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일본 요코하마 정경모 선생님 자택에서. [사진제공 - 임수경]
2019. 3. 일본 요코하마 정경모 선생님 자택에서. [사진제공 - 임수경]

어떠한 삶도, 죽음도 애달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언젠가부터 장례식장의 영정 앞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너무 많은 죽음을 겪었기 때문일까. 우리 시대가 그랬고 내 주변이 그렇기도 했다. 한 사람이 가고, 남은 사람들은 조문을 가고, 누구는 안타깝다 누구는 호상이다 그러다가 일상을 이야기하며 웃기도 하는 장례식장의 풍경들.

97년 긴 생애를 보내다 가신 정경모 선생님은 호상인가, 끝내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셨으니 안타까운 죽음인가, 나는 그저 그의 삶과 죽음이 애달프다.

돌아가신 후에 조문을 가는 것보다는 삶의 작은 순간이라도 더 함께 나누는 것이 소중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정경모 선생님께 시시때때로 전화를 드렸다.

언젠가 요코하마 자택으로 전화를 건 나에게 선생님은 “오오 수경이, 너는 지금 내가 어디서 온 줄 알고 전화를 했니, 아니면 모르고 한 거니?”하신다. 그 당시 선생님은 매우 위독한 상태로 여러 달 병원에 계시다가 막 퇴원하는 길이라 하셨다. 집에 들어선지 채 1분도 되지 않아 내 전화를 받으셨다며 매우 반가워 하셨다.

그동안 일본에 갈 때마다 선생님을 찾아뵙기는 했지만 정작 선생님을 뵐 목적으로 일본에 간 적은 없었다. 그날 나는 얼결에 약속을 드렸다. “선생님, 다음 주에 찾아뵐게요.” 그렇게 매년 3.1절에 찾아뵙겠다는 약속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간 선생님의 저서에서 궁금했던 것을 묻고, 기록했다. 자택에 있는 옛날 앨범을 뒤적여 역사적인 사진들을 재촬영했다. 프랑스 샹송을 불러드리면 독일 가곡으로 화답하던 선생님이셨다. 그렇게 우리는 선생님과의 이별을 준비하며 차곡차곡 추억을 쌓았다.

‘아! 목동아’ 노래를 부르던 선생님의 모습은 내가 휴대폰으로 촬영한 마지막 동영상이 되었다. “아 목동들의 피리소리들은 산골짝마다 울려나오고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지니 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 그렇게 선생님은 가셨다.

2019. 3. '아! 목동아' 노래를 부르는 정경모 선생님. [영상제공 - 임수경]

연초에 안부전화를 드렸을 때 선생님은 막 잠에서 깨셨다며 목소리에 힘이 없으셨다.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의 부고를 들었다. 그래도 우리는 추억이 있으니까. 선생님과 함께 했던 친구들은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코로나 상황만 아니었다면 선생님과의 이별을 위한 마지막 일본 여행을 준비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선생님을 만나 평생을 해로하신 사모님을 뵈러 가는 길을 상상해본다. 그날까지 꼭 건강하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정경모 선생님은 회고록에서 임수경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 해 여름 8월, 나이 어린 여학생 임수경이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려 평양에 나타나 전대협기를 들고 혼자서 운동장을 행진하고 있는 모습이 일본에 있는 나의 시야에 뛰어들었을 때, 그 충격과 감동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있었겠소이까.”

선생님은 내가 감옥에 있을 때 가끔씩 집으로 편지를 보내셨다고 면회 온 어머니가 말씀하시곤 했다. 석방이 되어서도 사면이 될 때까지 한동안은 여권 발급과 해외 출국이 제한되었던 나는 일본에 갈 수 없었고, 선생님은 한국에 오실 수가 없었으니 정작 첫 만남은 그로부터 10년을 훨씬 지나서였다.

2000년 일본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초청으로 도쿄에 강연을 하러 갔을 때 비로소 정경모 선생님을 뵈었다. “오오 수경이” 선생님은 늘 그렇게 나를 부르셨다. 그냥 “수경아”가 아니고 “오오 수경이”였다. 임수경이라는 이름 앞에는 항상 감탄사가 있어야 한다며 1989년 북녘 땅을 걷던 대학생 임수경을 기억하고 감탄하고 격려해 주셨다.

2000. 12. 일본 도쿄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초청 강연회장에서 정경모 선생님과의 첫 만남. [사진제공 - 임수경]
2000. 12. 일본 도쿄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초청 강연회장에서 정경모 선생님과의 첫 만남. [사진제공 - 임수경]

선생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것은 역사의 계승과 전수였다. 잘못된 역사, 왜곡된 정보가 알려지지 않도록 그렇게 평생을 글을 쓰고 읽고 알려내셨다. “이제 내가 죽으면 누가 이것을 전달하겠느냐”며 “수경이 네가 적어도 내가 쓴 글을 읽을 만큼은 일본어를 공부했으면 좋겠다.”라고도 하셨다. 약속대로 나는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지만 선생님의 주옥같은 글을 읽을 정도로 닿지는 못하였다. 평생을 글쓰기에 부지런하셨던 선생님 앞에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선생님은 어린 시절을 보낸 서울 영등포의 골목 풍경을 항상 말씀하곤 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날로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되살려 내려는 선생님만의 의식이었다. 그때 만큼은 표정도, 말투도 천진난만한 소년이었다.

“나는 말이야. 배를 타고 고국에 가고 싶어. 오사카에서 밤에 배를 타면 아침에 도착하지 않니. 그렇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고향으로 향하면 참 좋을 것 같아. 언제 그렇게 되겠니. 곧 그렇게 되겠지? 그렇지?” 선생님은 묻고 또 물으셨다. 그것은 선생님만의 다짐이었다.

묻고, 기억하고, 또 묻고, 또 기억에 남기고, 그 다짐 앞에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던 나 자신이 너무 작아서 또한 부끄럽다. 결국 선생님은 배를 타지도, 고향에 향하지도 못하셨다. 국적만 대한민국으로 남은 채 그렇게 가셨다.

정경모 선생님. 분단의 나라에서, 이국의 땅에서, 그간 마음고생 몸고생 정말 많이 하셨습니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우리 정경모 선생님.

1989. 3. 평양 방문. 왼쪽 정경모, 오른쪽 문익환. 정경모 선생님 앨범에서 재촬영. [자료사진 - 임수경]
1989. 3. 평양 방문. 왼쪽 정경모, 오른쪽 문익환. 정경모 선생님 앨범에서 재촬영. [자료사진 - 임수경]
1995. 7. 평양 김일성 주석 1주기 조문. 왼쪽 박용길, 오른쪽 정경모. 정경모 선생님 앨범에서 재촬영. [자료사진 - 임수경]
1995. 7. 평양 김일성 주석 1주기 조문. 왼쪽 박용길, 오른쪽 정경모. 정경모 선생님 앨범에서 재촬영. [자료사진 - 임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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