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둘러싼 논란

9월 22일 평양에 들어온 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평양시 중구역 연화동 동양척식회사 평양지사 자리에 비밀사무실을 차렸다. 숙소는 그 옆의 동척사택이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김용범, 박정애 등 국내의 주요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는 한편, 각지에 파견한 공작원들로부터 지방 사정을 보고받아 이북지역의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였다. 항일유격대세력은 김일성 등의 평양에서의 활동과 지방공작의 성과를 바탕으로 1945년 9월 말 비공개 ‘중앙지도부’를 구성하였다. 귀국 전 소련에서 조직한 조선공작단 핵심 소조를 입북 후에도 그대로 유지하다가 국내에서 활동하던 김용범, 박정애, 리주연, 최경덕 등을 충원했다. 김용범과 박정애는 일제 시기부터 소련과 국내를 오가며 활동했는데 해방 후 소련군의 매개로 김일성과 연결되었다. 리주연은 김일성으로부터 가장 큰 신임을 얻은 인물이었다. 그는 1937년 김정숙을 만나서 김일성과 연결된 이래 일관되게 김일성을 지지하였다.(주1)

국내파 공산주의자 중에서 김일성을 지지했던 박정애.
국내파 공산주의자 중에서 김일성을 지지했던 박정애.

‘중앙지도부’는 해방 직후 발간된 자료에도 등장하지만 정확히 언제, 어떤 경과를 통해 구성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항일유격대세력이 귀국 직후부터 김일성 등을 ‘중앙지도부’로 불렀다고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항일유격대세력이 북한의 현재 당창건사적관과 사무실을 ‘중앙지도부’로 불렀고, 이들의 영향으로 도당이나 군당에서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김일성이 지방의 공산주의자들을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만나는 과정에서 그의 사무실을 자연스럽게 ‘중앙지도부’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주2)

국내파 중에는 김일성과 밀착한 인물도 있었지만 김일성과 대립한 인물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기섭이다. 빈농 출신의 오기섭은 일제시기 소련 약소민족동방노력자대학을 졸업했으며, 국내에서 지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해방과 함께 신의주형무소에서 출옥했다. 그는 언제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입에 달고 다녔으며 프롤레타리아트밖에 몰랐다고 할 정도로 원칙주의를 강조하였다. 이념적 원칙을 강조했던 오기섭은 자기식의 볼셰비키 당조직론을 설파하며 사사건건 김일성과 대립했다. 그는 김일성이 주도한 북조선분국 창립도 끝까지 반대했으며, 1948년 9월에는 민청문제, 농민동맹문제, 직업동맹문제 등과 관련해 좌경적인 노선으로 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오기섭은 화요파 출신들이나 박헌영 직계라 할 수 있는 이주하 등이 서울 중앙의 박헌영을 지지했던 것과 달리 독자적인 사고를 했지만 좌경적인 주장으로 김일성뿐만 아니라 다른 공산주의자들로부터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주3)

김일성은 귀국 후 활동을 통해 건당 사업을 진행하면서 미군이 점령한 이남과 달리 소련군이 진주한 이북만의 독자적인 중앙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김일성과 항일유격대세력은 같은 판단이었던 소련군의 협조를 받아 9월 말부터 이북지역의 통일적인 당 활동을 지도할 북조선 중앙조직 결성 작업을 진행하였다. 김일성은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만나 이 문제를 제기하고 설득작업에 나섰다. 김용범, 박정애, 리주연, 최경덕 등 일부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김일성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나 오기섭, 정달헌, 이주하, 김재갑 등 함남 출신 공산주의자들은 서울 당 중앙의 존재를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들은 1국에 1당, 1당에 1개의 당중앙이 통일적인 당을 이끌어간다는 것이 볼셰비키당의 원칙인데, 북조선 중앙조직 건설은 이러한 원칙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주4)

김일성의 북조선분국에 반대했던 이주하는 후에 김삼룡과 함께 남로당 지하총책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사형이 집행되었다.
김일성의 북조선분국에 반대했던 이주하는 후에 김삼룡과 함께 남로당 지하총책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사형이 집행되었다.

김일성은 여러 차례 토론을 했지만 반대하는 세력을 설득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김일성과 항일유격대세력은 이 문제를 밀어붙여 10월 5일부터 북조선분국 설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예비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예비회의는 5일 첫날부터 항일유격대세력과 김용범, 박정애 등의 분국 설치 주장과 오기섭 등의 반대 주장이 팽팽히 맞서며 공전을 거듭했다. 분국 문제를 두고 한치의 양보도 없는 논전이 계속되자 김일성은 “당신네들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 박헌영의 허락을 받기 위해 주영하‧장순명 동지를 서울에 보내자”고 제의했고 10월 6일 저녁 이들을 서울로 파견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비회의는 8일까지 계속되었다.(주5)

이에 앞서 소련군사령부는 서울 소련영사관의 프리얀스키 영사와 샤브신 부영사를 통해 이북의 당중앙 설립 정보를 박헌영에게 알려주었다. 같은 무렵 김일성도 서대문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이해 평양으로 온 갑산공작위원회 출신의 박금철과 서대문형무소를 출소해 인민공화국(인공) 조직에 관여한 뒤 9월 말 이북으로 온 김교영‧이순근을 박헌영에게 파견하는 등 여러 경로로 이 문제와 관련한 의사를 전달했지만 박헌영은 김일성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결국 10월 6일 저녁 주영하와 장순명이 소련군 지프차를 타고 38선을 넘었고 7일 아침 서울에 도착해 박헌영을 만났다. 김일성은 이들에게 “박헌영 동지를 만나 이야기가 잘 안되면 38선 인근에서 나와 만나자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박헌영을 만난 뒤 주영하와 장순명은 “박헌영이 김일성을 만나기 전에는 입장을 밝히지 않겠다고 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서울의 소련영사관을 통해 평양의 소련군사령부로 보냈다.(주6)

갑산공작위원회(보천보 습격 사건) 사건으로 체포된 박금철. 해방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해 북으로 갔다가 김일성에 의해 박헌영에게 파견되었다.
갑산공작위원회(보천보 습격 사건) 사건으로 체포된 박금철. 해방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해 북으로 갔다가 김일성에 의해 박헌영에게 파견되었다.

소련군사령부와 김일성측은 “개성 북방의 소련군 38경비사령부에서 만나자”는 답신을 보냈고, 10월 8일 저녁 김일성과 박헌영의 첫 대면이 이뤄졌다. 10월 8일 오전 예비회의를 끝낸 김일성은 오후 개성으로 향했고 저녁에 박헌영을 만났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만남은 개성의 소련군 38경비사령부 관사(이전의 역 관사)에서 8일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대여섯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두 사람은 치열한 논의를 벌였고, 박헌영이 몇 가지 조건을 붙여 김일성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박헌영의 서울 당중앙은 10월 10일로 예정된 열성자 대회 소집 권한을 위임하기로 하였고, 그에 따라 북조선분국 설치를 위한 열성자 대회가 진행될 수 있었다.(주7)

북조선분국 설치와 민족통일전선 노선

우여곡절 끝에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서북5도당 책임자 및 당열성자 대회’가 개최되었고, 마지막 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가 결정되었다. 박헌영과의 합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북조선분국 설치를 제안하자 국내파 공산주의들로부터 강한 반발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결국 논란 끝에 분국 설치가 결정되었고, 제1비서로 김용범, 제2비서로 오기섭이 선출되었다. 집행위원으로는 김일성, 김용범, 박정애, 김일, 윤상남, 오기섭, 최경덕, 김휘, 리주하, 김응기, 정달헌, 장시우, 정재달, 김책, 리동화, 허현보, 리주봉 등 17명이 선출되었다.(주8) 김일성은 책임비서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했다는 증언도 있다. 김일성이 책임비서가 되지 않은 것은 젊은 나이인데다가 아직도 공산당 내에서 헤게모니를 확실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지만, 김일성으로서는 공산당 지도자보다는 당분간 항일투쟁의 영웅으로서 민족지도자로 부각되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주9)

현재 북한은 조선노동당 창건일을 10월 10일로 공식 기념하고 있는데 1958년부터 확정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와다 하루끼 교수를 비롯해 많은 연구자들은 실제 북조선분국 창립이 결정된 날은 10월 13일이라고 보고 있다.(주10) 서동만은 북한의 공식 설명의 변화 과정과 북한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대신에 현재 ‘조선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란 명칭으로 바꾸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10월 10일을 당 창건일로 결정한 것은 김일성 중심의 당 창건을 보다 확고히 부각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무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창설은 10월 5일부터 10월 13일까지 치열한 격론 끝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남과 북의 다양한 공산주의분파들 사이의 대립과 타협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 소련의 개입과 중요한 역할이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주11)

치열한 논란 끝에 북조선분국이 결성된 다음날인 10월 14일 김일성이 대중 앞에 공식 등장했다. 소련군의 주도로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민대회’가 열린 것이다. 모란봉 기슭의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대회에는 ‘40만 명의 평양시민’이 모였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군중이 모여 전설적인 항일투사 ‘김일성 장군’의 귀국을 환영했다. 이날 김일성은 ‘모든 힘을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개선연설을 하였다. 그는 민주적인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인민대중을 망라한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며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역설했다.(주12)

평양시민 환영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일성(사진=뉴시스)
평양시민 환영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일성(사진=뉴시스)

이날 김일성의 연설에서는 김일성과 항일빨치산집단의 국가 건설 노선의 핵심인 민족통일전선 구상이 적극적으로 표출되었다. ‘인민전선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중앙의 ‘8월 테제’와는 차이가 있는 항일빨치산세력의 건국 노선이 공개적으로 표방되었던 것이다. 통일전선문제와 당조직 노선을 둘러싼 김일성과 박헌영의 차이점은 10월 8,9일에 있었던 두 사람의 첫 대면에서도 확인되었는데, 이후의 정치노선, 조직노선이 실현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두 사람의 차이가 나타났다.

김일성의 통일전선에 대한 입장은 당시 이북지역의 민족주의 및 기독교세력을 대표하고 있던 조만식과의 관계에서 잘 드러났다. 김일성은 조만식과의 적극 협력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민족통일전선을 성공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김일성은 귀국 후 9월 30일 처음으로 조만식을 만났고 그 후에도 수십 차례나 만나면서 건국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김일성과 조만식은 개인적으로도 인연도 있고 해서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는 관계가 우호적이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조만식의 숭실학교 후배였고 김일성의 외가는 조만식과 같은 기독교 장로교 계통이었다. 김일성과 소련군은 공산당이 취약한 상황에서 지식인, 중간세력 등을 조직하기 위해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결성을 적극 지원하는 등 협력관계를 이어갔다.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은 11월 3일 창당했는데 창당 1개월도 채 안 된 12월 1일 당원이 5천4백여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12월 중순경 공산당원 4천5백여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빠르게 당세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호적이었던 김일성(공산당)과 조만식(조선민주당, 기독교세력)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계기는 11월 23일에 일어난 신의주 사건이었다. 공산당의 신의주 용암포 수산학교 접수에 반발한 학생들이 반공시위를 벌이자 소련군과 보안대가 학생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1천여명의 학생들 체포한 ‘신의주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선신민당 내의 반공 경향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김일성이 직접 현장을 방문해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며 공산당의 잘못된 행동과 책임자 처벌을 약속하는 등 발 빠르게 대처해 사태는 조기에 수습되었지만, 소련군의 초기 만행과 더불어 공산당의 고압적인 행태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주13) 조만식의 조선민주당과 기독교세력의 반공 활동도 강화되면서 양측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김일성과 조만식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나아가는 것은 신탁통치 문제가 터지면서였다.

환영대회 후 만경대 고향집을 방문한 김일성과 친지들.
환영대회 후 만경대 고향집을 방문한 김일성과 친지들.

북조선 공산당의 정치노선 정비와 김일성의 당권 장악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개최된 서북5도당책임자 및 당열성자대회(이하 ‘5도당대회’)에서 북조선분국 결정을 이끌어냈지만, 당의 노선 정립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8월테제’에 입각한 주장이 대부분의 대회 문건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보고와 토론을 통해 민족통일전선 강화, 소련군이 점령한 북조선에서 민주적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혁명역량을 확대, 강화하는 방안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한편, 후에 공식화되는 북한을 혁명근거지로 해서 전국적 차원으로 확대하는 ‘민주기지론’이 언제 제기되었는가는 연구자들 사이에 중요한 논쟁거리이다. 그 시기를 두고 1945년 12월 말, 1946년 8월, 1945년 10월 서북5도당대회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민주기지론’의 경험적‧이론적 근거는 항일투쟁시기의 유격근거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표현이 구체적으로 언제 등장했는가와 상관없이 해방 직후부터 김일성은 이 같은 사고를 하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일성은 소련군이 점령한 이북을 기본적으로 혁명의 기지로 삼아 남한지역까지 확대한다는 사고는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분단 정권 노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소련과 미국의 협조를 통한 한반도 전체의 통일적인 정권 수립이라는 방향과 근본적으로 다른 북한만의 정권 강화를 생각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5도당대회 결정에 따라 1945년 10월 2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집행부가 출범하였다. 조직부장 주영하, 선전부장 윤상남, 간부부장 리동화, 청년부장 김욱진, 노동부장 최경덕, 농민부장 리순근, 부녀부장 박정애, 총무부장 박정호, 산업부장 정재달 등이었다. 서울의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0월 23일에야 북조선분국 창설을 승인하였다. 분국은 출범해 활동을 시작했지만 이북의 공산당은 혼선을 거듭했다.

1945년 11월 15일 당의 정치노선을 재정립하기 위해 북조선분국 제2차 확대집행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때 김일성은 회의 보고를 통해 ‘인민정권’을 세우기 위한 투쟁과업과 방도를 제시하면서 해방직후 정권 수립과 관련한 편향을 비판하였다. 그는 특히 조선공산당이 급조한 인민공화국(인공)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 김일성은 조직문제와 관련해서도 이남과 정세가 다른 이북에서의 공산당의 활동과 관련하여 독자적인 정치노선에 입각해 민주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한반도가 분열된 조건에서 북한 지역에서 우선 인민정권을 세우고 그에 토대하여 전국적인 통일정권을 창설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공산주의청년동맹을 민주청년동맹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적극적인 통일전선 정책과 대중조직의 확대 강화 방안을 제시하였다.(주14)

신의주 반공학생시위 사건의 주요 인물들(좌)과 이를 보도한 1945년 12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우)
신의주 반공학생시위 사건의 주요 인물들(좌)과 이를 보도한 1945년 12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우)

이런 가운데 11월 말 신의주에서 소련군과 공산당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 사건, 즉 신의주 반공시위 사건이 발생하는 등 이북 곳곳에서 반공 정서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초기 이북에 주둔한 소련군 부대 중에는 죄수들로 구성된 부대 등 규율이 서지 않아서 조선인들을 약탈, 강간하는 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였고 반소 감정이 적지 않게 퍼졌다. 9월 이후 소련군의 규율은 강화되었지만 11월 중순부터는 함흥과 원산, 진남포, 청진 등지의 대규모 공장에서 소련이 공작기계와 방직기, 전동기 등을 전리품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소련은 압록강의 수력발전소에 있던 10만kw 발전기 3대를 실어가기도 했다. 쌀과 가축의 반출도 있었다.(주15) 이런 소련의 행위에 대한 북한 주민의 반감이 적지 않았던 상황에서 공산당이 신의주 용암포에 있는 수산학교를 일방적으로 접수해 정치훈련소로 사용하려 하자 학생들이 대규모 반소반공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북한 국장(오른쪽)에 등장할 정도로 북한의 대표적인 발전소인 수풍발전소. 한때 소련은 이곳의 발전기계를 전리품으로 반출해가기도 했다.
북한 국장(오른쪽)에 등장할 정도로 북한의 대표적인 발전소인 수풍발전소. 한때 소련은 이곳의 발전기계를 전리품으로 반출해가기도 했다.

공산당의 조직사업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945년 12월 17일 현재 4,530명의 공산당원 중 노동자는 30%, 농민은 34%, 지식분자‧상업가 및 기타 36% 등으로 숫자도 문제였지만, 구성도 노동계급의 비중이 낮았다. 당의 통일과 규율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고 있었다. 황해도와 평안도 등 일부지역에서는 공산당 내에 각종 ‘그루빠’(소조직)들이 생겨났으며 도당위원회가 분국의 지시나 결정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신의주사건에서 나타났듯이 대중과의 연계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외곽단체 조직 사업도, 통일전선 사업도 부진을 면치 못하는 등 심각한 위기 상황을 겪고 있었다. 공산당은 대중운동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당 자체가 분열로 지리멸렬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을 지경이었다.(주16)

이런 상황에서 12월 17,18일 북조선분국 제3차 중앙확대집행위원회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그동안 집행부 밖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일성이 주도하면서 새롭게 체제 정비를 이끌었다. 김일성은 보고를 통해 그동안의 사업에서 나타난 심각한 문제들을 비판하고 당의 향후 과업을 제시하였다. 김일성의 주도로 회의에서는 「북부조선당 공작의 착오와 결점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하였는데, 그 주요 항목은 다음과 같았다.

1. 조선민주주의정권 수립을 위한 노력과 통일전선의 공고화
2. 전체 당원들의 조직사상적 통일을 위한 투쟁
3. 전체 당원과 후보당원들에게 당원증 수여
4. 당 대열에 노동계급의 우수한 요소들 흡수
5. 사회정치기관에 대한 당의 영향 강화
6. 기관지 『정로』의 강화
7. 당 인재의 선발‧배치‧교양에 대한 특별한 주의
8. 당원통계의 유일제 강구
(주17)

회의에서는 18일 김용범의 조직문제에 보고와 토론에 이어 ‘유일당’의 과업을 실천하기 위한 집행위원의 보선과 부서 개조가 결정되었다. 집행위원회는 김일성, 김용범, 오기섭 등과 새로 소련에서 입북한 허가이(조직부장), 중국(연안독립동맹)에서 들어온 박일우‧무정과 김재욱(청년부장), 윤상남(선전부장) 등 19명으로 결정되었다.(주18) 해방 직후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중국 만주로 갔다가 10월 중순 귀국한 항일유격대의 2인자격인 최용건도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주19)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로 취임하면서 당권을 장악하였다. 김일성은 후에 “당시 그대로 두어서는 죽도 밥도 안되겠더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는데 유격대세력 내부에서 김일성이 당을 틀어쥐어야 한다는 요구가 강력히 제기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의 당권 장악과 함께 당의 규율을 강화하고 내부에 사상적 단결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이때까지도 이북 일부지방에서는 서울 중앙의 박헌영의 권위가 작동되고 있었는데 김일성의 책임비서 취임과 함께 그런 경향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신 1945년 말부터 이북지역 곳곳에서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그를 찬양, 미화하는 구호가 넘치기 시작했다.(주20)

김일성(중앙)과 허가이(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일성(중앙)과 허가이(오른쪽에서 두 번째)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 회의에서 김일성이 책임비서에 선출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10월 초순 북조선분국이 결성될 때의 북한 내의 공산주의 세력관계는 비교적 단순했다. 김일성의 항일빨치산세력과 국내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소수의 소련계 한인들밖에 없었다. 그러나 12월 초순 해외공산주의운동의 주요한 세력이었던 연안독립동맹계열의 주요 지도자가 귀국하였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허가이, 김재욱 등 소련계 한인의 주요인물들이 평양에 들어왔다. 이처럼 상당히 복잡한 세력구도가 형성된 조건에서 김일성이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로 취임함으로써 이북에서 분국을 장악함과 동시에 대중들 사이에 최고지도자로 등장했던 것이다.(주21)

연안독립동맹계열 인사들의 귀국과 북한 정치 상황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향한 대일 공격 작전을 전개한 뒤인 8월 11일 중국공산당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는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과 부사령 박효삼‧박일우에게 동북지역으로 가서 조선인민을 조직하여 조선해방을 완수하라고 명령했다. 조선의용군 지휘부와 본대가 동북지역으로 나아가기 전 1944년 그곳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던 한청은 8월 18일 100여명으로 구성된 조선의용군 독립지대를 선양에서 조직했다. 이후 팔로군 기열료부대와 함께 선양에 도착한 주연이 이끄는 100여명의 부대가 한청의 부대와 합병하여 400여명의 선견종대로 개편했다. 지대장 한청, 정치부 주임 주연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는 1,400여명으로 늘어났고, 12개 중대를 편성해 선양을 떠나 행군을 해서 단둥에 도착했다. 10월 초 이들 부대는 압록강 다리를 건너 군악대를 앞세우고 신의주로 들어갔으나 소련군이 포츠담 선언 등 국제간의 약속을 이유로 퇴거 명령을 내려 만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지대장 한청은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과 회담하는 등 국내에 남기 위해 노력했으나 소련군의 완강한 거부로 선양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은 국제간의 약속을 이유로 내세웠으나 대규모 부대가 국내로 들어와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게 될 경우 생길 혼란을 염려한 때문이었다.(주22)

동북지역으로 나아가기 위해 옌안 항일군정대학에 집결했던 의용군들은 1945년 9월에야 출발해 10월 말에야 진저우(금주)를 거쳐 선양에 도착하였다. 타이항산 군정학교에 소속되어 있던 의용군부대들도 비슷한 시기에 선양에 도착했다. 산동과 화중의 의용군 및 옌안의 2진 부대들은 이보다 늦게 동북지역에 도착했다. 의용군은 선양 서쪽 교외 고력툰 일대의 조선족 마을에 나누어 주둔했다. 11월 중순 고력툰의 조선인소학교에서 조선의용군 전체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국제정세를 설명하고 동북지역 조선인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으니 일부가 먼저 조선으로 가고,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곳에서 활동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남는 사람들은 3개 지대를 조직해서 남만, 동만, 북만 지역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남만에서 활동하는데 지대장 김웅, 정치위원 방호산, 참모장 안빈, 정치주임 주연 등이었고, 제3지대는 하얼빈을 중심으로 북만에서 활동하는데 지대장 이상조, 정치위원 주덕해, 부지대장 이석산, 참모장 김연, 정치주임 이근산 등이었으며, 제5지대는 연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데 지대장 이익성, 정치위원 박훈일, 참모장 조열광, 정치주임 전우 등이었다. 동북지역에 남은 조선의용군 부대들은 중국 국공내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고 이는 중국 최초로 소수민족자치구역인 옌벤조선족자치주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1월 말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 지도부는 소련군 지도부와 만나 입북하는 문제를 논의하였으나 조선의용군의 부대 입북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동북지역에 남은 이들 외에 김두봉, 무정, 박효삼, 최창익, 한빈, 허정숙 등 소수의 고위간부들은 12월 초부터 말까지 1차로 개인자격으로 평양으로 들어왔다. 1946년에는 박일우, 이익성, 이권무, 김웅, 주연, 이상조, 박훈일, 이유민, 왕자인 등의 동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 지휘 간부진이 2차로 귀국하였다.(주23) 독립동맹 지도자들은 해외 독립운동가들 중 가장 늦게 귀국한 것이다. 동북에 남게 된 의용군 사이에서는 실망이 컸고 일부는 개인적으로 이탈해 조선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정기간 지난 후에 돌아간다는 마음을 갖고 조직의 결정을 따랐다.(주24)

독립동맹 주석 김두봉.
독립동맹 주석 김두봉.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지도부는 조선의용군 부대를 중국 만주에 남겨둔 채 귀국함으로써 정치적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연안파로 불리는 이들은 조선의용군을 감안하면 가장 많은 조직원을 갖고 있었고 하나로 통일될 경우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안파로 불리는 독립동맹계열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독립동맹의 정치지도자는 김두봉이었고,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은 군사부문에서 최고 지도자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치적 단결력은 취약했고, 독립동맹계열 또한 동북항일연군 출신 항일유격대 세력처럼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되어 있지 않았다.

무정은 군사적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정치적으로 지도력이 취약했다. 그는 연안시절과 해방 직후 동지들의 신뢰를 얻지 못할 행동으로 내부에서 신임을 잃었다. 연안시절 무정은 정풍운동 과정에서 ML파의 핵심인물이었던 최창익을 궁지로 몰아넣어 그와 대립했고,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관내로 들어온 또 다른 핵심인물 박일우와도 반목했다. 게다가 해방 후 귀국 직전 선양에서 조선의용군 대회가 끝난 뒤 국민당군대의 진격에 맞닥뜨려 다른 동료들을 뒤로 한 채 일부 측근만 데리고 트럭을 구해서 빠져나오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이 같은 반목과 대립, 불신 때문에 귀국 후 독립동맹 출신들 상당수가 무정이 아니라 김일성을 지도자로 옹립하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특히 독립동맹의 김창만은 1946년 봄 북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선전부장이 되자 소련에서 나온 박창옥과 함께 김일성을 유일지도자로 옹립하는 데 앞장섰다. 무정은 귀국 직후 북조선공산당 간부부장을 지냈으나 김일성으로부터 철저히 견제를 받아 귀국 8개월 만에 열린 1946년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에서는 최창익, 박일우가 포함되어 있던 13명의 당 상무위원회 위원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위상이 추락했다.(주25)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 장군.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 장군.

1945년 12월에서 1946년 초반에 귀국한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간부들 중 무정, 박일우, 김창만, 허정숙, 이상조 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북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김두봉, 최창익, 한빈 등은 독립동맹 간판을 유지하다가 1946년 2월 조선신민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활동하였다. 독립동맹의 주석 김두봉은 한글학자 출신으로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좌파민족주의자에 가까웠고, 실질적인 지도력을 확보하기보다는 명망으로 추대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공산당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한 경력을 갖고 있었던 무정과 박일우가 실질적인 지도력을 갖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해서 독립동맹계열의 지도중심이 제대로 서 있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두 사람 모두 독립동맹에서의 3년여를 제외하고는 조선민족해방운동보다도 중국혁명의 일부분으로 축적된 경험 또는 경력이어서 해방된 조선에서 대중적 지도자로 등장하기에는 약점이 있었다. 일제 말기 만주에서 국경을 넘나들며 항일투쟁을 벌이며 조선 민중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김일성과 대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주26)

연안독립동맹계열의 핵심인물 중 한명이었던 박일우.
연안독립동맹계열의 핵심인물 중 한명이었던 박일우.
연안독립동맹계열의 핵심인물 중 한명인 최창익.
연안독립동맹계열의 핵심인물 중 한명인 최창익.

1945년 9월 중순부터 12월 말까지 동북항일연군계열, 소련계 한인공산주의자들, 중국 연안독립동맹계열 등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하면서 국내 공산주의자들, 민족주의자와 기독교계의 조선민주당 등이 이북지역에서 정치적 각축을 벌이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공산당과 조선민주당이 좌우연합을 통해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를 조직, 활동하며 11월에는 이북5도행정국을 출범시켜 이북지역의 행정 업무를 통일시켜 갔다. 1945년 말까지 공산당 내에서는 김일성의 주도권이 확립되기 시작한 가운데 조만식, 김일성 등이 대중 정치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12월 말부터 신탁통치 정국이 도래하면서 이 같은 정치상황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말았다.

------------------------------------

<주>

1) 김광운, 앞의 책, 144쪽

2) 김광운, 앞의 책, 144〜145쪽;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상)』, 중앙일보사, 1992, 83〜84쪽

3) 박병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101〜104쪽

4) 박병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136쪽; 김광운, 앞의 책, 147쪽; 이종석, 『조선노동당연구』, 역사비평사, 1995, 169쪽

5) 박병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136〜137쪽

6) 박병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137쪽

7) 김일성과 박헌영의 만남과 논의의 자세한 내용은 박병엽 증언/ 유영구․ 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 2010, 15〜24쪽 참조

8) 김광운, 앞의 책, 163쪽; 서동만, 앞의 책, 73쪽

9) 이종석, 앞의 책, 172쪽

10) 서동만, 앞의 책, 34쪽; 이종석, 앞의 책, 170〜171쪽

11) 서동만, 앞의 책, 93〜110쪽 참조

12) 임영태, 『북한50년사 1』, 들녘, 1999, 44쪽

13) 안문석, 앞의 책, 50〜52쪽

14) 김광운, 앞의 책, 177〜178쪽

15) 이문석, 북한 현대사 산책 1, 인물과사상사, 2016, 26〜27쪽

16) 이종석, 앞의 책, 176쪽

17) 이종석, 앞의 책, 176〜177쪽

18) 김광운, 앞의 책, 186쪽

19) 이종석, 앞의 책, 171쪽

20) 김광운, 앞의 책, 186〜190쪽

21) 이종석, 앞의 책, 177쪽

22) 염인호,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165〜167쪽

23) 정병일, 북한의 초기국가건설과 연안파 역할-역사적 재조명, 서강대 박사학위논문, 2012, 80쪽

24) 염인호, 위의 책, 196쪽

25) 이종석, 앞의 책, 167〜168쪽

26) 한홍구, 무정과 화북조선독립동맹, 역사비평 1991.8, 82〜83쪽

 

임영태 필자 약력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힘쓰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으며, 지금은 평화박물관의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에서의 학살-한국현대사, 기억과의 투쟁』, 『새로 쓴 한국현대사-해방부터 촛불항쟁까지 35장면』(공저),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공저),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 『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