 이처럼 사실이 왜곡되고 소련과 공산당이 매도되는 가운데 반탁운동이 지속되는 것을 보면서도 미군정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미군정은 은근히 반탁운동을 지원하면서 우익과 대중의 반소, 반공 감정을 부추기고 있었다. 이에 소련이 반격에 나섰다.

소련 관영 『타스(Tass) 통신』이 1월 22일 미군정이 반탁운동을 지원하고 있다며 비난하였고, 1월 23일에는 ‘조선 반동분자들이 반동을 더욱 계속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김구·이승만의 반탁운동을 강력 비판하였다. 1월 23일에는 소련 수상 스탈린이 주소미국대사 해리만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에서 온 전보를 읽어주면서 “한국 신문들이 미국이 아닌 소련만이 신탁통치를 고집하였다고 보도했다”며 미군정이 이에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 다음날 1월 24일 모스크바 방송은 애초 미국측이 장기간의 신탁통치안을 제안하였으나 소련측이 5년으로 수정했으며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1월 26일 미소 협상을 위해 서울에 와 있던 소련 대표 스티코프(T. Shtykov)가 1월 25일의 ‘타스통신’ 보도 내용을 바탕으로 모스크바 결정 과정에 대해 공개하였다.(주6)

박헌영의 언론 인터뷰를 왜곡조작한 존 스턴을 인용보도한 동아일보 1946년 1월 20일자 기사
박헌영의 언론 인터뷰를 왜곡조작한 존 스턴을 인용보도한 동아일보 1946년 1월 20일자 기사

소련이 일방적으로 모스크바 협정의 진행 과정을 공개하자 1월 25일 애치슨 미국무부차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모스크바 방송 보도를 대체로 인정하였다. 1월 26일 번즈 미국무장관은 하지에게 보내는 전문을 통해 소련의 보도가 정확하다고 알렸다. 주소 미국대사 해리만은 서울로 와서 하지에게 신탁통치는 루즈벨트의 생각이었으며 모스크바 회담에서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 신탁통치를 추진했고 모스크바 협정은 준수되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하지는 모스크바 협정에 대해 비판하면서 자신의 ‘건의사항’이 무시된 것에 항의하였다. 또한 이 무렵부터 미국 내에서도 소련과의 협조 노선에 대한 회의론이 강하게 대두되었는데 트루먼도 번즈가 소련과의 협상에서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는 불만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워싱턴의 기류는 대소 강경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하지와 맥아더 등 현지 점령군 사령관 등 군부의 움직임과 함께 미소공동위원회의 앞날에 먹구름으로 작용할 것이었다.(주7)

신탁통치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주장을 최초로 왜곡보도한 '태평양 성조기'의 1945년 12월 27일자 1면. 미군이 운영하는 이 신문의 해당기사는 당시 ‘날조전문가’로 유명했던 랄프 헤인젠 기자가 썼다.(사진=정용욱/ 한겨레 2019.8.9)
신탁통치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주장을 최초로 왜곡보도한 '태평양 성조기'의 1945년 12월 27일자 1면. 미군이 운영하는 이 신문의 해당기사는 당시 ‘날조전문가’로 유명했던 랄프 헤인젠 기자가 썼다.(사진=정용욱/ 한겨레 2019.8.9)

좌우의 분열과 민전-민주의원 대립구도

모스크바 협정 발표 이후 탁치 정국이 조성되면서 혼선이 계속되자 인공과 임정의 합작 시도, 4당공동코뮤니케, 5당통일운동 등이 진행되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우익은 반탁투쟁 과정에서 사실 왜곡과 정치선동을 통해 반소, 반공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탁치 분쟁 과정에서 항일민족세력과 친일민족세력의 대립구도가 점차 좌우익의 이념적 대립구도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좌우 대립구도는 5당회담이 결렬된 1월 16일 이후 가속화되었다.

1월 20일 임정을 중심으로 한민당, 국민당, 신한민족당, 조선민주당(이북), 한국독립당 등 반탁진영의 21개 정당·사회단체가 참석한 비상정치회의 제1차 준비회의가 열려 조선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였다. 1월 23일 비상정치회의에 이승만의 독촉중협이 합류를 제안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비상국민회의로 개편을 추진하였다. 그러자 1월 23일 임정요인 김성숙(조선민족해방동맹)은 좌익을 제외한 우익만의 비상정치회의는 민족분열을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의사를 피력하고 탈퇴를 선언하였으며, 임정요인 김원봉·성주식(조선민족혁명당) 또한 우익편향을 비판, 탈퇴하였다.(주8) 1월 29일 조공, 독립동맹(조선신민당), 전평, 전농 등은 “비상국민회의가 반민주적 경향에서 소집되는 비원칙적 회합이며, 임정봉대의 정치적 성격을 가진 음모적 회합”이라는 이유로 불참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주9)

반탁연설을 하는 김구. 그의 열정적인 반탁운동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항일민족세력 대 친일반민족세력의 민족적 대립구도를 좌익과 우익의 이념적 대립구도로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탁연설을 하는 김구. 그의 열정적인 반탁운동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항일민족세력 대 친일반민족세력의 민족적 대립구도를 좌익과 우익의 이념적 대립구도로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월 1일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어 상임위원(주10)과 최고정무위원(28명)(주11)을 선출하는 등 이틀간 진행한 뒤 휴회 상태에 들어갔다. 2월 5일 임정요인 장건상이 비상국민회의 탈퇴를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유림 또한 “비상국민회의는 임시정부의 법통으로 보아 비법적”으로 이승만이 사전에 계획한 공작을 실현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탈퇴하였다. 2월 14일 여운형, 함태영, 김창숙, 정인보, 조소앙 등이 불참한 가운데 비상국민회의 성립식이 열렸는데 참석자는 모두 우익인사들이었다. 이날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가 미군정의 요청에 따라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이하 ‘민주의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미군정 자문기구로 탈바꿈하였다. 이에 조선인민당은 긴급중앙회의를 열어 “자문위원회를 남조선대표민주의원이라 명칭을 변경하였을 뿐”으로 “본당이 제시한 조건에 명확히 위배되는” 것이므로 탈퇴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주12)

남조선 민주의원 성립을 보도한 동아일보 1946년 2월 15일자 기사
남조선 민주의원 성립을 보도한 동아일보 1946년 2월 15일자 기사

미군정은 여운형 등의 온건좌파를 포섭하여 민주의원에 합류시켜 좌익을 분열시키고 우익이 주도하는 정치상황을 마련하고자 했으나 여운형(인민당)뿐만 아니라 임정의 좌파와 일부중도세력까지 이탈하는 등으로 민주의원은 보수우익만의 조직이 되고 말았다. 미군정은 애초의 목적 실현에 실패하였으나 이승만은 민주의원 의장이 됨으로써 김구와 임정이 갈고 닦은 반탁투쟁의 과실을 손쉽게 따먹었다.

반탁운동을 통해 우익이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결집을 시도하자 좌익 또한 이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세력 결집을 시도하였다. 1월 19일 조선공산당을 비롯하여 조선인민당, 독립동맹, 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농민조합전국총연맹(전농), 청년총연맹(청총), 부녀총동맹(여총), 문학가동맹, 과학기술단체동맹 등 29개 정당·사회단체가 모여 회의를 열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 요소를 결집하여 강력한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고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준비발기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1946년 1월 24일 우익만의 결집에 반발해 비상국민회의를 떠난 임정의 김원봉, 김성숙, 성주식 등이 여기에 가담하였고, 1월 31일에는 김일성, 김두봉, 한빈, 최용건, 김책, 강기덕, 최창익 등 7명의 이북지도자를 포함, 24명의 준비위원이 선정되었다. 민전에는 인민당과 공산당, 독립동맹을 주축으로 조선학술원, 조선어학회, 진단학회 등 비정치적 성격의 학술단체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독립동맹은 민족통일전선의 적임자라고 자처하였다.(주13)

민주주의민족전선 명의로 제작, 살포된 1946년 3.1운동 기념대회 전단(사진자료=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민주주의민족전선 명의로 제작, 살포된 1946년 3.1운동 기념대회 전단(사진자료=대한민국역사박물관).

좌익세력이 민전 결성을 서두른 것은 탁치정국에서 우익에 빼앗긴 주도권을 되찾고, 우익의 세력 결집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좌익이 인공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었는데 인공이 임정과의 합작시도, 5당회의 등을 통해 통일전선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인공 또한 정부를 지향한다는 형식상의 문제 때문에 미소공위에 참가할 수 없게 된 급박한 상황도 작용했다. 준비과정을 거쳐 2월 15〜16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정식으로 결성되었다.(주14)

해방 후 첫 3.1 기념일을 앞두고 우익 성향의 전국청년총연합회, 전국여자청년총연합에서 제작 살포한 1946년 3.1절 기념 전단(자료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해방 후 첫 3.1 기념일을 앞두고 우익 성향의 전국청년총연합회, 전국여자청년총연합에서 제작 살포한 1946년 3.1절 기념 전단(자료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렇게 되면서 좌우대립 구도가 명확하게 형성되었다. 우익진영은 반탁을 기치로 단결해 지도급 인사들이 민주의원으로 결집하였고, 반탁투쟁위원회, 반공단체 등을 통해 대중적인 조직동원과 테러 활동을 감행하였다. 좌익진영은 ‘모스크바 총제적 지지’ 구호로 단결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으로 조직과 인물들이 결집, 모스크바 결정 성사 및 미소공동위원회 성공 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이제 한반도의 정치적 대립전선은 항일민족세력과 반민족세력의 대결이 아니라 좌우익으로 대결로 바뀌었는데, 1946년 3.1절 집회를 좌우익이 따로 개최한 것은 그와 같은 대립구도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좌익의 3.1기념전국위원회측은 남산에서, 우익의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측은 서울운동장에서 각각 따로 기념식을 갖고 서울 시내 행진도 각기 따로 하였다.

탁치 분쟁으로 북한의 좌우동거체제 붕괴

모스크바 협정 이후 탁치 분쟁이 시작되면서 한반도의 앞길에 먹구름이 덮이기 시작했다. 그 먹구름은 한반도를 두 동강으로 갈라놓을 수 있는 위험한 것이었다. 미소의 분할점령으로 분단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면 탁치 분쟁은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간 것이었다. 한반도 내의 정치세력이 단결되어 공동으로 대응하더라도 남북이 미소에 의해 분할 점령된 상태에서 통일적인 자주국가를 수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스크바 결정 이후 탁치반대든 찬성이든 어느 한쪽으로 한반도 내부가 통일되었다면 분단이 쉽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점에서 역사를 돌아볼 때 탁치 분쟁에서 좌우익의 대응은 모두 문제가 있었다.

탁치반대를 주장한 우익의 경우, 김구의 임정과 한민당·이승만은 다른 의도로 접근했다. 임정이 즉시 독립의 요구, 제2의 3.1운동의 심정으로 반탁운동을 펼쳤다면, 한민당과 이승만은 좌익으로부터 주도권을 탈취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한다는 정략적 의도가 컸다. 하지만 한반도의 정치 상황에 미친 결과는 동일했다. 이념대립과 민족 분열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좌초시켜 분단으로 가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좌익의 경우도 대응 과정에서 심각한 전술적 착오를 범했다. 처음 신중한 태도로 관망하다가 박헌영의 평양 방문 이후 1월 초 ‘모스크바 결정 총제적 지지’로 노선을 변경했는데 이때는 이미 대중적 열망이 ‘반탁’으로 상당히 기울어진 상태였고, 거기다가 미군정과 언론의 ‘가짜뉴스’를 통한 ‘반소·반공 캠페인’과 ‘공산당=소련의 괴뢰 공작’이 성과를 거두면서 대중적 신뢰를 상실하고 정치적 주도권까지 빼앗기게 되었다. 이후 이남에서는 좌우 대립이 기본적인 정치 구도로 작용하였다.

북한의 경우도 분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소련군이 장악한 상태에서 그 내막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공산당(북조선분국)과 대중단체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였기에 큰 혼란은 없었다. 그러나 조선민주당 지도자 조만식은 모스크바 결정에 대해 반탁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소련군정과 갈라서며 북한에서 좌우동거체제가 무너지고 말았다. 탁치 문제는 결국 이북의 정치상황도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던 것이다.

소련군 장교 메클레르와 함께 한 조만식과 김일성. 탁치 문제가 등장하기 전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으나 조만식이 신탁통치 결사 반대 입장을 고수하면서 소련군·김일성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소련군 장교 메클레르와 함께 한 조만식과 김일성. 탁치 문제가 등장하기 전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으나 조만식이 신탁통치 결사 반대 입장을 고수하면서 소련군·김일성과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12월 30일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은 조만식을 불러 모스크바 결정 소식을 전하며 그에게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조만식은 즉답을 피하고 “신탁통치 문제는 우리 민족에게 너무 중대한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가부를 결정할 수 없으니 당헌에 따라 총의를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조만식은 이후 고심 끝에 조선민주당 당중앙위원회를 소집, “신탁통치를 찬성할 수 없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후 소련군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조만식을 설득하고자 했다. 오산학교 제자였던 공산당의 의 실력자 최용건은 “열아홉 차례나 만나서 설득”하였으나 조만식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김일성도 만나고 치스차코프도 만나고 로마넨코도 만났으나 소용이 없었다. 소련군은 정책에 협조한다면 새 저부의 수반이 될 것이라는 암시도 했지만 조만식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만식은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조선민주당은 최용건이 장악, 공산당의 위성정당이 되었다.(주15)

북한의 3.1절 기념 대회(사진=뉴시스)
북한의 3.1절 기념 대회(사진=뉴시스)

이북에서 조만식이 퇴장하고 공산당과 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가 주도하는 토지개혁 등 민주개혁이 급진적으로 진행되었고, 이에 우익세력들이 저항하면서 1946년 2월 이후 공산당·소련군과 우익세력 사이에 충돌이 계속되었다. 조선민주당과 기독교계, 반공청년들이 남쪽으로 월남해 서북청년회 등 반공청년단을 조직해 반공투쟁, 이북에 대한 테러 활동 등에 나섰다. 1946년 3월 1일 북한의 3.1절 기념식장에서 김일성 등을 겨냥한 폭탄테러가 벌어졌고, 김책, 최용건, 강량욱 등 이북의 지도자와 소련군 장교를 겨냥한 테러 활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백의사와 임정의 정치공작대가 협력해 일으킨 것이었는데 행동대원들은 월남한 반공청년들이었다. 이 사건 후 북한에서는 이승만과 김구를 ‘테러단체의 괴수’ ‘파시스트’로 격렬히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해방 후 1945년 말까지 이북에서 좌우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지만 탁치 분쟁과 토지개혁을 거치면서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진행되었다. 기독계와 우익세력은 더 이상 이북에서 소련군과 협조하여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는 것을 포기하고 월남해 남한에서 이북에 대한 공격과 반공 활동을 펴는 방향을 전환했던 것이다. 탁치 분쟁은 이북에서 좌우연합 정치를 붕괴시켰고 남북간의 대결 구도를 보다 선명하게 만들었다. 이남에서는 좌우 대립이 기본구도가 되었고, 상호간에 테러 등 물리적 공격까지 감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숨죽이고 있던 친일파들이 반공애국자를 자청하며 부활했다.

탁지 분쟁은 민족 내부를 분열시켰고, 그 과정에서 좌우대립으로 정치구도가 바뀌었으며, 미소간에도 상호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이 커졌다. 이북의 김일성과 소련군은 이남의 미군정이 반탁운동을 부추기고 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임시정부수립 과정에서 좌익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것을 염려해 모스크바 협정을 파기하려는 의도라고 보았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모스크바 결정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의 앞날도 어두운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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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이완범, 한반도 신탁통치안과 국내정치(1943〜1948), 62쪽

2) 이완범, 한반도 신탁통치안과 국내정치(1943〜1948), 64쪽

3) 박병엽/ 유영구·정창현,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 25〜35쪽

4) 브루스커밍스/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293〜294쪽;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245쪽

5) 브루스커밍스/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294쪽;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245쪽

6) 브루스커밍스/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294쪽; 이완범, 한반도 신탁통치문제 1943〜46, 261쪽

7) 브루스커밍스/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295〜296쪽

8) 송남헌, 『해방3년사 1945-1948 Ⅰ』, 까치, 1985, 273쪽

9) 김창순, 남북한 정부수립 과정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의 활동과 정치적 배제연구,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35쪽

10) 의장 홍진, 부의장 최동오, 정무위원장 안재홍, 외교위원장 조소앙, 재정위원장 조완구, 산업경제위위원장 김성수, 국방위원장 유동열, 법제위원장 김병로, 교통위원장 백관수, 문교위원장 김관식, 예산위원장 이운, 노농위원장 유림, 후생위원장 이학송, 선전위원장 엄항섭, 청원징계위원장 조경한(송남헌, 위의 책, 278쪽)

11) 김구, 이승만,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김붕준(임정), 최익환(신한민족당), 함태영(기독교), 장면(천주교), 정인보(무소속), 김준연, 김도연, 백관수, 원세훈(한민당), 김법린(불교), 김선, 김여식, 김창숙, 권동진(신한민족당), 오세창, 이의식, 박용희, 황현숙, 안재홍(국민당), 여운형, 백상규, 황진남(인민당), 백남훈(조선신민당)(송남헌, 위의 책, 278〜279쪽)

12) 김창순, 위의 논문, 35〜36쪽

13) 김창순, 위의 논문, 36〜37쪽

14) 김창순, 위의 논문, 37〜39쪽

15) 중앙일보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상)』, 중앙일보사, 1993, 193〜199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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