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명옥 /번역가, 재일동포 3세

 

2019. 3. 일본 요코하마 정경모 선생님 자택에서. 왼쪽부터 임수경, 정경모, 리명옥. [사진제공 - 임수경]
2019. 3. 일본 요코하마 정경모 선생님 자택에서. 왼쪽부터 임수경, 정경모, 리명옥. [사진제공 - 임수경]

정경모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일본 오사카의 전철을 타고 퇴근하는 길에 그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으셔서 100세는 거뜬히 넘기실 줄로만 알았었다. 연말에 사모님과 통화를 하면서 폐렴 때문에 몇 번 응급실도 다녀오셨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막연히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89년이었다. 선생님을 만나게 해준 것은 임수경 씨 때문이다. 그 해 여름, 도쿄 도요대학(東洋大學) 3학년이었던 나는 평양에서 열리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게 된다. 남도 북도 통 틀어서 나에게는 처음으로 가보는 조국이었다. 같이 참가하는 학생들이 니이가타 항에서 배를 탔다. 원산으로 가는 2박3일의 배 안에서 우리는 그 해 봄 발표된 <4.2 공동성명>을 여러 번 읽었다.

평양축전 개막식 전날 밤에 숙소였던 광복거리를 산책하는데 남쪽에서 대학생 대표가 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택시를 잡아 고려호텔로 무작정 달려갔다. 고려호텔에 묵고 있던 재미동포 대학생들과 함께 호텔 로비 바닥에 앉아서 남쪽 백만 학도의 전대협 대표로 먼 길을 돌고 온 임수경을 만났다.

철이 들면서 통일이 되면 할아버지, 할머니도 자유로이 고향을 다녀오실 수 있고 일본에 사는 우리가 겪는 문제들도 다 풀린다고 수없이 들으면서 ‘통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수없이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그때 그 통일이 가까이 온 것 같은, 그때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우리는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을 했다. 어디를 가나 북녘의 사람들은 수경을 한눈이라도 보려고 밀려들었다. 그렇게 판문점으로 가서 남녘 땅을 바라보았다. 한 여름의 산천초목은 ‘향수’라는 말에 어울리게 푸르렀다.

1989. 7.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대표단 만찬장에서.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임수경, 맨 오른쪽 리명옥. [사진제공 - 리명옥]
1989. 7.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대표단 만찬장에서.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임수경, 맨 오른쪽 리명옥. [사진제공 - 임수경]

북에서 남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으려는 수경의 의지에 동참하며 6일 간의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단식투쟁을 함께 한 뒤 나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8월 15일, 수경은 문규현 신부님의 손을 잡고 걸어서 분계선을 넘었다. 임수경은 재일동포 3세인 나에게 처음 생긴, 서울에서 나고 자란 친구였다.

일본에서의 나는 학교를 다니고, 편안하게 집에서 잠을 자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때로는 영화도 보는 일상을 보내면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친구에 대한 부채감이 쌓였다. 도쿄에서 임수경 씨의 석방을 요구하는 행동을 하면서 정경모 선생님을 뵙게 되었다.

어느 집회에선가 정경모 선생님께서 서울로 편지도 전화도 잘 안될 때가 있지만 팩스를 보낼 수 있어서 수경의 어머님과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집회가 끝나고 바로 선생님께 가서 나도 편지를 보내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정경모 선생님은 편지를 써서 당시 도쿄 아오야마에 있던 ‘씨알의 힘’ 사무실에 찾아오라고 하셨다.

그때 처음으로 선배들의 책장에 꽂혀있던 『어느 한국인의 마음 - 조선 통일의 새벽에』나 『찢겨진 산하』를 쓰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4.2 공동성명」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신 분이란 것도 처음으로 알아서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날부터 매 금요일마다 ‘씨알의 힘’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매주 자료를 준비하고, 시국에 대한 말씀을 하셨고 때로는 역사를 강의하셨다. 거기에 모이는 재일동포나 일본사람들과 함께 우리나라 가곡을 부르시기도 했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좋아하셨고 평양에서 들은 <조국의 진달래> 플루트 연주가 좋았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때 이미 우리나라와 일본의 고대사에 관심이 많으셨던 걸로 기억한다. 솔직히 너무 오래전 역사에 선생님께서 집착하시는 모습이 생소했다. 굳이 선생님께서 그런 연구를 하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선생님이 가시고 난 뒤, 시간을 거슬러 다시 할 수 있다면 거기까지 가고 싶으셨지 않을까 부질없는 상상을 하곤 한다. 앞으로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선생님의 간절한 몸부림이 마음에 와 닿는다.

1996. 11. 일본 도쿄 병원에서. 리명옥 딸 지윤과 함께한 정경모 선생님. [사진제공 - 임수경]
1996. 11. 일본 도쿄 병원에서. 리명옥 딸 지윤과 함께한 정경모 선생님. [사진제공 - 임수경]

‘씨알의 힘’ 공부 모임을 마치면 다함께 맥주를 마시곤 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젊은 시절 어려운 살림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자신을 버티게 해준 사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이야기 하셨다. 어떤 회전초밥집이 괜찮더라고 하시면서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정전협정에 통역으로 참석하신 말씀도 해주셨다. 휴식시간 대기실에서 선 채로 담배를 피우던 북녘의 통역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끝내 할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역사가 선생님 몸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 조선학교를 다닌 나에게 “이런 역사는 조선학교에서 배웠느냐, 이런 말을 아느냐?” 자주 확인을 하셨다. “너희는 일본 사람보다 일본말을 잘해야 하고, 남과 북 조국에 있는 사람들보다 우리말을 잘해야 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고 너희들이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많다”라며 칭찬도 잔소리도 많이 해주셨다.

1994년 1월에 문익환 목사님께서 돌아가셨다. 도쿄 아오야마 교회에서 추도모임을 가졌다. 그 모임에서 나는 임수경 씨가 쓰고 정경모 선생님이 번역하신 추모사를 읽었다. 그 몇 달 뒤 선생님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고비를 넘기고 재활훈련을 시작하실 때부터 나는 퇴근길에 매일 병원을 찾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 휴게실 TV에서 김일성 주석의 사망 뉴스를 접했다. 그 날 정경모 선생님의 병실에 들어가니 선생님은 침대에 앉아계셨다. 바로 조금 전에 디딜 수 있게 된 두 발은 맨발이었다. 두 손을 무릎에 얹은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걱정하는 눈빛을 보내는 나에게 선생님은 “문 목사도, 김 주석도 가시고, 내가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으니 괜찮다, 걱정마라”고 말씀하셨다.

그해 나는 결혼을 하고 오사카에 와서 살게 되었다. 첫 아이를 낳고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선생님은 또다시 병원에 계셨다. 6개월쯤 되는 내 딸을 어르시면서 “나는 앞으로 한 번도 고향을 못 간다 한들 여전히 한국인이지만 너희는 그게 여의치 않으니 힘들겠구나” 하셨다.

나는 작고 낡은 집이지만 집을 샀다고 말씀드리니까 잘했다고 너무 칭찬을 해주셔서 크게 웃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당신께서 젊은 시절에 겪으신 고생이 생각나신 것 같았다. 선생님은 역사와 통일에 대한 큰 이야기는 물론 삶의 소소한 희로애락도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그 후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린 강연에서 선생님을 뵙고 짧은 인사를 드린 것 이외에는 오랫동안 뵙지 못했다.

2019. 3. 일본 요코하마 정경모 선생님 자택에서. [사진제공 - 임수경]
2019. 3. 일본 요코하마 정경모 선생님 자택에서. [사진제공 - 임수경]

그러던 어느 날, 수경에게서 연락이 왔다. 3.1절에 맞춰서 일본에 가니 함께 정경모 선생님을 뵈러 가자고 했다.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여태껏 뭐가 바빠서 연락도 안했느냐는 잔소리를 들었다. 요코하마 히요시 역에서 수경을 만나 선생님이 평소 좋아하시던 맥주를 사서 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우리 일행은 선생님께 처음으로 절을 올렸다. 선생님의 저서 『시대의 불침번』을 꼼꼼하게 읽은 친구가 책에서 궁금한 것을 많이 여쭈었고 선생님은 자세하게 대답해 주셨다. 서울에서 온 그들과 서울에 고향을 두신 선생님은 서울의 골목골목, 거기 흐르는 강의 옛 모습과 오늘의 모습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히 선생님은 노래도 한 가락 뽑으셨다. 나는 사모님 옆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다음 해에도 수경과 함께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이제는 해마다 봄이 오면 이렇게 모여 앉아서 “남북 간의 철도가 드디어 열렸다, 선생님 고향 다녀오신 소감은 어떠세요? 이제 겨우 전쟁이 제대로 끝났구나.” 이런 말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작년에도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여느 해처럼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것이다.

지금쯤 구름 위에서 문익환 목사님과 김일성 주석, 그리고 그렇게 존경하셨던 여운형 선생님과 그 따님들, 그리고 선생님보다 하루 앞서 가신 백기완 선생님도 모두 다 함께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시고 맥주잔을 들면서 노래도 하면서 밤에도 낮에도 우리를 지켜보실 거라고 믿고 싶다.

정경모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